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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한국교회사 속 예화를 찾아
성서와설교 (2019년 8월호)

 

  누구에게 전할까
  

본문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주님의 가장 크고 위대한 지상명령인 복음을 전하는 일은 기독교인들의 최대 사명이자 최고 의무이며 최후 과제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이 담긴 사도행전, 곧 성령행전은 이미 끝난 복음 전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에 의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모든 기독교인들도–비록 복음조차 상업화되어가는 현실이지만–성령의 임재 속에 담대하고 순수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

복음을 가족에게 전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일찍이 ‘이름 모를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하여 가정 복음화의 중요성을 암시하였다.(눅 16:19-31) 그런 가운데 사도 바울은, 복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가 개인은 물론 가정이라는 범주에서 일어난다고 역설하고 있다.(행 16:31) 마치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사도행전에는 온 가족이 구원의 역사를 이룬 여러 가정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곧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10:1-2)과 루디아의 가정(16:15), 그리고 빌립보 감옥 간수의 가정(16:33-34)과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의 가정(18:8) 등이다. 이러한 가정 복음화는 복음을 수용한 후 그 복음을 가장 먼저 전해야 할 우선적 대상이 가족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가정 복음화는 한국 사회에 복음이 전래된 초창기부터 강조된 일차 전도 목표였다. 이는 ‘가정을 인도하여 도에 이르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한국교회 최초의 번안 소설 『인가귀도』(引家歸道)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영국 선교사 존 그리피트(John Griffith)가 중국어로 집필한 전도용 책자를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가 우리말로 번역하여 1894년에 조선성교서회(朝鮮聖敎書會, 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행한 것이다. 이 소설은 발행된 이후 전도지로 사용되어 맹인 전도자 백사겸의 가족을 ‘인가귀도’ 했을 뿐만 아니라1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허다한 인가귀도의 사례들을 낳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 땅에 복음이 유입되던 선교 초기의 한국 사회는 현재의 핵가족 형태가 아닌 전통적인 대가족 사회였기에, 몇 대가 한꺼번에 입교(入敎)하는 희귀한 사례도 발생하였다. 소위 집단적인 가족 개종이 이루어져 달성 회당(현재 상동교회)에서는 손완식 씨 댁에서 5대가 입교하였고, 손호석 씨 댁에서도 4대가 입교하였다.2
이는 탁사 최병헌의 생가 가족도 매한가지였다. 이 귀하고 아름다운 일은 최병헌의 기독교 개종이 발단이 되었다. 그는 1888년 가을에 조원시(G. H. Jones)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 되면서 기독교를 처음으로 접하였고, 그 후 무려 5년이라는 장고한 세월 동안 성서를 연구하고 기독교 서적들을 탐독한 끝에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893년 2월 8일 정동교회(현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원시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그 이듬해인 1894년 자기 식구들을 데려오기 위해 충북 보은에 갔다가 동학의 접주가 된 처형으로부터 동학에 입교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최제우가 쓴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읽고 ‘동경대전은 유불선에서 몇 구절씩 뽑은 것으로 새것이 없다.’고 평가하며 ‘나는 죽을지언정 예수교의 진리를 따르겠다.’는 뜻을 단호하게 피력하였다.3 그만큼 복음에 대한 절대적 확신이 자리하였던 그는 가족을 전도한 가운데 1899년, 보은에 거주하고 있던 그의 생가 가족 3대가 모두 서울에 있는 정동교회에 입교하는 놀라운 일이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진 위대한 전도인 최병헌은 1927년에 별세하기까지 전도인 및 목회자로 무려 3,000여 명에게 손수 세례를 베풀며 그들을 주님께 인도하였다.4 그렇지만 그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가정 복음화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인간적이고 소박한 전도인이기도 하였다.5

정동 교우 최병헌씨는 구세주를 독실히 믿는고로 성신의 능력으로 외인에게만 전도할뿐 아니라 먼저 자기의 집안 식구를 권면하여 그 부인과 자녀가 다 신실한 교인이 되었으며 그 부친이 충청도 보은땅에 사는데 작년에 올라 오셔서 하는 말이 내 자식에게 들은즉 참 거룩한 도라 내려가서 교회 문답을 공부하고 집안에 있는 우상을 다 없이한 후에 통기 하마 하시더니 일전에 그 자제와 손자를 보내며 말씀하되 나도 늙어 행보하기 어려운고로 자여손을 대신 보내니 교회에 입교하여 달라 하기에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그 부자와 손자의 이름을 다 학습인에 붙였으니 최씨의 삼대가 다 구주의 문도가 된지라 우리 교회가 대한에 나아온지 불과 십여년에 이런 일이 있으니 영광을 어찌 하나님께 돌려 보내지 아니하리오

