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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교리의 더께를 걷어낸 갈라디아서 읽기
성서와설교 (2020년 1월호)

 

  갈라디아서 2장(1): 회상으로 권면하기
  

본문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갈라디아서 1장 후반부(1:15-23)는 2장 1-10절과 묶어 한 단락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로부터 자신의 독립된 지위와 더불어, 예루살렘 사도가 자신의 복음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는 자신이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법률 용어인 ‘실체적 진실’을 말하자면,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다. 많은 갈라디아인들도 바울이 예수의 제자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할례의 복음’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인 이유를 명확히 밝히기는 불가능하지만, 아마도 예루살렘 사도, 특히 야고보가 ‘할례의 복음’에 우호적 입장을 취한 것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이것이 바울과 베드로가 충돌한, 소위 안디옥 사건의 원인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아래에서 자세히 논하겠다.
바울은 자신의 자리가 종속적인 것을 부인하지 않되, 동시에 자신의 복음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왔음을 여러 번 강조하면서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권위 및 독립성을 주장한다. 한편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런데 그가 남긴 것은 일방형 소통인 편지뿐이다.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가 처한 상황, 그가 다루려는 문제, 청중의 상황, 1세기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모두 고려해야 그가 말하려는 내용을 간신히 어림잡을 수 있다. 그가 말한 특정 내용을 문맥에서 분리해 교리화하거나 윤리적 지침으로 손쉽게 변환하는 작업은 늘 위험이 따른다. 성서학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갈라디아서 2장의 거의 모든 구절은 논쟁의 대상이기 때문에 많은 지면이 필요한 만큼, 2장은 두 번에 걸쳐 다루기로 한다.

2:1–5
1장 18절과 21절, 그리고 2장 1절은 ‘그 후’(ἔπειτα)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바울은 세 가지 사건의 흐름을 연대적으로 간명하게 서술한다. 당대 수사학자들이 추천하던 방식 그대로이다. 2장 1절의 ‘그 후’1가 1장 18절의 사건이 일어난 뒤의 어떤 시점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바울의 회심 사건 이후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의 논점을 파악하기 위해 굳이 정확한 시간대를 알 필요는 없다.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 방문을 여기에서 회상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휠씬 중요하다.
바울은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계시를 따라’(2절) 예루살렘에 갔다. 예루살렘의 사도 무리가 불러서 간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방문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1장 1절이 떠오르지 않는가? 독립성,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점이다.
바울은 왜 예루살렘 방문기를 이 편지에 썼을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가 전하는 복음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천명하기 위해서이다. 2절에서 바울은 ‘유력한 지도자’ 그룹을 사적으로 만나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을 제시했다고 밝힌다. 이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해온 사역이 헛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사실상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둘째, 예루살렘 방문 시 이방인 신자의 할례 문제가 불거졌는데, 그때 바울 자신이 압력에 굴하지 않고 이방인 신자는 할례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이때 그가 취한 입장은 갈라디아 교인이 취해야 할 모범이다. 자기를 본받으라는 암묵적 권고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를 나열해본다. 바울이 회상을 편지에 적은 이유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다.

