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문화·신학·목회 (2019년 1월호)

 

  <애국가>에 드러난 정신과 작사자와의 관계
  

본문

 

| 나라를 잃은 절박한 시대상황에서 생겨난 <애국가>의 정신과 과제

현행 <애국가>가 만들어진 1907년은 을사늑약과 한일합병의 중간 시점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 반도는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도록 결정된 것으로 보였다. 1906년 2월에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실질적으로 우리나라를 통치하였다. 우리 경제는 일본에 더욱 예속되어 갔고, 친일 대신들은 고종 황제보다 통감부에 충성하고 협력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이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을 저지할 세력은 국내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4,000년 동안 역사와 문화를 이어온 우리 민족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처지에 있었다.
한반도의 독립을 지킬 수 있는 한 가지 남은 길은 우리 민족이 깨어 일어나서 한마음으로 단합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것밖에 없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한민족의 애국심을 일깨우고 단합시키기 위해
<애국가>가 만들어졌으며, 우리 민족은 이 노래를 간절하고 사무치게 불렀다. 약소한 한민족이 강대한 일제의 침략에 맞서려면 어떠한 현실적 상황과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신념과 초월적 의지가 필요했다. <애국가>는 이런 절박하고 절실한 필요와 요청으로 생겨난 것이다. <애국가> 가사에는 현실적으로 불리한 조건과 나쁜 상황을 견디고 이겨내는 초월적 신념과 의지가 담겨 있어야 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다.
<무궁화가>에서 가져온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는 나라 땅과 한민족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하는 아름답고 서사적이며 문학적인 표현이지만, 절박한 상황에서의 초월적인 신념과 의지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1-4절의 가사는 그 내용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나라 만세”는 외적 조건과 객관적 상황을 초월하여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는 간절하고 사무친 심정과 강인한 의지를 절절하고 절박하게 표현한다. 2절 가사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또한 바람이나 이슬과 같은 환경의 변화와 작용에도 변함없이 확고한 의지와 강인한 정신을 노래한다.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구름 없이 높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에서는 땅의 물질적 현실과 조건을 초월한 높고 깨끗한 가을 하늘, 밝은 달과 ‘우리 가슴 일편단심’을 일치시킴으로써 나라를 지키려는 초월적이고 흔들림 없는 고결한 심정과 높은 뜻을 강조하였다.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는 역시 현실적인 형편과 조건에 따른 좋고 나쁨에 좌우되지 않는 한결같은 심정과 자세로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가사의 성격을 생각할 때 <애국가>는 특정한 한 사람을 위해 지은 노래가 아님은 분명하다. 한민족이 함께 부르고 온 겨레가 한마음이 되어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도록 이끌려는 뚜렷한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실제로 한민족의 가슴 속에 깊이 스며들었고 독립운동의 중심과 선봉에서 우리 민족을 이끌었다. 그러므로 절박한 감정과 간절한 신념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결코 이런 시기에 이러한 노래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애국가>는 이 땅에 살아가는 민중을 독립운동의 중심과 주체로 일으켜 세우려는 노래이므로 우리 민족과 민중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전제한다. <애국가>가 전제한 당시 민중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바람과 이슬에도 변함없는 소나무 같은 높은 절개와 기상을 가진 사람들이며, 높고 깨끗한 가을 하늘과 밝은 달 같은 신념과 의지를 가진 이들이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한국 민중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가진 사람임이 틀림없다. 또한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어떤 어려운 현실과 조건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뚫고 나가려는 높은 기개와 강인한 의지를 가진 사람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애국가>의 정신과 신념, 정서와 지향을 기준으로 안창호와 윤치호가 어떤 신념과 지향을 가지고 그 시기를 살았는지 살펴보면 둘 중에 누가 <애국가> 작사자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애국가>가 지어진 1907년 전후의 시기에 한민족(민중)과 일제의 침략에 대해 안창호와 윤치호가 보여준 상반된 입장과 태도를 따져보면 누가 이 노래의 작사자인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 일제의 침략과 한민족에 대한 윤치호의 생각과 행동