복음을 민족에게 전하라
유대인의 왕 예수 그리스도(마 2:1-11, 27:11)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의 우선적인 대상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마 15:24, 막 7:27)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사도 바울 역시 다른 무엇보다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이 복음을 통해 구원받기를 염원하는 절규를 폭풍처럼 쏟아내고 있다.(롬 9:1-5)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래되면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과 그것을 수용한 한국교회 교인들은 ‘민족 복음화’라는 새로운 세상을 동일하게 꿈꾸었다. 이 같은 거룩한 꿈과 비전은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A Million Souls for Christ)이라는 전도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원대하고도 야심찬 이 전도운동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서구적 방식의 전도집회보다는 토착적인 방법의 꾸준한 개인 전도가 더 효율적이고 항구적인 전도 방법이라는 점을 선교사들이 인지하게 된 점은 나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6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민족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개인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기로 결단한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았다. 일례로 복음이 전래되던 초창기 어느 한 전도인이 꿈속에서 전도한 이야기가 교계 신문에 실리기도 했는데,7 이는 당시 전도인들과 전도부인들의 전도 열정이 어떠했는지를 가늠케 하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이들은 성서 속 빌립 집사(행 8:5-6, 26-40)처럼 매일 전하고 기도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예컨대, 구한말 고위 관료를 지낸 유한익은 고향에 돌아온 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복음을 수용한 그는 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구령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가장 먼저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종 부부를 전도하고자 하였으나, 대감이라는 신분과 체면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주인과 종’이라는 벽을 허물고 ‘형님’과 ‘누님’이라는 존칭어를 사용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간곡히 권유하였다. 그의 끈질긴 권유로 말미암아 종 부부는 주님을 영접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전도의 말문이 열리게 된 유한익은 자신의 동네 주민들까지 전도하여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왔고, 이웃 동네까지도 귀하고 아름다운 전도의 발걸음을 하였다.8 이렇게 개인 전도에 힘쓰던 그는 훗날 목회자가 되어 부흥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9
이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신홍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방탕한 삶 속에서 거짓 기독교인으로 입교하였으나, 이내 성서를 통해 참 기독교인으로 변화된 가운데 개인 전도에 힘썼다. 그런 중 1906년부터 교역에 투신하며 회개를 본질로 하는 부흥운동을 펼치는 부흥사로도 맹활약하였다. 자칭 ‘장수옹’(長壽翁, An Old Christian)이라 일컬은 그는 민족 복음화를 꿈꾸며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교역에 최선을 다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10

누구를 막론하고 종교의 취미를 맛본 후에 종교 전파심이 백열(白熱)할 것은 정리(定理)라고 할 것이다. 그것보다도 종교가 무엇인지 도덕이 무엇인지 모르고 죄악 중 멸망을 자취하는 인생을 볼 때에 차마 볼 수 없음으로 교역에 헌신하며 지어희생(至於犧牲)까지하는 자가 많다. 기독교창립 2천년동안 헌신자들을 들어 말하자면 수천수백으로 헤아릴 수 있다. 장수옹도 종교의 취미를 맛본 후에 죄악파도 중에서 헤매이는 조선민족을 차마 버려 둘 수 없어서 교역에 헌신하여 십수년 근무할새 사회나 개인의 고통받는 것을 볼 때에 가슴에 칼이 들어오는 것 같이 아프고 쓰린 마음으로 할수 있는데까지 활동하였다. 밤이나 낮이나 중심에서 사라지지 아니하는 것은 오직 이 불쌍한 인생을 어찌하면 구원할까하는 관념이다. 이것이 참으로 기독의 애의 정신이다.

