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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교리의 더께를 걷어낸 갈라디아서 읽기 03
성서와설교 (2020년 2월호)

 

  갈라디아서 2장(2): ‘그리스도-사건’의 효과
  

본문

 

2장 14절까지는 바울이 게바를 질책했던 말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15-21절은 그 질책이 이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 대상을 갈라디아인에게 옮겨가며 매끄럽게 오버랩(overlap)되는 것인지 자신 있게 판별하기 어렵다.1 우리는 안디옥 사건 회상이 갈라디아 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임을 이미 보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2장 15절에서 2장 마지막까지의 내용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바울이 염두에 둔 궁극적 대상은 여전히 갈라디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서 다룰 부분은 지난 2,000년 동안 갈라디아서 해석사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구절로 가득 차 있다. 그 유명한 ‘이신칭의’가 처음 천명되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바로 각 구절을 명징하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하나같이 아주 압축된 문장인 데다가, 은유적 표현과 더불어 중요한 신학 개념이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하고, 전치사의 의미가 워낙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어쩔 수 없이 학계의 복잡한 논의를 소개해야 할 텐데, 그 논쟁의 이슈와 제안들을 억지로 간략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선에서 반영해가며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해보겠다.

2장 15절
바울은 이방인 신자가 들으면 불쾌할 수도 있는 말로 15절을 시작한다. “우리는 태생상 유대인이고 이방인들에게 속한 죄인이 아닙니다.”(2:15) 이방인을 바라보는 유대인의 전형적 시각이다. 이방인은 모두 죄인인데, 그 이유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바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지침인 율법을 받았으나, 이방인은 율법을 소유하지 못했으므로 자연스레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여기까지는 유대인 출신 예수 따르미나 평범한 유대인 모두 동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16절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는 충격적으로 들릴 주장이 시작된다.

