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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교리의 더께를 걷어낸 갈라디아서 읽기04
성서와설교 (2020년 3월호)

 

  갈라디아서 3장: ‘그리스도-사건’의 빛에서 바라본 율법의 가치
  

본문

 

지난 호에서 다소 길게 갈라디아서 2장 후반부를 설명했는데도 충분히 다루지 못한 항목이 있다. 바울은 왜 그토록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했을까? 종교개혁 전통의 자장(磁場) 아래에 있는 현대 기독교인에게는 이 질문이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지겠지만, 1세기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전 연재글에서 확인했듯이 고대 유대교는 율법의 완전한 준수를 통해 ‘다가올 세상’에 들어가는(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구원’) 종교 체계가 아니라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선행(先行)하시는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기반을 둔 ‘은혜의 종교’였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들’을 자력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 일체로 확장해서 해석하는 전통은 바울이 실제 말한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배경이 될 수 없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비판한 이유를 당대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에서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다.1 새 관점에도 다양한 결이 있지만 거칠게 설명하자면,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비판한 것은 유대인 신자들이 지닌 유대 민족 중심주의나 배타주의를 겨냥한 것으로서, 이방인 신자가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던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새 관점에서 제시한 대답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필자가 보기에 기존 학자들은 ‘이방인 남성 예수따르미는 할례받을 필요가 없다.’(need not)는 주장과 ‘이방인 남성 예수따르미는 할례받으면 절대 안 된다.’(must not)는 주장 사이의 큰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전자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이외의 편지들에서 종종 개진한 견해이지만, 후자는 오직 갈라디아서에만 나오는 주장이다. 갈라디아서 5장 4절을 다시 보자. “여러분 중에 율법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려는 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고 은혜에서 떨어졌습니다.” 율법에 의지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무효화된다는 말이다. 이는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에서 ‘must not’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must not’과 ‘need not’은 의미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만 유독 ‘must not’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고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3장과 4장을 읽으며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할 것이다.
미리 답을 말하자면, 신학적 논거와 논리가 탄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여러 방편을 통해(저주 모티프를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을 자신의 적대자의 영향권에서 빼내려 했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바울은 ‘must not’이라는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야 했다. 다시 말해 ‘must not’이라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도출된 필연적 논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 자식인 갈라디아 신자들을 다른 선교사 그룹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사회적’이며 실리적 이유로 보는 것이 가장 간단하며 설득력 있 는 설명이다.