당대 최고의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높은 관리를 지냈고 일본과 미국에서 오래 유학한 윤치호는 <애국가>가 만들어진 시절에 최고 지식인 명망가이자 엘리트였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고 문학적 감수성과 표현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현실의 힘(돈과 권력)을 중시하고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그는 가족을 중시하고 겁이 많은 소시민적 인간이었다. “내게 꼭 필요한 것은 조선에서 사랑하는 내 아버님, 어머님, 아내와 아이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조용하고 안락한 가정을 갖는 일이다.”1
당당한 관복을 입고도 그 관복을 지나치게 수치스럽게 여기는 윤치호에게서 깊은 문화적 열등감이 보인다. “(내가 러시아에 오지 않고 집에 있었더라면) 나의 초라한 조선인 복장을 보고 각 나라 대표들이 빈정대거나 우습게 보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아주 흉측스런 도깨비가 두루마기를 입은 것처럼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였다.”2
윤치호는 문명부강과 개화를 조국이나 민족보다 중시하였다. 그가 “서구문명의 원리에서 본 조선은 단순히 빈곤하고 약한 나라가 아니라 ‘명예롭게 생각할 어떠한 가치도 없는’ 암흑의 나라이며 더욱이 유교에 얽매어서 문명의 원리에로 회심하기를 굳게 거부하는 반가치의 ‘덩어리’였다.”3 더 나아가서 그는 “조선의 근원적 열등성을 깊이 수치스러워하며 경멸과 증오를 품고 나아가 이 불명예의 나라를 조국으로 하여 태어난 자신의 생을 ‘우환’으로 원망했다.”4 그는 문명개화에 앞장선 일본을 찬미하고 부러워했다. “만일 내가 살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이 바로 그 나라일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양의 파라다이스여! 세계의 정원이여!”5
윤치호는 개화되지 못한 조선의 독립보다는 문명국들에 예속되어서라도 문명개화를 이루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일전쟁에 즈음하여 이렇게 썼다. “나는 조선에 대한 청국의 극악무도함을 너무도 증오하므로 다른 나라의 지배는 나에게는 비교적 견딜 만하다.”6 윤치호는 상해 유학 시기까지는 국왕과 개화 엘리트의 제휴에 의한 정치개혁에 역점을 두었다.7 러일전쟁(1905) 후에는 민족역사 비관론에 의한 민족 패배주의에 바탕을 두고 문명국 지배하의 개혁을 생각했다. 왕조, 정부 대신, 민중의 개혁 의지와 능력을 부인함으로써 현실을 비관적으로 인식했으며 가까운 장래에는 독립과 선정(善政)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며 미래를 절망적으로 인식했다.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윤치호의 총체적 비관론은 민족 패배주의에 이르렀다. 민족 패배주의에 빠진 윤치호는 문명국 지배하의 개혁을 구상하게 했고, 결국 일제의 식민통치를 긍정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8 그러므로 윤치호에게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설 강인한 투쟁의지도 없었고, 푸른 하늘의 높은 기개, 푸른 솔의 곧은 절개도 없었다.
윤치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 조약은… 지난 수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나는 한국의 모든 고난을 만든 운명의 여신(the Author and Finisher) 외에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9 그는 을사늑약을 과거 사건들의 결과이자 불가항력적인 현실로 받아들였다. 문명국의 부강한 힘에 맞서 싸우는 것을 그는 어리석고 쓸모없는 짓으로 여겼다. 따라서 문명한 강대국의 침략과 지배를 당하는 것은 약소국과 무력한 민중의 죄악이고 책임이라고 여겼다.10
윤치호는 민중을 불신하고 멸시했다. 오랜 세월 중국과 조선 왕조의 지배에 예속되어 종속적 습성을 체화한 민중은 무지하고 게으른 집단이며 공공성이 결여된 존재로서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민중을 불신하고 무시하는 윤치호의 관점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이끌 때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만민공동회를 통해서 민중의 개혁적 의지와 힘이 분출할 때에도 민중을 불신했을 뿐 아니라 민중의 소란과 폭동으로 정부의 탄압과 분쇄가 일어날 것을 걱정했다.11 따라서 윤치호는 독립협회 운동이 실패했을 때나 을사늑약이 이루어졌을 때 무지하고 무능한 민중을 탓하고 민중에게 책임을 돌렸다. 조선의 민중은 “보다 좋은 정부를 가질 자격이 없다.”라면서 독립협회 운동의 좌절을 민중의 어리석음 탓으로 돌리고 윤치호는 4년간 지방관으로 지냈다.12 3・1운동 때 <애국가>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을 그는 ‘알량한 거지들’이라 부르며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만세를 외치는 알량한 거지들이 조선에 독립을 가져다줄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독립이 이루어지더라도 무지와 가난에 찌든 대중에겐 독립을 유지해 나갈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13
지배세력에 순응하며 민중을 불신하고 멸시했던 윤치호는 무지하고 무능한 민중을 계몽하고 가르칠 의지는 있었으나 민중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지키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윤치호는 을사보호조약 이후 자신의 행동강령에서 정치적 독립요구를 삭제하였다.”14
그가 지은 <무궁화가>와 <한국>(Korea)의 가사는 조선의 신민과 민중에게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가르칠 뿐이다. 이들 노래에는 민중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민중과 공감하고 공명하는 윤치호 자신의 감정과 의지가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윤치호는 민중 밖에서 민중을 비판하고 계몽하려 했다. 민중을 일깨워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는 <애국가>의 절실하고 절박하며 사무친 감정과 정서가 윤치호에게는 없었다. 일제의 지배와 정복에 굴복하고 순응했던 윤치호에게는 현실적 조건과 상황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는 <애국가>의 강인하고 간절한 신념과 의지가 없었다.

