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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바울 구원론의 탐구 01
성서와설교 (2020년 2월호)

 

  칭의론, 무엇이 문제인가
  

본문

 

연재를 시작하며
오랫동안 바울을 공부해왔다. 그러던 차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해서 ‘칭의론에 대한 논의’가 관심사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 내 공부의 초점도 거기에 맞추었다. 개신교 신학의 중심 주제에 대한 나 나름의 이해를 갖기 위함이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묻고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칠판에서 받아 적었던 ‘이신득의’(以信得義)라는 말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에야 신학적 화두(話頭)로 다시 거머잡은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시작된 공부가 끝내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울은 칭의론을 말한 적이 없다.”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지금의 심경이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교설’이 기존의 칭의론으로는 제대로 해명될 수 없음을 보았다고나 할까? 아무튼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에 나오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500년 동안 지속된 그 완강한(?) 논리에, 논리로 맞설 힘은 없다. 다만 그동안 공부해온 로마서를 중심으로 그것을 해석해나가면서, 나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물론 루터도 바울을 해석했고, 칼뱅도 바울을 해석했다. 그들이 해석한 결과물을 체계화한 교리가 이른바 칭의론이다. 그렇다면 칭의론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 교리의 근거가 되는 ‘그들의 해석’을 성서에 비추어 차근차근 확인해나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그때 그들이 해석한 로마서가 지금 내 책상 위에도 펼쳐져 있은즉, 그들이 해석했듯이 나도 내 눈으로 그것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누구의 칭의론’이 어떻고 하면서 논쟁하기보다는 그러한 논의의 근거가 되는 성서를 놓고 저마다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신학을 하는 사람의 바른 자세가 아니겠는가. “너는 그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나에게 그 말씀은 이렇게 읽힌다.” 하며 서로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개방적인 신학풍토가 절실한 때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저마다 읽는 성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저마다 번역본이 다른 성서를 읽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일반 교인들은 물론 목회자들조차 이 번역의 다름을 그리 괘념치 않는 것 같다. 자신이 소지한 손때 묻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는 것으로 족하다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실은 신학자들도, 서로 ‘다른 번역’을 읽으면서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리 되면 결국 해석의 문제는 번역의 문제로 귀착된다. 어떻게 번역하느냐 하는 것이 해석보다 우선한다. 해석자에게 ‘개인적인 번역’(私譯)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없는 실력에 낯선 헬라어 성서 원전을 붙들고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나름의 해석을 위해서라도 개인적인 번역은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남의 해석에 의존했다면, 이제부터라도 내 눈으로 내 해석을 시도해야겠다고 마음먹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껏 나를 길들여온 그 완강한 ‘수입 신학’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것이 나의 늘그막 바람이다.
더욱이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놀란 것은 우리말 번역본의 많은 구절들이 기존의 칭의론에 오염(?)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도적으로 칭의론에 끼워 맞추듯 번역한 흔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교리가 번역에 개입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말 성서를 번역할 때 참고로 삼았을 영어 성서 자체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성서의 헬라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도, 번역자들은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갖는 한계를 절감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나온 영어 성서를 참고하여 이중 번역(重譯)한 것이 우리말 성서라면, 그러한 번역 성서의 한계야말로 해석자가 넘어서야 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비근한 예로, 로마서 1장 16절의 우리말 번역들을 비교해보자.(아래에서 ‘새번역’은 표준새번역 개정판이 아니라, 1967년에 발간된 ‘신약전서 새번역’을 뜻한다.)

