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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분단 상황에서 성서읽기
성서와설교 (2019년 2월호)

 

  두 창조 이야기의 합류와 한반도
  창 1:1-3:24

본문

 

유대인들은 새해 첫날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묵상하는 신앙 전통이 있다. 창조 이야기의 신학 주석을 통해 오늘날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조명해보자.
창세기에 나타나는 두 창조 이야기(1:1-2:3, 그리고 2:4 하반절-3장)는 그 언어나 내용은 물론이고 신의 이름이 다르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문서이다. 한글 성서는 ‘하느님’1 그리고 ‘야훼(여호와) 하느님’으로 번역하여 이 둘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지만, 히브리어로는 ‘엘로힘’(Elohim)2과 ‘야훼’(Yahweh)3로 전연 다르다. 흔히 원역사로 일컬어지는 창세기 1-11장은 주로 제사장 문서(Priestly Writings)와 야훼 문서(Jahwist Writings)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사장 문서는 바빌론 포로기 이후 사제들에 의해 전승된 문서를 의미하고, 야훼 문서는 신의 이름이 ‘거룩한 네 글자’(JHWH)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야훼 문서라고 불린다.4
히브리 성서(Bible)5는 본래부터 종교 경전이 아니라 히브리 혹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집단들의 이야기를 후에 신앙의 관점에서 재편집(redaction)한 것이다. 두 개의 창조 이야기 또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창조 이야기인 ‘에누마 엘리쉬’(the Enuma Elish)와 이집트의 창조 이야기를 기초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이 신학계의 검증된 학설이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

우선 7일이라는 창조의 시간 설정이 고대 바빌론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하루는 신앙의 시간으로 역사 변혁의 하늘 시간 곧 카이로스(καιρός)를 뜻하는 것이지, 물리적 의미의 시간인 크로노스(χρόνος)를 의미하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하여 지구의 역사를 6,000년으로 말하는데 이는 물론 잘못된 것이다. 한 주간을 7일로 계산하는 방식은 해, 달 그리고 육안으로 구별되는 5개의 별을 기초로 하며, 고대 중국에서도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 곧 7은 우주를 형성하는 완전 숫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수학에서는 아라비아 숫자인 십진법을 따르고 있지만, 고대 히브리인들은 12라는 숫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1년을 열두 달로 구분하였음은 물론 민족의 뿌리를 열두 지파로 보고 있다. 민수기 7장을 보면, 하느님께 제사드릴 때에 열두 마리의 황소를 열이틀에 걸쳐 드리고 있다.6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창조의 기원을 여는 창세기 1장 1절은 7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고, 2절은 그 배수인 14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후렴처럼 반복되는 “그대로 되니라”,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어구 또한 7번 등장한다. 게다가 이를 히브리어로 읽으면 운율이 척척 맞아 떨어진다. 달리 말해 이는 창조주 하느님을 찬양하는 시(詩)였으며 아마도 사제들이 예배를 시작하며 읊었던 경배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은 시편과 같이 시어(詩語)를 살려 번역을 하고, 많은 여백을 남겨두는 시의 형태로 편집하는 것이 창세기 저자의 의도를 살리는 옳은 방식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창공/하늘’, ‘땅’이라는 단어가 각각 7의 3배수인 21회 나오고, ‘엘로힘’은 7의 5배수인 35회 등장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창조 이야기를 결말짓는 2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문장 또한 모두 35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하느님이 그러했듯이 언어의 천재이자 놀라운 수학자였다.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얼마나 놀랍고 멋들어진 작품인가? 만약 김소월이나 윤동주의 시가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읽힌다면 그 뜻이 얼마나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창세기 1장이 주는 영적 감동을 온전히 느끼는 일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비록 히브리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바빌론의 창조신화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둘은 완전히 다르다. 바빌론 신화에서는 신들 사이의 복잡한 투쟁의 결과로 이 세상이 만들어졌지만, 성서에서는 유일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말씀으로 단번에 창조하신다. 1장의 저자는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남자와 여자)이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태어났다는 사실과 7일째는 하느님이 쉬셨으니, 모두가 쉬는 ‘안식일’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형상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을 띠고 태어났다는 말은 크게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모든 인간은 신의 아들딸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이는 곧 노예해방과 남녀평등을 외친 인권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에 하느님의 형상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두 창조 이야기의 합류와 한반도 93 통치자인 왕이었다. 이집트의 ‘바로’가 그러했고, 바빌론 제국의 왕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고대 히브리인들은 절대왕정의 세계에서 바빌론의 포로(노예)인 자신들 또한 신의 형상을 띠고 태어났음을 주장한 것이다. 이 선언은 단순한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을 넘어서는 일종의 혁명적 주장이었다.
둘째,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하느님의 청지기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향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과 함께 땅을 정복하고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지배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필자는 여기서 히브리어의 ‘카바쉬’( כָ בַּשׁ )와 ‘라다’( ר דָה )를 고대의 군사적 지배문화를 반영하는 ‘정복’과 ‘다스리다’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하느님 형상’이 내포하듯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바빌론 군사제국의 지배문화에 대한 비판을 품고 있으므로 군사제국의 언어로 창조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은 그 정신에 위배된다. 하느님 형상 이야기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청지기 직분을 말하는 것이다.
서구신학에서 이 구절을 군사적 용어로 잘못 번역한 나머지 유럽 기독교 국가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원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을뿐더러 자연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 착취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지구 생태계는 인류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가 살아갈 수 없는 극단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따라서 성서의 ‘정복’과 ‘다스리라’는 단어는 보존(保存)과 공존(共存)이라는 생태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하느님 형상은 안식일 제정과 연결된다. 7일째에 하느님이 쉬셨듯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태어난 자신들 또한 쉴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바빌론의 노예들은 동물과 같이 쉼 없이 일해야 했다. 그런데 쉴 권리가 없는 그들이 안식일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곧 노예해방선언이었다. 안식일( שַ בָתּ , 샤바트)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에서 교회에 나와 하느님께 예배하는 것으로 그치는 날이 아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남녀와 주종(主從) 사이의 차별 구조를 깨는 창조 회복의 날이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시작하는 저녁에 ‘샤바트 샬롬!’이라고 서로 인사한다. 흔히 평화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샬롬’( שָלוֹם )은 온전한 상태를 뜻한다. 곧 안식일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원래의 온전한 창조를 회복하기 위한 날이다. 이 안식일은 후에 안식년과 희년(Jubilee)의 모체가 된다. 예수는 공생애 출발과 함께 이 희년(‘은총의 해’)을 선포하신다.(눅 4:19)

