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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분단 상황에서 성서읽기
성서와설교 (2019년 10월호)

 

  초대교회와 북한 가정교회
  

본문

 

초대교회의 특징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의 승천 후 120여 명의 예수 따르미들은 오순절 성령 체험을 하였고,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 모임을 시작한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행 2:42, 이하 새번역)

그런데 이 새로운 예수 공동체에는 가르침과 친교와 성만찬과 기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자들의 보다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뒤따랐다. 그것은 재산의 공동 소유였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2:44-45)

이들은 처음부터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고, 성전에서의 모임과 집에서 모이는 가정 모임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2:46-47)

이로 인해 예수 공동체 모임은 계속 커져갔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2:47)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를 하러 성전에 올라가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는 기적을 행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스승 예수를 제1성서(구약)가 예언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참 메시아로 증언하였다. 그러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한 박해와 투옥이 시작되었다.(4:1-3)
이때부터 초대교회 교인들은 기존 성전 종교의 틀을 벗어나 독자적인 길로 나아간다. 그런데 성서는 당시 그들을 박해한 그룹을 단순히 “대제사장과 장로들”(4:23)로 한정짓지 않고,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와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한패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4:27) 곧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예수 공동체 혹은 초대교회의 시작이 단순히 유대교와의 갈등이라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저들을 둘러싼 모든 세력 곧 세상과의 투쟁임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누가는 초대교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다시 한 번 힘주어 증언한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4:32-35)

교회론에서는 현대 교회의 기능을 예배, 교육, 친교, 선교(전도)의 네 가지로 설명한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모습을 묘사한 사도행전의 말씀은 오늘의 교회가 거의 관심하지 않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경제 공유(共有)를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예수께서 자주 말씀하셨던바 재물 소유와의 싸움을 말하고 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눅 16:13) 곧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고백할 때, 이 공동체는 단순히 죽음 이후의 영혼 구원이라는 종교적 관점을 넘어 소유와 경쟁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세상을 부정하고 나온 것이다.
초대교회의 원형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지만, 완성된 형태로서의 첫 번째 교회는 안디옥교회이다. “두 사람(바나바와 바울)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안디옥)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행 11:26) 여기서 세상 사람들이 안디옥의 교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였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을까? 아니다. 이러한 고백은 이전 예루살렘에서도 이미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에 관한 지식 때문이었을까? 이것도 아니다. 단순히 성서 지식이 많은 사람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필자는 안디옥교회야말로 경제 공유를 제대로 실천한 교회라고 생각한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2장과 4장에서 ‘경제 공유’를 새로운 예수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에 모범을 보인 사람으로 바나바를 예로 들고 있다.(4:36-37) 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사탄(맘몬)에게 마음이 홀려’ 자기 몫을 따로 챙겼던 사람으로 심판을 받아 교인들이 보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5:1-11)

