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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분단 상황에서 성서읽기
성서와설교 (2019년 12월호)

 

  형제 갈등 이야기
  

본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두 번째 아담’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은 죄로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이에 바울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단절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를 원죄에서의 해방 곧 구원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이다. 이 시각에서 보면 성서 전체가 하느님과 인간, 민족과 민족,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첫 번째 책 창세기에 나오는 두 형제의 갈등 이야기가 특히 유명하다. 4장의 가인과 아벨, 25장의 에서와 야곱 이야기가 그것이다.

가인과 아벨
농사꾼 가인은 수확의 열매를 제물로 드리고, 양치기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린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이에 질투가 일어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하느님은 가인에게 살인의 책임을 물어 그가 떠돌이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가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죽음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고, 이에 하느님은 그가 살해당하지 않도록 이마에 표식을 찍어주신다.
성서는 왜 하느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는지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흔히 아벨은 ‘처음’ 제물을 드렸지만, 가인은 성의 없는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어느 농사꾼이 신에게 드리는 제물을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준비할까? 어느 해석자는 7절의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공동번역)라는 구절에 의거하여 본래부터 가인은 행실이 좋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제물보다 드리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에서 보면 일면 타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창세기 1-11장이 원역사로 명명되는 이야기임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갈등 이야기를 보다 근원적으로, 인류문화사적인 의미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아담’( אדם )은 그의 육신을 이루는 ‘흙’이라는 히브리어 ‘아다마’( אדמה )와 어근이 동일하다.(창 2:7)
따라서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닌 인간 전체를 상징하는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또한 인간 집단 간의 갈등에 대한 신의 응답으로 보아야 한다.
가인은 농사꾼이었고, 아벨은 양치기였다. 여기서 농사는 정착 문명을 대변하고, 양치기는 유목 문명을 대변한다. 정착 문명은 땅에 금을 긋는 사유화의 과정을 기초로 하여 집단을 형성하고 성곽을 세우며 도시를 형성한다. 그리고 도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확장된다. 다시 말해 정착 문명은 전쟁을 통해 자신의 땅을 넓혀야 하는 제국의 생리를 필연적으로 가지는 것이다. 창세기 11장에서 인간들이 모여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는 이야기는 곧 (바벨론) 제국의 오만과 폭력성을 상징한다. 반면 유목민에게 땅의 사유화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물과 목초지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동이 용이하려면 소유가 적어야 하고 양 떼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소가족 단위가 된다. 정착민이 상대를 정복해야 하는 제국의 생리를 갖는 것과 달리, 유목민은 땅을 함께 소유하는 부족 공동체의 생리를 갖는다. 이 관점에서 야훼 하느님은 당연히 반제국, 친유목을 선택하신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 형제 갈등 이야기의 핵심이다.