복음을 만민에게 전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지상명령은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막 16:15-16) 이 명령에 따라 사도들 및 주님의 제자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실천하였다.11 특히 바울은 세 차례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롬 15:19)
바울에 의해 유럽 지역으로 복음이 확산되었다면, 사도 도마를 통해서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이 확산되었다.12 심지어 일각에서는 도마가 한반도까지 왔다는 가설도 제기한다.13 그렇지만 이 땅에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파한 이들은 미국과 유럽 등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이들로부터 복음을 수용한 한국교회는 한인 디아스포라를 위한 선교를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만민을 향한 선교도 시작하였다.
만민을 향한 선교의 문은 복음을 수용한 지 3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인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될 때 설립 기념으로 외국에 선교를 하자는 놀라운 결의를 통해 그 서막이 열렸다. 이 결의에 따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미국의 장로교 총회, 그리고 선교지인 중화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머리를 맞댄 끝에, 공맹(孔孟) 문화의 발상지인 산동성(山東省) 지역에 선교활동을 펼치기로 뜻을 모았다. 산동성 중에서 한국 장로교가 선교해야 할 곳은 오지 중 오지였던 래양현(來陽縣)이었다. 1913년부터 래양현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본토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한 산동성 선교는 지역을 점점 확장해나갔으며, 훗날 단독노회인 래양노회까지 조직하였다.14
이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가진 산동성 선교에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선교활동을 감행한 선교사는 방지일이었다. 그는 1937년 총회 선교사로 파송되어 1957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홍콩으로 추방되어 귀국하기까지 21년간 선교활동을 했다. 이로써 산동성 선교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 방지일 목사의 만민을 향해 펼친 선교의 역사는 사실 그 이전에 국내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며 노방전도를 하던 시절 방지일은 신앙 월간지인 「게자씨」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게자씨 사 이름으로 평양 전차에 성구(聖句)만으로 광고할 때 ‘문의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게자씨 사로 연락을 줄 것’이라는 말을 한글과 일어로 작성하여 일본인도 보게 하였다. 또한 전화번호부에 나온 주소로 통신전도를 할 때에도 한국인에게는 한글 전도지를, 일본 사람에게는 일어 전도지를 보냈다. 나아가 노방전도를 할 때에도 한국인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도 전도를 하였다. 세계 복음화를 위한 그의 첫 행보였다.15

평양에서 시간이 나면 노방전도를 나가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평양 의대생이었던 대만 사람 解亭邦(해정방)이라는 학생을 노상에서 전도한 바 그가 관심을 보여 집에도 청하고 때로 기도회에 오게 하였는데 결국은 믿게 되었다. 내가 후에 대만에 갔을 때에 그를 찾았다.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는데 예수를 믿고 있음을 보았다. 언제 어디서든 씨를 뿌리는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선교사로 떠나기 전에 평양에서 펼친 전도의 방법들이다. 지금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해냈을까. 오직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단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자는 그 단순한 심정에서였다. 그러하였기에 유학을 포기하고 선교사로 가게 되었고 오늘까지도 일하고 있음은 하나님께서 써 주심이라고 믿고 있다.

1 양주삼 편, 『조선남감리교회삼십년기념보』(조선남감리교회전도국, 1929), 51-52; 오명동 편, 『한국 초대교회 맹인 전도자 백사겸 이야기』(한들출판사, 2002), 53-66 참조; 오명동, 『아름다운 보배』(월드북, 2018), 79-90 참조.
2 “오대입교 달성회당”,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9년 3월 22일, 1.
3 최우익 편저, 『최병헌 목사 약전』(정동삼문출판사, 1998).
4 노블 부인 편, 『승리의생활』(조선기독교창문사, 1927), 19.
5 “삼대가 입교함”,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9년 3월 1일, 1.
6 서명원, 이승익 옮김, 『한국교회 성장사』(대한기독교서회, 1966), 63-64.
7 “꿈에 전도한 일”,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8년 7월 13일, 5.
8 조상국・조창희, 『개척자의 발자취는 원대한 꿈을 싣고』(도서출판 동문, 2001), 70-72.
9 양주삼 편, 『조선남감리교회삼십년기념보』(조선남감리교회전도국, 1929), 177-178.
10 신홍식, 『장수옹』(조선야소교서회, 1929), 21-22.
11 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엄성옥 역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도서출판 은성, 2003), 121.
12 김동주, 『기독교로 보는 세계역사』(킹덤북스, 2014), 102 참조.
13 정학봉, 『아시아 기독교, 경교의 이야기』(도서출판 동서남북, 2009), 88-90.
14 방지일, 『중국선교를 회고하며-임마누엘』(선교문화사, 1996), 16-17.
15 방지일, 『나의 나됨』(선교문화사, 2005), 45-46.



고성은 | 목원대학교와 호서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목회활동 연구』, 『철마 정경옥, 생애 연구』, 『동부연회 순교자열전』(공저) 등이 있다. 현재 충남 홍성에 있는 광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으며, 목원대 외래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2019년 9월호(통권 7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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