2장 16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πίστ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를 통해서(διά)가 아니라면(ἐὰν μή), 율법의 행위들(ἔργα νόμου)로부터 사람이 의롭다고 여겨지지 않는다(οὐ δικαιοῦται)는 것을 (우리는) 알고서(εἰδότες), 우리가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의롭다고 여겨지기 위해 우리 또한 그리스도 예수에게 신뢰를 두었는데,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들로부터는 어떤 육신도 의롭다고 여겨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지만 한 문장이다. 그리스어 본문을 가능한 한 직역했으나, 그중 한 단어 ‘피스티스’(πίστις)는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처음 보는 글처럼 읽어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가장 먼저 드는 인상은 문장 안에 반복되는 문구가 불필요하다고 여겨질 만큼 많다는 것이다. 특히 ‘의롭다고 여겨지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 그리고 ‘율법의 행위들’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문장 안에 같은 문구를 사용하는 것은 글을 준수하게 쓰려는 사람이 피해야 하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렇게 반복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인가?
16절은 ‘εἰδότες’(알고 있으므로)라는 분사로 시작한다.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누가’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이미 필자의 사역이 제시하듯, 문맥을 통해 자연스레 추정하자면, 여기에서 알고 있는 주체는 ‘우리’, 즉 게바와 바울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바울뿐만 아니라 ‘할례자’를 위한 사도인 게바 역시 16절에서 천명된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짐’이라는 핵심 사항을 알고 동의하고 있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게바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짐’을 알면서도 그에 반하는 행동을 안디옥에서 했고, 바울은 이러한 게바의 행동을 위선으로 규정했다.(2:13) 여기에서 ‘위선’이라는 단어는 연극 배우처럼 실제 자신과는 다른 인물을 연기하듯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게바를 향한 이 같은 비난은 갈라디아인 공동체를 흔들어놓은 바울의 대적자들(5:9)에게 고스란히 적용된다. “할례를 받는 이들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여러분이 할례받기를 원합니다.”(6:13) 안디옥 사건 회상이 궁극적으로 갈라디아 신자의 마음과 판단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라는 우리의 관찰이 여기에서 재차 확인된다.
무엇보다도 2장 16절은 안디옥 사건에서 게바에게 화를 내며 그를 꾸짖던 내용의 연장선에 있으며, 3장 1절에서 갈라디아인들의 어리석음을 일갈하는 바울의 한탄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논쟁적 정황 때문에 한 문장 안에 불필요할 정도의 반복이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2장 16절부터 3장 내내 피스티스와 율법의 행위들이 대조된다. 이러한 긴 논증의 시발점은 안디옥 사건, 더 거슬러서 예루살렘 방문 때 벌어진 이방인 신자의 할례 문제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식탁 교제에 있다. 다시 말해, 후대에 이신칭의 교리로 유명해진 바울의 언설(2:16)이 원래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공동체 내 지위 문제 및 이방인 신자의 유대 율법 준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문제의 본질은 율법 준수를 통해 또는 선행을 쌓아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행위구원론’을 논박하는 데 있지 않다. 2장 16절은 믿음과 행위의 대조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방인 신자가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살아야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했던 일부 유대인 신자의 신념을 바울이 철저하게 부수는 장면이다. ‘율법의 행위들’로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는 주장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만을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이다.
이미 40년 전 샌더스(E. P. Sanders)는 고대 유다이즘이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을 얻는 종교체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매우 강력한 증거와 논증을 통해 밝혀냈다.2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행위를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선행(先行)하시는 은혜가 이스라엘의 존립과 정체성의 토대였다. 고대 유다이즘은 개신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신적 은혜에 기반을 두었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두고 강조했다.
샌더스는 유다이즘의 기본적 토대 혹은 전제를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는 패턴으로 설명했다. 언약적 율법주의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선행하시는 은혜”로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당신의 백성답게 살라는 지침으로 율법을 주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율법을 지켰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언약백성의 지위를 유지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율법 준수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3 이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와 마르틴 루터의 영향으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마치 율법 준수를 포함한 (구원을 향한) 인간의 노력 일체를 논박하는 것으로 오해되었다. ‘율법의 행위들’은 율법의 완벽한 준수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 혹은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시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율법을 핵심으로 두는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 그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율법의 행위들’은 유대인의 남다른 정체성에 관련된 행위, 특히 할례와 안식일 준수, 음식 규정 준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행위구원론적 행동으로 간주하고 비판했다.’는 전통적 해석이 소위 ‘바울에 관한 새 관점 학파’(the New Pers-pective on Paul)에 의해 타당하게 논박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이라는 표현으로 무엇을 지칭했고 왜 그것을 비판했는가?’
‘율법의 행위들’(ἔργα νόμου)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 1977년 샌더스의 책이 출간된 이래 학계의 뜨거운 논의가 있었고, 현재도 그 논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보수 계열 학자를 제외하면, 이 표현이 율법 공로주의나 행위 구원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학자들은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위 단락에서 제시한 해석은 흔히 ‘바울에 관한 새 관점’으로 일컬어지는 학자들의 의견에 가깝지만, 율법의 행위들을 ‘유대 정체성의 경계를 짓는 표시’라고 해석하는 것에 필자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앞으로 이어지는 연재에서 뚜렷하게 밝힐 것이다.)
‘ἔργα νόμου’를 영어권에서는 ‘works of the law’로 번역하는데, 이러한 번역은 종종 ‘행위와 믿음’(work vs. faith)이라는 잘못된 대조로 이어지고, 나아가 유다이즘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기초로 작용해왔기 때문에 더 나은 번역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학계에서 형성되었다. 이 단어에 대하여 최근 학자들이 제시한 새로운 번역 몇 가지를 간략히 소개해본다. 어떤 학자는 이 단어를 ‘율법 규정들’(rules/regulations of the law)로 번역하며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율법의 규율들을 일컫는 표현이라고 강조한다.4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이 오로지 이방인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일군의 학자들은 이 문구를 ‘할례로 완성되는 개종 의례’(proselyte rites)로 이해한다.5 이 단어를 율법에 부합하는 제의적 행동(ritual/cultic deeds)6이라고 해석하며 그 의미를 제한하려는 이도 있다. 율법에 해당하는 단어 ‘노모스’에 정관사가 없음을 근거로 유대 율법을 포함한 보편적 법과 규율에 부합하는 행동들이라고 이해하는 역사비평적 주석가7도 있는가 하면, 이를 더 확대해서 바울이 모든 종류의 법 체계를 비판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현대 철학자도 있다.8 율법의 행위들을 인간이 가진 가치 체계의 하위 범주로 이해하려는 연구가도 있다.9 필자는 이 단어를 ‘토라로 규정되는 삶의 방식’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들’의 대립항처럼 제시되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피스티스(πίστις)의 뜻을 살펴보자. 기독교인은 이 그리스어 단어를 거의 예외없이 ‘믿음’이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그리스어 사전에서 이 단어는 신뢰를 주는 것, 신실함, 신뢰, 충성, 증명, 믿음, 보증, 정직 등 무척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10 특정 명제나 사실에 대한 인지적 동의로서의 ‘믿음’(belief)보다는 관계성 형성의 바탕이 되는 ‘신뢰’와 ‘신실함’이라는 뜻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11 물론 논리적으로 볼 때 인지적 동의와 신뢰를 칼같이 구분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라는 문구에서 ‘그리스도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영어로 ‘of Christ’로, ‘πίστ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는 문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충성’으로 직역할 수 있다. 문제는 전치사 ‘of’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Love of God’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 즉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함’이라는 뜻도 가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뜻도 가능하다. 이 같은 문법적 논증에 더해, 위에서 언급한 2장 16절의 지나친 중복적 표현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낀 일군의 학자들은 전통적인 번역 ‘그리스도를 믿음’(faith in Christ) 대신 ‘예수께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보여주신 신실함’(Christ’s faithfulness)이 더 나은 번역이라고 주장한다. 북미권 학자들 중에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고, 독일어권 연구자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번역을 따른다.