두 번째 창조 이야기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사람은 6일째에 마지막으로 창조된 반면,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에 앞서 제일 먼저 창조된다. 그리고 1장에서와 같이 그냥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는( בּ רָא ) 것과는 달리 아담( אָ דָם )은 흙( א דָ מָה )으로부터 빚어진다. 야훼로부터 생기를 부여받긴 하지만, 1장처럼 하느님의 형상을 띠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담의 갈비뼈7로부터 여인 하와가 만들어진다. 2장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인간이 에덴동산8 중앙에 있는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범죄를 저지름으로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남자는 죽도록 땅을 일구어야 하는 노동으로 고생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두 번째 창조 이야기의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야훼는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선택하기를 바랐지만, 뱀의 유혹을 받은 두 창조 이야기의 합류와 한반도 95 인간은 선악과의 열매를 선택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한다.9
여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을 뜻할까? 성서에서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갖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잘못 해석하면 선악과 금지 명령이 야훼께서 도덕적 판단력을 상실한 어리석은 인간이나 혹은 무조건 순종하는 노예형 인간을 원하셨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선악과 금지 명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히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원죄를 ‘신과 같아지려는 교만(hubris)’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차피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즉, 단순히 반인본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선악과 금지 명령을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 이야기가 고대 절대왕정 시대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선과 악의 기준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사실 선악은 상대적 개념이지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당시 신탁(信託)의 이름으로 선과 악이 결정되는 최종 결정권은 누가 갖고 있었을까? 불과 300년 전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말을 했다. 곧 선악과 금지 명령은 인간 일반을 향한 명령이 아닌 절대권력에 대한 경계였다. 즉 선과 악을 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절대권력을 숭상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바울 이래 서구 신학계는 이를 죄의 기원, 소위 원죄론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원죄론은 구원에서 인간이 지닌 선에 대한 실천 의지를 빼앗아버린다는 함정이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부패와 타락의 원인이기도 하다.

