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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초기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 01
문화·신학·목회 (2018년 12월호)

 

  한국어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심
  

본문

 

| 역사가 발전할수록 외국인에게 쇄국적이었던 한국의 전근대
삼국시대에는 외국과의 교류가 자유로웠는데,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점점 더 장벽이 높아져 쇄국시대가 지속되었다. 삼국시대 학생들은 서해를 건너 수나라와 당나라에 자유롭게 유학했으며, 과거시험에 합격해 그곳에서 벼슬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인 『계원필경』도 최치원이 중국에서 지은 작품을 편집한 것이다. 당나라 곳곳에 신라방이 있어, 일본 승려들이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지낼 정도였다. 무역도 활발해서 실크로드의 종점이 경주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인도 승려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불교를 전했고, 우리나라 승려들이 일본에 가서 그림을 그리거나 학문을 전하였다. 백제 박사 왕인이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주었다는 사실이 일본 역사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원나라와의 왕래가 자유로워서, 충선왕은 북경에 만권당을 짓고 고려와 원나라 학자들이 학문을 토론하게 하였다. 개성의 중국어 교육기관에서는 중국 원어민 교사가 가르쳤으며, 이슬람 식당 쌍화점에서는 회회아비가 장사하여 <쌍화점>이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와 벽을 쌓아서, 두 나라 백성들이 서로 오갈 수 없게 되었다.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길을 따라 공식적인 사절단만 왕래하였고, 외교적인 예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소규모의 무역이 이뤄질 뿐이었다. 조선시대 사역원에서 사용하던 중국어 교재는 『노걸대』인데, 고려 상인 3명이 말과 인삼, 모시 등의 특산물을 싣고 중국의 북경으로 가서 팔고 그곳의 특산품을 사서 돌아올 때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상권은 완전히 회화체로 되어 있으며, 말을 사고파는 법이나 북경에 도착하여 여관에 드는 방법,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을 소개하는 방법 등이 중국어로 소개되어 있다. 48장 106절로 구성된 주요 장면마다 대화가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여행이나 실무에 필요한 중국어를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교재 속의 시대가 고려시대, 인물이 고려인으로 설정된 것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인데, 조선시대에는 상인이 자유롭게 중국을 갈 수 없으므로 고려시대 교재를 수정해가며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처럼 중국인 교수자가 고려에서 가르칠 수 없으므로 종이책을 가지고 회화를 배웠던 것이다.
1876년에 부산을 개항하고 1883년에 인천을 개항하면서 서양인들이 합법적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그 이전에 입국한 서양인은 표류한 선원들과 임진왜란에 종군했다는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뿐이었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종군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포교하기 위해 1593년에 스스로 입국했다는 학설도 있지만, 결국 한국인들과 접촉하지 못하고 포교를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상륙한 창원 바닷가에 세스페데스 공원이 조성되어 그 흔적만 남겼을 뿐이다.

