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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와 윤치호 03
문화·신학·목회 (2018년 12월호)

 

  공통된 증언들의 핵심과 결론
  : 윤치호의 <무궁화가>를 바탕으로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

본문

 

| 문헌과 증언의 한계를 넘어서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증언과 문헌증거들은 서로 어긋나고 상반되기도 하며 뒤얽혀서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한 증언과 전언, 2차적이고 간접적인 문헌증거들은 힘을 잃는다. 안창호가 <애국가>
를 작사했다는 증언과 전언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며 내세우는 여러 가지 문헌자료들을 극복하고 <애국가> 작사자에 얽힌 의혹과 무지의 어둠을 밝혀낼 수 없다. 또한 2차적이고 간접적인 문헌자료들도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많은 증언과 전문(傳聞)을 잠재우고 <애국가> 작사자의 진실을 밝혀낼 수 없다.
증언과 문헌자료만 의지해 연구했기 때문에 60년 이상 많은 학자와 관계자들이 연구하고 토론해도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단순히 증언과 문헌자료만 가지고 논의해서는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또한 새로운 문헌자료가 나올 가능성도 없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 위원이 이미 1955년에 이런 사정을 밝혔다. “당시 왜적의 혹심한 민족탄압에 기인한 것으로 그 이름을 의식적으로 감추고 36년이라는 암흑시대를 거치는 동안 당시의 지사들이 모두 작고한 오늘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헌을 얻지 못할뿐더러 남아 있을 리도 없는 이 이상 찾아낼 도리가 없다.”1 여기서 ‘왜적의 혹심한 민족탄압’ 때문에 ‘그 이름을 의식적으로 감추었다’는 판단은 정확한 역사적 판단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자에 관한 새로운 문헌을 얻을 수도 없고 그런 문헌이 남아 있을 리도 없다는 판단은 정당하다. 그리고 새로운 문헌자료가 나온다고 해도 기존의 문헌자료들이 지닌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안창호와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를 숨기려고 했다면 이들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증언과 전언들은 그릇된 것이거나 불확실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증언을 절대화할 수 없다.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숨기려 했던 안창호는 윤치호를 대성학교 교장으로 모시고 <애국가>의 작사자로 윤치호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는 말을 안창호에게 직접 들었다는 증언도 나올 수 있었다. 대성학교 교사였던 채필근은 안창호로부터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때 내가 도산 선생에게 ‘애국가는 본교 명예교장 윤치호 선생이 작사하였습니다.’라는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도산을 만나 존경하고 따랐던 김인서는 이런 증언을 듣고 안타깝지만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도산이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와 말을 남겼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았다. 도산처럼 정직하고 공명정대한 인물이 <애국가> 작사자 문제처럼 중요한 일에 대해서 그렇게 모호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인서는 친일을 했던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는 사실에 상처를 받았으나 도산이 <애국가>를 보급하고 전해준 사실에 위안을 얻고자 했다. “필자도 윤씨 작이란 기록을 볼 때 절의감(節義感)에 상처를 받으나 역사는 고칠 수 없다. 애국가도 작사자가 불행실절하였으나 국존 도산 선생의 품에서 기르고 도산 선생의 목소리로 전하여 애국가로의 대의명분을 잃지 아니하였다.”2
김인서는 도산이 <애국가>를 부르고 보급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채필근의 증언과 문헌기록들에 근거해서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안창호가 <애국가>의 작사자로 나설 수 없었던 역사적・사회적 상황과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 증언들과 문헌자료들이 가리키는 방향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여러 증언과 문헌자료는 상반되고 엇갈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자들에 대한 엇갈린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공통점이 있고, 그 공통점은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안창호 작사설과 윤치호 작사설 가운데 서로 공통되는 중요한 주장들이 있다. 대성학교 교원으로 있었던 김동원에 따르면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라는 가사가 윤치호의 원작인데 나중에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고쳤다.3
여러 가지 주장과 증언 가운데 이 설이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왜냐하면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이 주장하는 내용도 김동원의 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윤치영은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고 했다.4