강요하다2, 자유, 종으로 삼다, 복음의 진리

이 모든 단어를 하나로 묶는 끈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공동체 내 지위 문제이다. 학자들은 이 문제의 본질을 유대인의 배타성, 유대 민족 중심주의라고 진단한다. 일부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은 이방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더라도 유대적 삶의 방식을 따르며 살아가야 온전한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갈라디아서에서 다루는 핵심 논증은 바울이 여기에서 간략히 서술하는 사건에 이미 들어 있다. 이방인의 사도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유대인 정체성의 핵심인 할례를 이방인 신자가 받아야 하는지 논쟁이 불거졌고, 바울은 받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위에 나열한 단어 중에 먼저 ‘강요함’(ἀναγκάζειν)을 살펴보자. 종종 독자가 놓치는 점인데, 이방인 신자의 할례 문제를 다룰 때 바울은 유독 ‘강요함’에 격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갈라디아서보다 나중에 집필된 로마서만 보더라도 바울의 기본 주장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방인 신자의 할례는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행위를 맹렬히 비난한다. 강요 없이 그냥 권유하는 것은 별 문제 없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말이다. 2장 3절을 보자. “하지만 나와 함께 있던 디도는 헬라인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다.” 바울은 왜 강요를 문제삼은 것일까? 다음 절을 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장 4절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던 거짓 형제들을 비난한다. 그들이 ‘우리’가 소유한 자유를 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그들의 강압적 행동에 굴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진술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우선 종이라는 단어가 위계 질서를 함의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거짓 형제들의 행동이 설사 그들 자신의 입장에서 선한 행동이었을지라도(고의로 악행을 일삼는 ‘형제’를 예루살렘 공동체가 용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행동은 유대인 신자가 이방인 신자보다 우월함을 전제한다. 이방인 신자가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에 도전하면서, 유대적 삶의 방식을 채택하느냐 마느냐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고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같은 지위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아니, 이 점은 바울에게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와 동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같은 신분이므로 서로 강압할 권리가 없고, 모두 자유하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가 지닌 내용이다.
‘복음의 진리’(ἀλήθεια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와 ‘자유’(ἐλευθερία)라는 단어는 그와 연관된 주제와 함께 본문에서 반복해서 나온다. 이신칭의 논의는 바로 이 배경에서 등장한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믿음 외에는 어떠한 인간적 가치와 규율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같다. 할례로 대표되는 유대적 삶의 방식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종말론적 칭의와 구원에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흔히 구원론의 정수라는 이신칭의 교리는 교회론이기도 하다.3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는 교회 안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는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점을 세세히 설명하는 것은 다음 호로 미룬다. ‘복음의 진리’라는 단어는 안디옥 사건을 회상할 때 또 등장하므로 기억해두시라!

2:6–10
2장 2절을 보면 바울 자신이 예루살렘의 주요 사도들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있음을 시인하는 것 같다. 그러나 1장 해설에서 말한 것처럼 2장 6절부터는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이 애초에 예루살렘 사도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성격인 것처럼 말한다. 더 나아가 사도로서의 자기 임무가 베드로의 직분 및 권위와 다를 바 없다고 대담하게 선언한다. 베드로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대표 사도인 것과 같이, 바울 자신은 이방인 전도에서 베드로와 맞먹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는 제3자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 아니라, 1인칭 시점으로 표현된 바울의 회상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바울은 자신의 의도에 맞게 예루살렘 회상기를 기술(혹은 구술)한다. 사실 그는 이 방문 이야기를 통해 갈라디아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중이다.

베드로 안에서 (그를) 할례의 사도직으로 움직여 이끄신 분이 또한 내 안에서 (나를) 이방인에게 향하도록 움직여 이끄셨다.(2:8)

정교하게 균형을 맞춘 위 문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베드로와 바울은 동급의 사도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바울 자신의 복음이 지닌 권위를 재천명하는 기능을 한다. 갈라디아 신자들은 이방인이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베드로만큼 대표 자격을 지니고 있으니, 갈라디아 신자들이 바울 자신의 복음에 천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넌지시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2장 2절의 진술과는 달리 2장 9절에서 자신과 예루살렘 사도 그룹과의 완전한 의견일치와 상호인정을 말한다.(“친교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 모든 옛이야기는 한곳을 가리킨다. 바울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며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동일하다. 이중으로 인증받은 셈이다. 그래서 유일한 복음이고 유일한 권위를 지닌다. 누구라도 이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이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이 아래에서 바울이 이어서 하고 싶은 말이다.