| 일제의 침략과 한민족에 대한 안창호의 생각과 행동

평안도의 가난한 평민 집안 출신인 안창호는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정신과 새로운 문명을 주체적으로 배우고 익혔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대중연설을 함으로써 안창호는 민중을 주체로 깨워 일으켰고 민중과 하나 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서북 독립협회가 평양 쾌재정에서 개최한 관민공동회에서 21세의 안창호는 관리들의 불의와 무능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연설을 통해 높은 기개와 기상을 드러냈으며, 민중과 높은 관리가 한마음으로 함께 박수치며 환호하게 만들었다. 또한 서울 종로의 만민공동회에서도 불의한 고관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통해서 청중의 환호와 열정을 이끌어냈다. 이미 그 당시에 그는 독립운동을 하려면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총칼이 가슴에 들어와도 물러서지 않을 용기가 있어야… 지금부터 목숨을 내놓을 결심으로 모이자.”15
안창호는 가난한 민중으로 태어나 민중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독립운동을 펼쳐갔다. 그는 한민족(민중) 속에서 한없는 힘을 발견하고 민중을 믿고 신뢰하며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과 함께 일어나 서로 주체로서 더불어 사는 민주공화의 세계를 열어갔다. 민중 속에서 민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온 안창호는 미국 유학을 중단하고 미국의 한인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여 1905년에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세웠다. 공립협회의 강령은 민중이 서로 ‘보호하고 단합함’에 있었다.
안창호는 민이 서로 보호하고 단합하는 것이 ‘문명부강의 뿌리와 씨’라고 말했다.16 민이 사랑으로 서로 보호하고 단합하는 것이 문명부강의 뿌리와 씨라고 여긴 안창호는 문명부강을 ‘칼’로 파악한 윤치호와는 전혀 다른 문명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창호가 민을 문명의 뿌리와 토대로 본 것은 그가 민을 문명과 국가의 중심과 주체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1906년 말에 안창호는 미국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대한신민회 취지서’를 썼다. 이 취지서에는 망해가는 나라를 건지려는 안창호의 절절하고 사무친 심정과 의지가 담겨 있다. “나는 나의 한 몸을 돌아보지 않고 이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을 목적한다. 나는 내 집안을 돌아보지 않고 우리 인민을 새롭게 하는 것을 책임으로 한다.… 눈물이 막 쏟아지고 몸속의 피가 용약한다.… 잠을 잊고 밥을 먹지 않으며… 심장을 토하고 피를 말려서….”17 이 글귀는 안창호가 망해가는 조국의 위태로운 현실을 얼마나 절박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준다. 인민을 새롭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안창호의 간절한 의지와 신념은 민중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희생과 헌신의 굳은 결심을 한 안창호는 1907년 2월에 귀국했다. 그는 ‘신민회’라는 비밀독립운동조직을 만들고 국민교육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나라의 주권을 잃고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도산은 일본과 전쟁을 해서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보았으며, 연설을 통해 학생과 청년들에게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선포할 것을 역설하였다.18 도산은 신민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개전 준비를 하고 실행하였다. 신민회의 많은 회원들이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만들면서 독립군을 조직했다.
1907-10년 사이에 민중을 깨워 일으켜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이룸으로써 민족의 독립을 지키기 위하여 안창호는 혀가 닳고 몸과 맘이 마르고 닳도록 헌신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느라 목이 쉬었고 결국 목에 병이 들었다. “경향 각지에서 계속해 장시간의 연설을 하였으므로 아무리 건전한 성대라도 결국 난치(難治)의 고장이 생겨서 목병이 되고야 말았다. 오동짓달 추운 날에도 잠시라도 말씀하게 되면 전신을 땀으로 목욕하고 눈을 감고 한동안 고민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래서 지우들과 학생들이 목을 쓰시지 말도록 간곡히 권했으나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19 안창호는 쾌재정에서 연설을 한 21세 때부터 61세에 죽기까지 어떤 시련과 유혹, 역경과 실패에도 좌절하거나 흔들림 없이 높은 기개와 기상을 보이며 한결같은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몸과 맘이 마르고 닳도록 희생하고 헌신하였다.