모세의 광야 만나 사건과 예수의 급식 기적 사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부하셨다.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을 두 벌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막 6:8-9) ‘청빈’을 가장 중요한 제자됨의 길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귀신 축출이나 병 치유의 기적은 오늘날에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지만,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급식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필자는 급식 기적 사건을 오늘날 재현하는 길은 청빈과 나눔에 있다고 믿는다.
광야에서 일어난 예수의 급식 기적은 출애굽 이후 히브리 노예들이 경험한 광야 40년의 만나 사건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첫째는 모세오경을 연상케 하는 ‘다섯’이라는 숫자이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먹은 사람이 남자만) ‘오천 명’이 그것이다. 둘째는 광야 생활에서의 조직체계 기본 단위인 오십부장과 백부장(출 18:21)을 연상케 하는 구절이다. “그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막 6:40, 눅 9:14)
여기서 필자가 이해하는 출애굽 광야 만나 사건의 핵심은 저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음식을 공짜로 먹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핵심은 그다음 구절에 있다.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출 16:17) 건강한 청년들은 많이 거두었을 것이고, 노인이나 장애인들은 적게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멜로 되어보니 모자라지 않았다는 말은 곧 이들이 필요에 따라 거둔 것을 나누었다는 말이다. 광야 40년의 가장 큰 사건은 만나 사건이고, 만나 사건의 핵심은 ‘평등한 분배’ 곧 필요에 따라 나누는 공유 정신이다. 이것이 예수의 급식 기적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만나 사건에서 배우는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은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많이 거두어놓은 만나에 벌레가 생기거나 녹아서 먹을 수 없었다는 구절에 들어 있다. 여기에서는 재산 축적의 무용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기도에 나오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와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모세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 제도에 있다. 예수 또한 나사렛 회당에서의 선포를 통해 희년(禧年, Jubilee) 정신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눅 4:16-19) 희년은 야훼 하느님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신앙으로, 오십 년째가 되는 해에는 모든 소유를 내려놓고 처음 출발로 되돌아가는 제도이다. 예수께서 회복하고자 하신 하느님 나라의 건설 곧 율법의 완성은 안식년과 희년 속에 담긴 공동체의 나눔 정신이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자유라는 미명하에 개인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경쟁을 기본 바탕으로 삼고 있으며, 자본을 가진 사람이 자본이 없는 사람을 지배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구조이다. 자본주의의 구호는 ‘크면 클수록 좋다.’(The bigger is the better!)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 교회의 성공 모델 또한 대형교회이다. 그러나 조직이란 커지면 커질수록 약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성향을 보인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말이 있지만, 자본 중심의 대형 체제는 강자 중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생명 중심의 작은 경제단위가 결국 사람을 살리듯,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진 교회는 부패와 타락의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목사들이 설교 단상에서 자주 외치는 소리 가운데 하나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말이다. 이 말은 청빈과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나아가겠다는 말이다. 초대교회는 교인이 적어서 가정교회 형태를 유지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 사건 직후 예루살렘에서는 하루에 3,000명의 신자가 늘어나기도 했다.(2:41) 이제야말로 진정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초대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가난한 자와 재물을 공유하는 나눔과 연대였다.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는 체제로 사회주의가 있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금기시되어 있지만, 유럽에서는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공산주의 이념을 실시하고자 하는 공산당도 존재한다. 세금이 높고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는 북유럽 국가들을 ‘복지형 사회주의 국가’라고 부른다. 예수의 복음 정신에 따르면, ‘기독교 자본주의’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지만, ‘기독교 사회주의’1라는 말은 타당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교회에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여럿 있었다.2

북한 가정교회 이야기
북한에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외에 약 500여 개의 가정교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 또한 2014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순안에 있는 가정교회를 방문하여 이를 확인한 바 있다. 당시 7명의 우리 일행은 약 15명가량의 주로 나이 많은 북한 신자들과 함께 안방에 둘러앉았는데,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앉아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예배를 드렸다. 우리와 동행한 보수 교단 출신 목사는 저들이 가짜일 수 있다는 의심을 갖고 찬양 시간에 자신의 임의대로 찬송 몇 곡을 지정하여 부르자고 하였는데, 돌아오면서 자신의 의심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미국교회협의회 의장과 미국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한 고 이승만 목사는 1970년대 말 북한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 함경도 회령의 가정교회에서의 예배를 녹음하여 들려주었는데, 당시 받은 감동은 이루 다 표현하기 힘들다.
북한의 가정교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최재영 목사가 펴낸 『북녘의 교회를 가다』(동연, 2019) “가정 교회와 처소 교회” 편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중 몇 구절을 인용한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본격적으로 전후 복구 사업이 시작되자 기존 기독교 신자들과 조기련(조선기독교도련맹) 측은 기독교를 믿는 인민들의 신앙생활 유지에 대한 가장 올바른 대책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격동기와 과도기를 맞아 종교 문제가 매우 절박한 문제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성급히 처리해서는 안 될 문제이기 때문에 일시적 대안이 아닌 본질을 붙잡고자 했던 것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가정 교회’였으며 이로써 북측 기독교 공동체는 전 세계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독특한 교회 형태인 가정 교회 제도를 정착시키며 기독교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며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지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정 교회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45년 8.15해방 직후 북조선 인민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태동되었다. 해방정국 이후 6.25전쟁 직전의 기간에도 새로운 교회 제도로 자리 잡기 시작한 가정 교회는 전쟁 직후에는 이전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조기련의 주도로 가정 교회가 재정비되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원래 김일성 위원장이 이끄는 당과 내각은 교회, 성당, 사찰 등을 우선적으로 복구하려 했으나 인민들과 민중들의 반대로 소극적으로 전환되었다. 일제강점기 36년간 조선의 가톨릭과 개신교, 불교가 워낙 친일행각을 자처했던 것을 대중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인민대중들은 역사 청산과 친일친미 사대주의 청산 차원에서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교회당을 복구하는 것은 물론 교회 조직이 활성화되는 것조차 꺼려하고 혐오스러워할 정도로 반대했던 것이다.(385-386쪽)


