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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교리의 더께를 걷어낸 갈라디아서 읽기
성서와설교 (2019년 12월호)

 

  갈라디아서 1장: 바울 복음의 권위와 유일성
  

본문

 

연재를 시작하며
현존하는 기독교 문헌 중에 그 유명한 이신칭의(以信稱義) 가르침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갈라디아서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갈라디아서는 매우 중요한 문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신학의 요체는 뜨거운 감정으로 가득찬 논쟁투 문장 중에 등장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기독교 서점 책장에는 갈라디아서를 다룬 설교, 강해, 주석, 성경공부 교재가 빼곡히 꽂혀 있다. 이 중 많은 책이 칭의 교리 해설이나 구원론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교리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칭의 교리 외에도 갈라디아서에 담긴 심오하고 다채로우며 풍성한 내용이 그에 걸맞는 관심과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아쉽다. 이 연재는 이러한 ‘빈 곳’을 채우려는 노력이며, 갈라디아서를 보다 세밀하게 읽고 충실하게 이해하려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집필을 이어갈 것이다.
많은 학자가 제 나름의 갈라디아서 해석을 내놓았으나, 많은 지점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편지의 전모를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갈라디아서 본문 한 구절 한 구절을 모두 다루는 주석의 형태를 피하고, 중요하지 않은 이슈는 과감히 건너뛰면서 현대 독자에게 의미가 있는 지점에 집중할 것이다. 독자들이 갈라디아서의 기본 내용을 충실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포함하여 일곱 편의 글이 연재될 것이다. 현대 신약학의 연구 성과를 최대한 반영하되, 가능한 한 그것을 단순한 문장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修辭)적 기술에 주목하여, 특히 청중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방식과 이 설득 기술을 사용하는 이유에 주안점을 둔다.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은 매우 강한 설득의 기술이라는 점에 대해 고대의 수사학자들 사이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반드시 성서를 옆에 두고 이 글을 읽으시기 바란다.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같이 익숙한 번역본이 아닌 낯선 번역본을 추천한다. 눈에 익숙한 탓에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연재에서 사용되는 성서 구절은 모두 헬라어 원전을 바탕으로 한 필자의 사역(私譯)임을 일러둔다.
우리가 앞으로 주의를 기울일 주제를 나열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겠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방식으로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비로소 치밀하고 자세한 읽기가 가능할 것이다.

- 바울은 왜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는가?
- 바울이 이방인 남성 신자의 할례와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과 할례를 받으면 절대 안 된다는 주장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 이신칭의 가르침이 어떤 상황과 문맥에서 등장하는가?
- 의롭게 됨(혹은 의롭다고 여겨짐), 믿음, 율법의 행위들 등 갈라디아서의 키워드는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 믿음과 행함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갈라디아서 1장 개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다른 편지와 비교할 때 몇 개의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 갈라디아서를 제외한 다른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당시의 편지 쓰기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시 편지들은 편지 저자와 수신자에 대한 정보(예: 갑순이가 갑동이에게)에 뒤이어 감사의 표현이나 건강 기원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도입부에서 바울은 이러한 관행을 상당히 벗어났다. 감사 표현 대신 저주를 써 넣은 것이다.(1:8-9) 갈라디아서가 회중 앞에서 처음 낭독될 때 갈라디아 회중은 자기들의 관습적 기대에 정면으로 반하는 이 대목에서 무척 놀랐을 것이다. 이는 정확히 바울이 의도한 바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갈라디아서는 전복적 의미가 곳곳에 박힌 구약 해석, 독특한 은혜 이해, 복음 설명, 일반적이지 않은 율법 이해, 새로운 기반 위에 쌓은 윤리적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중심에 청자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의 편에 서게 하려는 바울의 계산된 수사법–수사법은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수사학에서 도출된 기술이다–이 있다. 편지 도입부에 저주 문구가 나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1장을 채우는 주제는 바울 사도직의 신적 기원과 권위, 회심 전과 후 바울 삶의 극적 변화,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들과 미묘한 관계이다. 이러한 굵은 씨줄에, 본론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은혜의 본질, 복음의 규범성(복음은 순종의 대상), 율법 이해, 갈라디아 교인이 처한 상황 진단이 희미한 날줄의 형태로 엮여 있다.