개역한글/개역개정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새번역(1967)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한 구절만 놓고 보더라도, 왜 바울이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기 힘들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도 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도 한다. “구원하는” 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번역의 밑바닥에 똑같이 깔려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하나님이 구원해주셔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고, 심지어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설교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이리 되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막 5:34, 새번역)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은 까맣게 잊혀진다. 더 위험한 것은 그 구원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처럼 믿게 된다는 점이다. ‘구원받는다’는 말이 일반화된 것도 이러한 번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소한 차이 같아도, 여기서 파생되는 굴절과 왜곡은 자못 심각하다. 오해가 오해를 더하고, 그렇게 증폭된 오해가 ‘구원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찌해야 하는가? 헬라어 성서 원문을 놓고 씨름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에이스 소테리안’(εἰς σωτηρίαν)이라는 전치사구의 번역이다. 헬라어 문법에서 전치사 ‘에이스’(εἰς)는 일반적으로 ‘위하여, 향하여, 속으로’라는 뜻이다. 향방과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어떤 명사의 뒤에서 그 명사를 수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구절에서도 ‘에이스 소테리안’은 “하나님의 능력”을 꾸며준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번역하면, 저절로 이해(해석)도 달라진다. 구원은 우리가 이르러야 할 목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 안에 내주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능력이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로부터 생겨난 능력”(롬 1:4)이라는 것까지 감안하면, 우리의 구원과 죽어 있는 자들의 부활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도 더 깊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상론하겠지만, 로마서 10장 10절에 이르면, 번역은 물론 해석도 그 깊이를 더한다. “의로움에 이르도록(‘에이스 디카이오쉬넨’, εἰς δικαιοσύνην) 그것이 마음으로 믿어지고, 구원에 이르도록(‘에이스 소테리안’, εἰς σωτηρίαν) 그가 입으로 고백되기 때문입니다.”(사역)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과 ‘의로움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동일한 뜻으로 반복되고 있다. 구원과 의로움의 상관성이 해석의 과제로 주어진다. 헬라어 원문과 씨름하며 얻어낸 나름의 번역이 얼마나 해석의 지평을 넓혀주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이다. 적어도 받겠다고 해서 얻어지는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그 소득은 크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거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이, 별 생각 없이 관용적으로 쓰일 말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칭의론 때문에 생겨나는 잘못된 질문들
칭의론과 연관된 유튜브를 뒤적이다 보면, 접하게 되는 질문들이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칭의의 교리’를 한국교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질문들을 이 글의 실마리로 잡는 것은 그러한 논의야말로 우리가 처한 교회의 현실과 믿음의 현주소를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 2. 칭의 상실, 가능한가? / 3. 우리의 구원, 안심해도 되는가, 떨며 기다려야 하는가? / 4. 구원은 행한 대로 받는가, 은혜로 받는가? / 5. ‘이미 얻은 구원’과 ‘미래에 얻을 구원’

이러한 질문들이 드러내는 바와 같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교되는 칭의론은 한마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되었으니, 이미 구원받은 게 아니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사들은 ‘구원의 확신’을 강조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구원의 확신도 없느냐고, 윽박지르듯 다그친다. 이리 되면 전도지를 들고 나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게 마련이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향한 안쓰러운 마음의 발로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침은 날이 갈수록 점점 공허하게 들리고, 일반인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지고 있다.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는데, 정작 의로운 구석은 보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믿는 자 스스로 생각해도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묻고, 그 물음 또한 다양하다.
위에서 예시한 질문들을 곰곰이 새겨보라. 뭔가 질문 자체가 이상하다. ‘한 번의 구원’은 뭐고, ‘칭의의 상실’은 또 무엇인가? 구원을 확신한다고 하면서도 왠지 속으로는 미심쩍다는 소리 아닌가? 그래서 교수들을 불러다 묻고, 신학자들끼리 모여서 논의도 한다. 일부러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골라 논쟁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론은 뻔하다. 서로 제 소리를 하다가 말고, 제 주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믿음의 굳건함(?)을 보일 뿐이다. 특히 칼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주장은 완강하다. 자기와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바울을 논하면서도 바울의 복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는 사실이다. 칼뱅이 바울보다 우위에 있다. 보수를 표방하는 사람들일수록, 칼뱅의 해석이 절대적이다. 걸핏하면, ‘칼뱅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식이다. 자기 생각은 전혀 없는 사람들처럼, 누구의 구원론이 어떻고, 누구의 칭의론이 어떻고 한다. 남의 해석을 제 견해처럼 내세우고, 남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으로 학자연한다. 백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수입 신학’이 판을 치고 있다. 신학적인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누구의 말 그대로 ‘다시 성서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그래서 그 해석을 놓고 저마다의 견해를 나눌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신학교육 자체가 그러한 분위기나 기반을 조성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앞으로 이 글을 쓰면서 주력하고자 하는 것도, 나의 이런 생각에 근거한다. 바울의 구원론을 탐구하다 보니, 기존의 칭의론이 가진 문제점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그런 식의 칭의론을 말하지 않더라.” 이것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논지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맛보기 삼아, 로마서의 몇몇 구절들을 예시하고자 한다. 앞으로 이어질 필자의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1) 로마서 3장 28절