에서와 야곱
쌍둥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 이야기도 여기에 맞물린다. 흔히 팥죽 한 그릇과 장자권을 맞바꾸는 어리석은 한 개인의 이야기로 치부하지만, 문화인류사적인 의미에서 접근하면 에서는 사냥꾼으로 군인을 상징하고(훗날 돌아온 야곱을 맞이할 때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야곱은 집안일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나중에 양치기가 된다. 성서에 ‘사냥꾼’이라는 말은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창세기 10장에는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은 것 때문에 저주를 받은 함의 자손들 명단이 등장하는데, 거기에 구스의 아들 니므롯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이다. 그는 야훼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사냥꾼이었다. 그가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 시날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이다.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가서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를 세우고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는 레센을 세웠는데 그것은 아주 큰 성이다.” 사냥꾼 니므롯은 정복 전쟁을 벌이면서 온갖 도시와 나라를 세우는데 이 나라와 도시들은 모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나라였다. 즉, 에서가 사냥꾼이라는 이야기에는 강자로서 약자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제국의 폭력성이 내포된 것이다. 여기서 장자(축복)권은 단순히 몇 분 늦게 태어난 것이 억울해서 동생이 형이 되었다는 순위권 쟁탈이 아닌, 군사(제국)침략 문명과 집안(공동체)나눔 문명의 대결 속에서 야훼 하느님은 전자(형 에서)가 아닌 후자(동생 야곱)를 축복하고 선택하셨다는 의미이다. 훗날 에서는 에돔 족의 조상이 되고 야곱은 이스라엘 족의 조상이 된다.
서구의 사상사는 크게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두 흐름이 있다. 동양 사상을 배제한 단순한 구별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일면 타당성도 많다. 학문적으로 이 둘은 그리스-로마 문명에 기초한 인간 본위의 다신성과 유대-기독교 문명에 기초한 신 본위의 유일신성으로 비교된다. 하지만 필자는 성서가 본래 말하고자 했던 도시(정착) 문명과 유목(이동) 문명의 관점에서 이 둘을 이해한다. 오늘날 세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도시화 일색이라 이러한 사상 논쟁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이는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역화(localization)로 대비할 수 있다. 세계화는 모든 것을 표준화, 획일화하려는 제국의 특성(가인, 에서)을, 지역화는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공동체적 특성(아벨, 야곱)을 갖고 있다. 전통적 권위가 무너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이러한 획일/차별/통제의 힘과 다양/평등/자유의 힘이 서로 충돌하는 세계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아브람은 우르 제국의 왕족으로 패망한 제국을 회복하려는 꿈을 갖고 살았지만 유목 지역인 가나안에 피신하여 유목민이 됨으로 평화공존 사상을 깨닫는다. 이때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불리게 되고 야훼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베푸신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자손 번성의 복은 세계인의 기독교인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침략성을 버리고 평화공존의 공동체인이 되는 것을 뜻한다.