| 누가 <애국가>의 작사자인가

윤치호는 미국과 일본 같은 문명국가들을 찬양하고 부러워했으며, 문명화되지 못한 우리나라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한민족에 대해서 깊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지배와 통치를 현실로 받아들였다. 윤치호는 <애국가>가 말하는 높은 기상과 일편단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당시 민중을 높은 기상과 일편단심을 가진 숭고하고 위대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민중과 함께 철갑을 두른 소나무처럼 바람과 이슬에도 변함없는 높은 기상이 ‘우리 기상’이고, 가을 하늘 밝은 달이 ‘우리 가슴 일편단심’이라고 노래할 생각을 간절하게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제의 지배를 현실적으로 승인하고 받아들였으며 민중을 불신하고 낮추어보았던 윤치호가 이러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애국가>를 지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을사늑약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 죽기까지 안창호가 우리나라와 민족에 대해 품은 심정과 신념은 <애국가>의 심정과 신념 그대로였다. 안창호는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한반도의 독립을 지키고 통일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혼신을 다해 희생하고 헌신하였다. 그는 늘 <애국가>를 부르는 심정과 신념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였다. 그의 삶과 정신, 말과 행동 속에는 언제나 <애국가>가 살아 있었다. 그는 민중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과 함께 일어나려고 했다.
한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이 바로 안창호였다. 그는 평생 철갑을 두른 소나무처럼 높은 기상을 가지고 살았고, 가을 하늘 밝은 달처럼 뚜렷하고 흔들림 없는 일편단심을 가지고 살았으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한결같이 나라를 사랑하였다. 안창호와 <애국가>는 뗄 수 없는 하나였다. 안창호의 삶과 정신에 비추어볼 때 <애국가>는 안창호가 지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1 1896년 10월 1일의 윤치호 일기. Yun, Chi-ho, Yun Chi-ho’s Diary(국사편찬위원회,
1971-89).[이하 ‘일기’로 표기]. 윤경남 역술,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신앙과지성
사, 2014), 262. 윤치호의 가문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한
길사, 1985) 15쪽 이하, 그리고 부유한 집안에 대해서는 윤경로, 『105인 사건과 신민회 운
동』(일지사, 1990), 93쪽 참조.
2 ‘일기’, 1896년 5월 24일
3 양현혜, 『윤치호와 김교신』(한울, 1994), 41. ‘일기’, 1890년 2월 7일, 1902년 12월 31일
4 양현혜, 위의 책, 42. ‘일기’, 1890년 5월 4일, 1891년 2월 2일, 1892년 3월 5일, 1892년 9월
13일.
5 ‘일기’, 1893년 11년 1일.
6 ‘일기’, 1894년 7월 31일.
7 ‘일기’, 1890년 5월 18일.
8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한길사, 1985), 231.
9 ‘일기’, 1905년 11월 18일. 유영렬, 위의 책, 160.
10 ‘일기’, 1889년 5월 25일, 1890년 2월 14일. 그 외에 1889년 12월 23일, 1891년 11월 27일, 1919년 6월 1일, 1928년 8월 10일 참조.
11 ‘일기’, 1898년 3월 10일, 5월 1-2일.
12 ‘일기’, 1899년 1월 7, 16, 21일, 2월 2, 3, 10일, 1898년 11월 6일, 1899년 1월 1, 24일, 2월 1, 2, 10일.
13 ‘일기’, 1920년 8월 14일.
14 쿤 데 괴스테르, “윤치호의 친일협력에 대한 재평가,” 윤경남 편저, 『좌옹 윤치호 평전』 173.
15 주요한 편저, 『安島山全書』(흥사단, 2015), 36-38, 55-56.
16 안창호, “공립협회 1주년 기념 연설,” 『安島山全書』, 581-582.
17 안창호, “대한신민회취지서,” 『安島山全書』, 1068-1070.
18 안창호, “삼선평 연설”, 『安島山全書』, 583-585.
19 박현환 편저, 『속편 도산 안창호』(도산기념사업회간행, 1954), 242. 『安島山全書』, 84쪽에서 재인용.


박재순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씨사상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씨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씨사상』,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다석 유영모』 등이 있다.

 
 
 

2019년 7월호(통권 727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