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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18년 11월호)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와 윤치호 02
  증언과 문헌에 대한 문헌비평적 접근

본문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 그동안 안창호 설을 내세우는 안용환과 흥사단에 속한 인물들은 <무궁화가>와 <애국가>를 모두 안창호가 지은 것으로 주장하였다. 반면에 윤치호 설을 내세우는 김연갑, 신동립, 그리고 윤치호의 후손들은 모두 윤치호가 지었다고 주장한다. 안창호 설이 주로 증언에 의존한다면, 윤치호 설은 주로 문헌자료에 근거한다.1
양쪽 모두 자신들의 주장을 절대화하고 비타협적 자세로 완고한 논리와 논거를 내세우므로 대화와 토론의 여지가 별로 없다. 주관적 증언들과 근거가 약한 문헌자료들을 교조적으로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은 <애국가> 작사자를 불확실성과 혼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 입체적이고 심층적으로 여러 관점과 차원에서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가설과 추정을 세우고 논의해가면 누가 작사자인지 알 수 있고, 결국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국민적 공감과 합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증언과 문헌의 대결
현재 안창호 작사설과 윤치호 작사설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증언과 문헌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설은 세간에 널리 퍼져 있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증언과 전문(傳聞)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설은 그 증언과 전문은 많지만 실증적인 역사적 사실과 문헌적 증거가 충분치 않다. 이에 반해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설은 증언과 전문은 부족하지만, 제법 많은 문헌자료와 증거를 가지고 있다.
어째서 안창호 작사설에는 증언과 전언이 많고 윤치호 작사설에는 문헌 증거가 많을까?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안창호는 자신이 작사자임을 숨겨야 할 이유와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작사자임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비밀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나 <애국가>를 지을 때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그 비밀이 노출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처음에 이 증언들은 흩어져 있었고 잊혀져 있었으나, 점차 기억을 되살리고 수집되고 종합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수많은 증언 속에는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진정성이 담겨 있다고 여겨지므로 모두 날조된 것으로 무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안창호와 윤치호 두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안창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증언과 전언은 윤치호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거나 승복시키기 어렵다. 인간의 기억은 매우 불확실하고 그 기억의 전달 과정에서도 착오와 변경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창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주관적 열정과 충성심이 개입되었을 여지가 있으므로 증언과 전언만 가지고는 윤치호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다. 그러면 논쟁은 계속되고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확정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 운동을 벌인 독립협회 회장이었고 1896년(또는 1897년)에 나온 <무궁화가>를 지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무궁화가>의 가사를 오늘날 맞춤법에 따라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1절)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2절) 애국하는 열심의기 북악같이 높고
충군하는 일편단심 동해같이 깊어
(3절) 삼천만인 오직한맘 나라 사랑하여
사농공상 귀천없이 직분만 다하세
(4절) 우리나라 우리황제 황천이 도우사
군민동락 만만세에 태평 독립하세


<무궁화가>의 후렴이 현행 <애국가>의 후렴과 같기 때문에 <무궁화가>를 지은 윤치호가 작사자 이름 없이 널리 불리는 <애국가>의 작사자로 쉽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1908년에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가 간행되었고, 여기에 이 두 곡이 작사자 이름 없이 함께 수록되었다. <무궁화가>와 <애국가>는 그 내용과 정신은 전혀 다르지만 후렴이 같을 뿐 아니라 곡조도 같고 글자 수도 같으므로 형식상의 연속성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윤치호를 <애국가>의 작사자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나중에 나온 다른 찬미가나 애국창가집들은 <애국가>의 작사자를 윤치호로 표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윤치호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침묵했기에 윤치호와 관련된 이런 문헌자료들은 막연한 풍문과 추측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문헌자료가 가진 증거 능력의 한계–문헌비평의 관점에서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설도 결정적인 실증적・역사적 사실을 가지지 못하며 제시된 문헌적 자료들도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하고 있다.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김연갑이 제시하는 문헌 증거는 다음과 같다.

