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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18년 11월호)

 

  중세 사람들의 삶과 죽음 04
  알브레히트 추기경의 삶과 루터

본문

 

브란덴부르크의 추기경 알브레히트(1490-1545)는 당대에 유명한 호헨촐렌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가문의 격식에 따라 브란덴부르크의 후작으로 출발하여 무려 14개의 호칭이 붙었고, 성장하여서는 다시 마인츠의 대주교,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 등 7개의 호칭이 더 생겼다. 중세의 막강한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과 마찬가지로, 이름 있는 가문에서 이렇게 긴 칭호를 소유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대주교 자리를 돈으로 사다
중세 시절, 이름난 가문에서는 그 일원 중 한 사람을 종교계의 높은 지위에 앉히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이것은 전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알브레히트의 형인 선제후 요아킴 1세(1484-1535) 역시 일찍이 동생을 위한 자리를 물색했는데, 바로 우트레히트의 주교 자리이다. 그는 이 주교 자리를 사기 위해 6,000굴덴을 제공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알브레히트가 1513년에 브란덴부르크와 가까운 마그데부르크와 할버슈타트의 참사회에 재직하면서 서서히 출세의 발판을 다진 결과, 그의 나이 23세에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와 할버슈타트의 주교가 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이렇게 여러 도시를 겸직하는 주교나 추기경이 많았다.
알브레히트가 24세가 되던 1514년에 그는 마인츠의 대주교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는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그마치 3만 굴덴을 지불했다. 이 정도의 거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그는 은행가이자 당시 최고의 갑부인 야콥 퓨거(1459-1525)에게 돈을 빌려서 비용을 해결했다. 퓨거 가문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1500년부터 교황청과 왕래하면서 교황의 재정가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513년부터 바티칸의 면죄부 장사로 들어온 돈을 관리하였고, 그 돈의 일부를 이익금으로 배당받은 영향도 있다.
알브레히트는 퓨거 가문으로부터 3만 굴덴을 빌려 대주교 자리를 얻었지만, 8년 이내에 빌린 돈과 이자를 반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갚아야 할 돈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알브레히트는 이 돈을 기한 내에 갚을 방법을 찾았는데, 바로 면죄부 판매권이었다. 당시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허락이 필요했다. 결국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 허락을 받기 위해, 17세에 추기경이 되고 38세에 교황이 된 레오 10세(1513-21)를 찾아갔다.
마침 경제적인 문제로 곤궁에 처했던 교황은 알브레히트에게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3만 굴덴을 조달해준다면 면죄부 판매권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황제 막시밀리안 1세(1459-1519)도 여기에 관여했는데, 면죄부 판매를 공적으로 인정해주는 대가로 1년에 1,000굴덴을 요구했다. 결국 알브레히트가 대주교 자리를 얻고자 마련한 돈은 자그마치 6만 8,000굴덴이었다. 이 금액을 8년 내에 다 갚아야 했다니!
결국 알브레히트는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 면죄부를 많이 팔아야 했다. 그래서 알브레히트는 이러한 장사에 능통한 도미니카 수도원장 요한 테첼(Johann Tetzel)을 면죄부 판매 전담인으로 임명했다. 그는 곳곳을 다니면서 능수능란하게 면죄부를 팔던 사람이며, “여러분, 돈이 통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그 순간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바로 천국으로 올라갑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이다. 사실 면죄부 장사 초창기에는 그 정도로 타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신학자 임바흐 교수는 밝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돈을 긁어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이미 루터 시대 이전에도 지탄을 받았다.

형제들이여, 신이 당신의 죄를 용서해줄 것이고, 만약에 당신들이 은반지나 탈러(Taler, 돈의 단위)로 바치면, 내가 파는 이 거룩한 면죄부가 당신들을 구원해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장식 핀, 브로치, 반지, 숟가락까지 값나가는 물건은 다 받습니다. 여러분들! 이 거룩한 교황의 교서에 머리를 조아리십시오! 그 외에 다른 방법도 있답니다. 누군가가 선심을 써서 가난한 수도원에 돈을 보낸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참회가 된답니다. 가까이, 가까이 오십시오. 사랑하는 여인들은 양모를 바친다면, 나는 당신들의 이름을 교황의 교서에 새길 것입니다.

