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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와설교 > [성서와 설교] 분단 상황에서 성서읽기
성서와설교 (2019년 1월호)

 

  마태 족보의 비밀
  마 1:1-17

본문

 

복음서에는 예수의 족보가 두 곳에 나온다.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이다. 이 두 복음서는 마가복음과 함께 동일한 시각에서 기록되었다고 하여 ‘공관(共觀, Synoptic)복음서’라고 불리지만, 두 족보의 차이는 매우 크다. 마태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로, 곧 과거에서 현재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지만, 누가는 반대로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혁명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예수에서 올라가기 시작하여 아브라함, 여기에 그치지 않고 노아, 무드셀라, 에녹, 아담,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족보에 포함시킨다. 이런 차이에 대해 신학적으로 마태는 유대인 기독교인을, 누가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복음서를 기록하였다고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마태는 예수를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이해한 데 반해, 누가는 세계(‘로마제국’)인의 한 사람으로 이해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예수 사이의 족보를 살펴보면, 언급되는 조상들의 이름이 다를 뿐만 아니라 대(代) 수조차 상당한 차이가 난다. 한 사건에 대한 서술이 세 공관복음서 내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이한 족보는 신학적 차이 곧 독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인류의 기원과 역사에 관하여 성서와 인문학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또한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서로를 보완하는 신학과 과학의 독특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신학은 왜(why)를 질문하지만, 과학은 어떻게(how)를 질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족보를 ‘사실로서의 역사’(Historie)가 아닌 ‘해석된 역사’(Geschichte)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마태가 족보를 기록한 이유 중 하나는 예수가 정통 유대 가문의 후손임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예수 시대에 갈릴리 출신이라 함은 곧 하류 계층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오늘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만났는데, 그분이 우리 조상들이 기다려온 분이다. 같이 가보자.” 나다나엘이 반문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마태는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족보의 대 수가 정확히 40이라는 것이다. 마태의 족보 마지막 부분에서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이고, 다윗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 14대이며, 바빌론으로 끌려간 다음 그리스도까지 14대라는 구절 때문에 전체가 42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윗과 바빌론이 앞뒤로 반복되기에 42에서 2를 빼면 40이 되고, 실제 그 수를 세어보아도 40대이다.

40과 광야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출애굽을 한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에 머문 기간이 40년이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십계명을 받기까지 기도한 날이 40일이다. 선지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의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친 후에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호렙산에 이르기까지 광야를 걸어간 기간이 40일이다.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 나가 금식하며 기도한 날이 40일이다. 변화산상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이 모두 광야 40일 기도와 직접 연계된다.
광야(廣野)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rb:d>mi)이다. 여기에서 ‘미’(mi)는 장소를 뜻하는 접두어이고, 히브리어 어근 ‘다바르’(rb"d")는 말씀 혹은 언약을 뜻한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서술할 때 사용된 바로 그 단어이다. 곧 ‘다바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하늘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광야’ 혹은 ‘빈들’로 번역된 이 히브리어 단어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허허벌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 변혁을 가져오는 하늘의 말씀이 임하는 시공간(視空間)을 뜻한다.
모세, 엘리야, 예수는 모두 40일간의 광야 기도생활을 거쳐 새 역사의 주역으로 나섰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애굽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머무른 것 또한 단순히 고통스러운 훈련 기간이 아니라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새 인간이 되는 은총의 기간으로 이해해야 한다. 노아의 홍수가 40일 주야로 계속되었다는 이야기도 단순히 홍수를 통한 심판을 넘어 노아의 가족을 통한 새 역사 창조에 그 방점이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의 족보를 40대로 정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역사가 시작하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족보의 여인들을 통해 드러나는 마태의 고발