1908년 『찬미가』, 윤치호 역술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의 작사자로 ‘윤티호’ 표기
1914년 미국 「태평양잡지」, 윤치호 작사로 기술
1931년 한석원 편저 『세계명작가곡집』, 윤치호 표기
1909년 이기재 소장 『창가집』, 윤치호 작사로 표기
1920년대 김종만 소장 필사 가사집, ‘윤 선생 치호’로 표기
1910년 일본유학생회 ‘윤치호 작 새 애국가’로 기록
1911년 ‘105인 사건’ 관련 경기도 경무보고서에서 ‘윤치호 구작(舊作)’
1914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보고 제143호에 ‘윤치호 작’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헌적 자료나 서지학적 자료를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적・서지학적 증거자료는 <애국가> 작사자를 확정하는 증거 능력이 크지 않다. 고대와 중세에는 작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저명한 인물을 작자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어떤 인물이 어느 문헌의 저자라고 기록되었어도 그 인물이 실제 저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
현대 문헌학은 문헌의 저자, 저작 시기, 내용과 형식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검토하는 문헌비평(literary criticism)을 중시한다. 이런 문헌비평이 가장 발달하고 전문화된 분야는 성서학이다. 문헌비평은 성서학에서 역사비평, 자료비평,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으로 세분화되었으며, 기억과 구전에 의한 오랜 전승 과정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검토하는 방법이 발달하였다. 현대 문헌학에서는 문헌자료를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합리적 비판과 의혹의 여지가 있다면 철저한 검토를 거친 후 제시된 합리적 비판과 검토를 통과한 내용만을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다섯 개의 문서는 고대로부터 ‘모세오경’이라고 하여 모세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문서들이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학자들뿐 아니라 보통의 기독교인은 누구나 알게 되었다. 신약성서의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도 모두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직접 쓴 작품이 아니라 후대에 다른 사람(혹은 집단)이 그 이름을 빌려 쓴 것이다. 고대의 문헌, 특히 경전과 같은 문헌들은 오랜 구전 과정과 문서화, 그리고 편집 과정을 거쳐서 최종 형태의 문서로 확정된 것이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문헌의 내용과 문맥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첨가와 삭제, 수정되기도 하였다. 현대 문헌학은 기억과 구전에 의한 전달 과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윤치호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문서들에 대해서도 문헌학적인 비판적 검토와 의혹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윤치호 설을 위해 제시되는 문헌들은 현대 문헌학의 이러한 철저한 검증과 비판을 통과하기 어렵다.
윤치호 작사설을 위해 제시되는 가장 중요한 문헌자료는 1908년 6월 25일 발행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이다. 그러나 ‘역술’(譯述)이라는 단어가 저자임을 뜻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기에 실린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표시도 없다. 그러므로 이 문서는 윤치호가 <애국가>
의 작사자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설사 윤치호가 『찬미가』를 ‘역술’한 것이 아니라 ‘저술’한 것이라고 기록되었더라도, 더 나아가서 윤치호 자신이 현행 <애국가>의 작사자라고 기록되었더라도 그것이 윤치호가 정말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온전히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윤치호가 그때 자신이 『찬미가』의 저자이며 <애국가>의 작사자라고 ‘기록했다’는 사실만을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안창호나 다른 어떤 사람이 <애국가> 작사자라고 주장되는 일이 없고 윤치호만이 <애국가> 작사자로 주장되고 그렇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만일 안창호가 진정한 <애국가> 작사자인데 어떤 필요와 이유가 있어서 윤치호를 대신 내세우기로 하고 윤치호도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추정한다면,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고 밝히고 그렇게 문헌에 썼다고 해도 그것이 윤치호 작사설을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애국가> 작사자로 주장되는 안창호와 윤치호가 1945년 전에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안창호와 윤치호에게서 나오는 증언과 전문이 어긋나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증언들과 마찬가지로 문헌자료들도 결정적인 증명력을 갖지 못한다. 게다가 정보가 부족하고 연락과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던 그 시절에 만들어진 문헌들의 증거 능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 1907-10년과 같은 특수하고 혼란스러운 격변기에 나온 2, 3차의 문헌자료들은 어떤 면에서 그 증거 능력이 증언보다도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신속한 정보 소통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도 인터넷에 거짓 뉴스와 왜곡된 정보가 넘쳐나고 있다. 문헌적・서지학적 자료들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료들을 절대화하고 맹신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뜻이다. 어떤 문헌과 자료에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고 쓰여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때 그 문헌과 자료를 작성한 이들이 그런 줄로 생각하고 그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했을 뿐이다. 그런 것들은 간접 증거가 될 수는 있지만 직접적이고 온전한 증거는 아니다.
