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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18년 11월호)

 

  만주 유이민 소설 속의 기독교 05 (마지막회)
  만주를 배경으로 한 반기독교 소설

본문

 

반기독교 소설의 배경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1915년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의 전신)을 조직한 것이나, 1930년 상해에서 ‘공산주의자그룹’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만으로도 넉넉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연해주로 망명한 1913년 이전만 해도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이름난 부흥사이기도 했다. 만주 망명 시절인 1911년 용정의 명동교회에서 가진 부흥회 때는 인근 수백 리에서 1,000여 명이 모일 정도였으며(서굉일, 『규암 김약연 선생』), 그리어슨(R. Grierson, 具禮善) 선교사와 ‘삼국전도회’(三國傳道會)를 결성해 30여 개의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적 활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최문식(崔文植)은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이다. 1920년대 초 숭실전문학교 시절에 기독교 신앙을 얻었으나 일본 유학 기간에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그는 목사가 되기 전부터 이미 사회주의 이념에 깊이 젖어 있었던 셈이다. 1933-34년에 그는 ‘기독교적화노협사건’에 연루되기도 하고 기독교사회주의 비밀결사사건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이력은 1946년 10월에 있었던 ‘대구 폭동’의 주모자라는 이력에 가려져 있다.(민경배, “배민수와 최문식,” 「한국기독공보」)
1917년 러시아혁명 뒤 이 땅에 유입된 사회주의는 한국 기독교의 지형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1920-30년대 기독교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과 공격은 집요하고 때로 극렬했다. 기독교 측에서는 이에 맞서 정면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일부 움직임도 없지 않았으나 주류는 아니었다. 치지도외(置之度外)랄까? 한국교회는 그때 벌써 어떤 외부의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뿌리 깊은 나무’로 성장해 있었다.
오히려 그 같은 도전을 한국교회 자체의 내적 성찰의 기회로 삼는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개인 구령의 차원에 치중해 있던 보수성과 정체성을 극복하고 ‘갈등의 도가니’ 양상을 보이는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증대되고, 가난과 질병, 무지와 억압 등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웃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지식인 가운데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보다는 사회주의가 사회 변혁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신앙을 떠난 이들도 있었으며, 여전히 신앙 안에 있으면서 기독교를 통해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해내고자 한 사람들도 있었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이기영은 천안의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 권사의 직분까지 얻었지만, 믿음을 버리고 반기독교 운동의 선봉에 섰다. 『대지의 아들』에서 기독교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기독교는 이미 형해(形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 직후까지 임화와 함께 좌익 문학운동을 주도해온 김남천은 기독교의 영향 속에 자라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른 기독교인이었지만, 사회주의의 자장(磁場)에 갇혀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과 달리 박화성은 좀 특이한 이력의 작가이다. 목포의 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젖세례’를 받고 남장로교 계통의 정명여학교를 나왔다. 어려서는 찬미책과 성서를 줄줄 내리읽어 신동이라 불리며 주목을 받았다. 그런 그가 초기작에서부터 반기독교 의식을 선명히 드러내는 것은 의외다. 물론 사회주의에 기울어졌기 때문이었으나 그렇다고 그가 사회주의 문학 조직인 카프(KAPF)에 가담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한귀>, <시들은 월계화>, <하수도공사> 등 일련의 작품에서 보이는 반기독교 의식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경한 모습이다.
반기독교 소설 대부분은 사회주의 의식에 젖어 있는 작가들 또는 그 이념을 문학을 통해 적극 구현하기 위해 조직된 카프 결사체의 맹원들에 의해 창작되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 사상에서 비롯되었을 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기독교가 이들의 공격의 표적이 될 만큼 사회의식에 취약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족, 계급, 이념 등의 중층적 갈등구조 속에 놓여 있던 만주 유이민사회를 배경으로 한 반기독교 소설의 출현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만주 한인사회에 대한 무지 비판, <그 여자>
강경애는 1930년대 만주 한인사회의 대표적 문인이다. 1940년 2월 만주를 아주 떠날 때까지 10년 넘게 용정에 붙박아 살면서 대부분의 작품을 이곳에서 써냈다. 그녀는 오랜 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그 여자>,
<축구전>, <소금>, <원고료 이백 원>, <번뇌> 등의 탁월한 만주 서사들을 형상해냈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주로 ‘가진 자’와 ‘힘 있는 자’의 폭력과 부도덕성을 고발하고 이에 대한 저항 의지를 내비치는 데 집중한다. 이것은 물론 그녀의 탁월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면서, 동시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현실과 맞서고자 하는 작가의식의 표현이다.
그녀가 이 같은 대자적 현실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불우한 성장기 체험이나 주의자인 남편 장하일(張河一)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련 유학 경험을 가진 장하일은 장연군청 고원(雇員) 시절 강경애를 만나 결혼 후 곧장 용정으로 이주해 동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흥중학교는 당시 만주에서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의 학교였다. 해방 후 북으로 간 그는 「로동신문」 부주필 등 주로 언론 분야에서 일하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까지 올랐으나 반당분자로 몰려 결국 숙청당하고 만 인물이다.(일본외무성, 『북조선인명록』)
1932년 9월 「삼천리」에 발표된 <그 여자>는 만주 유이민들의 실정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현지 지식인들과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비판한다. 용정의 기독교 계통 여학교 교원인 주인공의 이름은 ‘마리아’이다. 이 이름은 기독교에 대해 냉소적이고 부정적 의도를 내비치고 있는 소설들에서 상투적으로 불러내는 인명이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여인들은 이름을 갖지 못했다. ‘~씨’ 같이 성으로만 불리거나 남편이나 자녀의 이름 뒤에 ‘~부인’ 또는 ‘~어머니’ 등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가의 지명을 따서 ‘~댁’, ‘~집’ 등으로 부르는 풍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교회에 나오는 여자들에게 서양식 이름을 지어주기 시작한 것은 감리교 선교사 노블(Mattie Wilcox Noble)이었다. 그녀는 성서 속의 인물이나 널리 알려진 유명한 신앙인들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조선혜, 『노블 부인의 선교생활 연구』)
