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분단 상황에서 성서읽기
성서와설교 (2019년 11월호)

 

  멘토링: 손정도 목사와 김성주
  

본문

 

머리가 남달리 좋다고 해서 항상 뛰어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의 뛰어남을 이끌어줄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또한 탁월한 지도자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이면에는 부모가 되었든, 선생이 되었든 오랜 시간 그를 이끌어온 조력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들을 가리켜 보통 ‘멘토’라고 부른다.
멘토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Homerus)의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타카 왕국을 다스리는 오디세우스 왕이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게 되자 왕은 자신의 어린 아들 텔레마쿠스를 가장 믿을 만한 친구인 멘토에게 맡긴다. 이후 멘토는 왕이 전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왕의 아들을 10여 년간 양육한다.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스승으로, 때로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이야기에 기초하여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어떤 한 사람을 양육하는 사람을 ‘멘토’(mentor), 대상이 되는 사람은 ‘멘티’(mentee), 그리고 이러한 양육 과정을 ‘멘토링’(mentoring)이라 부른다. 넓은 의미에서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간 모든 양육 과정은 멘토링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좁은 의미에서 멘토링이란 일대일의 양육 관계를 의미한다. ‘멘토’는 보통 ‘조력자’(助力者, helper)로 번역하지만, 풍부한 경험과 지혜 및 인격을 겸비한 사람이 일대일의 관계로 한 사람을 사회의 지도자 혹은 한 분야의 전문가로 길러내는 역할을 담당하기에 해당 번역어는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어 단어 그대로 멘토 혹은 멘토링이라고 부른다.

성서와 멘토링
성서의 인물 가운데에는 멘토링의 관계를 통해 하느님의 사역을 담당한 사람이 여럿 있다. 그 예로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와 사무엘, 엘리야와 엘리사, 세례 요한과 예수, 예수와 베드로(혹은 열두 제자), 바울과 디모데 등을 들 수 있다. 출애굽 이후 히브리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시작하면서 모세 혼자 백성의 모든 문제를 도맡아 처리하는 모습을 본 그의 장인 이드로는 책임을 나눌 지도자를 세우라고 조언한다.(출 18:13-26) 이드로의 조언을 받아들인 모세는 마치 군대 조직과 같이 백성을 이끌어갈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을 세운다. 이 경우 또한 장인–사위의 관계를 넘은 일종의 멘토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멘토링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경우이다. 모세는 일찍이 자신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눈여겨보고 그를 특별하게 훈련시킨다.(민 27:12-23) 그리고 죽음을 앞둔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지도력을 이양한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출 34:9) 모세로부터 여호수아에게 이어지는 지도력 이양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해를 함께하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자라면서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훈련을 받는다. 원래는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장의 임무를 이어가야 하지만, 멘토링의 과정을 겪은 사무엘이 엘리의 뒤를 잇는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스승으로 둔 많은 예언자 수련생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의 멘토링을 통해 지도력을 얻는다.(왕하 2장)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3년의 삶을 함께 지내는 과정은 집단 멘토링이다. 그런데 이 열두 제자 가운데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아홉 명의 제자와는 구별되어 따로 행동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이다.(마 17장) 그중에서도 베드로는 수제자로 불린다. 집단 멘토링의 경우라 하더라도 그 안에 세워가는 지도력에 구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에게 베드로보다 더 가까운 제자가 있었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the Beloved Disciple)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예수의 빈 무덤을 베드로보다 먼저 목격했고(20:4), 예수의 마지막까지 동행한다.(21:20) 그리고 그는 요한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21:24)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에 비유된다. 바울은 디모데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알고 있는바, 디모데를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멘토링의 과정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디모데가 장성하자 바울은 그를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고, 바울이 개척한 에베소교회를 맡긴다.(딤전 1:2-3) 그리고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죽을 때가 되자, 디모데를 속히 오라고 부른다.(딤전 4:9)
독자들 가운데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멘토링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의문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구원의 주님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가 묻는 질문은 이러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굳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 없으신 분이 죄 많은 인간 요한을 통해 굳이 세례를 받을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적절한 답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역사적 관점에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복음서는 모두 서두에서 예수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묘사한다. 하느님이 예수에게 직접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을 통해서 하느님의 부름이 예수에게 임한 것이다. 사복음서에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만남이 일회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 신학적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특히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이고, 예수의 세례는 불과 성령의 세례라는 언급을 통해 사역의 본질이 서로 다름을 말하고 있다. 또 요한이 제자를 예수에게 보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 11:3)라는 질문을 한 것을 보면 굳이 멘토링의 관계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과 예수가 각각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통해 태중에서부터 특별한 관계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더욱이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은 첫머리에서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1:14)라고 말함으로써 예수의 공생애가 국가권력에 의해 중단된 요한의 사역을 이어가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복음서가 다 말하지 않는 특별한 (멘토링) 관계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손정도 목사와 소년 김성주
훗날 북한의 주석이 된 김일성은 청소년 시절에 손정도 목사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손정도 목사는 누구인가?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1882-1931) 목사는 23세에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중 전도사를 만나 기독교인으로 삶의 극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이후 문요한(John Moore)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8년 조만식 등과 함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협성신학교를 졸업한다. 전도사로 진남포의 교회를 섬기다가 미 감리교의 파송선교사 자격으로 만주로 목회지를 옮긴다. 그곳에서 그는 항일 비밀결사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핵심 인물 조성환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안창호를 비롯한 지도부와 교류하였다. 그러다 날조된 ‘가츠라암살음모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3개월간 악독한 고문을 받고
1년의 유배형을 받아 진도에 머물게 된다. 당시 손 목사는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중간 연락을 담당했으며, 일제는 손 목사를 ‘불령선인의 수령’1으로 지목했다. 형을 마치고 동대문교회를 1년 동안 섬기며 출석 교인을 배로 증가시키고 이어 3년간 정동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조선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시킨다. 요즘으로 말하면 가장 성공적인 목회자였다. 특히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많은 젊은이들이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 감화를 받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유관순 열사이다.
그러다가 홀연히 교회를 사임하고 다시금 만주 선교사로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병가를 핑계로 1년 동안 한양에 머문다. 그 이면에는 정동교회의 전임자인 현순 목사와 함께 고종의 특명을 받아 영친왕 이강공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연락을 담당하던, 조선 최초의 미국대학 여학사이자 이화학당의 교사 하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된다. 때는 바야흐로 1919년 초, 기미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준비되던 때였다. 손정도는 이승훈으로부터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서명할 것을 위촉받았으나, 대신 신흥식, 길선주 목사를 소개하고 자신은 만주로 망명한다.
이후 안창호와 함께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하여 의정원(오늘날의 국회) 의장을 비롯한 여러 직책을 역임한다. 임시정부가 여러 파로 나뉘어 갈등을 일으키자 그는 의장직을 사임하고 길림에서 다시금 목회하면서 안창호와 함께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는 이상촌 건립을 시도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만 49세의 나이로 심방 중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96년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2
‘감리교역사와신학연구소’의 성백걸 교수는 손정도 목사를 이렇게 평한다.

