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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19년 1월호)

 

  혼자 성경을 처음 번역한 한국인 이수정
  

본문

 

외국 선교사 지원자들은 대부분 본국에서 파견되기 전에 미리 파견되려는 나라의 국어를 배우거나, 아니면 선교지에 부임해서 배운다. 그런데 언더우드는 한국으로 부임하던 길에 일본에 들러서 몇 달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현지에 파견되어 국어와 문화를 함께 배운 것이 아니라 제3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운 특이한 경우인데,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준 교사 이수정은 그 이전이나 이후에 활동이 알려지지 않은 특이한 인물이다.

|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학과 교사 이수정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 달 동안의 거친 항해를 마치고, 1885년 1월 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헵번 박사(Dr. Hepburn) 집에 머물게 된 언더우드는 1월 26일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 박사(Dr. F. F. Ellinwood)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의 알렌 의사(Dr. Allen)가 헵번 박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알렌 의사가 자신이 당장 한국으로 오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오후 이곳을 떠나 나가사키로 가는 기선이 있었습니다. 나가사키에는 한국으로 가는 기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는 않지만, 필요한 것들을 구하지 못한 채 그렇게 빨리 떠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곳에 있는 선교사들, 또 한국인들과 안면을 익히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루미스 씨(Mr. Loomis)는 이번 주에 그분들에게 저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2주 내지 3주 후에 있을 다음 번 기선을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1

언더우드는 요코하마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들을 찾아다닌 셈이다. 그러나 두세 주가 되어도 제물포 항으로 가는 배는 없었다. 그는 2월 18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3월 26일 전에는 한국의 제물포 항으로 가는 배가 없어서, 그때까지 헵번 박사 댁에 머무르려 합니다. 그러는 동안, 일본으로 망명해 요코하마에 있던 몇몇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제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었고, 그 보답으로 저는 영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국어에 관한 책은 몇 권밖에 없지만, 저는 그 책들을 얻게 되어 그것들의 도움을 받으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그리 큰 문제로 보이지 않지만, 저는 아직 그러한 어려움에 직면하기 전 상태에 있습니다.2


언더우드는 이 무렵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한국어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단계였지만,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미리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선교부에 ‘여성 선교사를 미리 일본에 파견하여 한국어를 배우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조언하였다.

제가 알기로, 같은 여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한국 여성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이렇게 하는 것도 현재 결혼한 여성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미망인이나 젊은 미혼 여성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만일 지금 일본으로 몇 사람을 파송한다면 이곳에서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을 것이고, 길이 열리자마자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3

언더우드가 여성 선교사를 미리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은 머지않아 여성 선교사가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한국어를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교사를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더우드는 한국어 교사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막연하게 ‘망명객’이라고만 기록했는데, 이 시기의 망명객이라면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등을 가리킨다.
이때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이수정은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국내 어떠한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 신비한 인물이다. 이수정의 이름은 일본의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1882년 10월 15일 기사에 처음 공식적으로 나타난다.

이번 내조한 조선인 이름은 정사 박영효(朴泳孝), 부사 김만식(金晩植),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정사 서기 3명, 부사 서기 2명, 생도 2명, 종사관 서기 2명… 또 유람하기 위해 동행한 조선 사람들은 민영익(閔泳翊), 박의병(朴義秉), 이수정(李樹廷), 김옥균(金玉均) 여러 명과 종사(從事) 등으로 총원 30명 정도 된다.