루터에게 고백성사를 한 많은 이들이 테첼의 설교에 완전히 빠지는 모습을 본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에 대해 성당에서 열심히 설교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신자들은 루터의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루터에게 영향을 미쳐 결국 역사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아무튼 테첼의 면죄부 장사 덕으로 알브레히트는 자신의 빚 6만 8,000굴덴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어서 이자와 잡비까지 모두 갚았다. 이 돈을 갚는 상황에 대한 기록이 있다. “테첼이 이끄는 면죄부 판매단에는 늘 퓨거가 은행의 위원들이 함께 있다가, 이 면죄부 판매 돈 통을 열 때 공증인을 소환하였고, 증인까지 세워서 장부를 만들곤 했다. 때로는 통 안에 든 돈은 물론 가짜 돈도 아주 정확하게 가려내고, 들어온 돈의 반은 퓨거가가 가져가고 나머지 반은 당연히 교황의 몫이었다.” 이렇게 큰 금액을 8년 안에 다 갚고도 남았다니, 면죄부 장사가 보통 남는 장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알브레히트의 연인 우술라
당시 알브레히트는 여러 명의 연인을 두었다는데, 그중 우술라 레딩거(Ursula Redinger)를 살펴보자. 가톨릭 추기경이 연인을 두고 살면,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관계를 비밀리에 유지하는데 그는 이를 결코 숨기지 않았다. 의아한 것은 그가 연인 관계를 그대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들은 추기경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명시되지 않으니 더 궁금하다.
우술라 레딩거는 제빵사 집안 출신 서민의 딸로서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알브레히트는 1510년 혹은 1511년에 마인츠의 주교좌 참사회원으로 일했을 당시에 그녀를 알게 되었고, 그녀와의 사이에 ‘안나’라는 딸 하나를 두었다. 그녀의 딸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남편은 알브레히트의 비서인 요하네스 키르히너였다. 첫 번째 남편이 죽자, 안나는 1550년에 아버지의 또 다른 비서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의 두 번째 결혼 때에는 결혼 문서에 “요하킴 키르히너의 과부이자 추기경의 딸”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연인 우술라가 죽자, 알브레히트는 그녀의 시신을 값비싼 관에 넣어 할레의 성당에 두고, 성녀 마가레타의 뼈와 함께 넣어 그녀를 공경하도록 했다는 소문이 19세기까지 파다했다. 알고 보니 마가레타는 성녀 우술라가 동행했던 1만 1,000명의 여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추기경의 연인 우술라는 성녀 우술라와 큰 관계가 없었지만,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알브레히트가 개인적으로 이 성녀를 이용한 것 같다는 추측이 있다.
그렇다면 성녀 우술라는 누구인가? 기독교를 믿는 한 영국 왕의 딸인 우술라는 1만 1,000명의 처녀를 이끌고 로마 순례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쾰른에서 훈족의 공격을 받아 학살되었다. 쾰른 시민들은 그녀를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위의 마가레타 관에 대한 소문은 몇백 년이 지난 후에 실상이 밝혀졌는데, 1880년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박사가 마가레타의 뼈가 들어있다는 관을 열어보니 거기엔 인간의 뼈가 아닌 나무로 만든 인간의 뼈대 형상을 한 모조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부분은 정말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았는데, 그저 소문인 것일까? 그렇다면 알브레히트의 여인 우술라의 진짜 시신이 든 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연인 문제에 대한 루터의 상반된 입장
이러한 상황을 보다 못한 루터는 알브레히트에게 편지를 쓴다. “당신이 추기경으로 그렇게 산다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차라리 당신의 원래 신분인 귀족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당하게 결혼을 하시오! 당신이 계속 그렇게 산다면, 아마 다른 추기경들도 당신과 같은 삶을 살지도 모르잖소. 만약에 내 조언대로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죽고 난 뒤에 당신은 신으로부터 ‘당신의 부인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알브레히트에게 건넨 자신의 충언이 수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루터는 그를 향해 공격과 질책을 퍼부었다. 루터는 추기경의 연인 우술라가 죽은 후 마그데부르크 시민들을 향해 “추기경이 거룩함을 가장해 자신의 창녀에게 촛불까지 얹게 하다니!”라며 작정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에게 위와 같은 조언을 한 루터는 종교개혁을 도왔던 필립(Philipp von Hessen, 1504-67)에게는 다른 조언을 했다. 이미 정식 부인을 둔 필립에게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가 자주 매춘부를 찾았던 모양이다. 그의 여동생은 차라리 부인 하나를 더 두라고 조언했지만, 당시 합법적인 혼인 외에 다른 혼인은 금지되어 있었다. 당시 이런 일을 저지른 자들을 포대기에 싸서 강물에 던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사형에 처하기도 하던 시대였다.
결국 그는 17살의 한 정부를 찾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간 대가로 돈은 물론이고, 딸이 정부로 살게 할 수는 없다면서 합법적인 혼인을 요구했다. 필립에게는 엄연히 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제2의 부인으로 맞이하는 것은 그에게 매우 난처한 일이었다. 필립은 즉시 이 문제를 루터와 의논했다. 그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가톨릭의 불합리성을 보고 종교개혁을 부르짖은 루터 아닌가.
하지만 루터는 필립의 두 번째 결혼 문제에 대해 다른 귀족들과 심각하게 회의한 끝에, 마태복음 19장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예수가 일부일처제를 강조한 것은 사실임을 인정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드시 ‘예외’가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부인이 나병에 걸렸다면 남편은 부인이 비록 살아있을지라도 두 번째 부인을 맞을 수 있는 것처럼, 어떠한 전제 조건이 타당하다면 예외적인 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예외를 필립의 상황에 적용시켜, 필립이 17세의 정부를 감추지 않고 주위 사람 일부에게만 알린 후에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는 논리를 펼쳤다.
바티칸의 부정부패를 참다못해 종교개혁을 일으킨 장본인이 자신의 종교개혁을 지지해준 필립을 옹호하기 위해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까지 필립의 두 번째 결혼을 성사시켰다니, 후에 루터는 이 일로 많은 지탄을 받았다.

