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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한국교회사 속 예화를 찾아
성서와설교 (2019년 12월호)

 

  겸손, 성실, 청빈을 갖춘 아름다운 신앙
  

본문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도대체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예수께 묻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28-29)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기독’(基督) 두 자만 씌워서 세상 일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일이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아름다워야 한다. 성서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면모들을 목도할 수 있는데, 어떠한 신앙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신앙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을까?

겸손한 신앙이다
잠언을 비롯한 성서 여러 곳에 교만과 겸손을 대비하는 구절이 있다.
(시 147:6, 잠 3:34, 11:2, 18:12, 29:23, 약 4:6, 벧전 5:5) 이들 구절은 하나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을 ‘최악의 죄악’으로, 겸손은 ‘최고의 미덕’으로 선포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 같은 교만과 겸손이 가장 잘 대비되는 인물은 사울과 다윗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한 자였으나 나중에 교만한 자로 변모하였고, 다윗은 시종일관 겸손을 유지하였다.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처럼(잠 3:34, 약 4:6), 사울의 집은 점점 망하여 갔으나 다윗의 집은 점점 흥하여 갔다.(삼하 3:1)
신약성서가 말하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겸손의 대명사이다. 그분의 겸손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 사건 자체가 겸손이다.(빌 2:6-8) 그의 요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베들레헴 마굿간 구유에서 출생하여 가장 낮은 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눅 2:7) 이를 반영하여,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탄생교회로 들어가는 작은 돌문의 이름은 ‘겸손의 문’이다. 이처럼 겸손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소개하고 있다.(마 11:29) 또한 그가 공생애 중에 만난 이방인 백부장(마 8:5-13)이나 수로보니게 여자(마 15:21-28, 막 7:24-30)가 보여준 겸손한 믿음을 ‘최고의 믿음’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탄 나귀 새끼도 그의 겸손을 상징하지만(마 21:5), 그 무엇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 자체가 겸손이었다.(빌 2:8)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를 만난 교만한 바울 또한 겸손한 자로 변하였다. 그의 겸손은 낮아짐의 미학을 창출하였다.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 15:9)로 고백하였다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엡 3:8)로 고백하기도 하였고, 나아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딤전 1:15)로 고백하며 점점 더 작은 자가 된 것이다.1
이 외에도 다양한 겸손의 고백을 쏟아낼 만큼 ‘겸손의 사도’로 변모한 바울은 겸손을 기독교인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꼽았다.(롬 12:3-8) 나아가 초대교회 교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겸손을 기독교인의 유일무이한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도 아름답고 고귀한 겸손을 실천한 신앙인을 ‘ㄱ자’ 교회로 널리 알려진 김제 금산교회에서 만날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금산교회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관습이 반영된 예배당을 통해 우리에게 문화적 유산도 남겨주고 있지만, 겸손이라는 아름다운 신앙적 유산도 물려주고 있다.
금산교회는 마방(馬房) 주인 조덕삼과 마부 이자익에 관한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로 출발한다. 1905년 최의덕(L. B. Tate) 선교사와 김필수 조사의 전도 활동을 통해 조덕삼은 자신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고 지역 주민들을 불러모았다. 자신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는 청년 이자익도 이 자리에 함께하였다. 그렇게 조덕삼, 이자익 두 사람은 세례도 받고, 집사도 되고, 영수도 되었다. 1907년 금산교회 교인이 증가하여 장로 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마부 이자익은 장로로 피택되고, 마방 주인 조덕삼은 그렇지 못하였다. 최의덕 선교사는 조덕삼이 장로가 되지 못할 경우 혹시 교회에 분열이 생길 수 있음을 염려하였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다. 세상에서는 주인과 머슴 사이였지만, 그 관계가 역전된 교회의 투표 결과에 대해 조덕삼은 도리어 교인들에 대한 감사로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었다.
조덕삼의 겸손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장로가 된 이자익을 잘 섬겼고, 나중에는 이자익 장로의 신학 공부까지 후원하여 결국 금산교회 담임목사로도 모셔왔다. 봉건적 잔재가 남아 있던 사회에서 신분을 초월한 조덕삼의 신앙적 겸손은 마부 이자익을 장로교회 역사상 세 번의 총회장을 역임[13회(1924), 33회(1947), 34회(1948)]한 유일한 인물이자, 대전신학대학교를 설립한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다.
겸손한 신앙인 조덕삼 역시 1910년에 장로가 되었으며, 그 후 아들 조영호, 손자 조세형까지 장로로 피택되어 3대가 금산교회를 섬기고 지키는 큰 기쁨과 영광을 누렸다.2 이처럼 존귀와 축복의 역사를 창출한 조덕삼의 겸손한 신앙을 박은영 기자는 담백하게 기술하고 있다.