사소한 문법 사항에 대한 과한 다툼 같지만, 이 논쟁이 칭의론 이해에 끼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우리의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기반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인지적 동의(믿음)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기반하는가? 이것이 신약학계에 널리 알려진 ‘피스티스 크리스투’ 논쟁이다. 지면의 제한으로 이 논쟁의 전모를 충실하게 요약할 수는 없다.12 다만 두 가지 해석 모두 일리가 있고,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측면도 있다는 것만 말하겠다. ‘Faith in Christ’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을 표현하는데, 문제는 정확히 ‘무엇’을 믿는 것인지가 이 짧은 표현에서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즉 지난 호에서 약어로 ‘the Christ-event’가 사실임을 인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어쨌든 ‘faith in Christ’라는 표현 자체는 비어 있는 기표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내심에는 믿음을 인간의 행위로 보는 것을 경계하는 지나친 신학적 염려(theological anxiety)가 있어 보인다. 보이는 ‘행위’라는 단어에 대한 알레르기적 반응이 역사적으로 견실한 주해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 피스티스는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가지는 선행성으로 인해 발생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13
필자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에게 충성함’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1장 5절에 등장하는 ‘믿음의 순종’이라는 표현만 보아도 그렇다. 여기에서 ‘믿음의 순종’은 ‘믿음, 곧 순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한편,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잇는 뒷 문단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의로움을 연결하면서 죽고 사는 것에 대해 논하므로 피스티스를 그리스도의 신실한 죽음으로 보는 것도 일리가 있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그 믿음이 오기 전”(πρὸ τοῦ δὲ ἐλθεῖν τὴν πίστιν)이라는 표현을 써서 ‘예수=피스티스’라는 등식을 제시한다. 이러한 면을 고려하면 ‘예수의 피스티스’는 동일어의 반복으로, 즉 피스티스를 통해 드러난 예수 자신의 정체성(신뢰할 만한 분)과 사역(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의롭다고 여겨지는지 바울의 본문을 통해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이는 경험적으로도 확인된다. 어떤 이는 복음 집회에서 스스로 결단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믿어져서’ 신자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기독교인이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우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믿어서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인해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14 2장 16절에서 바울이 반복해서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이 없음을 명석판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등장한 여러 신조와 고백이 있고, 이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성서의 권위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과 ‘믿음’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칭의와 별 상관이 없다. 이는 특정한 신앙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고백이자 울타리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만이 중요하다.
피스티스에 대해 소개하고 싶은 해석이 하나 더 있다. 최근 옥스포드대 서양고전학과 교수인 모건(Teresa Morgan)이 설득력 있게 논증했듯이,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인에게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피스티스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보이는 신뢰,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신실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중간자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중재자가 되시어 그리스도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 사이에 신뢰와 신실함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그 신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매개된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신실한 분이자 하나님의 신뢰를 얻기 충분하신 분이며, 인류가 신뢰할 만한 분으로서 ‘신뢰하는 자들(믿는 이들)을 의로움으로 이끄시는 분’”인 것이다.15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한다고 어떻게 과거의 십자가 사건이 시간을 초월해서 나에게 구원이라는 효과를 가져다주는지도 논의의 대상이다.16 이에 대해 필자를 포함한 어떤 학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이 명확히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위에서 ‘의롭다고 여겨지다’로 번역한 동사 ‘δικαιοῦται’를 학자들이 어떻게 연구했는지 살펴보자.17 칭의는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 알트하우스의 루터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믿음(신앙)을 주심으로써” 인간을 의롭게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믿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된다는 논리이다.18
이 같은 고전적 칭의론에 대해 현대 신약학자들은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기본적으로 헬라어 동사 ‘δικαιοῦσθαι’(‘δικαιόω’의 현재 시제 수동태 부정사)는 바르고 적절한 관계에 있다고 인정되거나(recognized) 선언되다(declared)라는 의미를 지닌다.19 다시 말해 법정적이고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동사이다. 일부 학자들은 ‘바로잡히다’(rectified) 혹은 ‘의롭게 만들다’(being made righteous)라고 해석하지만 이는 해당 동사의 일반적 용례에서 벗어난다. 이 단어는 ‘의롭다고 간주됨(혹은 여겨짐)’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앞으로 다시 살펴볼 기회가 있을 텐데, 칭의, 성화, 구원, 구속, 화해 등은 그리스도-사건(the Christ-event)이 가져온 효과에 대한 다양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다.20 바울은 의로움, 성화, 구원 등에 대해 말할 때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를 섞어서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여정(ordo salutis)처럼 명확한 단계로 그의 역동적인 사고를 도식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의의 전가’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요 개념은 사실상 바울서신에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 신약학자들이 제시한 주요 해석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의로움(칭의)은 구원/생명의 전제이자 조건이다.(Rudolf Bultmann)21
- δικαιοῦσθαι는 선언적 의미가 있으며(‘의롭다고 선포되다’), 동시에 무죄 방면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Douglas Moo)22
- ‘의롭다’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이미) 변화를 받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알아보시고(recognize)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는 의미, 즉 구원을 받기에 적합한 상태이다.(John M. G. Barclay)23
- ‘바로잡아졌음’(rectified)으로 번역하는 게 좋다.(J. Louis Martyn)24
- 칭의는 믿음이라는 명찰을 단, 새롭게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룹에 속함을 의미한다.(N. T. Wright)25
- 동사 ‘δικαιόω’는 ‘의롭게 만들다’와 ‘의롭다고 여기다’는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의’는 좀 더 관계적 개념에 가깝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자기가 속해 있는 관계에 의해서 그 개인에게 부과된 의무들의 충족으로서의 ‘의’를 말한다.(James D. G. Dunn)26