이 기사를 보면 이수정은 공식적인 수행원이 아니라 유람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고 하였다. 민영익, 김옥균 등과 함께 대표적인 인물로 이름을 올렸으니, 일본 신문기자들이 그를 중요한 인물로 여겼던 듯하다.
4차 수신사 일행은 10월 13일 도쿄마루(東京丸) 편으로 요코하마에 입항하여, 그날 기차를 타고 도쿄까지 와서 세이쇼지(靑松寺)에 숙소를 정하였다.
수신사 일행의 동선(動線)은 일본 기자들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수정은 공식적인 수행원이 아니어서 수신사 일행과 동선이 달랐으며, 신문기사에도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수정이 양반 출신인지 아닌지에 관한 기록도 확실치 않은데, 일본의 기독교 잡지 「칠일잡보」(七一雜報) 1883년 5월 11일 자에 그가 세례받은 기사가 실리면서 인적사항이 소개되었다. 임오군란 때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명성왕후를 보호하여 시골로 피란시킨 공으로 민영익의 신임을 받은 선락쟝군(宣略將軍, 종4품)이라는 것이다. 당시 정권의 실세인 민영익이 1882년 10월에 4차 수신사를 따라 개인적으로 일본에 오면서 이수정을 데려온 목적이 분명치는 않지만, 호위무사 겸 신문물 시찰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수정은 그 이후에도 일본에 남아 있었다. 1884년 12월에 파견된
5차 수신사의 종사관인 박대양(朴戴陽)의 『동사만록』(東槎漫錄)에 그를 만난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인 이수정(李樹廷)은 본래 운미(芸楣: 민영익) 집안의 청지기였다. 사람이 매우 영리하고 민첩하였으며 자못 문자를 해득하였다. 이에 일본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교사(敎師)가 되었는데, 이날 청국의 교사 장자방(張滋昉)을 이끌고 나를 만나러 왔다. 자방은 문사가 넉넉하였으며 시를 더욱 잘하였다. …들으니 서교(西敎: 천주교)에 물든 자라고 한다.

『동사일기』 1885년 1월 5일의 기록에서는 이수정에 관한 네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민영익 집안의 청지기’, ‘영리하고 민첩하여 문자를 해득함’, ‘머리를 깎고 교사가 되었음’, ‘청나라 천주교인과 함께 수신사 일행을 만나러 왔음’ 등이다. 박대양은 이수정을 기독교인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청나라 천주교인과 함께 다닌다면서 은근히 비난하였다.
박대양의 기록 가운데 중요한 정보는 그가 이 당시에 (한국어) 교사였다는 점이다. 일본에서의 한국어 교육은 조선 후기에 통신사(通信使)가 정례적으로 파견되면서 쓰시마에서 체계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가 세운 한어사(韓語司, 1727-1871)가 가장 오래된 한국어 교육 기관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전후로 근대적인 외교관이 필요하자 쓰시마에 설치된 이즈하라 한어학소(嚴原韓語學所, 1871-73)가 부산 현지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초량관어학소(草梁館語學所, 1873-80)로 바뀌었다가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학과(1880-87)로 대체되었다.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학과는 “육군 2명, 해군 5명, 외무성에서 10명의 생도비용을 차출”한 관립학교였는데, “한어(韓語) 망실(亡失) 예방”이라는 기존의 설립 목적과는 달리 조선 침략의 실무자를 배출하기 위함이었다.4 초대 한어 교사는 초량어학소 교수 아라카와(荒川德滋)를 초빙하였으며, 한국인 한어 교사로는 이동인(李東仁)을 초빙 고용하였다.
1882년 10월 일본에 들어온 이수정은 1년 남짓 농업과 법률을 공부하다가 1883년 8월 9일에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학과 교수로 취임했다.5 일본 문부성령에 따라 1880년 3월에 설치된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학과는 손붕구(孫鵬九, 1882. 3.-1883. 8.) 후임의 2년 임기로 이수정을 외국인 교사로 초빙했다. 그는 곧바로 교과서 편찬에 착수하여 1년 뒤에 조선문화 학습 교재인 『조선・일본 선린호화(善隣互話)』를 간행하였다.
이수정이 어떻게 조선어학과 교사가 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은 분명치 않다. 4차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1882년 9월 2일 도쿄에 도착하자 조선어학과 생도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郞)가 안내와 통역을 맡았는데,6 이때 동경외국어학교와 연락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876년 1차 수신사가 파견되었을 때 일본 측 접대기록인 『항한필휴』(航韓必携) 5월 26일 자 “성료배관”(省寮拜觀)에 이미 외국어학교 방문 일정이 잡혀 있었으며, 민종묵의 보고서 『문견사건』(聞見事件)에도 외국어학교에 들른 기록이 있다.