금산교회는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김제 금산리의 지주 조덕삼(1867-1919)이 1905년 자신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금산교회는 시작되었다. 테이트 선교사가 어느 날 조덕삼의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었다. 서양 선교사를 지켜본 조덕삼이 “살기 좋다는 당신네 나라를 포기하고 왜 이 가난한 조선땅에 왔습니까”라고 묻자, 선교사는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때문입니라”라고 대답했다. 선교사의 희생정신과 용기에 감동받은 조덕삼은 자기 집 사랑채를 내주어 예배를 보도록 했고, 이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었다. 이자익(1879-1958)은 여섯 살 때 부모를 여의고, 열두 살에 고향인 경상도를 떠나 멀리 전라도 금산까지 왔고, 김제에서 제일 큰 부자 조덕삼의 집에서 마부로 일을 하게 되었다.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이자익은 영특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다. 이를 눈여겨본 조덕삼은 자기 머슴이었지만,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하고 신앙생활도 하도록 배려했다.
몇 년 후 조덕삼과 이자익은 영수가 되었고. 1907년 금산교회의 장로선출 투표에 이들이 후보에 올랐다. 주인과 머슴이 경쟁 상대가 되었는데, 투표 결과는 머슴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님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훨씬 높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장로가 된 이자익이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강단에서 설교할 때면, 조덕삼은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설교를 들었다. 조덕삼은 머슴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학비는 물론 가족의 생활비까지 지원하였다. 조덕삼은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되었다.3


성실한 신앙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성실이다.(시 89:1, 2, 5, 8) 다윗은 다른 누구보다 하나님을 성실하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시 37:3) 성실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도 성실을 요청하신다.(시 7:8) 이를 통해 성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인생에서 성공 여부보다 성실 여부를 더 중시하고 있다는 관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잠 19:1, 28:6, 10, 18)
성서에서는 성실한 신앙으로 일관한 신앙인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인물로는 요셉을 들 수 있다. 그가 이집트 사람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을 때에나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그의 성실은 범사를 형통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창 39장) 그의 성실은 나라의 국무총리가 된 이후에 더욱 빛을 발하여 7년의 흉년 속에서도 이집트 백성과 자신의 혈족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요셉은 성실의 지도력을 지닌 ‘성실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예수도 성실의 상징이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17) 이 말씀대로 그는 수많은 일들을 성실하게 행하셨다.(요 21:25) 이처럼 성실한 일생을 사신 예수는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나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를 통해 성실한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셨다. 바울 또한 사도로 부름받아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으며(딤후 4:6-8), 교회에 보낸 편지들에서도 신자들에게 성실을 강조하였다.(롬 12:8, 고전 4:2, 엡 6:5, 골 3:22)
한국교회도 초기부터 성실한 신앙을 강조해왔다. 특히 영계 길선주 목사는 1904년 대한성교서회에서 발행한 전도 책자 『해타론』을 통해 신앙생활 최대의 적인 태만을 추방해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한국교회 역사에서도 성실한 신앙생활을 영위한 신앙인들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일례로, 1928년에 설립된 양막교회의 황혜운 권사는 무려 30년을 한결같이 교회의 새벽종을 치는 일을 감당하였다. 그녀의 모범적 봉사를 치하하기 위해 기독교대한감리회 예산지방에서는 1977년 3월 1일 전정진 감리사 명의의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녀의 성실한 신앙을 상징하는 양막교회의 종은 지금도 그 교회에 남아 있다. 『양막교회사』에는 그녀의 성실한 봉사를 기록하면서, 찬송가 <저 건너편 강 언덕에>(237장)의 가사에 잇대어 천국에서 울려 퍼지는 기쁜 종소리를 암시하는 ‘황금종’이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전하고 있다.