개역한글/개역개정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새번역(1967)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표준새번역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사역(私譯)
율법의 행위들과는 무관하게(전치사 ‘코리스’; 관계없이, 별도로), 믿음으로(여격) 사람(‘안드로포스’)이 의로워지는(‘디카이오오’의 부정사 현재 수동태) 것으로 우리는 간주하기(‘로기조마이’) 때문입니다.


이 구절의 우리말 번역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든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는다.’고 하든, 한글로는 뭔가 표현이 어색하지만, 그런 표현상의 차이는 크게 괘념치 말자. 전통적인 칭의론에서 ‘행위냐 믿음이냐’를 논할 때에 자주 인용되는 본문이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행위냐, 믿음이냐에 있지 않다. 이 구절이 분명히 못 박아 말하는 ‘사람’(‘안드로포스’, ἄνθρωπος)이라는 말에 더욱 눈길이 간다. 그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 사람이 ‘의로워진다’는 뜻인지, 그걸 분명히 가려보고 싶다.
그러려면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 의롭다 하다,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의 수동태를 어떻게 번역하느냐 하는 문제와 마주친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받는다).”는 우리말 번역과 달리, 필자는 “의로워진다”고 번역했다. 사람이 의로워져야 “의로운 자”(롬 1:17)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의로워지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 한다’는 것이, 왠지 나에게는 공허하게 들린다. 그렇게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이,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하기도 하고, 공공도로의 밑바닥을 파서 예배당 지하실을 넓히기도 하는 현실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존의 칭의론’에 대한 나의 소박한 반감이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기울어가는 것도, 어쩌면 ‘칭의’(稱義)라고 하는 그 공허한 관념이 믿는 자의 삶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놓고 보면, 갈라디아서 2장 17절의 꾸짖음은 실로 아프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워지기를 추구하다가 죄 있는 자들로 밝혀졌다면, 과연 그리스도는 죄의 일꾼이란 말입니까?” 의로워지기를 추구하는 것이 믿는 자의 삶이고, 그런 사람이라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도 의로워지기를 추구하지는 않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만을 가르치고 있는 게 교회가 처한 현실이다. 그런 식의 확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광화문에 나가 깃발을 흔들어도 할 말이 없다. 스스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2) 로마서 5장 9절
개역한글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개역개정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새번역(1967)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표준새번역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사역(私譯)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의 피 안에서 더더욱 의로워졌으니(‘디카이오오’의 분사 과거 수동태) 그를 통하여 진노에서 벗어나(‘아포’) 구원될(‘소조’의 미래 수동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믿음으로부터(‘에크’) 의로워졌은즉(‘디카이오오’의 분사 과거 수동태)” 하고 말했던, 5장 1절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다. 의로워졌다(1절)는 것을 전제로 더더욱 의로워졌다(9절)고 말할 참이다.