필자가 보기에,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확정하려고 지나치게 노력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바르다고 여기시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문제 없음’ 정도로 유연하게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2장 17–18절
이 두 절은 조건문이다. 여기에서 조건문은 잘못된 전제를 받아들였을 때 얼마나 이상한 결론이 도출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아마도 2장 16절의 핵심 주장을 오독할지도 모를 갈라디아 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롭다 여겨짐을 받으려 하면서 율법의 행위들을 등한시하면 유대인이 보기에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개종 전) 이방인 죄인’과 같은 모습이 되고, 유대인의 눈에 결국 그리스도는 인간을 죄인이 되게 만드는 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바울은 이러한 논리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폭로하고 있다.

2장 19–20절
매우 감동적인 고백이 담겨 있는 문단이지만, 그 뜻을 풀이하기가 만만치 않다. 우선 19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살기 위해 율법을 통해 율법에 관한 한 죽었다는 표현은 유대인의 입에서 도무지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율법은 사실상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바울은 여기에서 그 둘을 억지로 떼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대담한 주장을 하는 근거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다. 필자는 이 문장을 명쾌히 해석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가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말한다. 신비 체험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20절도 마찬가지로 난해하다. 바울 자신이 사는 삶은 사실상 그리스도가 바울 안에서 삶을 영위하고 계신 것이라고 말한다. 무슨 말일까? 아마도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채로 살아가는 삶을 좀 더 풀어 말한 것 같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1장 앞부분에서 그리스도-사건을 묘사한 것과 대동소이하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는 그러한 분에 신뢰를 두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바울 ‘안에’ 그리스도를 계시하셨고, 신자들은 그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기 때문에(4장 19절: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될 때까지 다시 내가 해산의 고통을…”),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실제로 연합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 Participation in Christ)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 또한 답하기 쉽지 않고 긴 설명이 필요하다. 여러 답안 중에서 헤이스(Richard Hays)와 스토워스(Stanley Stowers)의 글이 가장 흥미롭고 정보량이 많으므로 그들의 주장을 읽어보기를 추천하는 것으로 갈음한다.27