황금종이라 불리는 황혜운 권사는 배움은 적었지만 기도 많이하는 권사로 능력이 있고 양막교회 새벽기도의 파수꾼으로 평생 새벽 종 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겨왔다. 그리하여 황금종이라는 별명이 있기도 하였다.4

청빈한 신앙이다
성서는 소유의 넉넉함보다 청빈의 소박함을 더 귀하다고 말한다. 청빈한 신앙을 견지하기 위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탐심이다.(눅 12:15) 다른 무엇보다도 물질에 대한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딤전 6:10)
성서에서는 탐심을 경계하고 청빈한 신앙을 실천한 신앙인들을 만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사무엘 선지자는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인정하듯, 권력과 이권에 초연한 자세로 일생을 청빈하게 살았다.(삼상 12:1-5) 또한 신약성서의 세례 요한은 극단적 청빈의 삶을 자청하며 살았던 마지막 예언자였다. 그는 광야에 기거하면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막 1:6) 이때 그가 먹은 메뚜기는 들에 있는 곤충 메뚜기가 아니라 식물용 메뚜기, 즉 쥐엄 열매였다.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둘째 아들이 먹고자 하였던 쥐엄 열매는 가난과 궁핍의 상징이지만, 세례 요한이 먹은 쥐엄 열매는 검소와 청빈의 상징이었다.5 이 밖에도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노라는 사도 바울의 진솔한 고백은 그의 청빈한 신앙을 반증하고 있다.(빌 4:11-13)
한국교회의 역사에서도 청빈한 신앙을 몸소 실천한 신앙인들을 만날 수 있다. 1951년에 설립된 예산장로교회는 6・25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교회이며, 1・4후퇴 때 아들과 함께 월남한 김능백 목사가 1952년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주님의 생활 정신을 본받아 악의악식(惡衣惡食)하며 청빈하게 생활하였으며, 성도들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이 소문이 예산 전역에 퍼져 교파의 구별 없이 그를 칭송하는 소리가 드높았다고 전해지고 있다..6 예산장로교회에는 청빈한 목회를 실천한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백영업 목사 역시 청빈한 신앙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신학생 시절에 중국의 어떤 지방이 수재를 겪어 큰 어려움이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준비해둔 여비 전부를 구제금으로 보냈다. 이 일이 보도되어 중국에서도 백영업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목회자로서도 청렴결백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생을 청빈하게 생활하다가 타계하였다..7
진보 신학의 거장이자 한국기독교장로회를 태동시킨 장공 김재준 목사도 ‘청빈’이라는 아가씨와 결혼한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를 동경하고 흠모하여 젊은 시절부터 청빈한 일생을 살았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남몰래 돕는 일에 힘썼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18:20)라는 예수의 쓸쓸한 말처럼 그는 거처할 집 한 채도 없이 교수 생활을 은퇴하였다. 천사무엘 교수는 그의 예언자적인 삶을 서술하며 그의 가난을 ‘청빈’이라고 평가하였다.8

김재준은 집 한 채 없이 가난하게 교수생활을 마무리했다. 그가 가난했던 이유는 젊어서 성 프랜시스를 동경하여 청빈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서울 유학 시절부터 미국의 웨스턴신학교에서 그의 신학수업을 마칠 때까지 고학으로 공부했다. 고학은 곧 고생의 연속이었다. 지독한 경제적 어려움 중에 공부한 김재준은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냥 있지 못했다. 돈이 없어 등록을 못하는 학생들의 등록금을 대신 내어주거나 밥을 굶는 학생들의 식비를 보태주었다. 그것도 드러나지 않게 돕곤 했다. 그래서 그의 가난은 청빈(淸貧)이었다.


* 고성은 목사님의 연재 “한국교회사 속 예화를 찾아”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1 이신건 엮음, 『이성봉 목사의 예화』(성결신학연구소, 2000), 21 참조.
2 김수진, 『마부 이자익을 섬긴 조덕삼 장로 이야기』(진흥, 2008), 175-176.
3 박은영, “아름다운 섬김의 본이 된 교회-금산교회”, 「주간기독교」 2018년 11월 18일: 18-19.
4 양막교회 편집부 편, 『양막교회사』(양막교회, 1992), 46-47.
5 이석봉, “세례요한은 곤충 메뚜기를 먹지 않았다”, 「뉴스엔조이」 2014년 12월 11일 기사.
6 예산장로교회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예산장로교회 창립 60주년 교회사』(예산장로교회, 2013), 30.
7 방지일, 『야사도 정사로』(선교문화사, 2001), 109.
8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살림, 2003), 176.



고성은 | 목원대학교와 호서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목회활동 연구』, 『철마 정경옥, 생애 연구』, 『동부연회 순교자열전』(공저) 등이 있다. 현재 충남 홍성에 있는 광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으며, 목원대 외래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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