3:1–5
2장 전체에 걸쳐 자신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자신이 겪었던 일과 연결시켜 강렬하게 풀어낸 바울은 이제 3장에서 갈라디아 신자들을 직접 호명하며 하고 싶은 말을 여과 없이 이어나간다. 그것도 모욕적으로 들릴 만한 형용사를 갈라디아인에게 붙이면서 말이다. “아, 바보스러운 갈라디아인들이여!”(3:1) 여기에서 ‘바보스러운 자들’(ἀνόητοι)이라는 단어는 “지성(νοῦς)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로 직역할 수 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이 정도로 ‘머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된 이유가 참 놀랍다. 3장 1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한’ 이들의 정체를 악한 주술사(evil magician)로 규정한다. 그들은 고대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사악한 눈’(evil-eye)으로 갈라디아인을 홀리게 만들었다.(ἐβάσκανεν) 악감정의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면서 해악을 끼치는 일종의 저주 주술이다.2
지금까지 발굴된, 사악한 눈의 저주를 피하는 데 사용된 수많은 부적들이나 액땜의 방법이 적힌 문서들을 보면, 고대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저주가 얼마나 널리 행해졌고 또 실제로 이것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믿음이 팽배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받으라고 강요한 사람들–그들은 스스로를 ‘선교사’로 생각했을 것이다–은 사실 악한 주술을 거는 사람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바울은 그들이 1장 8-9절에서 천명한 저주의 대상임을 암시하는 동시에(바울의 복음과는 다른 메시지를 전했으므로) ‘사악한 눈’의 저주를 내리는 자들이라고 묘사함으로써 갈라디아인의 두려움을 건드리고, ‘할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불신하도록 유도한다. 이렇게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대적자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것은 고대 연설가들이 자주 사용하던 기법이었다.3
1장 10절에서 ‘신을 설득한다’는 표현(개역개정에는 “하나님께 좋게 하랴”라고 잘못 번역되었다)은 그리스 시대 주술사의 행위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묘사이다.4 거기에서 바울이 스스로 주술사가 아니라고 굳이 선언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이중으로 저주를 거는 모습(1:8-9)에서 이방인 갈라디아 예수따르미 중 일부가 바울을 일종의 주술사로 간주했을 가능성을 들 수 있다. 둘째, 바울 자신이 주술사가 아니라는 말에는 바울의 복음이 불완전하거나 미흡하다고 지적하며 바울의 복음을 변질시킨 이들이 다름 아닌 악한 주술사라는 암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암시는 3장 1절에서 명확해진다. 바울의 적대자 무리는 갈라디아인의 판단력과 지력에 악한 주술적 영향을 끼쳐서 선명한 사실과 경험으로부터 등을 돌려 바보로 만들어버린 자들이다.
3장 1-5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얻은 영적 유익에 율법의 행위들이 실제로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는 경험에 기반한 설득이다. 경험, 특히 두려움에 호소하는 설득의 힘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자들이 한결같이 인정했다.5 특히 그 경험이 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바울은 여기에서 갈라디아 신자들의 과거의 명백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현재 (일부) 그들의 행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모든 문장이 수사적 의문문이다. 2장 16절에서 개진된 명제가 실제로 어떻게 체현되었는지를 밝히면서 율법의 행위들의 무용성에 집중하게 한다.
그런데 경험에 근거한 이 같은 논증에 새롭게 도입된 주제가 눈에 띈다. 바로 ‘영을 받음’이다.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성령’(즉, 성스러운 영)으로 번역되었지만, 정확히 직역하면 그냥 ‘영’이다. 삼위일체 교리의 한 위격인 성령을 떠올리며 이 구절을 읽으면 안 된다.(삼위일체 교리는 훨씬 후대에 발전되었다) ‘성령’ 하나님을 ‘듣고 믿어서’(3:2)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영’을 그리스도라고 말할 때도 있으며,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혹은 그냥 ‘영’이라는 표현을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에게 ‘영’은 하나님의 힘을 드러나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고, 인간 안에 내주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아주 대담한 주장을 한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바로 ‘영’이라고. 