2장 21절
여기에서 바울은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이전 호에서 말했듯이 고대의 은혜 개념은 현대와 달라서,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선물과 은혜를 베푸는 것이 좋은 선물 주기였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든 모든 가치(‘율법의 행위들’도 포함해서)를 무시하고 오직 피스티스에 근거해 의롭게 여기신다고 16절에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지 않는다고 굳이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갈라디아인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한 사람들과 그들을 따른 일부 갈라디아인들이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고 있다고 에둘러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흑백논리에 근거한 단언(assertion)으로 끝을 맺는다. 의로움이 율법을 통해 오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기 때문에, 의로움이 율법과 관련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 구절만 보면 샌더스의 다음과 같은 설명–놀랍게도 수많은 오해를 자아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이 설명에 대한 불만족에서 시작되었다–이 핵심에 닿는 것 같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음’이라는 단 하나의 수단으로 인류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에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유대교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바울의 눈에 보인 유대교의 유일한 흠결은 그 안에 예수가 없다는 것이다.28 자세한 논리 전개가 생략되어 있어서 현대인의 귀에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지만 바울은 빈번하게 이와 비슷한 흑백논리를 전개하곤 했다.
단호한 흑백논리 또한 회색지대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함으로써 갈라디아인을 설득하고 압박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모 아니면 도’ 식의 극단적 대조는 갈라디아서 전반에 걸쳐 두루 등장한다.(자유와 노예, 영과 육) 바울 복음을 따르든지, 아니면 저주를 받든지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는 말이다. 바울의 진단에 따르면 잘못된 복음을 따른 갈라디아인은 지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ἀνόητος) 3장 1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의 어리석은 지성은 사실 고대 저주 중의 하나인 ‘악한 눈’(evil-eye)의 영향을 받아 홀린 결과(bewitched, βασκαίνω)라고 말한다.
이에 더해서 복잡한 논증 후반부에 바울은 “누구든지 율법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었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5:4)라고 말한다. 칭의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복음이 가져다준 효과이자 혜택이라면, 율법을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이러한 혜택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교리의 더께를 벗겨내고 갈라디아서를 세밀하게 읽어야 바울의 주장이 신자에게 얼마나 큰 경각심을 주는지, 그리고 얼마나 위엄 있고 무거운지 깨달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다. 바울은 왜 ‘율법의 행위들’을 저토록 신랄하게 비판했을까?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일까? 갈라디아서 3-5장을 해석하면서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 한다.