마태의 족보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이 족보에 여성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과거 우리나라도 그러했지만, 이천 년 전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온전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의 숫자를 셀 때 여성은 제외하였고, 랍비들은 성전에서 하루 세 번 기도하면서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음을 감사했다. 그런데 이러한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마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메시아로 칭송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성의 이름을 넣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을 넣었다. 게다가 이들은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 커다란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여인들이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여성은 다말이다. 다른 여성은 몰라도 다말의 이름만은 결코 예수의 족보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다말의 아들은 남편과의 사이가 아니라 시아버지 유다와의 사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유다에게는 세 아들(엘, 오난, 셀라)이 있었다. 유다는 이주를 하면서 가나안 여인 다말을 며느리로 맞아 큰아들 엘과 결혼을 시킨다. 그러나 큰아들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므로”(창 38:7) 자식 없이 죽게 된다. 그러자 당시 풍습에 따라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인 다말과 결혼을 하였는데, 그 또한 야웨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자식 없이 죽는다. 그러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마저 죽을까 두려워 셀라가 장성한 후에 결혼시키겠다는 말을 하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시아버지 유다는 장성한 셀라를 다말에게 줄 의향이 없었다. 그러자 다말은 창녀로 분장한 후 유다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게 되었다. 배후 역사와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전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불륜 관계이다. 설사 어찌어찌하여 일어났다 하더라도 필사적으로 감추어야 할 사건이다. 그런데 마태는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서 자식을 얻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여성은 라합이다. 라합은 본래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을 보호해준 대가로 그녀의 일가족이 죽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게 된 것이다.
세 번째 여인은 모압 여인 룻이다. 룻은 유대 땅에 기근이 들어 모압 땅으로 피난온 한 유대인 가족의 며느리가 된다. 룻은 남편과 자식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와서 보아스를 만나 다윗 왕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는 복을 받는다. 그런데 룻은 보아스와 정식으로 결혼한 후에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추수 기간에 (술에 취한) 보아스가 혼자 자고 있을 때에 살며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후에 정식으로 결혼을 하긴 하였지만, 이는 19금(禁)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네 번째로 등장하는 여인은 다윗 왕의 후처로 솔로몬을 낳은 밧세바이다. 그런데 마태의 족보에는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 ‘우리아의 아내’라고 기록되었다. 다윗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 장군이 전쟁터에 나가 왕과 왕국을 위해 전투하는 동안 권력으로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였다. 물론 이 부정한 행위는 후에 나단 선지자의 우회적 비판을 통해 다윗이 그 죄를 회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둘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은 불륜의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다. 중요한 것은 마태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는 다윗의 죄를 보다 확실히하게 밝히기 위해 앞의 세 경우와 같이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고’라는 방식으로 기록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는 요즘 말로 하면 미투 고발이다.(#MeToo, ‘나도 당했다’) 국내에 미투운동을 촉발한 사람은 서지현 검사이다. 그녀는 이 고발 사건으로 인해 4월에는 ‘젊은 지도자상’을, 5월에는 ‘들불상’을 그리고 11월에는 환경재단에서 주최하는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시상식에서 ‘진실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들불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나서게 된 이유는 8살 때 경험한 광주민주항쟁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진실상’ 수상 자리에서는 “어둠을 물리치는 방법은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촛불 하나를 켜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촛불 하나를 켰다. 그런데 작은 촛불 하나 켜는 일은 곧 온몸을 불살라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고백했다.
오늘날의 미투운동은 2006년 미국의 여성인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시작했다. 그러나 진정한 창시자는 마태이다. 마태는 시아버지로부터 출산의 권리를 박탈당한 다말, 남성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기생 라합, 떨어진 이삭을 주워 먹고 살아야 했던 가난한 과부 룻, 다윗의 욕망의 희생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남편의 비참한 죽음까지도 받아들여야 했던 밧세바, 이렇게 네 여인의 이름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40대(代)의 역사 속에 일부러 집어넣음으로 성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화해와 포용의 새 역사를 향하여