윤치영과 가까이 지내던 김병섭이 윤치영의 증언을 듣고 최병헌의 외증손 김지영에게 말해주었고 김지영은 그 말을 녹취하였다. 그 녹취 내용에 따르면, 윤치영은 ‘윤치호 역술 『찬미가』’를 김병섭에게 선물로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애국가 4절까지의 본문은 최 목사의 <불변가>를 옮긴 것이고, 후렴은 윤치호 작으로 알고 있다. 당시 윤치호는 최 목사의 정동감리교회를 다녔고 두 사람은 친동기(의형제)같이 지냈다.” 김병섭의 이러한 증언은 그 내용과 상황이 매우 구체적이므로 윤치영이 그런 진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김병섭은 모교의 졸업식이 있던 1984년 2월 14일 오후 3시경 윤치영과 만나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를 선물로 받으며 그러한 증언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김연갑은 윤치영의 집을 방문하여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한 것이 분명하다는 윤치영의 말을 들었다면서 김병섭의 증언이 지닌 효력을 부정하였다. “1986년과 1990년 2차에 걸쳐 윤치영 댁을 방문, 인터뷰한바 윤치호가 작사한 것이 분명하다고 했으니 김 장로와 윤치영 중 한 분이 잘못된 주장을 한 것이 되니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다.”5 김연갑이 윤치영을 방문하여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한 것이 분명하다.’는 진술을 들었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다.
김병섭과 김연갑에게 상반된 증언을 남긴 윤치영의 증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최병헌 작사설에 대한 윤치영의 증언이 나온 이후 김연갑은 윤치영을 두 차례 만나 윤치호 작사설을 확인했다고 하면서도 김병섭의 전언에 대한 윤치호의 반박이나 해명을 전하고 있지는 않다. 김병섭이 윤치영의 증언을 날조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윤치영은 윤치호의 사촌동생일 뿐 아니라 윤치호와 흥업구락부 활동을 함께 했던 가까운 사이였다.6 윤치호를 잘 알았던 윤치영은 <애국가>의 후렴만 윤치호가 지었고 1-4절 가사는 다른 사람이 지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다가 최병헌이 그 가사를 지었다고 추정하고 그러한 주관적 심증과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통치 말기에 윤치호와 함께 친일의 길을 걸은 윤치영은 이승만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다. 그는 이승만과 안창호의 적대적 경쟁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안창호와 서북세력에 대한 적대감과 견제심리를 이승만 및 기호세력과 공유했던 윤치영은 안창호가 <애국가>
가사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불변가>를 지었다고 알려진 최병헌이 <애국가> 가사를 지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다가 김연갑으로부터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연구와 논의 상황을 자세히 듣고서 안창호 작사설과 윤치호 작사설 가운데 윤치호 작사설을 내세우는 김연갑의 주장에 동의하고 지지를 표시했을 것이다. 만일 윤치영이 최병헌의 <불변가>가 <애국가> 가사와 같다는 것을 문헌으로 확인하여 알고 있었다면 김연갑의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병헌이 <애국가>를 지었다는 윤치영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최병헌은 학문적 깊이와 문장력을 가진 학자였으나 그의 심정과 행보는 애국가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안창호가 민중과 함께 애국가를 열렬히 불렀던 1908년 2월 6일에서 3월 10일까지 그는 의병들을 회유하는 선유(宣諭)활동을 벌였고 “백성들의 미개함이여!” 하면서 민중을 낮추어 보았다.7 1909년부터는 정치적 발언을 삼갔고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는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1913년 이후에는 심령천국만을 강조하고 1919년에는 삼일운동에 반대했다. 최병헌이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가족들의 주장도 모호하다. 그가 지은 <불변가>가 <애국가>의 원형이라고도 하고 <애국가>가 틀림없다고도 한다. 그 <불변가>를 집에서 부르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데 <불변가>는 남아 있지도 않다.8 최병헌이 <애국가>를 지었다는 주장은 가족들의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할 뿐 아무런 문헌적 증거도, 다른 증언들도 없다. <불변가>가 오늘날의 <애국가>였다면 당시의 상황에서 숨겨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윤치영이 나중에 김연갑을 만나서 자신의 증언 내용을 번복하고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말했다지만, 그가 윤치호 작사설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확증 없이 최병헌 작사설을 주장했다가, 확신 없이 윤치호 작사설에 동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윤치영의 이러한 엇갈리고 상반된 주장에서 주목할 부분은 윤치호가 <애국가>의 후렴만을 지었다는 생각을 윤치영이 오랫동안 진지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동원과 윤치영의 증언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은 윤치호가 <애국가>의 후렴구만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의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된다.