오경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갈라디아인이 부인하려 해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경험은, 그들이 듣고 믿어서 ‘영’을 받았다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영’으로 시작한 갈라디아인의 새로운 삶은 ‘영’ 안에서 영위되어야 하고 ‘영’으로 마쳐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바울은 그들이 몸에 흔적을 남기는 할례와 같이 ‘육’에 의지하는 것은 틀렸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듣고 믿음으로부터’(ἐξ ἀκοῆς πίστεως)라는 표현은 ‘피스티스에 대한 메시지로부터’라고 번역해도 되고, ‘피스티스를 들음’ 또는 ‘들은 바를 믿음으로부터’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바울이 이 말을 정확히 무슨 의미에서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존 바클레이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메시지’ 혹은 ‘믿음을 일으킨 메시지’라고 해석한다6-그가 여기에서 ‘율법의 행위들’이 그러한 영적 선물과 그에 따른 혜택을 얻는 것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3:6–9
3장 6절에서 바울은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 이야기의 특정 대목을 인용한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의롭다고 여겨진’ 일만이 아니라 그가 할례받은 일도 포함하기 때문에(창 17:9-27) 바울은 창세기 17장의 이야기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언급을 삼가한다. 우리가 볼 때 매우 자의적으로 성서에 기반한 논증을 펼치는 것 같으나, 당시 유대인이나 로마인에게 이런 식의 문서 해석은 보편적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3장 10-14절을 설명할 때 다시 다루려고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갑자기 왜 꺼내들었을까? 아마도 바울의 적대자들이 아브라함의 할례를 따라 할례를 강요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꽤 높다. 창세기 17장의 내용이 바울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흔들 수도 있는데 굳이 아브라함 이야기에 호소하는 위험을 감수한 것을 보면 그러하다. 물론 피스티스와 ‘의롭다 여김’의 관계가 창세기 15장 6절에서 어느 정도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3장과 4장을 아우르는 뚜렷한 주제는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3장 7절에서 바울은 피스티스에서 비롯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못을 박는다. ‘호이 에크 피스테오스’(οἱ ἐκ πίστεως, those who are from faith)는 정확히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피스티스로부터’(에크 피스테오스)라는 표현은 하박국 2장 4절에서 바울이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학자는 바울의 신학을 ‘전치사 신학’(preposition theology)이라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몇 가지 전치사만 사용해서 심오한 신학과 체험을 말하기 때문에 그의 말은 때로 운문에 가깝고, 그래서 산문이나 명제적으로 풀어서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피스티스로부터’라는 말 역시 그러하다. 필자는 ‘피스티스에 속했다’라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바클레이처럼 ‘피스티스를 기반으로 완전히 재구성된 인간’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정관사+전치사+명사(피스티스, 율법)’의 구조를 지닌 표현이 인간 정체성의 기반을 가리킨다고 보면 무난할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피스티스에 정체성을 두고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녀인가? 답을 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가족과 민족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3장 26-28절을 다룰 때 설명하겠다.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사역이 이미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에서 예표되었다고 하며, 이를 성서가 미리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8절) 이 말은 “모든 민족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창 12:3, 18:18, 22:18)라는 하나님의 말씀(약속)이 성취되었다는 뜻이다.(바울이 창세기 12장과 18장의 구절을 인용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령하시는 창세기 17장을 갈라디아서 내내 언급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피스티스에서 난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더불어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바울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명제나 결론을 툭 던져놓고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은 채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한참 돌아 그 명제나 결론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논증하기 어려운 이 선언의 근거를 설명하지도 않고, 뜬금없이 율법의 행위들과 저주를 연결시킨다.