1 이 측면은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에게 관찰되었다. 대표적으로 J. Louis Martyn, Galatian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Anchor Bible 33A; New York: Doubleday, 1997), 230. “almost imperceptible transition.”
2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London: SCM, 1977).
3 E. P. Sanders, 위의 책, 75, 420.
4 바흐만(Michael Bachmann)의 해석이다. “Was für Praktiken? Zur jüngsten Diskussion um die ἔργα νόμου”, New Testament Studies 55(2009): 35-54; Anti-Judaism in Galatians? Exegetical Studies on a Polemical Letter and on Paul’s Theology, trans., R. L. Brawley(Grand Rapids, Eerdmans, 2009); “Keil oder Mikroskop? Zur jüngeren Diskussion um den Ausdruck erga nomou”, in Lutherische und Neue Paulusperspektive Beiträge zu einem Schlüsselproblem der gegenwärtigen exegetischen Diskussion, ed., Michael Bachmann(WUNT 182; Tübingen: Mohr Siebeck, 2005), 69-134.
5 나노스(Mark D. Nanos)는 이러한 입장을 개진하는 대표적 학자이다. 매우 많은 소논문과 책을 써서 여기에 서지목록을 옮길 수 없다. 그의 홈페이지에 중요한 글이 올라가 있다.(https://marknanos.com)
6 Klaus Haacker, Der Brief des Paulus an die Römer(ThHK 6; Leipzig: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99), 83-84.
7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2007).
8 현대 철학자의 바울 전유는 필자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더 깊게 논할 능력이 없다. 다음의 책을 참고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성민, 『바울과 현대철학: 바울은 동시대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새물결플러스, 2018).
9 John M. G. Barclay, Paul and the Gift(Grand Rapids: Eerdmanns, 2015).
10 BDAG와 LSJ lexicon에서 πίστις 항목을 찾아보라.
11 피스티스의 인지적 측면을 강조하는 대표적 학자로는 볼터(Michael Wolter)를 들 수 있다. Michael Wolter, Paulus: Ein Grundriss seiner Theologie(Neukirchen-Vluyn: Neukirchener, 2011), 72-96. 그의 표현을 참고하라. “Der Glaube als Wirk-lichkeitsgewissheit.”
12 자세한 논의는 리처드 B. 헤이스, 최현만 옮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갈라디아서 3:1-4:11의 내러티브 하부구조』(에클레시아북스, 2013) 부록에 실린 제임스 던과 리차드 헤이스의 논쟁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13 톰 라이트, 장용량・최현만 옮김, 『로마서』(에클레시아북스, 2014), 132에 의하면, 믿음이란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자기-내려놓음,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결과로 참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참 인간으로 재창조되는 참-인간됨.” John M. G. Barclay, 위의 책, 380: “What Paul is discussing in 2:16 are not complete soteriological systems, but the evidential basis on which God can consider someone “righteous” (or worthy) in his sight. “Christ-faith” (or “faith in Christ) is the sign of a prior, transformative event: it is the mode of life generated by the self-gift of Christ.”
14 이 표현은 톰 라이트가 누군가에게 들었다며 그의 책에 쓴 것인데, 안타깝게도 출처를 찾을 수 없다.
15 Teresa Morgan, Roman Faith and Christian Faith: Pistis and Fides in the Early Roman Empire and Early Churches(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16 이 질문은 볼터(Michael Wolter)도 제기했다. M. Wolter, 위의 책, 110.
17 칭의의 의미를 다룬 이 부분은 필자가 「묵상과 설교」(성서유니온)에 기고한 글 “바울의 칭의론 15분 안에 톺아보기”에서 발췌했다. 허락해주신 박대영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18 파울 알트하우스, 이형기 옮김, 『루터의 신학』(크리스천다이제스트, 1994), 255 참조. “루터는 ‘의롭게 하다’(justificare)와 ‘칭의’(justificatio)라는 용어를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사용한다.” LW 26: 129-130 참고.
19 John M. G. Barclay, 위의 책, 375.
20 조셉 A. 피츠마이어, 김병모 옮김, 『앵커바이블 로마서』(CLC, 2015), 184-191.
21 Rudolf Bultmann, 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New York: Scribner’s Son, 1951), 1:270. 불트만은 때로 칭의를 구원의 정수로 간주한다.(1:271)
22 Douglas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NICNT; Grand Rapids: Eerdmanns, 1996), 227.
23 John M. G. Barclay, 위의 책, 376.
24 J. Louis Martyn, Galatian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Anchor Bible 33A; New York: Doubleday, 1997).
25 톰 라이트, 최현만 옮김,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개정판(에클레시아북스, 2016), 188.
26 제임스 던, 박문재 옮김, 『바울신학』(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3), 474, 478.
27 Stanley K. Stowers, “What Is Pauline Participation in Christ,” in Redefining First Century Jewish and Christian Identities: Essays in Honor of Ed Parish Sanders, eds., Fabian E. Udoh et al.(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08), 352-371; Richard B. Hays, “What Is ‘Real Participation in Christ’? A Dialogue with E. P. Sanders on Pauline Soteriology”, 위의 책, 336-351.
28 E. P. Sanders, 위의 책, 552.



김선용 |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서 성서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신약 정경과 외경, 초대교회사를 공부했고, 초기 기독교 문헌을 그리스-로마 시대의 철학, 수사학, 종교적 배경에서 연구하고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2020년 3월호(통권 7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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