여류문사 행세를 하는 미모의 주인공 마리아는 자기가 제일인 양 자만심에 젖어 있을 뿐 고향에서 쫓겨나 만주까지 흘러든 동포들의 삶의 실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없다. 그런 그녀가 얼두거우(二道溝)교회 부인청년회가 주최하는 강연회에 연사로 나섰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본문으로 삼아 ‘믿음’이라는 제목을 내세웠지만 내용은 엉뚱했다. “여러분, 죽어도 내 땅에서 죽고요, 살아도 내 땅! 내 땅에서 살아야 한단 말이어요. 무엇하러 여기까지 온단 말이어요 네. 그렇지 않아요. 네. 내 잔뼈를 이룬 땅이요. 내 다만 하나인 조업(祖業)이란 말이지요! 여러분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산명수려한 내 땅을요!”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군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마리아의 호통이 계속되자 마침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마리아는 애써 자기의 학력, 미모, 여류작가라는 신분 등을 생각하며 상대적 우월감을 잃지 않으려 했지만, 군중들은 이런 마리아의 속내까지 들여다보는 듯 적개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일시에 교회당이며 종각을 부수고 쓰러뜨렸다. 마리아는 옷이 갈가리 찢긴 채 쓰러져 벌벌 떨고 있었다.
일제의 침탈로 인한 대규모의 인구 이출은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해체를 압박하고 인구 감소를 초래함으로써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그러자 이주 부정론이 제기되고 이주 반대운동이 일기도 했다. 따라서 마리아의 이주 부정론은 일면 타당성을 가질 수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가 그 같은 이주 부정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데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만주 유이민들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턱없이 부족한 채 오히려 그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려 드는 터무니없는 우월의식을 질타하는 데 있다. 살길을 찾아 마지못해 떠나온 이주 한인들의 비극적 현실 조건에 대한 이해도 없고 사랑도 없이 말로만 떠들며 젠체하는 기독교인들의 허위의식에 대한 통렬한 질책으로 읽어야 할 작품이다.
사족일 수 있지만 작중에서 ‘마리아’로 재현된 인물의 실존 가능성을 제기해볼 수 있다. 작품이 발표된 1932년 무렵에 활동한 ‘여류작가’는 강경애 외에 박화성, 백신애, 최정희, 모윤숙이 전부였다. 이들 중 만주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박화성과 모윤숙이 더 있을 뿐이다. 박화성은 남편 김국진이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과 같은 동흥중학교 교원으로 있어 잠시 용정에 다녀갔을 뿐 직장을 잡고 거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윤숙은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1931년에 장로교 계통의 명신여학교 교사가 되어 1년 남짓 용정에 살았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간도에 객이 되어>, <해란강의 추억> 등을 남겼으나, <그 여자>에서 마리아가 그렇듯 당시 만주 한인들의 삶과는 크게 동떨어진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특히 앞의 작품에서는 만주 한인들에 대한 경멸의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기 모윤숙은 당시 용정 제창병원 원장 김영[본명 김덕봉(金德鳳), 1903-37]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비련이었다. 김영은 독립운동가 김필순(金弼淳)의 아들이자 ‘상해의 영화 황제’ 김염(金焰)의 맏형으로 이미 가정을 이룬 가장이었다. 모윤숙은 이룰 수 없는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렌의 애가>에 담아냈다.(박규원, 『상하이 올드 데이스』) 핏빛 구름이 걷힐 날 없던 1930년대 만주의 하늘 아래서 울려 퍼진 사랑의 세레나데였던 것이다. 보다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여자>의 모델은 모윤숙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 대한 냉소, <부흥회>
김창걸(金昌傑)은 1980년대 이후에야 국내에 알려진 중국 내 조선족 작가이다. 1911년 함경북도 명천 태생으로 명동촌에 이주했으며 연변대 교수, 연변문학연구회 문학부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1936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수십 편’을 썼으나 스크랩으로만 보관해오던 중 “‘문화대혁명’ 때에 ‘반란’을 당하여 몽땅 잃어버”렸다고 한다. 지금 전해지는 작품은 『김창걸단편소설선집』(1982)에 수록된 15편을 포함하여 나중에 발굴되었거나 해방 후에 발표된 작품을 합해 23편만이 확인될 뿐이다. 그나마 선집에 수록된 작품들도 발표 혹은 집필 당시의 원작이 아니라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 “되살려”낸 것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선집 수록본을 텍스트 삼아 해방 전의 문학세계를 논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이 글에서 살피고자 하는 <부흥회>와
<기념사진>은 자전적 제재의 작품인 만큼 적어도 해방 전 만주 기독교의 일면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부흥회>는 용정 명동교회에서 있었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를 제재로 한 작품이며, <기념사진>은 은진중학교에서 실제 일어났던 반기독교 운동을 재현한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김창걸단편소설선집』에 수록되어 있다.
화자가 소학교 학생 시절이었다고 했으니 1920년대 중반의 일일 것이다. M교회에서 김석두 목사를 초청해 부흥회를 열었다. “룡정에서 30리 동남쪽”에 있다는 M교회는 명동교회임을, “조선에서도 이름 있는 성신을 입었다는 김석두 목사”는 당대의 유명한 부흥사 김익두(金益斗, 1874-1950) 목사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돌머리’(石頭)를 연상케 하는 이름에서 벌써 작가의 의도는 드러나 있는 셈이다.
앞서 김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 학생들이 난입해 아수라장을 이뤘다는 소문이 나도는 판이었지만, 김 목사의 명성에 끌려 모여든 교인들로 300명 정도를 수용하는 교회당이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참회기도회가 열리고 뒤이어 안신(안수)기도회도 열렸다. 특별한 병은 없으나 어려서부터 허약 증세에 시달리는 작중의 ‘나’, 장난치다 넘어져 곱사등이가 된 ‘윤 아무개’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겨 부흥회에 참석했다.
교회사는 김익두 목사가 생전에 무려 1만여 명의 병자를 고쳤다고 전한다. 1920년 5월 부산진에서 안수기도만으로 여덟 살의 어린 앉은뱅이를 고치고, 밀양에서는 열여덟 살의 여자 벙어리를 고쳤다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소설 속 두 인물도 김익두 목사의 이런 명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들도 이번 기회에 안수기도를 받아 허약한 체질이 개선되고 곱사등이가 펴질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부흥회에 참석한 것이었다.
안수기도회는 몰려든 사람이 너무 많아 근처 여학교 강당을 빌려 열었다. ‘나’도, ‘윤 아무개’도 소원을 묻는 목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러나 이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허약한 몸이 건강해지지도, ‘윤 아무개’의 곱사등이가 펴지지도 않았다. ‘나’의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종교보다 과학을 더 믿게 된 데다 “사회를 휩쓰는 사조”에 물들어 믿음에서 멀어졌다. 작가는 이렇게 냉소하고 있다. “나는 끝내 사탄의 꼬임에 빠지고 말았다.”

