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한국교회사 속 예화를 찾아
성서와설교 (2019년 10월호)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
  

본문

 

성서에서는 하나님 중심의 일생을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누가복음 2장의 안나 선지자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그녀는 매우 초라한 일생을 살았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이 소천했을 뿐만 아니라 84세가 되도록 홀몸으로 산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하나님을 남편 삼아 경건한 삶을 살았다. 이를 통해 그녀는 늙은 나이에 온 인류를 구원할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만나는 은혜와 복을 누렸다. 아기 예수를 만난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아기 예수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이와 같은 영적 은혜와 복을 누린 그녀의 성전 중심의 일생에는 어떤 특색이 있을까?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
구약성서에서 교회라는 개념은 성막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이동식 성소였다.(출 25:8) 신약성서에서는 이를 ‘광야 교회’로 지칭하고 있다.(행 7:38) 광야에서 이동하던 성막은 가나안 입성 후 실로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으며(수 18:1), 사울 왕 시절에는 성막이 놉에 자리하기도 하였다.(삼상 21:1-6) 그러다가 다윗 왕 시절에는 기브온에도 성막이 세워졌으며(대상 16:39, 21:29), 예루살렘에 성막이 세워지기도 하였다.(삼하 6:17)
다윗 왕은 다른 누구보다 주의 장막을 사랑하고 그곳에 거하기를 매우 즐거워하였다.(시 84편) 주의 장막을 존귀하게 여긴 그는 성막 대신 성전을 건축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아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부탁하며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대상 22장)
그의 준비를 통해 솔로몬 왕 때 예루살렘 성전이 7년 만에 건축되었다. 그 후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포로 이전까지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바벨론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바벨론 유수 이후 디아스포라가 된 유대인들은 한 마을에 최소 10명의 유대인 성인 남성이 있으면 회당 설립이 가능했다. 그 이래로 회당은 유대인의 신앙 교육의 장이 되었다. 바벨론 귀환 이후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고,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한 헤롯 대왕 시절 예루살렘 성전이 대대적으로 보수・증축되는 상황에서도 회당의 중요성은 지속되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에게 성전과 회당은 신앙생활의 양 날개가 된 셈이다.
신약성서에서도 헤롯 대왕 사후 증축 중이던 성전(요 2:20)과 회당의 중요성은 여전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성전과 회당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성장하였다.(눅 2장) 물론 그는 공생애 시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나 인원에 대하여 혁명적인 발언을 쏟아내기도 하였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배의 장소보다는 예배의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웠고(요 4:20-24), 성전이나 회당 모임에 비해 현저히 적은 사람이 모인 경우도 예배 모임으로 인정하였다.(마 18:2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그 역시 성전과 회당을 매우 중시하였다. 특히 그가 예루살렘에 최후로 입성할 때 발생한 성전정화 사건은 그가 얼마나 성전을 중시하였는지를 예시적으로 보여준다.(막 11:15-17)
구약성서의 한나와 동일한 이름인 신약성서의 안나 선지자 역시 성전을 중심으로 일생을 살았다. 한나는 여호와의 집을 사랑하여 매년 실로에 있는 성막을 찾았지만(삼상 1:7), 예루살렘 성전을 매우 사랑한 안나 선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곳에 거주하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평생토록 사랑한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의 예언대로 기원후 70년에 파괴되었다.(막 13:1-2)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사흘 만에 새로 지은 성전(요 2:19-22)인 교회는 예수의 부활승천 직후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태동하였다.(행 2장) 이처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태동한 교회는 복음이 전파되는 전 세계 곳곳에 세워
졌다.
이는 복음이 전파된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 일례로, 한국교회 초기 교인인 김베드로와 그 모친은 교회가 참으로 희귀하던 시대에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갔다. 빈한한 형편의 모자는 자신들이 살던 고향의 교회가 없어지자, 자기 생활이 가능하면서도 교회가 있는 지역만을 찾아 이사를 거듭하였다. 이는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겠다는 신앙적 의지가 담긴 모자의 선택이었다.