손원일과 김일성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유격대 투쟁 과정에서 불린 이름이며, 그의 본명은 김성주이다. 남한에서는 가짜 김일성 이야기가 떠돌지만, 김성주와 김일성이 동일 인물이라는 점은 여러 가지 사실로 증명된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 열린 시민환영대회가 증거로 자주 언급되는데, 이때 등장한 김일성의 모습(34세)이 장군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젊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독립군이 활동하던 시절에 장군이라는 칭호는 정규군과는 달리 젊은 사람에게도 사용되었다. 특히 게릴라전을 펼치는 작은 단위의 유격대에서 장군이라는 칭호는 일종의 경칭어였으며, 백두산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펼쳐진 게릴라 전투에서 나이 든 사람이 활동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안중근 의사 또한, 수하에 군사를 거느리지 않았지만 재판에서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총장’ 곧 장군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만약 평양의 환영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이 소련이 내세운 가짜 인물이었다면, 그 환영식의 주최자이자 사회를 맡은 조만식 장로가 협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조만식은 평양 숭실학교 동창생으로 서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 호에서 언급하였듯이 손원태 장로(손정도 목사의 차남)의 회고록이 이를 분명하게 증언한다.1
이번 글의 초점은 오늘의 주제 곧 ‘형제 간의 갈등’에 부합하는 손정도 목사의 큰아들 손원일과 김일성의 갈등 관계이다. 김성주는 14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길림에서 목회를 하던 손정도 목사를 찾아간다. 이때 손 목사는 김성주를 ‘양아들’2로 삼아 학교를 다니는 3년 동안 그를 돌본다. 김성주가 17세에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도 손 목사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김성주를 석방시켰는데, 이때 같이 투옥된 다른 동지들은 나중에 일본군에 넘겨져 모두 죽음을 당했다. 이에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이 시기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손 목사를 ‘아버지이자 생명의 은인’이라는 극도의 존경을 담아 말한다.
그런데 훗날 6・25전쟁에서 손정도 목사의 큰아들 손원일은 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으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장으로 목숨을 걸고 대결했다. 손원일은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해 중앙청 탈환 등의 전적을 갖고 있으며 정전협정 당시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대사직과 한국반공연맹의 이사장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건립과 반공주의 사상 전파에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십 대로 돌아가면 세 살 위인 손원일과 김성주는 형제와 같았다.
훗날 손원일은 김성주와의 만남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3 김일성 또한 회고록에서 둘째 아들 손원태와 막내딸 인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만, 손원일과 다른 두 자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다.4 손원일의 동생 손원태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성주는 처음 얼마동안 교회 부속 기숙사에서 살았기에 손원일을 비롯한 다섯 형제와 한솥밥을 먹었다. 학교 근처로 거처를 옮겨간 이후에도 명절에는 함께 모였으며, 더욱이 같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한 신앙의 동지였다.5 남북분단과 6・25전쟁이 형제를 적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의 기독교 신앙 배경을 살펴보자. 기독교 선교 초기인 19세기 말은 가장(家長) 중심의 유교 문화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마치 사도행전의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 세례를 받을 때 온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세례를 받은 것처럼, 가장이 결정하면 모두가 따르던 시기였다. 김일성의 어머니 집안은 조선에서 기독교를 선구적으로 받아들인 가문 중 하나이자, 항일운동의 지도자 가문이었다.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창덕학교와 칠골교회를 세운 장로였고, 숭실학교를 다닌 6촌 동생 강량욱 목사는 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주역을 담당하며 국가부주석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외삼촌 강진석 또한 기독교 신자로 백산무사단 사건으로 15년을 복역했으며, 어머니 강반석은 그 이름이 의미하듯 돈독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6