| 일본에서 한국어에 관심을 보인 독일인 의사 지볼트
서양인들의 한국어 연구는 한반도 밖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보다 앞서 개항한 중국과 일본에는 이미 외교나 선교 목적 등으로 서양인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바로 이웃한 한국이 그들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과 교역하는 역관들이 사용하던 책자를 통해 한국어 어휘를 접하는 수준이었다가, 차츰 현지에 표류 또는 억류 등으로 체류하게 된 한국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한국어를 깊이 있게 관찰하고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쇄국정책이 바뀌어 외국인의 입국이 허용되자, 그동안 관찰자 입장에서 한국어를 연구하던 관점이 변하여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실용적 관점의 연구로 전환되었다.
일본에 표착(漂着)한 한국인들은 나가사키(長崎)나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동래로 돌아왔다. 쓰시마에 표착하면 곧바로 동래로 돌아왔지만, 다른 지방에 표착하면 나가사키에 있는 쓰시마의 출장소인 조선관(朝鮮館)을 거쳐 동래로 돌아왔는데, 그 옆의 데지마(出島)에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었다. 독일인 의사 지볼트(J. 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1866)가 1820년대 나가사키에 있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파견되었는데, 인류학에 관심이 많아 일본의 문화를 탐구하던 중에 옆 건물에 머물던 한국인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한국인의 첫인상을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키가 크다. 체형은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활발하고 기민하다.”1라고 기록하였다.
표류 한국인이 올 때마다 숙소 앞에는 그들이 타고 온 배가 매어져 있고, 그들은 송환 절차가 끝날 때까지 몇 달을 이웃에 살았다. 지볼트는 그들이 북을 치며 불경을 외우거나, 바둑이나 장기 두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일본인과는 다른 한국인들의 문화에 흥미를 느껴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의 『조선견문록』 첫 부분은 인류학적인 접근으로 시작하다, 자연스럽게 접견과 필담으로 이어진다.
지볼트는 감독관에게 선물을 보내어 나가사키 부교(奉行)의 허가를 받고, 1828년 3월 17일 한국인 숙소를 방문하였다. 고토렛토(五島列島)에 표착한 한국인은 전라도 출신의 어부와 선원, 상인 등 36명이었는데, 감독관은 그들 가운데 지식인 4명, 선원 1명, 견습선원 1명을 자기 방에서 지볼트와 만나게 해주었다. 지볼트가 그들에게 아라고(네덜란드 음료), 쥬네바(증류주) 등을 선물하자, 그들도 가지고 있던 필사본 한문책, 두루마리 그림, 항아리 등을 선물하였다.
지볼트는 이미 일본인들을 통해 한자를 조금 알고 있었으므로 한문으로 필담을 시작하였다. 지볼트의 네덜란드인 친구 화가 카를 위베르 드 빌네브(Carl Hubert de Villeneuve)는 옆에서 이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들이 스케치하는 일에 잘 응해 주었으므로, 지볼트와 빌네브는 그 뒤에도 몇 차례 이 한국인들을 방문하며 필담을 나누고 붓글씨 족자를 선물로 받아왔다.
순수한 한국어는 하늘, 구름, 바람, 사람과 같은 두 음절 또는 세 음절의 단어가 많은데, 교양 있는 계층이 모음과 음절이 풍부하며 흐르는 듯한 모국어를 엄청난 중국식 표현으로 바꿔버렸다고 지볼트는 아쉬워했다. 한국의 고유문자는 열다섯 개의 자음문자가 오른쪽에 혹은 아래쪽에 표기되는 모음문자를 끼워서 음절을 구성하고, 재차 각각의 특성에 따라서 음절 혹은 단어 끝에 받침으로 사용되는 특성까지 파악할 정도로, 지볼트는 빠르게 한국어를 터득하였다.2
지볼트는 허사첨과 김치윤 등을 몇 차례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단어, 음절, 문장의 경계를 잘 구별한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처음 만나는 이국인에 대하여 또박또박 천천히 발음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3 김치윤은 『천자문』에 음과 훈을 달아주고, 허사첨은 한시를 지어주었다. 이들은 “천지현황(天地玄黃) 생긴 후에 일월영칙(日月盈仄) 되었어라” 식으로 『천자문』에 토를 달아서 가사체로 부르던 <옥설화답가>도 적어주어, 중국의 한자를 빌려 쓰던 한국인들이 어떻게 언어생활과 문학생활을 하는지 보여주었다. 지볼트는 그 후 네덜란드에 돌아가서 『일본』이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이 책의 7장 언어와 문자 편에 실린 한국어에 관한 기술이 서양인에 의한 최초의 한국어문법 기술로 평가되고 있다.