성물 모으기에 중독된 추기경 알브레히트
알브레히트의 생활은 다소 소박한 편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520년 카를 대제의 황제 대관식에 그는 말을 탄 수행원 130명을 대동하였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쾰른의 선제후는 말을 탄 수행원 500명, 팔츠의 선제후는 말을 탄 수행원 700명과 나타났다고 한다. 사실 이 정도의 숫자는 중세시대 잔치나 축제 때 말을 몰고 온 이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소박한 행차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일례로 당시 우라흐의 귀족 잔치에는 4,280마리의 말이, 란츠후트 귀족의 잔치에는 말을 탄 이들이 5,945명 등장했다. 이런 귀족들의 잔치가 열리면 그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주위 지방까지 말들로 꽉 찼으며, 여기에는 수행원들과 말 관리사까지 동행한다. 중세사가인 칼–하인츠 스피스 교수가 쓴 귀족들의 호화 생활에 대한 연구서 덕택에 우리는 당시 상황을 보다 잘 들여다볼 수 있다.
알브레히트는 경제적 문제로 인해 힘들어했지만, 그가 귀족 출신인지라 씀씀이는 컸다고 한다. 1536년 선제후 요하킴 2세가 그의 부인과 할레에 머무는 2주 동안 1,000굴덴 이상을 지출했는가 하면, 금과 은으로 된 1만 굴덴의 요람까지 선물했다고 한다. 대신 알브레히트는 교회 혹은 호화로운 성을 건축하거나 소유하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술품에 대한 조예가 더 깊었다고 하는데, 그가 모은 예술품은 주로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물품이었다.
많은 종교적 예술품을 소장한 그에 대해서 동시대인 게오르크 자비누스가 남긴 자료들을 보면, 90가지 종류의 미사복, 미사용 성작(calix)과 성물 600점, 100개가 넘는 미사 재단의 장식들, 다마스커스로부터 온 면직물과 비단으로 만들어진 32가지 종류의 기, 35개의 양탄자 외에도 재단 방석들, 값비싼 미사책 등이 있다. 그는 축제일이 되면 아주 호화스러운 주교 모자를 쓰고 주교 지팡이를 잡고, 참으로 찬란한 종교 행렬을 만들어 거리를 지나가곤 했는데, 이때는 추기경으로서의 위엄보다는 광채나는 그의 복장이 더 두드러졌다고 한다.
이 외에도 그는 성당의 제대를 금과 은으로 만든 재료로 꾸미는 것에도 많은 투자를 하였다.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죽을 때를 대비하여 금관을 만들게 했는데, 그가 모은 종교의식에 필요한 많은 물품이 후에 중세의 성물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성물에 대한 취미나 애착을 가졌던 그가 소유한 성물은 자그마치 총 8,833개이다. 그중 42개는 몸을 다 갖춘 성인들의 시신이며, 성물 중에서도 아주 값어치 있는 353개는 금이나 은궤로 보관하였다.
이에 관한 매우 황당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가 소유한 성물들을 방문해서 기도하고 경배하면 얻게 될 죄의 사면 햇수가 자그마치 3,924만 5,120년 220일이라고 한다. 우습지 않는가? 약 4,000만 년과 220일의 산출 근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며, 또 이것을 믿은 중세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유감스럽게도 그의 유물은 종교개혁 시기에 많이 사라지기도 했고, 그가 죽기 전에 많이 팔기도 했는데, 그가 죽을 즈음에 갚아야 했던 빚은 10만 굴덴이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부자였던 퓨거 가문, 벨저 가문뿐만 아니라 바이에른의 귀족들, 심지어 유대인에게까지 빚을 졌다고 한다.