2:11–14
바울은 옛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훈훈한 분위기가 급변한다. 바울은 소위 ‘안디옥 사건’을 회상한다. 그에게 친교의 오른손을 내밀었던 게바의 면전에서 바울은 그를 꾸중하며 맞섰다. 이야기를 진술하는 톤이 갑자기 변하니 안디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청자4의 주의가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바울은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2장 14절에 ‘복음의 진리’라는 표현이 다시 나오고,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단어들도 또 나온다. 이로 미루어보면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친교와 일치에 배치되는 행동을 게바가 안디옥에서 했다고 바울이 넌지시 말하고 있다.5 게바가 예루살렘 측에서 온 무리(‘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를 두려워하며 이방인 신자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게바의 행동은 바울의 눈으로 볼 때 이방인 신자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한 것이다. (2:14) 다시 말하지만 바울의 회상은 중립적 진술이 아니다. 그의 안디옥 사건 회상에 따르면 게바는 겁쟁이(2:12)에 위선자이며(2:13) 복음의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다(2:14). 안 좋은 예의 극(極)이다. 게바의 예를 따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더한 말도 한다. 이방인 신자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한 결과로 게바는 이미 정죄받았다!(2:11) 여기에서 ‘정죄받았다’로 표현된 단어(κατεγνωσμένος)는 정확히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인데, ‘이미 유죄 판결 받았다’ 혹은 ‘경멸받았다’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다.6 이 수동태 문장에서 숨겨진 주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게바를 정죄하셨다는 뜻이다.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예수의 수제자로 유명한 게바마저도 복음의 진리를 따라 걷지 않으면 하나님께 즉시 정죄받는데, 하물며 이방인 신자들이야 말해 무엇하랴는 메시지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청중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설득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안디옥 사건을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들려주면서 복음의 진리, 즉 할례를 강요받지 않는 이방인 신자의 자유(2:3-5)를 재진술하고 있다. 유대인 신자가 이방인 신자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물러날 이유는 없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안디옥 사건 회상은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안디옥 사건은 갈라디아 신자들을 설득하는 기능을 한다.
안디옥 사건에서 읽어낼 수 있는 ‘복음의 진리’라는 표현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이방인 예수따르미(Jesus-follower)가 굳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유대인 예수따르미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주님 앞에서 (제의적으로) 정결하고 의로운 백성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faith in Christ) 혹은 ‘그리스도의 신실함’(faithfulness of Christ)에 달려 있다.(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여겨지는지, 아니면 예수께서 보이신 신실함으로 인해 우리가 의롭게 되는지 그리스어 문장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것이 유명한 ‘피스티스 크리스투 논쟁’이다. 이는 다음 호에 논하겠다.)
같은 믿음 아래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없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이다. 복음의 진리는 마음에 믿음이라는 형태로 간직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걸어야 한다.(2:14)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거짓 형제들에 맞서며 복음의 진리를 지켰고, 안디옥에서 게바에 맞서 예수 숭배자는 복음의 진리에 자신을 정향(定向)하여 바르게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바르게 걷는다는 말은 살아내고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어로는 ‘오르토포데오’(ὀρθοποδέω)이다. 보통 ‘정통주의’로 번역되는 ‘orthodoxy’라는 단어는 직역하면 ‘바른 견해’이다. 바른 견해는 바른 걸음과 분리될 수 없다. 복음의 진리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증이 들어 있는 5장 6-7절의 내용을 예기(豫期)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도 힘이 없고 무할례도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믿음이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잘 달리고 있었는데, 누가 여러분이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했습니까?(5:6-7)

믿음은 사랑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며, (복음의) 진리는 순종의 대상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나머지 부분에서 바울이 공들여 논증하고 강조하는 명제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신다. 믿음 외에 그 어떤 것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으신다. 따라서 출신에 관계없이 모든 예수따르미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신분을 가진다. 우리의 믿음은 바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념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은 순종을 요구한다.


1 개역개정판에는 이 단어의 번역이 생략되어 있다.
2 개역개정판에는 ‘억지로’라고 번역되었다.
3 이 관찰은 다음의 연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Krister Stendahl,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 Harvard Theological Review(1963): 199-215. 이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해 더 정밀하게 논증되었다.
4 당시 문맹률이 매우 높았으므로 바울의 편지는 회중 앞에서 (여러 번) 낭독되었을 것이다. 편지의 독자보다는 청자가 많았을 것이다.
5 참고. Philip F. Esler, “Making and Breaking an Agreement Mediterranean Style: a New Reading of Galatians 2:1-14”, Biblical Interpretation(1995): 285-314.
6 BDAG, s.v. “καταγινώσκω”.



김선용 |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서 성서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신약 정경과 외경, 초대교회사를 공부했고, 초기 기독교 문헌을 그리스-로마 시대의 철학, 수사학, 종교적 배경에서 연구하고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2019년 1월호(통권 7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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