더 나아가서 이 여인들은 이방 출신이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고, 룻은 모압 사람, 밧세바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였다. 예수 이전부터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할례를 받고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통해 야웨를 따를 때만이 구원받는다는 선민사상을 굳게 붙잡고 있었다. 이 사상은 당시 유대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였다. 마태는 아브라함의 순수한 혈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위에 찬 것인지를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이방 민족은 유대 민족과 단지 종교적으로 구별될 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적으로는 적대적 관계였다. 마태는 네 명의 문제 많은 이방 여인들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예수의 족보에 삽입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역사는 아브라함의 자손인지 아닌지에 따라 구별하고 차별하는 ‘배타의 역사’가 아닌,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화해와 포용의 역사’임을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환상을 경험한다. 여러 동물이 담긴 바구니가 내려오고 그 동물들을 잡아먹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그런데 거기에는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규정한 동물들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는 먹기를 꺼려하였다. 그때 하늘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한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 베드로는 이 같은 일을 세 차례 경험한다. 베드로는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던 중, 가이사랴에 거주하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초대를 받는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깨닫는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방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을 전하자 성령이 임하고 방언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세례를 베푼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재현이다. 곧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족보에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가 담겨 있다. 이 여인들은 당시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로서 소외받고 차별받는 민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말은 시아버지의 부권(父權)에 눌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고, 라합은 남성들의 성노리개였다. 또한 룻은 이방 여인 과부였으며, 밧세바는 비록 아들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지만 다윗에게 겁탈을 당하고 충직한 남편이 간교한 권력에 의해 죽게 되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한(恨) 많은 여인이었다. 이들이 아브라함과 예수의 족보에 포함된 일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꼴찌가 첫째 되는 역사 뒤집힘’과 다름이 없는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또한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외친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라는 구절의 구체적인 예이다.
선민사상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을 향한 마태의 족보 고발 사건은 유대인들의 신앙과 사회 이념을 뒤흔드는 폭탄선언이었다. 마태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고 이룩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는 유대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 역시 구원의 반열에 포함되어 있다는 신학적 선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차별과 배타의 역사가 아닌 화해와 포용의 역사 창출을 선포하고 있다.
이 메시지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연과 학연, 그리고 빈부에 따른 차별의 현실을 끝내야 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발생하는 차별과 혐오를 없애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남한 사회에는 10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온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또한 연변 동포나 북한 동포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현재 남한에서 살고 있는 탈북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 사회로부터 받는 차별을 견디다 못해 기회가 허락된다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2018년 한 해에 남북관계는 유례없는 진전을 보였다. 판문점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정상회담, 그리고 평양에서의 세 번째 만남에 이어 이제 서울에서의 네 번째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남북관계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알게 모르게 교육받고 습득한 북한에 대한 적대감은 여전히 우리의 생각 속에, 그리고 사회 안에 남아 있으며 특히 교회 안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 무신론을 주창해온 북한의 공산주의와 기독교 신앙은 함께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가 족보에서 네 여인의 이름을 밝히 드러내지 않았다면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른 신을 믿는 이방 족속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고정 관념을 계속 유지하였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형제의 나라인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아시리아의 혼혈점령정책으로 인해 피가 섞이자 이들을 개와 같이 여긴 것이다. 이들과 대면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더럽히는 일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는 이 금단(禁斷)의 땅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가보안법을 어긴 것이다.
화해와 통일의 시대를 맞아 우리 기독교인들이 취해야 할 복음의 자세는 무엇일까? 변화의 21세기를 맞아 북한 또한 변화하고 있다. 사회주의를 제창하고 헌법에 종교의 자유 조항을 삽입하였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의 자유와는 차이가 있다. 만약 우리가 마태가 족보에서 말하고자 했던 구원의 포용과 통합 사상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런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마태가 오늘 이 한반도 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시대를 바라보며 어떤 족보를 기록할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부풀어 오른다.

조헌정 | 신약학(역사적 예수)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 등이 있다. 예수살기 상임대표, 「현장언론 민플러스」 이사장, 평화통일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7월호(통권 7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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