그는 어두운 세력을 이겨내고 민족독립과 인류평화, 세계를 밝히는 사랑과 생명의 빛으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손정도에게는 고구려인의 기상과 문무를 겸비한 이순신 장군 같은 조선인의 이상형이 살아 있었고, 그의 생명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로 만나 새로운 한국 기독교인의 패러다임으로 출현했다. 장사씨름대회에서 우승하여 황소를 탄 경력의 그였다.3

또 북한의 한 학자는 손정도 목사를 이렇게 평가한다.

손정도 목사님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의 한 분이며 일제강점 초기로부터 1930년대 초반에 이르는 우리나라 반일독립운동사에 큰 자욱을 남긴 애국의 거성이었습니다.4

사실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활동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기독교사상」 전권을 할애한다 하더라도 부족할 것이다. 손정도 목사는 남한과 북한 두 정부와 남한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인정받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다만 남한에서는 목사로서의 선교적 삶에 방점을 찍는 반면, 북한에서는 항일 민족운동가로 방점을 찍는 것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필자가 이번 주제에 맞추어 관심을 갖는 부분은 길림에서 펼친 손정도의 마지막 목회(1925-31) 중 김성주와의 만남이다. 김성주의 아버지 김형직(1894-1926)은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교사 생활을 하다 1917년 3월 23일 장일환과 함께 평양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들, 현직 교사와 재학생 등이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하다 발각되어 1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이후 그는 압록강 근처 포평리에 가정교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33세에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죽게 된다. 14세의 김성주는 아버지와는 숭실학교 동문으로5 각별한 사이였던 손정도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손 목사는 그를 양아들로 삼아 육문중학교에 보내고 3년간 그를 후원한다. 이때 김성주는 길림조선인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과 성가대장으로 봉사했다.6
사실 김성주의 교회 관련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손정도 목사에 대한 이야기는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자세하게 나오지만, 여기서는 차남 손원태 장로의 회고록에 실려 있는 부분을 옮겨본다.

나는 감옥생활을 할 때 손정도 목사한테서 많은 방조를 받았다. 손정도 목사는 내가 길림에서 혁명활동을 한 전 기간 나를 친혈육에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사람이였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같은 학교(숭실중학교) 출신이라는 관념도 작용하였지만 그보다는 사상과 리념의 공통성이 아버지와 손정도를 뜨거운 우정으로 결합시키였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생전에 손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손정도는 3.1운동 직후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림시정부에서 한동안 의정원 의장직을 맡아보았다.…
길림에 와서는 례배당을 하나 꾸려놓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우리가 대중교양장소로 널리 리용하고 있던 례배당이 바로 그 례배당이였다. 원래 손 목사는 신앙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는 길림의 기독교신자들과 독립운동자들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신자들 속에는 손정도처럼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훌륭한 애국자들이 많았다.…
손정도가 류길학우회 고문이였으므로 나는 그와 자주 상종하였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우리 아버지가 너무도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이 분하고 애석하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을 위해 투신하라고 격려하곤 하였다.…