하나로 합류된 창조 이야기와 한반도

두 개의 창조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라는 장소와 바빌론 포로 시대라는 같은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서로 다른 계층에 의해 전승됨으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그 차이는 이러하다. 첫째, 1장은 사제들에 의한 안식일 제정이 핵심이지만, 2장은 평민 계층 지도자들에 의한 절대권력을 향한 비판과 제어(制御)가 핵심이다. 둘째, 1장이 인간이 신의 형상을 타고났다는 성선설(性善說)을 말한다면, 2장이 원죄론을 말하며 성악설(性惡說)의 입장을 갖는다. 셋째, 1장이 7이라는 우주 숫자에 맞춘 시간 구조 이야기라면, 2장은 에덴동산 안에서 일어나는 공간(空間) 구조 이야기이다. 넷째, 1장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느님인 반면, 2장은 야훼로 시작하지만, 이어지는 에덴동산에서의 주인공은 선악과를 둘러싼 아담과 하와이다.
이와 같이 두 문서는 사제와 평민, 성선설과 성악설, 공간과 시간,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대비되는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문헌의 역사로 보면 1장의 기사는 2장의 기사보다 수백 년 후에 나왔다. 곧 1장의 P전승 집단10은 2장에 나타난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비관적 입장에 대한 반론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의 최종 편집자는 대립하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하였다.
이를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 비추어보자. 남과 북은 70년 넘게 단절된 상태로 살아오다 보니 여러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경제적으로 볼 때, 남쪽은 자본주의, 북쪽은 사회주의를 따른다. 사회법에서 볼 때, 남쪽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개인주의, 북쪽은 평등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이다. 사회 이념에서도 남쪽은 미국식 기독교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반면, 북쪽은 소련의 마르크스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조선식 주체사상을 갖고 있다. 결론은 이렇게 많은 다름 속에서도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잡아먹는 흡수통일을 배제하고 서로가 공존하는 평화통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모든 분야에서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제3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우리는 4・27판문점선언을 기점으로 새로운 남북평화 시대를 열었다. 천년 이상을 하나의 왕국으로 살아온 민족이지만, 외세의 개입에 의해 전쟁을 겪은 남과 북이 서로 화해하고 하나의 국가로 나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1장의 전승집단(P)과 2장의 전승집단(J)이 JP라는 새로운 제3의 전승집단으로 엮어지듯이 우리 또한 남북의 차이를 넘어 제3의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단순히 정부끼리의 대화가 아닌 전 민족 차원에서의 대화를 통해 하나하나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1 필자는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고어(古語) ‘하 님’의 본래 발음이 ‘하나님’보다는 ‘하느님’에 가깝고, 우리 민족의 전통을 잇고 현대 사회와 소통할 수 있으며, 이웃 종교와의 대화가 수월하다는 관점 때문이다.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한 초기 선교사 로스(J.Ross)는 ‘하늘에 계신 님’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공동번역 성서는 물론 북한의 성서 또한 ‘하느님’을 사용한다. ‘하나님’은 유일신이라는 개신교의 독특성을 넘어 가톨릭은 물론 이웃 종교를 배제하는 신앙의 독단을 낳을 위험이 있다. 출애굽기 3장 14절의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YHWH)에 대한 문자 풀이가 뜻하는 신성(神性)은 유일독단이 아닌 다름을 포용하는 자연성(自然性)이다.
2 중동의 신들은 ‘엘’로 통칭된다. 엘로힘은 그 복수형이다.
3 공동번역 성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우리말 성서는 출애굽기 3장 14절의 ‘YHWH’를 옛 발음인 ‘여호와’로 고집하지만, 세계교회는 오래전에 ‘야훼’(혹은 ‘야웨’)로 수정하였다. 새번역 성서에서는 이를 ‘주님’으로 번역했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YHWH를 직접 발음하는 대신 아도나이(adonai, 주님)라고 부른 전통에 근거한 것이지만, 필자는 원본에 충실하는 것이 번역의 기본이라 여기기에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4 신의 이름을 ‘엘로힘’으로 나타내는 문서는 ‘E문서’라고 불린다. P문서와 E문서는 동일한 신명(神名)을 사용하지만, P문서가 E문서보다는 수백 년이 경과한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 예루살렘 성전 중심이라는 점에서 내용상 큰 차이가 있다. J문서는 기원전 1,000년경의 다윗 왕 시대 예루살렘 중심의 남왕국에 그 뿌리가 있는 반면, E문서는 그보다 이전인 족장시대의 실로 혹은 길갓 성전을 언급하며 북왕국에 그 뿌리가 있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4문서설(JEDP)을 비판하며 공관복음서의 형성 과정과 같이 보다 복잡한 공동체적인 형성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본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이영재, “오경 연구의 최근 동향”, 이영미・이영재 외 공저, 『토라의 신학』(서울: 동연, 2010), 15-51을 참조하라.
5 코이네 그리스어 ‘biblia’는 ‘책들’을 의미한다.
6 출애굽기 12장 1-20절에는 유월절의 기원이 나온다. 야훼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그달을 한 해의 첫 번째 달로 정하도록 하고 그달의 14일째부터 21일째에 이르는 기간을 무교절(7일간의 축제 기간)로 공포한다는 점에서 바빌론의 문화를 반영한다.(P문서) 그러나 이어지는 21절 이하에서는 모세만을 대상으로 유월절에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무교절의 기원(39절)을 다르게 설명한다.(JE문서)
7 갈비뼈( צֵ לָע )의 또 다른 의미는 ‘곁’(side)이다. 하와가 아담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아닌 분리될 수 없음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이를 ‘돕는 배필’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나 하위 존재로 여기는 성차별적 언어이다. 돕는 배필은 ‘함께하는 짝꿍’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수메르 신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수메르어로 갈비뼈는 ‘생명’이라는 의미가 있다. 곧 ‘하와’의 본래 의미는 ‘생명의 어머니’이다.
8 수메르 신화에서는 ‘에디누’(Edinu)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9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Gilgamesh) 서사에는 ‘생명나무’가 나오고, 늙은이가 이 열매를 먹고 젊어지자 뱀이 나무를 탈취해간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나오지 않는다.
10 사제집단(P)은 페르시아 시대에 성전 제사를 위해 하느님과 모세5경을 절대화시킴으로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2장에서의 야훼는 인간과 함께 에덴동산을 거니는 마치 친구(?)와 같은 인상을 받지만, 1장의 하느님은 매우 거룩한 분으로 인간과의 대화는 사제들이라는 중간 계층(브로커) 없이는 불가능하다.


조헌정 | 신약학(역사적 예수)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 등이 있다. 예수살기 상임대표, 「현장언론 민플러스」 이사장, 평화통일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2월호(통권 7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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