충남 보령군 스무티 교회 김베드로씨는 3세에 부친을 여의고 그 모친을 모시고 잔명을 부지하여 가다가 6년 전부터 주를 믿더니 불행이 그곳 교회가 없어지매 모자 서로 의논하고 홍주군 주동교회로 주를 따라 갔더니 그곳은 산협인고로 생활이 곤란하여 다시 청양군 장대교회로 갔더니 이곳은 장터와 읍중인고로 물가가 너무 고등하여 생활이 어려운고로 그 모친에게 간하여 본군 퇴천교회로 와서 형제의 집 협호를 얻어 있더니 하나님의 도우심과 형제의 사랑함으로 농사도 하고 장사도 하여 예수를 더욱 진실히 믿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청년을 사랑하며 외인에게 신용을 얻어 지금은 취리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기 백량이라도 달라 하면 의심없이 주겠다 하니 이는 다 주께 얻은 신용이라 하였더라.1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였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최선의 신앙적 수단은 금식이다. 성서 속 믿음의 사람들은 회개를 비롯한 매우 다양한 이유로 금식을 실천하였다.2 구약성서에서 금식의 원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민족적 지도자 모세였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두 번 받는 과정에서 그는 목숨을 건 40일간의 금식을 무려 세 번이나 행했다.(신 9-10장) 엘리야 역시 이세벨에게 쫓길 때 하나님이 주신 음식과 물을 먹고 마셔 힘을 얻은 후 40일을 금식하며 걸어서 호렙산에 이르기도 하였다.(왕상 19:1-8) 다윗 왕도 자신의 신하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 죽게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아내로 삼은 일을 나단 선지자가 책망할 때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금식기도를 했다.(삼하 12:16-18) 구약성서에는 이처럼 개인적인 금식기도만 담긴 것이 아니라, 민족적인 금식기도도 담겨 있다.(삼상 7:5-6) 심지어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까지도 민족적인 회개의 금식에 동참하는 특이한 이야기도 자리하고 있다.(욘 3:4-8)
금식기도는 신약성서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신앙적 수단이었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늘의 음성을 들은 이후, 공생애를 앞두고 처음으로 행한 일은 광야에서 홀로 40일간 금식하는 것이었다.(마 4:1-2, 눅 4:1-2) 예수가 일회적인 40일 금식을 했다면, 안나 선지자는 일평생 반복적인 금식을 했다. 이것은 실상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금식 형태였다.(눅 5:33) 특히 바리새인들의 경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눅 18:12) 안나 선지자는 이들보다 더 자주 금식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더욱이 금식 장소가 성전으로 특정되다는 점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역사에서도 금식기도를 실천한 신앙인들을 다수 만날 수 있다. 새벽 기도회의 원조로 널리 알려진 길선주 목사가 금식기도의 원조도 아닐까 싶다. 그가 성령 충만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신앙적 수단 중 하나가 바로 금식기도였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주 사흘의 금식기도와 매년 일주일간의 금식 대기도를 평생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한국교회에 신유 운동을 일으킨 김익두 목사 역시 평양신학교 졸업반 시절 여름방학에 황해도 장수산에서 예수처럼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전해진다.4 한국교회 최초의 신비주의자로 일컬어지는 이용도 목사 역시 금강산에서 10일간 금식기도를 통해 ‘기도꾼’으로 탈바꿈했다고 전해지고 있다.5
한국교회에 금식기도 운동을 널리 확산시킨 ‘할렐루야 아줌마’ 최자실 목사도 한국교회의 금식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조용기 목사와 함께 순복음교회를 개척하던 시절부터 금식기도를 자주 실천하였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한 그녀는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현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을 설립하였고, 국내뿐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처에 금식기도원을 설립하여 국내외 금식기도 운동의 전도자가 되었다. 그녀의 둘째 아들 김성광 목사는, 자신의 어머니가 1970-80년대에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교회에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금식기도의 결과였다고 평하고 있다.6
반면에 이름이 알려진 목회자는 아니지만 다른 누구보다 평생 금식기도를 실천한 필자의 부친 고규상 목사도 있다. 필자가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부친은 성서 속 안나처럼 일생을 교회에서 금식하며 기도로 살아온 목회자이다. 부친이 고부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를 시무할 때의 일은 지금도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부친이 교회에 기거하며 40일 금식기도를 할 때 필자가 사택에서 교회까지 자주 물을 배달하였다. 당시 사택과 교회는 7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는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까지 주셨던 것처럼 부친도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할 때 구하지 아니한 신유의 능력을 받아 놀라운 신유의 역사를 일으킨 적이 있다고 간증하였다.