강반석은 18세에 두 살 아래의 김형직과 결혼한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있지만, 당시는 대부분 교인들끼리 결혼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유교의 제사문화로 인해 심각한 갈등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혼사를 맺었기에 김성주의 할아버지 또한 기독교 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김형직은 결혼 후 1년이 지나 숭실학교에 입학하지만7 2년 후 중퇴한다. 강량욱 또한 숭실학교를 중퇴했는데, 학비 때문에 중퇴했다는 설이 있지만 당시 숭실학교는 선교사의 필요에 따라 기독교 지도자를 키우는 특수학교였기에 학비가 따로 없었다. 따라서 중퇴한 이유는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가르침 곧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교육에 대한 반발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중퇴 이후 강량욱과 김형직의 활동이 이를 증명한다. 이들은 둘 다 민족학교 선생으로 활동하였고, 김형직은 3・1독립항쟁 이전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국민회의 핵심으로 활동하다 심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룬다. 그의 동생 김형권 또한 풍산지서 무장습격사건으로 13년을 복역하였다. 김성주의 동생 김철주 또한 항일무장투쟁 중에 전사한다. 결국 김성주의 친가와 외가 모두 뿌리 깊은 항일 기독교 집안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어렸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녔음을 회고하고 있으며, 손원태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성탄절 연극을 준비할 때, 풍금으로 찬송가를 반주한 적도 있다. 11세가 되자 만주 팔도구의 부친을 떠나 외조부 강돈욱 장로가 주도해 설립한 창덕소학교 5학년으로 편입하고, 이때 외종조부 강량욱은 2년 동안 김성주의 담임선생으로 항일민족정신을 심어주게 된다. 김일성은 자신이 기독교인이었음을 숨기지 않으며, 북의 학자들은 그가 기독교인이었다고 단정한다.8 김일성 주석이 남한에서 온 목사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식사를 할 때 식사기도를 부탁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도 김형직・강반석 부부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삼아 활동한 양강도(兩江道)의 ‘포평리례배당’은 현재 김일성 주석의 어린 시절 항일 자주 독립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매년 수만 명의 청소년들이 걷는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의 출발점과 종착점이 되어 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온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독교 정신과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주장하는 나의 주장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9
해방 이후 북한이 ‘종교는 아편’이라는 맑스주의 이념에 따라 기독교를 무조건 탄압하였다기보다는 민족주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박해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북한에 있던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남쪽으로 피신한 것은 아니다. 주로 북조선의 사회주의 이념에 반대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지주들이 피신한 것이다. 오히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로 활동한 김창준 목사같이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기독교인들은 북으로 가기도 했다.
결론으로 남북 모두에서 존경받고 추앙받는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 선생은 특별한 관계를 맺었으며, 그의 아들인 손원태와 김성주는 형제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남북이 나눠진 이후 두 사람은 반대편에 서게 되었고 6・25전쟁으로 인해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 둘을 연계하고 화해의 역할을 시도한 사람이 손원태이다. 그는 미국에서 외과의사로 은퇴하고 나서 북을 방문하면서 단절된 남북관계에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성서는 추방당한 가인과 죽임당한 아벨을 대신한 새로운 인간형 ‘셋-에노스’의 출현(창 4:25-26)을 말하고 있고, 형 에서와 화해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 사이에 놓인 담을 허무는 화해자로 오셨다. 오늘 한반도에 진정 필요한 사상은 핵무기와 사드 미사일과 F35 전투기를 비롯한 첨예한 군사무기로 상대를 위협하는 제국의 폭력적인 야만성이 아닌, 모두가 야훼 하느님의 형상을 띤 형제와 자매로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공동체적 유목민성이다.
지난 75년 동안 분단된 남북한에서는 아기를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 라헬의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제국의 경계선인 철책을 허물고 하늘의 음성이 들리는 광야(대륙)의 넓은 길을 향해 나서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회복해야 할 시기이다.