| 안창호가 가장 신뢰하고 사랑한 안태국이 전해준 진실
주요한이 쓴 『안도산전서』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성학교 교원이었던 안태국은 안창호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했던 동지였다. 그가 그의 사위 홍재형에게 전해준 이야기도 윤치호가 후렴구만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는 점에서 김동원과 윤치영의 주장과 같다. 그 사연을 길게 인용해본다.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이 장인에게 전해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대성학교 대리교장으로 있는 도산이 서울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였다. 윤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 되었다고 찬성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9

안태국의 증언은 무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안창호가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던 동지였다. 1920년에 안태국이 갑자기 죽었을 때 안창호가 했던 추도사는 안태국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준다. “명예·지위·권력 이 모든 것에 조금도 거리낌없이 오직 성충을 다하여 20년을 종시 여일하게 위국 분투하시는 안 선생의 성격과 열성은 내 입으로 다 말할 수 없소. 나 보는 한인 중에는 진실로 유일한 애국자요, 선생의 옥중 생활과 적의 악형이 선생의 그 좋던 얼굴과 체격을 손하게 하고 이제 또 돌아가시게까지 한 것이오….(도산은 목이 메어 말을 끝맺지 못하였다.)”
그다음 해 추도회 때 안창호는 말하였다. “누가 나더러 묻기를, 네가 믿는 사람 중에 가장 믿던 이와, 네가 사랑하던 이 중에 가장 사랑하던 이가 누구인가 하면 나는 안태국 선생이라 하겠나이다. …남아 있는 우리들은 선생과 같이 변함이 없고 간사함이 없는 애국자의 생활을 끝까지 지어 나가기를 바라나이다.”10 안태국과 같은 진실한 사람에게서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증언이 나왔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안태국은 기억력이 비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제가 신민회의 뿌리를 뽑기 위해 날조한 105인 사건의 공소 사실이 허위임을 법정에서 밝혀낸 사람이다. 일제는 신민회원들 60명이 1910년 12월 27-28일에 평안북도 선천역에서 일본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날조하였다. 이에 대해서 안태국은 세 가지 반박 증거를 제시하였다. 첫째, 같은 해 12월 26일에 만기 출소하는 유동열을 환영하기 위해 양기탁, 이승훈 등과 함께 서울 명월관에서 식사하고 요리값 27원의 영수증을 받았다. 둘째, 이튿날 이승훈이 평양으로 내려가므로 평양에 사는 윤성운에게 이승훈을 마중 나가라고 전보를 쳤다. 셋째, 정주에서 27일 아침 6시에 60명이 기차를 타고 선천으로 갔다 하니 그 인원이 기차를 탔는가 철도국 서기를 불러 기차표를 조사해라. 안태국이 주장한 대로 증거가 확보되고 공소 사실이 허구임이 밝혀졌다.11 안태국의 기억력은 매우 명석했고 재판장과 맞서는 안태국의 언행에서 드러난 기개와 기상이 하늘을 찔렀다.
홍재형이 전해준 안태국의 이야기는 다소 복잡하고 문제가 있으나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김동원이나 윤치영의 증언과 일치한다. 홍재형이 전해준 이야기의 상황이 대성학교에서 일어난 일로 설정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애국가>가 지어진 것은 1907년이고, <애국가>가 수록된 『찬미가』가 발행된 것은 1908년 6월이며, 대성학교가 설립된 것은 1908년 9월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다. 홍재형의 전언이 시기와 상황 설정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김동원과 윤치영의 주장과 일치하므로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증언이나 전언 과정에서 시기와 상황 설정은 윤색되거나 변경될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불확실하여 얼마든지 착오를 일으키거나 변경·수정될 수 있다.
신약의 복음서들이나 구약의 오경과 같은 성서 문서들의 전승 과정에서도 이런 윤색과 변경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구약 오경의 경우에는 수백 년 동안 기억과 암기에 의한 구전(口傳)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에 문서화되었고, 신약 복음서들의 경우에도 수십 년 구전을 거쳐서 문서로 만들어졌다. 문서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그 내용과 상황이 수정되고 첨가 및 삭제되는 편집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따라서 증언과 전언들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내용이 수정되기도 하고, 그 반대로 내용을 중심으로 상황과 맥락이 변경되거나 새롭게 설정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문서의 내용들이 모두 왜곡되거나 날조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헌의 양식과 전승・편집 과정을 합리적 추정과 비평에 의해 역사적・문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문서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을 참되고 옳은 것으로 확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홍재형이 전한 안태국의 증언은 시기와 상황 설정에 문제가 있지만, 윤치호의 <무궁화가>에 안창호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가사를 지었다는 핵심 내용은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이 이야기를 주요한이나 홍재형이 완전히 지어낸 것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그 경우 안태국의 이야기는 날조된 것으로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의심해야 할 근거와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홍재형이 날조했다면 그의 장인을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이다. 그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장인의 인격과 평판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안태국이 거짓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태국은 평양 출신으로서 신민회의 핵심 인사였으며 대성학교 교원이었다.12 그는 안창호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고 신민회의 주요 사업이었던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의 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안창호가 말했듯이 “변함이 없고 간사함이 없는” 안태국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는 안창호와 윤치호의 관계와 일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애국가> 작사에 관한 안태국의 증언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 안태국의 증언에 대한 합리적 추론
안태국의 증언과 그 증언이 전해지면서 변경되는 과정을 추론해보자. 신민회의 평안남도 책임자인 안태국은 안창호의 가까운 동지로서 안창호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가장 깊이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안창호와 윤치호가 <애국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현장에 함께 있었거나 나중에 안창호로부터 <애국가> 관련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신민회 회원들은 거의 독립협회의 청년 회원들이었으므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시절에는 윤치호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안창호가 윤치호와 의논하고 도움을 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윤치호는 독립전쟁이나 독립투쟁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만 국민계몽과 교육에 관심이 깊었다. 안창호는 윤치호를 신민회의 일원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으나, 국민교육운동에는 서로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교육독립운동을 시작하기 전인 1907년 상반기의 어느 시점에 안창호는 윤치호를 만났을 것이다.
국민교육운동을 위해서 새로운 <애국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안창호는 <무궁화가>를 지은 윤치호에게 황실 찬미가인 <무궁화가>의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니 고쳐서 부르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윤치호는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고, 안창호가 자기가 지어놓은 <애국가> 가사를 제시하니 윤치호가 좋다고 동의했을 것이다. <애국가> 작사자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데 곤란을 느꼈던 안창호는 그때까지 ‘애국가’로서 가장 유명했던 윤치호의 <무궁화가>를 개작한 것이므로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윤치호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고 양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애국가>와 관련된 안창호와 윤치호의 만남은 대성학교가 세워진 1908년 9월 이전, 아마도 1907년의 초반에 어쩌면 윤치호의 집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대성학교 시절에 또는 대성학교가 폐쇄된 이후 어느 시기에 안태국은 그의 사위 홍재형에게 <애국가>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필자가 보기에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 홍재형은 이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수정되고 변경되기가 쉽다.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컴퓨터처럼 기억을 여러 가지 범주로 분류해서 저장했다가 나중에 그 기억을 끌어내어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변경되고 수정되기 쉽다. 홍재형은 <애국가> 관련 이야기를 ‘대성학교’라는 범주에 저장해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안창호, 윤치호, 안태국이 모두 대성학교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안창호에 의해서 1909년 8월에 설립된 청년학우회 회장은 윤치호, 총무는 안태국이었으므로 세 사람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안태국은 누구보다도 안창호와 윤치호의 관계를 깊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안창호, 윤치호, 안태국이 모두 대성학교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홍재형은 <애국가>에 얽힌 이야기를 대성학교와 관련해서 기억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 대성학교와 관련지어서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애국가>에 관한 이야기가 본래의 상황과 문맥을 벗어나서 대성학교의 상황과 문맥에서 전해졌다고 생각된다.