1978년 고부교회 마루 바닥이 꺼져 있는 상황에서, 시급한 새 성전 건축과 도시로 진출하여 개척교회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는 두 가지 문제를 놓고 교회에서 기거하며 40일 금식기도를 하였다. 교회에서 금식하면서도 심방을 제외한 모든 목회 활동을 감당하였다. 처음 20일 동안은 힘이 들고 어려웠지만 나중 20일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영력을 주셔서 오히려 힘이 생겨 쉽게 금식기도를 할 수 있었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환상이나 계시 같은 체험은 없었으나 예배 시간에 은혜가 충만하여 성도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40일 금식기도를 마친 뒤 고부교회 새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고, 성전을 건축한 후 개척교회나 진배없는 군산 신창교회로 이임할 수 있었다. 금식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이었다. 나아가 금식기도를 통해 솔로몬 왕처럼 구하지 않은 신유의 능력도 받았다. 고부교회 교인이었던 은희채 집사의 여동생인 은희주 초등학교 교사의 어린 아들이 전주 예수병원에서 뇌암으로 시한부 사망 선고를 받고 퇴원한 상황이었는데, 안수 기도 한 번에 뇌암이 치유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내 목회 여정에 주신 큰 은혜였다.7

성전에서 주야로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집은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소이다. 구약성서 속 야곱은 부친과 형을 속이고 밧단아람에 사는 외삼촌 라반에게로 도망갈 때, 하룻밤을 유숙하며 놀라운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 고백한 곳에서 서원 기도를 했다.(창 28장)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여 그의 또 다른 아내 브닌나에게 심한 핍박을 받았는데, 이 일로 크게 상심하여 여호와의 집에서 눈물로 통곡하며 하나님께 하소연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으나, 그녀의 속사정을 들은 후 그는 그녀에게 평안을 빌며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축복해주었다. 마침내 한나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게 되었다.(삼상 1장) 또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 왕은 성전 봉헌식을 하면서 공적인 기도를 드렸다.(왕상 8장) 다니엘 역시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상황에서 포로로 잡혀간 이후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단 6:10) 그가 예루살렘을 향하였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안나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는 일생을 살았다. 예수가 이사야 56장 7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신 것과 같이 그녀는 하나님의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삼은 것이다.(막 11:17)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루에 두 번 삼 시와 구 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기도하면서 그 중간인 육 시에 기도하는 것까지 합하여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을 실천한 반면, 그녀는 정기적인 기도 시간을 넘어 성전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초대교회 지도자들도 정기적인 기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기도 하였다.(행 3:1)
한국교회 역사에서도 교회는 기도의 장소였다. 개신교가 전래된 초기부터 지금까지 ‘교회로 조직되지 못한 모임’을 가리켜 ‘기도처’로 호칭하는 것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교회에서 또 다른 기도의 장소로 자리했던 곳은 산이었다. 이러한 산기도의 원류를 살펴보면 금강산 영맥이 자리하고 있으며,8 이 금강산 영맥의 원조는 이용도 목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28년 첫 목회지인 통천구역을 담임하던 시절부터 박재봉과 함께 금강산을 찾아 산기도를 시작하였다.9 그는 예배당 기도보다는 산 기도가 더 큰 은혜의 장소라고 이야기하며 예배당 기도에만 그치는 자신을 자책한 적도 있다.10
이처럼 그는 산기도를 중시하였지만, 그의 일상적 기도 장소는 예배당이었다.11 그는 슬퍼도, 기뻐도, 억울해도 교회로 달려가며, 주님이 그리울 때마다 초저녁이든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간에 무시로 교회에 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12 이러한 예배당은 자신에게 있어서 “판결 골짜기이며, 문제의 해결처이며, 특별 면회소이며, 상담소였다.”라고 고백하였으며, 심지어 “성전은 나의 애인”이라는 사랑 고백까지 하고 있다.13 특별히 그는 금강산에서 산기도를 행한 직후인 1928년 성탄절 전날 예배당에서 새벽 3시쯤 기도하던 중 환상을 통해 마귀를 격퇴하였다. 이 마귀 격퇴 사건은 이용도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의 놀라운 변화도 가져왔다. 송길섭 교수는 이 기도 체험을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을 차용하여 이용도의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이라고 칭하며 그가 전개한 부흥회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14 이는 습관을 따라 기도하던 성서 속 예수처럼(눅 22:39-46) 예배당에서 기도하던 그의 경건한 습관15이 가져다준 영적 체험이었다.