[연재를 마치면서] 1980년대 중반 미국과 유럽에서는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대화’라는 주제로 남북 학자들이 참여하는 학술 컨퍼런스가 여러 차례 열렸다.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통일학술 모임이 있었으며, 이 내용은 책으로도 출판되었다.10 그러나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은 그때로부터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뒷걸음질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간 ‘남북화해’, ‘남북대화’라는 말은 자주 언급되었고,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민간 차원에서의 만남도 어느 정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남북사상’에 관한 대화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그 자체가 부정되는 현실이다. 따라서 통일의 새 시대를 향해 몸부림친 이번 2019년도에 「기독교사상」 편집부에서 이런 연재를 구상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한 것은 민족사적 의의가 크다고 본다. 30년 전에 출판된 글들을 보면 당시 대화에 참여한 기독교 학자들은 대부분 조직신학자들이었으며 성서학자는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필자가 1년 동안 연재한 ‘분단 상황에서 성서읽기’는 30년 전 논의의 반복이나 재구성이 아닌 전혀 새로운 분야의 글이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분야의 글이 계속하여 실리기를 바란다. 관심을 갖고 글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한다.

* 조헌정 목사님의 연재 “분단 상황에서 성서읽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1 “얼마 전 평양을 들렸을 때, 나는 인민대학습당에서 1937년 9월 3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기사를 읽고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받았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크게 싣고 2면에 걸쳐 그에 행적과 유격대 활동에 관해 소개한 장문의 기사였다. 「신한민보」는 샌프란시스코의 교민단체인 국민회에 의해 1909년 2월에 창간된 교포신문이다. 이 「신한민보」에 그 당시 이미 김일성에 관한 기사가 실려 미국의 동포사회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 손원태 회고록(미출간 원고) 116쪽.
“그런데 그들의 글을 읽어보니 초보적인 상식도 없는 사람들의 무식하기 짝이 없는 글이었다. 이는 당장 몇 가지 문제만을 이야기해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벌써 1920년대부터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지닌 인물이 독립운동을 벌인 것처럼 쓰고 있고 일본사관학교 출신의 어떤 인물을 내세우기까지 하였는데, 그 당시 독립운동의 거두들이 활약한 길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전혀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없다. 만약 그때 벌써 그런 인물이 있었다면 우리 아버지가 모를 리 없고, 안창호 선생이 모를 리 없으며, 그 쟁쟁한 길림의 독립군 거두들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진 것은 1930년대 초, 즉 김성주가 항일유격대의 총성을 울린 때부터이다. 이것은 더 논의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당시 역사의 체험자, 목격자, 증언자로서 나는 이것을 당당히 증명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김일성 장군의 사진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이다. 그들은 김일성 주석이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배경에서 찍은 사진을 놓고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도 역시 그 사진을 보았다. 거기에는 길림 시절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만주에서 항일유격대를 이끌 때의 사진도 있었고 해방 후에 찍은 사진도 있었다. 무장투쟁을 할 때는 얼마나 모진 고생을 겪었는지 본래의 모습을 전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 서로 다른 사진 속에서도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성주 형의 모습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나는 가슴이 아파서 울었다. 빼앗긴 나라를 찾자고, 망국노가 된 백성을 도탄에서 구원하자고 그렇게도 모진 고생을 했던 그이였다. 그래서 그렇게 모습조차 알아보기 힘들 만큼 풍상에 시달렸던 이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되든 일제에 부역하며 오로지 자기 일신의 안락과 영달만을 추구하던 자들이 감히 헐뜯으려 달려들다니!…. 하느님은 과연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어째서 이런 악인들이 세상을 활보하게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의사의 직분에 충실할 뿐 남의 말이나 정치 같은 데는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과 관련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었다. 기억도 생생한 김일성 주석과의 어린 시절 인연이 깊은 나로서는 이 문제가 그 어떤 학술상의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이기에 앞서 인간 양심과 관련되는 하나의 도덕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장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미국에 사는 의사에 불과한 나는 이러한 허위날조를 국가의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남한의 엄청난 권력과 맞설 만한 아무런 방도도 없었다.
이제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오랫동안 권력의 핵심인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이 쓴 글을 잠시 인용해본다. 이 글은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전직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이런 발언을 한다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당장은 충격파를 가져올 수 있으나 장구한 민족사의 체계로 보아서는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다.’” - 위의 원고 149-150쪽.
2 ‘양아들’이라는 표현은 필자의 표현이다. 김일성과 손원태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손 목사의 경제 형편은 매우 빈궁했으며, 다섯 자녀의 뒷바라지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김성주를 받아들여 3년간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보았고, 명절 때마다 그를 불러 함께 음식을 나누고, 감옥에 갇혔을 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를 구출해주었기에 ‘양아들’이라고 해도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김일성 자신이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3 「한국일보」 1991년 10월 16일(8607호) 〈나의 이력서〉라는 코너에는 김성주에 대한 손원일의 짧은 언급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손원일은 자신이 육문중학교를 졸업한 후 김성주가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언급한다. 달리 말하면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다고 말한 것인데, 이는 당시 남북 대결 상황이 극도에 치달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한 말이었을 것이다.
4 “목사의 부인도 나를 몹시 사랑해주었다. 명절 때면 그 부인이 나를 청해다가 조선식으로 맛있는 음식도 해주었다. 그 집에 가서 먹던 토끼고기를 넣은 두부지지개와 쫀드기떡이 참말로 별맛이였다. 손정도에게는 아들 둘에 딸 셋이 있었다. 길림에서 우리의 운동에 관여한 것은 둘째 아들 손원태와 막내딸 손인실이였다. 손인실은 그때 황귀헌, 윤선호, 김병숙, 윤옥채 등과 함께 조선인길림소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내가 청년학생운동을 할 때와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있을 때 나의 심부름을 많이 들어주었다.” - 이상규, “손정도 목사의 만주선교와 김성주와의 교류에 대한 검토”, 광복절 74주년 기념 한국교회사 포럼-손정도 목사의 신앙과 삶 자료집(2019. 8. 13, 3・1운동 100주년 기독교기념사업회 주관), 12.
5 동생 손원태는 형 손원일과 김성주가 함께 교회를 섬긴 일을 언급하고 있다.
6 강반석의 한자명은 ‘반석’(磐石)이 아니라 형제의 돌림자를 따라 ‘반석’(磐錫)이다. 그러나 선교사가 그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주장도 있어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필자는 이해한다. 딸이 돌림자를 갖는 경우 또한 특이하다.
7 숭실(중)학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로 미션스쿨, 병원 등에서 일할 지도자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선교사나 교회 지도자에 의해 추천된 사람들만이 가는 학교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기독교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8 최상순, “손정도 목사는 그리스도교정신을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애국의 거성”, 김득중 편,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사상』(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23.
9 최상순, 위의 책, 24.
10 통일신학동지회, 『통일과 민족교회의 신학』(한울, 1990);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서울남노회 엮음, 『기독교에서 본 주체사상: 대화의 모색을 위하여』(민중사, 1993).



조헌정 | 신약학(역사적 예수)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 등이 있다. 예수살기 상임대표, 「현장언론 민플러스」 이사장, 평화통일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7월호(통권 7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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