북한의 한 학자는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특별한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손정도 목사님이 길림시절 김일성 동지를 미래가 촉망되는 청년혁명가로 높이 일러 주시며 그분의 혁명활동을 각방으로 도와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 동지께서는 손정도 목사님을 자신을 애국과 투쟁으로 떠밀어준 정신적 스승으로, 학업과 생활을 보살펴준 육친으로, 감옥에서 구출해주고 독립운동의 활무대로 나설 수 있도록 해준 생명의 은인으로 높이 존경하시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수령님의 혁명활동과 손정도 목사님의 애국적인 생애가 하나로 련결된 것을 력사적인 행운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우리 민족사의 고귀한 재보로 간직합니다. 손정도 목사님과 우리 수령님과의 호상관계는 단순한 사제관계나 혁명선배와 후배간의 관계가 아니라 민족주의운동자와 사회주의운동자와의 관계로서 애국적이며 민족적인 사상감정으로부터 서로 상대방의 리념과 주의주장을 리해하고 용납하고 동조하는 사상적정신적 결합이였고 전 민족적 차원에서의 모든 애국력량의 단합을 모색하고 그것을 참답게 이루어낸 구감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7


이덕주 교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결국 손정도 목사와 길림교회는 육문중학교와 함께 김일성의 초기 공산주의 이론 형성과 혁명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하겠다. 이처럼 손정도 목사는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이 몰입하기 전, 아직은 계몽주의 단계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며 학생운동을 전개하는 김일성을 포용하고 지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손정도의 ‘열린’ 자세는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공존과 조화를 추구하는 ‘기독교 사회주의’ 이론, 이념과 방법론이 다를지라도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독교 민족주의’ 이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김일성의 후원자 역할을 자임한 것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아끼는 ‘선한 목자’의 심정과 다를 바 없었다.8

유물론과 무신론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서 기독교 목사인 손정도를 이토록 추앙하는 것은 어찌 보면 국가 이념에 모순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굳이 김일성 주석(수령)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최고의 경칭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손정도 목사가 멘토로서 청소년 김성주에게 미친 독립투쟁에 관한 정신적인 영향력은 지대하다 할 것이다. 실제로 김성주는 항일무장투쟁에 나섰고, 후에 김일성 장군으로 불린다.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손정도가 기독교 목사로서 김성주의 무력투쟁을 격려했을까? 그런데 그는 이미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용군(義勇軍)을 창설했으며, 이후에도 군인 양성과 독립전쟁 비용 조달을 위한 노병회(勞兵會)를 창설하여 노동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비폭력이 기독교의 근본정신인 것은 맞지만, 무고한 양민이 마구 살해되는 전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무기를 드는 일이 과연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윤리학 교수로서 이 물음을 가지고 무척 고민했다. 결국 그는 행인을 마구 치어 죽이는 미치광이 운전사를 운전석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임을 고백하고 히틀러 암살단에 참여하였다. 차남 손원태의 회고에 의하면 손정도 목사가 가장 가깝게 만나는 사람은 민중의 폭력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한 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다.
끝으로 손정도 목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난 자유 독립과 국민이 가져야 할 민족주의를 부르짖고, 신앙 자유의 용기로 화평한 복음을 전하며 진리와 정의로 선한 싸움을 싸워보리란 결심으로 하나님께 약속했다.9

한때 조선의 가장 큰 대형교회를 이룩하고서도 홀연히 이를 떨치고 만주로 떠나간 손정도 목사의 민족사랑 정신을 오늘에 되살릴 때, 기독교는 우리 민족사에 다시 한 번 우뚝 서게 될 것이다.


1 최상순, “손정도 목사는 그리스도교정신을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애국의 거성”, 김득중 편,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사상』(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22.
2 그의 무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현충원에 있는 것은 가묘이다.
3 “3・1정신과 기독교–한국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심포지움 자료집(2019).
4 위 자료집, 20.
5 손정도가 1908년 졸업할 당시 김형직의 나이는 15세였다. 아직 결혼 전이라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평안도 출신의 동문으로 조선국민회 결성 과정에서 접촉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후에는 길림성에서 활동을 같이 했다.
6 이 이야기는 올해 우리말로 출간 예정인 손원태 장로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회고록은 오래 전에 이미 영문으로 출판된 바 있다. Sohn Won Tai, Kim Il Sung and Korea’s Struggle: An Unconventional Firsthand History(McFarland & Company, 2003).
7 최상순, 위의 책, 21.
8 이덕주,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기독교 사상”, 김득중 편, 위의 책, 72.
9 배형식, 『고 해석 손정도 목사 소전』(기독교건국전도사무소, 1949), 3에서 재인용.



조헌정 | 신약학(역사적 예수)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 등이 있다. 예수살기 상임대표, 「현장언론 민플러스」 이사장, 평화통일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11월호(통권 731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