<바로 잡습니다> 지난 호의 글 187쪽에 실린 미주 5번을 아래와 같이 바로잡습니다.
5 안용환, 『독립과 건국을 이룩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청미디어, 2016), 265; 윤경남 편저, 『좌옹 윤치호 평전』(신앙과지성사, 2017), 412.



1 「동아일보」 1955년 5월 14일,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문철 위원 인터뷰.
2 把守軍(김인서), ‘愛國歌의 作詞者,’ 「信仰生活」 제14권(1955) 2호, 26-27.
3 주요한,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주요한 편저, 『安島山全書』(서울: 흥사단, 2015 증보), 554.
4 “작사자 규명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일요시사」 제214호 기획특집(2005. 11. 22.)
5 위의 글.
6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윤치영이 구속되었을 때 윤치호는 그의 석방을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윤치호 일기』 1938년 5월 29일, 9월 3일)
7 최병헌, “『충청남도 선유문안』(忠淸南道宣諭文案) (13),” 「기독교사상」(대한기독교서회, 2018년 10월호): 73-74.
8 조헌정, “동양의 하늘과 서양의 하늘은 같다,” 「에큐메니안」, 2018년 7월 11일(https://goo.gl/KRUYbr)
9 주요한 편저, 『安島山全書』(서울: 흥사단, 2015 증보), 120-121.
10 주요한 편저, 위의 책, 276-277.
11 주요한 편저, 위의 책, 210.
12 주요한 편저, 위의 책, 100.



박재순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씨사상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씨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씨사상』,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다석 유영모』 등이 있다.

 
 
 

2018년 12월호(통권 7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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