1절이나 9절이나 똑같이, ‘디카이오오’(의롭게 하다)라는 동사의 수동태를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9절은 거기에 ‘더더욱’이란 말을 덧붙여 “더더욱 의로워졌다”고 말하고 있으니,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기존의 칭의론과 사뭇 다르다. 놀라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더더욱 의로워졌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면서도, “구원될 것이다”라는 말은 미래로 남겨두고 있다. ‘의로워졌는데도’, 거기서 더 나아가 ‘더더욱 의로워졌는데도’, 구원은 ‘아직 아니다’라는 생각이 이 미래 속에 담겨 있다. 빌립보서 3장 12절이 연상된다. “내가 이미 붙잡았기 때문도 아니고,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붙잡을 수만 있다면 붙잡으려고, 나는 오직 좇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식의 사고를 바울은 허용하지 않는다. 기존의 칭의론이 로마서 5장 9절을 놓고 당황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필자의 사역과 기존의 우리말 번역을 찬찬히 비교해보라. 헬라어 성서의 문장 첫머리에 명기된, ‘폴로 말론’(Πολλῷ μᾶλλον, 더더욱)의 번역이 문제임을 보게 된다.
개역한글/개역개정은, “더욱 구원을 얻을(받을) 것이니”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새번역/표준새번역은 “구원받을 것은(구원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라고 번역하였다. ‘더더욱’이라는 말을 어디에 갖다 붙일지 몰라서 헤매고(?) 있는 형국이다. “더욱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는 번역(개역한글)이 어색하다고 여겼는지, 새번역은 거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받을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라고 용감하게(?) 오역을 해버렸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말을 번역에 반영하기 위해서, “더욱 확실합니다”라고 한 것일까?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심사숙고하고 번역한 것일 터인데, 일개 평범한 목사가 오역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그 번역이 왜 이리도 눈에 거슬릴까? 필시 까닭이 있지 싶다.
‘디카이오오’를 ‘의롭다 하다’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전문가적인(?) 고정관념이 이런 문장에서는 덫으로 작용한 것 같다. 그런 ‘디카이오오’가 ‘분사 과거 수동태’로 표기되었으니, 늘 그래왔듯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에 ‘더더욱’이란 말을 덧붙여서 “더더욱 의롭다 함을 얻었다.”라고 번역하려니, 문장 자체도 이상하고 의미도 통하지 않는다. ‘더더욱’과 ‘칭의’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슬며시 번역을 왜곡한 게 아닌가 의심이 된다. “더더욱 의로워졌다.”고 번역하면 그만인 것을, ‘더더욱 의로워진다’는 사고를 할 줄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애꿎은 ‘소조의 미래 수동태’에 ‘폴로 말론’을 갖다 붙여서, “더욱 구원을 받으리니”(개역한글)라고 번역했지 싶다. 그래놓고도 뭔가 어색했던지,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표준새번역)라고, 매끈하게 다듬어 냈다. 문장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지만, 그게 오히려 미심쩍다. 번역을 비틀어서라도 ‘기존의 칭의론’을 고수하려는 속셈이 안쓰럽게 여겨질 정도이다.
위에서 예시한 세 구절(롬 1:16, 3:28, 5:9)만 놓고 보더라도, 기존의 칭의론으로는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교설을 담아낼 수 없다. 바울은 ‘우리가 이르러야 할 목표’(롬 1:16)로 구원을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람이 의로워지는”(롬 3:38) 것을 가르친다. ‘사람’이 의로워져야 ‘의로운 자’(롬 1:17)라 할 수 있고, ‘더더욱 의로워져야’(롬 5:9) 그 사람됨이 ‘의로움’에 이를 수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바울에게서 구원과 의로움은, 호환할 수 있는 동의어처럼 쓰인다. 그리고 이것을 확인시켜주는 구절이 로마서 10장 10절이다.