3:10–14
짧지만 해석하기 매우 까다로운 본문이다. 특히 10절과 12절이 그러하다.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샌더스의 연구 이후로 유대교는 율법의 완벽한 준수를 통한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님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다음과 같이 율법의 완벽한 준수만이 저주를 벗어나는 길인 것처럼 말했을까? 먼저 3장 10절에서 다수의 영어 성서나 우리말 번역(개정개역, 새번역)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개역개정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새번역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 하였습니다.


이 번역문을 보면,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하지 못한 사람에게 저주가 내린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직역을 하면 이러한 뉘앙스는 담겨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역 사실 누구든지 율법의 행위들로부터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 그것들을 행하기 위해(τοῦ ποιῆσαι αὐτά) 그것들 안에 계속 머물지 않는 모두가 저주받았다고 [율법 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행하기 위해”라는 목적절에 주목하자.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살짝 다른 표현을 덧붙이지만(“책에 기록된”이라는 구절),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행위 자체보다는 의도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히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율법의 완벽한 준수 없이는 모두 저주에 떨어진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이는 당대 유대교의 보편적 신념으로써도 확증될 수 있다.7
또한 3장 10절이 청중에게 줄 영향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방인인 갈라디아 예수따르미들 중에 이 말을 듣고 부담을 느낀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갈라디아서 앞부분은 저주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율법의 일부, 특히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두드러진 행위인 할례, 음식 규정 준수, 안식일 준수 정도만 지키려던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을 주는 말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는 갈라디아 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함이다. 설득에 있어 사람의 감정, 특히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고대 수사학 연구자들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바울의 논증이 지니는 정합성 자체보다는 바울이 청중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울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신명기 27장 26절(“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개역개정)을 들어 율법의 행위들에 의지하거나 정체성의 기반을 삼는 사람은 저주를 받았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을 것이다. 갈라디아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정체는 대체로 유대인 출신 예수따르미이자 선교사들로 추정된다. 따라서 일견 설득력 없어 보이는 바울의 말(3:10-14)은 그의 적대자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청중을 염두에 두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절대 침해될 수 없는 성스러운 대상이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침해될 때 자동으로 저주가 내린다고 편지 서두에서 충격적으로 선언했다. 당시 사람들은 저주받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는데, 특히 저주가 글의 형태로 남겨질 때는 더욱 더 지속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울이 신명기 27장 26절을 가져오면서 그 구절에 없는 “책에 기록된”이라는 표현을 삽입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다시 3장 10절에 집중해보자. 바울이 바로 앞 구절(3:8)에서 창세기 12장 3절과 18장 18절을 인용하며 ‘복’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복’의 반대말인 ‘저주’로 넘어가는 것은 그다지 부자연스럽지 않다. 또한 샌더스가 날카롭게 관찰했듯이 저주와 율법을 한 구절에 나란히 놓은 칠십인역 구절은 신명기 27장 26절밖에 없다.8 따라서 바울은 이미 자신이 개진한 저주 모티프를 이어가면서,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들이려는 갈라디아인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려고 가장 적절한 구절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더 어려운 문제도 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다고 여져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3:11) 왜 바울은 “그 계명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로 살 것이다.”(3:12b, 이것은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한 것이다)라고 말했는가? 모순되는 주장이 아닌가? 이 문단에서 바울이 레위기 18장 5절과 하박국 2장 4절을 동시에 인용하면서 논증을 펼치기 때문에, 마치 성서의 특정 구절을 성서의 다른 구절로 반박하는 것처럼 보여 문제를 더 어렵게 한다. 이 난해한 논증의 흐름을 설명하려는 끝없는 노력이 있었지만, 필자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한다.
바울의 주장의 흐름을 짚어보면, 하박국 2장 4절이 참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레위기 18장 5절이 아무리 오경에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맞지 않다는 논리이다. 현대인의 귀에 별로 설득력이 없게 들린다. 그래서 단단한 근거를 가진 주장이라기보다는 일방적 선언(assertion)에 가깝다. 하지만 그 안에 작동하는 논리를 굳이 찾자면 이런 것 같다. 피스티스로부터(만) 살 수 있다는 하박국 2장 4절을 오롯이 받아들이지 않고 할례를 덧붙이려는 노력은 ‘책에 있는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아브라함의 예(창 15:6)와 하박국 2장 4절이 합해지면서 레위기 18장 5절의 내용을 무력화시킨다. 레위기 18장 5절에는 ‘믿음으로’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3장 12절의 “율법은 피스티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ὁ δὲ νόμος οὐκ ἔστιν ἐκ πίστεως)라는 문장은 “율법은 피스티스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에서 나오다’라는 말은 ‘~에 속해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레위기 18장 5절의 중요성을 격하시키는 논리라고 생각한다. 3장 11절에서 하박국 2장 4절의 내용이 명징하다(δῆλον)는 말만 보아도 그렇다. 대단히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논증같지만, 앞서 말했듯 문서(성서든, 로마법이든)에 대한 이러한 접근, 즉 한 구절이나 규정은 극히 중요시 여기고 다른 구절이나 규정은 상대화시키는 것은 고대 수사학이나 유대인의 성서 해석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현대의 법 해석에서 필요에 따라 법의 문구나 이전 판례의 문구 자체에 호소하거나, 때로는 법의 정신 혹은 취지에 호소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13-14절에 흐르는 논리 역시 명료하지 않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저주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을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유대인이 저주에서 속량되어야만 이방인에게도 아브라함의 복이 전해질 수 있다는 내용을 바울은 어디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뿐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사고에 닿을 수 없다. 또 하나, 바울은 아브라함의 복을 ‘영의 약속을 피스티스를 통해 받는 것’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창세기에는 나오지 않는 바울만의 새로운 해석이다. ‘영의 약속’은 ‘약속, 곧 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곧 ‘영을 받음’이라는 것이다. 이는 피스티스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바울은 여전히 ‘피스티스에서 비롯한’이라는 표제어에 방점을 찍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저주 및 저주의 제거와 관련되어 있는지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이러한 주석적 문제를 풀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은 갈라디아서의 처음부터 뚜렷하게 흐르는 저주 모티프 안에 이 본문을 놓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사건’을 ‘주다’라는 동사를 사용해 표현한 점(1:4, 이는 고대의 묶는 주술에서 자주 쓰인 동사이다), 이중으로 저주 걸기(1:8-9), 안디옥 사건에서 게바가 하나님께 정죄당한 일(2:11), 그리고 바울의 적대자들을 악한 주술사로 묘사한 것(3:1)이 차곡차곡 쌓인 가운데 3장 10절에 이르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주 모티프는 갈라디아 청중의 두려움을 겨냥한 것이다.