마치면서
1541년부터 아팠던 그는 부분적인 업무만 이행 가능할 정도로 병이 점점 더 악화되었고, 1545년 9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보통 그 이전의 선임자들은 어떤 병으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알브레히트의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생전에 자신의 관을 미리 짜 두었으며, 금으로 만든 이 관은 지하실에 두는 관형묘로 남아 있었는데, 30년전쟁(1618-48) 시기에 그의 금관은 도난당했다. 그의 시신에 대한 관심보다는 분명 금덩어리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가 퓨거 가문에서 빌린 돈으로 대주교 모자를 썼다는 것은 문화사 안에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455년에서 1827년 사이에 살았던 주교들이나 추기경들이 돈으로 자리를 산 이야기는 독일 사학자들의 연구서로도 나와 있기 때문에, 사실 알브레히트의 이야기는 그중의 일부에 속할 뿐이다.
상식을 너무 벗어나기에 슬프기까지도 한 대목은 면죄를 받는다는 햇수이다. 당시에 3,924만 5,120년 220일을 면죄받은 영혼들은 지금도 천국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 4,000만 년에서 이제 겨우 500년 정도 지났는데…. 이렇게 하달된 종교교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맹목적인 추종은 참으로 어리석게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무섭기까지 하다.
루터에 대한 언급도 빠질 수가 없다. 바티칸의 비리를 보다 못해 종교개혁을 한 그가 종교개혁을 옹호해준 귀족 필립의 문제를 두고 교묘한 논리를 짜내어 도왔다는 것은 바티칸의 비리보다는 문제의 크기가 작다고 할 수 있겠지만, 왠지 그 역시 자잘한 비리를 스스럼없이 만들어낸 인간으로 비쳐져 씁쓸하다.


양태자 | 독일 마르부르크 필립스대학교에서 비교문화학과 비교종교학 석사학위를, 예나 프리드리히 쉴러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 『중세의 뒷골목 사랑』,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 등을 집필하였고, 영성 번역서로 『파도가 바다다』가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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