1:1–5
편지의 첫 문장에는 유난히 ‘~이 아니라’(not)라는 부정적 표현이 많이 나온다.

사람들에게서도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도 아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사도가 된 바울(1:1)

이례적이다. 강조점은 명확해진다. 바울은 편지의 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주제와 단어를 서두에서 언뜻언뜻 비친다. 편지의 첫 구절부터 바울의 복음, 그가 가진 사도직의 권위와 원천이 편지를 작성하게 된 주요 이슈임을 엿볼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임명된 것이며, 그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라고 강조한다.(1:7-9, 11 참고) 이 주제는 1장을 지배한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 주제에 집중하고 있을까? 바울의 사도권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문제시되어 이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의 사도권을 옹호하고 있다는 해석이 통상적인 대답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측면이 있다. 바울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바울의 복음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는 말이 된다. 즉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1장 4절에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이 갖춘 형식과 돌아가신 목적을 독특하게 표현한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표현이어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독특한 표현의 의미를 놓치기 쉽다. 찬찬히 짚어가며 읽어보자. 바울은 먼저 예수께서 우리의 죄들(복수형)을 위해 ‘그 자신을 주셨다.’고 말한다. 단순히 ‘죽었다’는 동사 대신 이 표현을 쓴 이유가 있을까? 또 바울은 예수가 죽은 목적을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집어 올려 내시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것–앞으로 ‘그리스도-사건’(the Christ-event)이라고 명명하겠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해진 일이라고 천명한다. 바울의 진술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죄들을 위해 자신을 ‘주신’ 행위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표현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거의 동일한 의미의 분사(‘넘겨주심’)로 다시 등장하는데, 이 특별한 표현을 쓴 이유는 바로 이어지는 구절인 21절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사건’이 지닌 선물(gift)의 측면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넘겨)주신 행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하나님의 선물이고, 따라서 무효화될 수 없으며 무효화해서도 안 된다. 이 신학적 사실과 당위성으로부터 바울은 의로움이 율법을 통해 올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선물)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만약 의로움이 율법을 통해서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2:21)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자기-주심과 은혜의 관계, 그리고 은혜와 칭의의 관계를 스케치 정도로 남겨둔다. 이 관계들은 편지 본론에서 자세하고 복잡한 논증을 통해 규명된다.
‘현재의 악한 세대로부터 집어내시기 위해’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현 시대의 악한 손아귀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다시 말해 우리가 악한 시대와 분리된 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부터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를 기반으로 신학(구원론)과 윤리(현재의 악한 세대를 거슬러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하나로 엮는다. 그러므로 5-6장에서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논하는 것은 결코 이 신학적 편지의 부록이 아니다. 믿음은 삶으로, 특히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5:6)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사건’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뜻이다.(1:4)

1:6–10
이 단락에서는 바울 복음이 지닌 유일성이 강조된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르는 상황에 대해 바울은 ‘은혜를 통해 부르신 분(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을 빠르게 버리고 떠난 행동이라고 진단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미 이 구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과 자신의 결정적 차이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자기가 선포한 복음과 다른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했다가, 즉시 혹여 있을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듯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인간에게서 연원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복음’(1:7)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을 휘저어놓은 이들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켰다.’
이렇듯 ‘변질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들의 설득에 많은 갈라디아 신자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분명하다. 이미 설득당한 갈라디아인들을 돌이키는 일은 바울에게 쉽지 않은 과제였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갈라디아 신자들 중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이 구약을 기반으로, 그리고 그 외의 합리적 논증에 기대어 갈라디아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한들 그들과 함께 있는 ‘변질된 복음’의 전도자들은 그 자리에서 바울의 주장을 하나하나 논박할 수 있었다. 설득은 명백한 사실 적시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감정, 권위, 세간의 인정, 청자와의 관계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갈라디아 회중과 가까이에서 직접 소통하던 ‘복음을 변질시킨 자들’은 확실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바울이 선택한 설득 방법은 감정에 호소하는 수사학, 보다 정확히는 청중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논법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유일한 복음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음을 천명한다. 고대인들은 성스러운 법(sacred law)에서부터, 성스러운 문서, 그리고 무덤까지 전적으로 보호되고 보전되어야 할 것들에 저주를 걸어 타인이 침해할 수 없게 해 놓았다. 대부분의 고대인이 이런 저주가 실제로 작용한다고 믿었다. 이와 유사하게 절대 침해될 수 없는 바울 복음의 규범성(normativity)은 바울이 선언한 저주를 통해 보전된다. 바울 자신이나 천사를 포함한 그 누구라도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1:8-9) 갈라디아서는 편지이고 그 안에 이중으로 저주 문구가 적혀 있기 때문에(고대인은 글로 적혀 있는 것 자체가 큰 힘을 지닌다고 믿었다) 이를 읽는 자 중에 혹 바울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바울 복음에 걸맞지 않게 사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된다.
저주는 두 차례나 선포된다. 이는 그저 말뿐인 위협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5장 4절 등에서 이미 이러한 조건부 저주가 자동으로 실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저주와 5장 4절을 잇는 구절은 3장 10절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5장 4절과 3장 10절은 형식도 비슷하다. 복음이 은혜를 통해 가져다준 복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고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이 곧 저주이다.(성서를 열어 이 구절들을 꼭 읽으시길!)