그런 문헌들이 윤치호 작사설을 증명하려면 그 문헌을 만든 사람들이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사실을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밝혀야 한다. 또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출처)은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따져 물어서 윤치호에게까지 소급되어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서 오랜 세월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고 표기한 문헌들의 편집자들이 어떻게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윤치호가 자기가 작사했다는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윤치호가 진실을 말했는지 검증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윤치호 작사설을 위해 제시되는 이런 문헌자료들은 모두 풍문이나 불확실한 정보나 판단에 근거한 간접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윤치호 설을 주장하는 쪽에서 중요하게 제시하는 또 다른 문헌적 자료는 미국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한 「신한민보」(1910. 9. 21.)에 현행 <애국가>를 <국민가>라는 제목의 ‘윤티호 작사’로 소개한 것이다. 이 또한 윤치호와 관련이 없었던 「신한민보」 편집자들이 전문이나 풍문에 근거해서 윤치호 작으로 소개한 것일 뿐 윤치호 설을 증명하는 자료가 될 수 없다. 대한인국민회 창립 15주년을 위해 「신한민보」 1924년 1월 31일 자에 수록된 <애국가>와 안익태가 작곡한 악보와 함께 1-2절 가사를 제시한 1936년 3월 26일 자의 <애국가>에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제시하지 않는다.3 이 점은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신한민보」 편집자들이 나중에야 알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1910년 일본유학생회 ‘윤치호 작 새 애국가 기록’이란 것도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다. 도쿄 한국연구원 원장을 지낸 최서면에 따르면 일본 유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서대문의 독립문 낙성식에 참가했다가 돌아와서 “윤치호가 만들었다는 애국가를 불렀는데 옛날 것과 달리 바람직한 노래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민영환 작시의 애국가를 부르지 말고 윤치호 애국가로 부르자.”라고 말한 내용이 일본 유학생회 학회지에 실려 있다고 한다. 최서면은 이 사실을 밝히면서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고 주장했다.4 그러나 일본 유학생이 참여했다는 독립문 낙성식은 1896년에 있었고 이때에 부른 윤치호의 노래는 현행 <애국가>가 아니라 <무궁화가>였다. 이것이 잘못 알려져 1910년까지 <애국가>를 윤치호 작으로 알고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밖에도 <애국가>를 윤치호 작으로 표기한 1909년 이후의 여러 문헌자료가 제시되고 있지만, 이런 자료들도 1908년의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에 근거하거나 풍문에 근거해서 윤치호 작으로 표기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역시 결정적인 증거로 인정하기 어렵다.
1945년 9월에 윤치호는 딸의 요청을 받고 <애국가> 가사를 써주면서 끝에 ‘일구영칠년 윤치호 작’(一九○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 문서에서 애국가 4절이 원래 가사인 ‘님군을 섬기며’가 아니라 ‘충성을 다하여’로 기록되어 있는 점이 눈에 띈다.5 ‘충성을 다하여’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시절에 고쳐 넣은 것이다.6 만일 윤치호 자신이 애국가를 지었다는 점을 증거로 남기려고 했다면 자기가 본래 지은 대로 기록해야 한다. 이런 사실은 윤치호 작사설에 빈틈이 있음을 의미하며 윤치호가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윤치호가 그동안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밝히지 않다가 해방 후에 갑자기 그런 기록을 남긴 점에 대해서도 그 진정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윤치호는 겁이 많은 사람으로서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위협 앞에서는 굴복하는 사람이었다. 일제의 군사적 지배에 곧바로 굴복하고 순응했을 뿐 아니라 105인사건 때에는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다가 판사 앞에서 번복하기를 세 차례나 하였다.7 고문에 대한 윤치호의 이러한 태도는 안창호나 이승훈이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면서도 당당한 기개를 드러내며 더욱 강해져서 나온 것과는 대조된다.