| 농업을 배우려다가 기독교를 받아들여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조선 조정에서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1881년 4월 10일부터 윤7월 2일까지 넉 달 동안 60여 명이 일본에 머물며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기관을 찾아다녔고, 정부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가운데 손붕구(孫鵬九, 1852-?)는 6월 17일 시나가와(品川)의 유리제작소를 견학하고 나서, 그곳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제조법을 연구하기 위해 직공견습(職工見習)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 한국어 교사가 필요하자, 1882년 3월부터 조선어학과 강사로 초빙되어 일본 생도들을 가르쳤다. 이수정에게 조선어 교사를 넘겨준 뒤에 귀국한 그는 대한제국의 농상공부(農商工部) 광산국장(鑛山局長) 등을 지냈다.
조사시찰단 수행원 가운데 안종수(安宗洙, 1859-96)는 일본의 농학자 츠다 센(津田仙, 1837-1908)과 접촉하는 한편, 서양의 근대농법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한 『농정신편』(農政新編)을 편찬하였다. 안종수는 귀국한 뒤에 이수정에게 일본에 가서 농업을 배우라고 권하였다.
이수정은 1882년 겨울 도쿄에 와서 츠다를 만나 잠시 농업을 배웠다. 츠다의 안내로 츠키지교회(築地敎會)의 성탄예배에 참석한 이수정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1883년 4월 29일 로케츠쵸교회(露月町)에서 야
스가와(安川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일본인들의 세례 과정은 인생을 걸 정도로 심각하여, 이수정은 자신이 그동안 믿던 유교를 극복한 뒤에도 야스가와 목사에게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질문하는 등 번민과 방황 끝에 세례를 받기로 결심한 것이다. 세례문답은 녹스 목사가 주관하였는데, 녹스 목사가 영어로 질문하면 야스가와 목사가 이수정과 한문으로 필담하면서 답변을 정리하여 녹스 목사에게 전달하다 보니, 두 시간이나 걸렸다.
이수정의 세례 기사가 「칠일잡보」에 실린 1883년 5월 11일은 바로 제3회 일본기독교 신도대친목회의 제4일째 날이며, 회의장인 도쿄의 신사카에교회(新榮敎會)에서는 아침 8시 기도회에서 조선인 이수정이 자기 나라 말로 회중(會中) 기도를 드린 날이다. 「칠일잡보」에 따르면 이날 원로 성경학자 오쿠노 마사쯔나(奧野昌綱)씨의 발의에 따라 이수정이 자국어로 기도를 드렸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날 찍은 기념사진에는 40여 명의 일본 교단 지도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는데, 츠다 센과 한복 차림의 이수정이 앞줄 가운데에 앉아 있다. 이수정의 기도는 조선말로 된 기도였음에도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크게 감동시켰다고 한다.7

| 한문에 토를 단 현토 신약전서를 간행하다

한국의 지식인 이수정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인 루미스는 이런 변화가 “복음이 저 ‘은둔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 확신하고 그를 찾아가 신약성경 번역을 제안하였다.8 당시 일본에서는 훈점(訓點)을 단 『훈독신약전서』(訓讀新約全書)가 지식인들에게 호응이 높았으므로, 루미스는 이수정에게 한한성경(漢韓聖經)으로 번역을 시작하자고 하였다.
‘한한성경’이란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성경에 현토(懸吐)하는 방식이었는데, 현토는 번역이라기보다 한문 원전을 한국인들이 읽기 쉽도록 도와주는 방식이었다. 서당에서 훈장이 『논어』에 구두(句讀)를 떼어 토를 붙여 읽어주면 학생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논어』에 토를 받아 쓰는 방식이었다.
이수정은 월급 50원을 받으면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현토 작업을 진행하여, 6월 21일에 사복음과 사도행전의 현토가 끝나고 11월에는 요코하마에서 1,000부씩 인쇄를 마쳤다. 이수정은 신약성경 전체의 현토 작업을 마치고 싶어 했지만, 만주에서 로스 목사가 번역한 성서를 받아본 루미스가 이수정에게 본격적인 번역 작업을 제안하였다. 이수정은 국한문 혼용의 마가복음 번역을 시작했지만, 그가 9월부터 월급 120원을 받고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학과 교사로 임용되면서 작업 속도에 차질이 생겼다. 현토본을 다시 번역한 『마가젼복음셔언』는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언해(諺解) 방식을 따라 직역(直譯)하였다.