| 한문 필담을 통해 한국어 어휘를 수집한 귀츨라프 선교사
귀츨라프(Karl Gützlaff)는 지볼트와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네덜란드선교회 소속의 독일계 선교사이다. 15세 때부터 아랍어와 터키어를 배운 그는 23세에 네덜란드선교회로부터 자바에 파견되어 중국어를 배웠다. 그는 조선, 타이완, 일본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1832년 2월 26일 동인도 회사는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통상지를 얻기 위해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를 용선하여 탐사를 시작하였다. 7월 22일(음력 6월 25일)에 이 배는 공충도 홍주의 고대도(古代島) 뒷바다에 나타났다. 귀츨라프는 홍주목사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와 한문으로 대화를 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한문성경과 전도문서를 나눠주었다.
귀츨라프는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가르쳐주고, 한글 자모를 받아 적은 다음 이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또한 그는 중국 광동에서 간행된 정기간행물 The Chinese Repository(1832)에서 “조선어론”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를 소개하였는데, 이는 그가 수집한 어휘 목록과 함께 그 당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진행된 한국어 연구를 포괄하는 내용이다.
로우니(L. de Rosny)는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프랑스인 동양학자이다. 그는 1866년 “한국어에 관한 소견”(Aperçu de la langue coréenne)이라는 논고를 집필하였는데, 일반 언어학 관점에서 한국어문법 기술을 시도한 최초의 업적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그가 직접 한국인과 접촉할 기회를 갖지는 못하였으므로, 지볼트의 한국어문법 기술 내용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를 언어학적 관점으로 기술한 것이라는 특성을 보인다.4 그러나 이때까지 한국어를 연구한 서양인들에게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친 교사는 없었다. 요행히도 적극적인 정보 제공자들을 만났을 뿐이다.

| 중국에 머물면서 한국어 문법을 정리한 선교사 달레와 로스
달레(Charles Dallet)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이다. 그가 1874년 『조선교회사』 서론 7절에 “조선어”를 소개하는데, 한국어를 인도 유럽어와의 문법적 특징을 비교하는 방법론적 한계가 있으나 전반적이고 체계화된 최초의 문법기술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달레가 한국에 입국하지 않고도 이러한 체계적 기술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시기적으로 더 늦은 1881년에 출판된 리델의 『한어문법』 원고가 리델이 중국에 머물던 1866년부터 원고 형태로나마 참고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스코틀랜드인 선교사 로스(John Ross)는 매부인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와 함께 만주에 머물면서 한국인 인삼 장수 서상륜의 도움을 받아 1887년에 신약성서 번역을 완성했다. 또한 1876년에 『중국관화입문』(Mandarin Primer)이라는 중국문법서를 편찬하였고, 1년 후,인 1877년에는 동일한 체제로 『한국어입문』(Corean Primer)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문법기술에 중점을 둔 서양인들의 앞선 저작들과는 달리 회화용 학습서이다. 한국어 회화문을 한글과 로마자로 제시해서 학습자들이 스스로 한글 발음을 터득하고 문법 규칙을 추론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한반도 밖에서 이같이 생생한 회화 예문과 함께 로마자로 현실 발음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만난 의주 출신의 한국인 행상 이응찬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후 『조선어법』(Korean Speech with Grammar and Vocabulary)의 이름으로 수정 보완되어 출판되면서 훗날 내한하는 언더우드(H. G. Underwood), 아펜젤러(H. G. Appenzeller), 게일(J. S. Gale) 등과 같은 서양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보인다.