또한 해방이 되자 친일파의 거두였던 윤치호와 그 가족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길거리에서 학생들이 윤치호에게 휴지와 돌을 던지기도 하고 자객이 습격하여 목숨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8 윤치호는 개인 재산과 가정을 매우 중시하는 소시민적 인간이었다. 갑자기 해방이 이루어져서 윤치호 자신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윤치호는 자신과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라고 주장했을 개연성이 높다.
친일파였던 김활란이 해방 후에 윤치호를 찾아갔을 때 윤치호가 “애국가를 내가 지었다고 말하지 마시오. 내가 지은 줄 알면 나를 친일파로 모는 저 사람들이 부르지 않겠다고 말할지 모르니까.”라고 말했다고 김동길이 전하였다.9 이 말도 윤치호가 “내가 애국가를 지었다.”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게 될 것을 말한 것뿐이다. 이런 발언들은 친일파를 정당화하고 옹호하기에 적합한 말이어서 신뢰하기 어렵다.
친일파였던 서정주도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는 것을 밝히면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므로 밝힐 수 없다는 말을 이승만에게서 들었다고 하지만, 이런 주장도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승만은 평생 안창호를 적대적 경쟁자로 여기고 안창호를 음해하고 비난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승만이 1904년에 미국에 가서 환영하는 동포들과 밤새도록 <애국가>를 불렀다는 주장도 착각이거나 잘못된 기억에 근거한 것이다. 1904년에는 아직 <애국가>가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역시 친일파였던 백낙준이 윤치호에게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윤치호는 말없이 그의 역술 『찬미가』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보냈다고 한다. 윤치호의 이런 행동은 매우 모호하여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확실한 증명이 될 수 없다.
1945년 이전에 윤치호는 떳떳하게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밝히지 못했다. <애국가>가 독립운동가들뿐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 그렇게 널리 불리고 있는데도 윤치호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애국가>에 대해서 자신의 특별한 감정과 생각을 한 번도 밝힌 적이 없는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면, 이것은 너무나 기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3·1운동 때 온 국민이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했는데,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독립운동자들과 3·1운동을 비난하는 글을 쓰면서 <애국가>에 대해서 느낌이나 생각은 밝히지 않고 있다. 윤치호는 60여 년 동안 매일 자신의 주변 사건과 관계에 대해서 자신의 심경을 일기에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그 어디에서도 <애국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해방 후 친일파와 그 가족들이 생존의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윤치호와 친일 인사들이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내세우는 것은 설득력도 떨어지고 신빙성도 없어 보인다.


1 안창호 설과 윤치호 설을 주장하는 문헌에 대해서는 안용환, 『독립과 건국을 이룩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서울: 청미디어, 2016)와 윤경남 편저, 『좌옹 윤치호 평전』(서울: 신앙과지성사, 2017) 참조.
2 “애국가는 절대 도산 안창호의 작품일 수 없다”(「뉴시스」, 2018. 3. 31.)에서 인용.
3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보는 유동식은 「신한민보」에 실린 1924년과 1936년의
<애국가> 가사가 1910년에 실린 ‘윤치호 지음 애국가 가사’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1924년과 1936년의 <애국가>에는 윤치호가 작사자로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유동식, “윤치호와 안익태,” 윤경남 편저, 『좌옹 윤치호 평전』, 514.
4 최서면, “일본에서 부른 애국가,” 윤경남 편저, 『좌옹 윤치호 평전』, 448-449.
5 안용환, 『독립과 건국을 이룩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 윤경남 편저, 『좌옹 윤치호 평전』, 265.
6 주요한 편저, 『안도산전서』, 122.
7 윤경남 편저, 『좌옹 윤치호 평전』, 302-303.
8 坪江仙二, 『改正增補朝鮮民族獨立運動史』(高麗書林, 1986), 410.
9 김동길, “애국가는 누가 지었나,” 윤경남 편저, 『좌옹 윤치호 평전』, 418-419.



박재순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씨사상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씨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씨사상』,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다석 유영모』 등이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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