1:11–24
11절과 12절 역시 바울의 복음이 지닌 신적 기원을 강조하였다. 이어 13절과 14절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말하고 있다. 특히 자신이 유다이즘1 안에서 조상들의 전통과 가르침에 깊이 헌신했음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과거는 15절에서 그리스도의 만남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모든 유대적 가치를 폄하시킨다. 이 주제 또한 갈라디아서의 주요 대목, 특히 율법의 가치에 대한 논증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특히 교회를 파괴하고 핍박하던 시절을 회상한 뒤에 곧바로 하나님의 의지로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사건’이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도, 아니 극도의 부정적 가치를 지닌 사람에게조차 주어진다는 은혜의 비상응성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살던 세상에서는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다. 현대인의 상식이나 통념과는 반대로 선물을 제대로 주기 위해서는 선물 받을 사람을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 좋은 선물이었고, 선물을 받은 사람은 유무형의 어떤 것으로 이를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당대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주신 것은 충격적이며 사회적 가치 체계를 거스르는 행동이었다.2
다메섹 회심 사건은 사도행전에 세 번이나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바울 자신이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갈라디아서 1장 15-16절이 유일하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가 바울 ‘안에 계시되었다.’ 그리스도가 바울 ‘안에’ 계시되었다는 주제는 2장에서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라는 유명한 고백으로 재현되고, 이후 갈라디아 교인들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재형성되기를 바란다는 바울의 소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4:19)
그런데 왜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것일까? ‘계시에 의해서’라는 표현이 이 단락에서 두 번이나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여전히 그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부터 이후의 사역까지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배운 적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예레미야나 이사야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무와 그가 선포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직접, 바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하고 의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증하신, 이방인 신자들이 순종해야 할 절대적 권위를 지닌 메시지라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전혀 차이가 없음을 2장 10절까지 변론한다. 여기에서 바울의 전략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예루살렘 사도로부터 독립된 지위를 말하는 동시에 예루살렘 사도에게 자신의 복음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결국 1장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하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만이 유일하고 참된 것이고, 그의 복음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전혀 차이가 없으며,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벗어나면 누구든지 저주의 대상이 된다. 앞으로 계속 살펴보겠지만, 바로 이 점이 갈라디아서 이해에 결정적 도움을 준다.(비슷한 주제–율법과 칭의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로마서와 차이가 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복음은 단지 구원을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일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순종의 대상이다. 앞서 말했듯 신성한 물건이 손상되거나 침해되지 않도록 저주를 걸어 놓는 것은 고대 사회와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예수 따르미가 되기 전 이방인으로서 이방신들을 숭배한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바울의 이러한 메시지는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1 유대인의 신앙과 서로에 대한 헌신, 율법에 따른 생활, 그리고 애국심과 민족적 정체성을 ‘유대교’라는 하나의 종교를 의미하는 듯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적절한 우리말 대체어가 없어 ‘유다이즘’이라는 용어를 썼다.
2 이것이 존 바클레이가 쓴 『바울과 선물』의 주요 논지이다. J. M. G. Barclay, Paul and the Gift(Grand Rapids: Eerdmans, 2015).



김선용 |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서 성서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신약 정경과 외경, 초대교회사를 공부했고, 초기 기독교 문헌을 그리스-로마 시대의 철학, 수사학, 종교적 배경에서 연구하고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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