1940년대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북한 지역만 해도 2,300개가 넘는 교회가 있었고,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운 평양에는 200개 이상의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교회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특히 평양은 집 한 채가 남지 않을 만큼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일부 주민들은 교회에 들어가 있으면 미군의 폭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피신했지만, 전쟁 상황에서 그런 배려는 있을 수 없었기에 기독교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배신감과 증오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1985년에 방북한 세계교회협의회 관계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보고서에 기록했다.

사실 연맹(조기련)은 평양에 교회 한 곳을 건축하자고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조기련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가정 교회 공동체 그룹들과 가정 교회 신자들이었다.… 북조선 신자들은 30여 년 이상을 개인들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그것은 편법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별 쓸모없고 외형만 번지르르한 교회 건물은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391쪽)

남한의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 상당수는 북한의 교회가 가짜라고 주장한다. 가짜와 진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진짜의 특징은 무엇이고 가짜의 특징은 무엇인가? 일단 남한은 개인의 자유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갖고 있고, 북한은 평등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체제를 갖고 있다. 북은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는 허용하고 있다. 다만 북한은 남한처럼 정교분리(政敎分離)가 되어 있지 않다. 북한에서 기독교 목사는 다른 모든 국민과 똑같이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다. 독일교회의 목사들 또한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걷은 종교세에서 봉급을 받는다. 북한교회는 북한식 체제 안에서 교회로 존재하고, 남한교회는 남한식 체제 안에서 교회로 존재한다. 정교분리라고 해서 국가체제 밖에서 교회가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개인 자유의 관점에서 북한의 교회는 제한이 많다. 그러나 남한에서 사회적 문제가 되는 교회 세습 문제나 재산 분쟁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세상 종말이 온다고 교인들을 유혹하여 외국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기독교 이단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 형식이다. 둘째, 그러하기에 교인 숫자가 매우 제한적이다. 셋째, 가진 재산을 함께 나누는 공유 정신이다. 남한과 북한의 교회 형태 중 어느 쪽이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초대교회에 가까운 교회인가?
7・4남북공동성명에서부터 2019년 판문점 남북합의문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선포된 기본 원칙은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와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이다. 그렇다면 통일 이후 한국교회는 민족 주체의 자주적인 교회로, 그리고 현재 남한과 북한이 채택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를 뛰어넘어 초대교회가 지향하는,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는 공동 소유와 나눔을 실현해내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 이덕주, 『기독교와 사회주의 산책』(홍성사, 2011).
2 김흥수 편, 『일제하 한국기독교와 사회주의』(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2).



조헌정 | 신약학(역사적 예수)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 등이 있다. 예수살기 상임대표, 「현장언론 민플러스」 이사장, 평화통일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10월호(통권 7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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