| 한국에 들어와서 체계적으로 이중어 사전을 만든 선교사들
리델(Felix-Clair Ridel)은 1861년에 한국에 입국한 프랑스 신부이다. 그러나 병인양요(1866)가 일어나자 천주교 신자인 최지혁과 함께 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한국어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1880년에 『한불자전』이라는 역작을 출간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1년에 『한국어문법』(Grammaire Coréenne)를 연달아 펴내었다. 이러한 리델의 역작 배경에는 그보다 앞서 1845년에 한국에 들어와 20여 년간 한국어 연구에 힘쓰다가 병인양요 때 순교한 프랑스 신부 다블리(Daveluy)의 전작이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또한 리델 자신이 6년간 한국에서 생활하며 습득한 지식과 더불어 최지혁이라는 훌륭한 조력자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들은 순교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방대한 분량의 한불사전 원고를 작성했으며, 피신할 때마다 몸에 지니고 다녔다. 지볼트와 로스가 각각 전라도 방언과 함경 평안 방언에 기반을 둔 문법을 기술했다면, 리델은 서울말을 기반으로 한국어 문법의 전반적인 체계를 기술했다.
1884년에 내한하여 인천에서 부영사로 근무한 영국 외교관 스캇(James Scott)은 1887년에 『조선어입문(언문말책)』(A Corean Manual or Phrase Book with Introductory Grammar)을 출간하였는데, 로스와 리델의 업적을 종합한 문법기술을 바탕으로 구어 중심의 한국어를 학습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1885년에 내한하기에 앞서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경외국어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던 이수정으로부터 임브리(William Imbrie) 선교사가 지은 『영일어원』(English-Japanese Etymology)을 한국어로 대역해가면서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학습하였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들어온 후에도 한국어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의 두번째 한국어 선생은 가톨릭 신자인 송덕조이다. 그는 리델의 『한불자전』 편찬에도 참여한 바 있고, 프랑스 신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언더우드가 처음에 송덕조를 소개받고 천주교 신자라는 점과 프랑스 신부들과의 교류가 있다는 점을 거북하게 생각했으나, 나중에는 송덕조의 한국어 도움이 자신의 사전 편찬에 얼마나 지대한 공을 끼쳤는가를 회고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는 1886년에 『한영사전』과 1890년에 『한영문법』을 출간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 리델의 『한어문법』이 참조되었음을 언급하였는데, 리델의 문법기술을 수정 보완하면서 영문법 체계에 의존한 바가 크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은 1888년 한국에 들어와 1928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한국어와 한국학 전반에 대해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았다. 그는 원래 신학교 출신이 아닌 인문학 전공자였으므로, 그의 저서는 한-영 혹은 영-한 번역이 많았다. 김만중의 『구운몽』 같은 한국 고소설이나 한국 민담 등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고,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한영사전』을 3판에 걸쳐 개정 보완하여 편찬하였고, 한국어문법서(Korean Grammatical Forms)에 해당하는 『사과지남』(辭課指南)을 1894년에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한국어 습득에 필요한 어미 체계와 조사에 대한 문법서이다. 이 책에 기술된 문법 체계 또한 리델의 문법기술 체계와 나란한 면이 많다.
한국어가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너무 쉽고 비천하여 아녀자들이나 쓰는 암말로 취급받던 시대에 서양인들은 한국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한국어 연구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워 나가면서 문법과 사전을 정리할 수 있게 가르치고 도와준 한국어 교사들은 대부분 문법이나 영어를 몰랐던 한국인들이었다. 전근대의 한국 지식인들은 한국어 문법이나 회화 교수법에 관해 제대로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남들보다 신문물에 일찍 눈을 떠 다양한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앞으로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한국어 교사들의 발자취를 한 사람씩 찾아 나서기로 한다.


1 지볼트, 유상희 역, 『조선견문기』(박영사, 1987), 2.
번역본에는 ‘조선인’, ‘조선어’라고 했으나, 이 글에서는 한국인, 한국어로 통일하여 사용한다.
2 지볼트와 한국인들의 만남은 위의 책 『조선견문기』 11-29쪽의 내용을 요약, 인용하였다.
3 고영근, “지볼트의 한국기록 연구,” 「동양학」 19집(극동대학교동양학연구소, 1989년 10월호): 11.
4 고영근, 『국어문법의 연구: 그 어제와 오늘』(탑출판사, 1994), 257-258.



이 숙 |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강사와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전임강사로 일했다. 저서로 『한국어 이해교육론』(공저), Practical Korean(공저) 등이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년 2월호(통권 7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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