신(神)의 (子) 예슈쓰크리슈도스(耶蘇基督)의 복음(福音)이니 그 쳐음이라. 예언(豫言者)의 긔록(記錄)바의 일너스되 보라 나의 사(使者)를 네 압 보여쎠 네 도(道)를 갓츄게 리라 말과 갓치…

현토에서 언해로 진전하였으므로 ‘耶蘇基督’(야소기독)을 ‘예슈쓰크리슈도스’로 번역했지만, ‘神’(신)이나 ‘豫言者’(예언자), ‘使者’(사자) 등은 번역하지 않았다. 중국식 한자어 ‘上帝’(상제)보다는 일본식 한자어 ‘神’(신)을 사용하다 보니, 아펜젤러가 이수정 번역본을 조선인들에게 보이고 평가하게 한 결과 “예수 그리스도가 귀신의 아들이라는 인상을 조선인들에게 심어줄 염려가 있다는 판단에 이르렀다.”라고 한다.9 이 번역본을 받아본 언더우드도 번역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 미국에서 미리 부탁한 한국어 교육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이수정은 빠른 시일에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로스 목사의 『마태복음』 번역본에 실린 주기도문과 별도의 새로운 번역을 미국성서공회가 발행하는 「바이블 소사이어티 레코드」(BSR) 1885년 5월호에 투고하였다. 루미스는 이수정의 주기도문 번역문을 그의 붓글씨, 자신의 영어 해설과 함께 보낸 뒤에도 모두 12회에 걸쳐 이수정 관련 기록을 BSR에 싣게 하였다.10
선교지를 정하지 못해 번민하던 언더우드는 미국 장로교에 자신을 한국 선교사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1884년 7월 10일에 보냈다. “몇 개월 전에 한국인들 중에 선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이수정의 진지한 호소를 읽기 전까지, 어느 선교지로 가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11
언더우드의 한국행은 7월에 미국 선교지에 소개되었으며, 일본에서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입국할 계획이라는 내용까지 실렸다.12 언더우드는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운 뒤에, 이수정이 번역한 『신약마가복음셔언』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그 나라 사람에 의해 그 나라 글자로 성경이 번역된 첫 번째 사례가 만들어졌지만, 1년 뒤에 귀국한 이수정은 보수파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더 이상 복음화 사업에 결실을 맺지 못했다.(다음 호에는 프랑스 신부들을 가르치다가 언더우드를 가르친 송순용을 소개한다.)

1 김인수 옮김, 『언더우드목사의 선교편지』(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2), 29.
2 김인수 옮김, 위의 책, 30.
3 김인수 옮김, 위의 책, 30.
4 정근식, “구한말 일본인의 조선어교육과 통역경찰의 형성,” 「한국문학연구」 32집(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7): 22.
5 『東京外國語學校沿革』(1932) 및 『明治 文部省 11年報』 902쪽, 김태준, “이수정, 동포의 영혼의 구제를 위한 염원,” 「한림일본학」 2집(한림대학교일본학연구소, 1997), 14쪽 재인용.
6 박영효, 『사화기략』(使和記略)
7 김태준, 위의 글, 12.
8 이만열, “이수정의 성경번역과 한국교회사의 의미,” 「한국기독교와 역사」 43호(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2015): 11.
9 김태준, 위의 글, 22.
10 박용규, “최근 이수정 관련 사료 발굴과 교회사적 의의,” 「역사신학 논총」 32집(한국복음
주의역사신학회, 2018): 23-24.
11 박용규, 위의 글, 25쪽 재인용.
12 박용규, 위의 글, 26.


이 숙 |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강사와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전임강사로 일했다. 저서로 『한국어 이해교육
론』(공저), Practical Korean(공저) 등이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이다.

 
 
 

2019년 3월호(통권 7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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