3) 로마서 10장 10절
개역한글/개역개정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새번역(1967)
그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롭다 함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릅니다.
사역(私譯)
의로움에 이르도록(‘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그것이 마음으로 믿어지고, 구원에 이르도록(‘에이스 소테리안’) 그가 입으로 고백되기 때문입니다.


‘의’와 ‘구원’이 ‘이르러야 할 목표’로 읽히도록 번역했다는 점은 실로 고맙다. 그런데 여기에도 음험한(?) 번역상의 비틀림이 있다. ‘목표’를 ‘결과’처럼 뒤바꿔버렸다. 헬라어 성서에서 이 구절의 주동사인 ‘피스튜오’(πιστεύω, 믿다)와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 고백하다)는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로 사용되었다. ‘믿는다’가 아니라 ‘믿어진다’이고, ‘고백한다’가 아니라 ‘고백된다’이다. 우리말은 본디 수동태적 표현을 어색해하지만, 해석을 위해서는 수동태를 그대로 살려 직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두 동사의 주어가 동사 속에 3인칭 단수로 감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누가) 믿어지고 ‘누가’(무엇이) 고백된다는 말인지, 이 문장만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바로 앞 절인 9절과 연관되어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당신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그를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믿으면, 당신은 구원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9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보면, 10절에서 “그것이 마음으로 믿어진다.”라고 말할 때의 ‘그것’(3인칭 단수)은 “하나님이 그(예수)를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가 입으로 고백된다.”라고 말할 때의 ‘그’(3인칭 단수)는 ‘주라고 고백되는 예수’를 가리킨다.
이러한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든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었기 때문인지, 우리말 번역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의롭다 함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얼버무려 버렸다. 번역의 모호함은 차지하고, 이런 번역을 근거로 하는 설교는 더욱 가관이다.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처럼 설교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처럼 오도한다. 이게 오늘날 교회가 처한 현실이고, 우리가 우러러 받드는 강단의 현주소이다. 그렇게 설교하기 위해서 번역을 이렇게 한 것인지, 번역을 이렇게 했기 때문에 설교를 그렇게 하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기 힘들다. 어쩌자는 건가?
좋다. 우리말 번역 그대로,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하자. 거기에 ‘이르는 과정도 없이’ 구원을 받았다 하고, ‘더더욱 의로워지지도 않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는 기존의 칭의론으로 어찌 삶이 변화되고 사람됨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흔히들 ‘법정적 의미의 칭의론’을 비판하면서, 윤리성의 약화를 지적하기도 한다. 신학적인 논의로는 거창해 보여도, 그 문제의 발단은 지극히 사소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디카이오오’(의롭다 하다, 의롭게 하다)라는 헬라어 동사의 번역이 문제였을 것이다. 왜 ‘의롭게 하다’라는 뜻은 무시하고 ‘의롭다 하다’라는 뜻만 고집했는지, 누구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다. 어쩌면 영어성서가 이 단어를 ‘justify’라고 번역한 것이 사단(事端)이었을 수도 있다. 필자가 공부해온 바로는, 로마서에서 ‘디카이오오’라는 동사를 ‘의롭다 하다’라고 번역해야 할 구절은, 유일하게 8장 33절 한 군데뿐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거슬러(‘카타’) 누가 소송(고발)하겠습니까?(‘엥칼레오’) 의롭다 하시는 분(‘디카이오오’의 분사 현재)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소송하겠습니까?” 하고 말하는 것으로 보면, 재판정(롬 14:10)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더는, 그 누구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걸어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사람됨을 평가하실 수 있고 의롭다 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2장 5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도, 그 기준은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하나님은 겉모습을 취하는 분(‘프로소폴렙시아’)이 아니다.”(롬 2:11)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복음서가 ‘최후심판의 비유’(마 25:31-46)를 가르치면서, 그 심판이 “염소들에서 양들을 갈라내는(‘압호리조’; 구별하다) 것과 같다.”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을 의롭다고 평가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뜻이다. 그 비유에서 “의로운 자들”에 대한 언급을 두 번씩이나(37절과 46절) 명기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사람됨에 대한 평가’는 최후 심판까지 유보되어야 마땅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어떤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칭의’(Justification)를 빌미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께서 그리도 싫어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따로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우리야말로 ‘현대판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복음 16장 15절을 찾아보라. 우리의 옆구리를 찌르고드는 말씀이 거기 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들을 아신다.


왜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욕을 먹고 있는가? ‘자신을 의롭다 하기 때문에’ 꾸짖음을 당하고 있다. ‘의롭다 하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신데(롬 8:33),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 했다는 것이다. 어떤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신학교 칠판에서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 적었던 ‘Justification’(칭의)이야말로, 신학적인 자기 정당화가 아닐까?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라도, 두고두고 깊이 새겨야 할 일이다. 앞으로 이어질 이 연재가, 믿음 자체를 놓고 묻고 찾으며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강일상 | 한국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마가복음의 기적설화』, 『산상설교, 그 사람됨의 가르침』, 『부활되어야 할 부활』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은퇴하였다.

 
 
 

2020년 3월호(통권 7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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