3:15–21
바울은 언약과 유언이라는 뜻을 모두 가진 ‘디아테케’(διαθήκη)라는 단어를 가지고 일종의 말놀이(wordplay)에 근거한 논리를 펼친다. 여기에서 바울이 자신의 논증에 끌어들이는 논거는 ‘오래된 것이 더 중요하다.’는 고대인의 통념이다. 언약이 율법의 수여보다 먼저였으므로 언약이 더 중요하다. 물론 오경에 근거하지만, 이를 위해 바울이 전개하는 단수명사로서의 ‘씨’(개역개정에는 ‘자손’) 논증도 과한 측면이 없지 않다. ‘씨’는 단수명사이지만 집합명사로서 ‘자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보는 편이 자연스러운데, 바울은 이 단어가 단수명사임을 강조하고 그 단수성을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실체에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의 저주’라는 표현을 이미 사용하였는데, 이는 유대인에게는 경악할 만한 말이었다. 이에 더해 그는 하나님이 직접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천사를 통해 어떤 중개자(아마도 모세)의 손으로 주었다고까지 말한다. 바울은 율법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를 넓힘으로써 유대인이 당연하게 여겼던 율법의 가치를 끊임없이 깎아내리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견해를 칠십인역 구절로 뒷받침할 때도 있고, 때로는 그 책에 없는 내용을 근거로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예를 들어,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주어졌다는 내용은 칠십인역 신명기 33장 2절에 희미하게 암시되어 있지만 바울처럼 선언하듯 말할 수는 없다.) 심지어 유언을 얼마든지 고칠 수 있었던 당대의 관습과 배치되는 주장도 한다.(3:10, “누구도 유언을 무효화하거나 거기에 덧붙일 수 없다.”) 이러한 점은 결국 바울이 엄밀한 형식 논리나 증거에 입각해 주장을 개진하지 않고 주로 갈라디아 청중의 감정을 건드리는 설득의 방식을 채택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의가 율법으로부터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니, 그것은 말이 안 된다(2:21)는 식의 논리가 18절에서 다시 등장한다. “유업이 율법으로부터 (온다면) 더 이상 약속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통해 은혜를 주셨습니다.” 즉 율법과 유업/상속이 연결될 수 없다는 논리인데, 우리 귀에는 별 설득력이 없다. 기본적으로 이 주장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행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또 ‘정답’을 이미 가진 채 역으로 문제가 무엇인지를 추정하는 식의 추론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율법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범죄 때문에 더해진 것일 뿐이다. 하지만 율법 자체는 생명을 주는 능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안에 살기 위해 율법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바울은 이미 하박국 2장 4절의 문자적 해석을 옹호하면서 생명을 피스티스와 연결시켰다.

3:22–25
이 본문에서도 바울은 조금 이상한 논리를 펼친다. ‘그리스도를 믿음’ 혹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에서 생겨나는 약속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기 위해 성서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한다. 모든 이가 죄의 지배하에 있다는 경험적 사실이 실제로는 약속과 믿음을 연결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말인데, 논리적 정합성은 부족하다. 바울은 율법이 우리의 ‘몽학선생’(παιδαγωγός) 역할만 했다고 말하는데,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어린 학생이 충분히 성장하기까지 등하교를 돕고 교육하고 보살피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바울은 율법의 한시적 역할을 지적한다. 물론 당대의 유대인이 생각한 율법의 의의와 기능과는 동떨어진 견해이다.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여기에서 바울의 율법관이 ‘율법의 저주’라고 불릴 만큼 나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부 고대 문헌에 ‘παιδαγωγός’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체적으로 단순히 앞에서 설명한 일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율법을 폄하한다. 이 이유들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성이나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필자는 ‘바울의 율법관’이라는 표현을 폐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처럼 상황에 적응하며, 다이나믹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바울 해석자들은 대개 바울이 논쟁이나 논증을 할 때 당대의 유대교를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제시했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고대인들이 치열한 논쟁 상황에 있을 때 활용하는 수사 기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이다. 바울은 필요하다면 여느 고대인과 마찬가지로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었다. 그가 유대인들의 믿음과 율법 이해를 공정하게 제시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너무 순진하다.9