1928년 12월 24일 성탄절 전날 새벽 3시쯤 습관에 따라 교회에 나가서 기도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었다. 무서운 형상을 한 마귀가 기도하는 그를 방해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이용도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자세히 보니 성전 안과 밖에 마귀가 득실거렸고 마귀를 내쫓느라고 주먹을 휘둘러 벽과 창을 치다보니 손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귀를 다 물리치고 하나 남은 마귀를 쫓아가다가 그 마귀를 따라 교회 권사의 집으로 들어갔고 온 가족을 깨우는 등 법석을 떤 후에, 다시 빠져나간 마귀를 추적하였다. 잠시 후 마귀는 통천 거리를 지나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마귀 격퇴 사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이용도는 전과 아주 달라졌다. 그 다음날은 성탄절이어서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의 통곡을 하였고, 그 동안 낙심하였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에 나오기로 결심하였으며 교회를 박해하던 청년들까지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처음 부임했을 때 5, 60명에 불과했던 교인수가 150명 정도로 늘어났고 미지근하던 교회에 뜨거움이 넘치게 되었다.16


1 “주를 따라 이사함”, 「그리스도회보」 1913년 8월 11일.
2 김성광, 『금식기도』(강남출판사, 1996), 63-99.
3 길진경, 『영계 길선주』(종로서적, 1980), 181-182.
4 이태선, 『불의 사자 김익두 목사』(보이스사, 1993), 38-42.
5 정재헌 편, 『이용도 목사 365묵상집: 진리를 드소서』(행복미디어, 2015), 62-63.
6 김성광, 위의 책, 141-143.
7 고규상 목사 증언(2019년 9월 5일).
8 박경룡, 『주님따라 금강산』(전망사, 1986), 75 참조.
9 정재헌 편, 위의 책, 62-63.
10 정재헌 편, 위의 책, 170.
11 정재헌 편, 위의 책, 390 참조.
12 정재헌 편, 위의 책, 64.
13 정재헌 편, 위의 책, 146, 153.
14 송길섭, 『일제하 감리교회 삼대성좌』(성광문화사, 1982), 231-234 참조.
15 변종호・정재헌 편, 『이용도목사전집 2–일기』(주의것, 2019), 227, 234, 236, 239 참조.
16 이호문, 『목회 혁명』(다산글방, 1992), 191.



고성은 | 목원대학교와 호서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목회활동 연구』, 『철마 정경옥, 생애 연구』, 『동부연회 순교자열전』(공저) 등이 있다. 현재 충남 홍성에 있는 광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으며, 목원대 외래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2019년 10월호(통권 730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