3:26–29
바울은 선언한다. 모두가 피스티스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가 하나님의 자녀인 이유는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었기 때문이다. 이 논리 또한 파악하기 어렵다. ‘옷을 입다’라는 것 자체가 비유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유로부터 ‘의의 전가’ 교리를 끌어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굳이 바울의 논리를 이해해보자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식의 메시아 사상(그의 백성과 메시아가 합체된다는 사상)은 1세기 유대교에서 찾아보기 어렵다.10 고대인들의 이해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예처럼 민족이나 가족은 최소한 하나 이상의 특질(traits)을 공유하는데(로마서 4장은 이러한 일반적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 바울은 그 공유된 특질을 믿음(피스티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신실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자들은 예수와 같은 종족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사회의 모든 구별이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된다는 선언처럼 들리는 3장 27-28절은 현대인이 듣기에 매우 놀라운 내용이지만, 사실 그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세운 모든 가치 체계와 분류를 무시하신다는 말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규정짓는 정체성은 그리스도뿐이라는 말이다. 바울이 그의 여러 편지에서 노예제의 부당함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 구절을 모든 차별의 철폐로 확장시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바울이 모든 면에서 영웅적인 사고를 했으리라는 기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고, 이러한 점을 인정할 때 그의 편지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종종 가져다주는 억압적 요소를 제대로 평가하고 극복할 수 있다.
바울은 이 긴 논증을 마치며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길고 복잡하며, 때로는 설득력이 없거나 빈 곳이 있는 논증의 결론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 모티프는 띄엄띄엄 나오기 때문에 하나의 굵은 줄기를 더듬어 찾기는 어렵다. 4장 후반부에서 바울은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때 다시 바울의 아브라함 이야기 이해와 활용을 다루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율법의 행위들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느냐, 이방인으로 태어났느냐는 하나님의 눈에 중요하지 않다. 바울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동등성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새 관점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졸고, “바울을 바라보는 새 관점–기원, 분화, 그리고 그 이후”, 「목회와 신학」(2019년 7월호)을 참고하라.
2 이 저주 행습에 대한 연구는 많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한정해서는 Susan Eastman, “The Evil-Eye and the Curse of the Law: Galatians 3.1 Revisited,”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83(2001): 69-87을 참고하라. 보다 광범위한 연구로는 John H. Elliott, Beware the Evil Eye: The Evil Eye in the Bible and the Ancient World, 4 vols.(Eugene, Oregon: Cascade Books, 2015-2018).
3 Demosthenes(데모스테네스), De corona (3): “모든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언어적 폭력과 비난을 듣는 것이다.”(ὃ φύσει πᾶσιν ἀνθρώποις ὑπάρχει, τῶν μὲν λοιδοριῶν καὶ τῶν κατηγοριῶν ἀκούειν ἡδέως)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연설가 데모스테네스와 로마의 위대한 연설가 키케로 모두 연설 중에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상대방을 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4 플라톤, 『정체』(Republic), 364 b–e. Hans Dieter Betz, Galatians: A Commentary on Paul’s Letter to the Churches in Galatia(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79), 55.
5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2.5.15.
6 존 M. G. 바클레이, 송일 옮김, 『바울과 선물: 사도 바울의 은혜 개념 연구』(새물결플러스, 2019), 660쪽 각주 4번.
7 보다 자세한 논증은 E. P. Sanders, Paul: The Apostle’s Life, Letters, and Thought(Minneapolis: Fortress, 2015), 523-524를 보라.
8 Sanders,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Philadelphia: Fortress, 1983), 21.
9 다음 연구를 참고하라. R. Barry Matlock, “Helping Paul’s Argument Work? The Curse of Galatians 3.10–14,” in Torah in the New Testament: Papers Delivered at the Manchester–Lausanne Seminar of June 2008, ed. M. Tait and P. Oakes, LNTS 401(London: T&T Clark, 2009), 179.
10 이러한 해석은 톰 라이트가 일관되게 밀어붙이는데, 1차 자료가 탄탄하게 뒷받침되지 않아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는다.



김선용 |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서 성서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신약 정경과 외경, 초대교회사를 공부했고, 초기 기독교 문헌을 그리스-로마 시대의 철학, 수사학, 종교적 배경에서 연구하고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2020년 4월호(통권 7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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