은진중학교 반기독교 운동의 전말, <기념사진>
1920년대 초부터 만주에도 사회주의가 유입되었다. 처음 반일 성향의 민족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번져가기 시작하여 1920년대 중반에는 많은 사회주의 운동단체들이 출현했다. 이들 학교 안의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만주 일대의 사립학교들에서 반종교 운동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22년부터의 일이다. 상해로부터 용정에 온 임호, 동흥중학교 교사 김봉익, 대성중학교 교사 이주화 등이 용정의 반종교 운동을 주도했다.(박주신, “간도 한국인의 민족교육에 관한 연구”) 이로부터 1920년대 말까지 기독교 계통의 은진중학교, 천도교 계통의 동흥중학교, 유교 계통의 대성중학교 등이 모두 극심한 내분에 시달리다 쇠락해갔다. 김약연이 교장으로 복귀한 명동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념사진>에 소환된 학교는 은진중학교이다. 1920년 2월 캐나다 선교사 박걸(A. H. Barker) 등에 의해 설립된 은진중학교는 간도 일대에서 명성이 높아 시험을 치러 학생들을 선발할 정도로 지원자가 많았으며, 남만주와 북만주는 물론 멀리 연해주에서 유학 오는 학생들도 많아 전체 학생 수가 3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이 학교도 반종교 운동의 세찬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은진중학교에서는 1925년에 반기독교 운동이 시작되어 1926년에 본격화되었다. 성경 과목 교사의 교육 내용을 문제삼아 그의 해임과 성경 과목 폐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듬해 4월에는 졸업시험 답안지에 이상한 답을 쓴 한 학생의 졸업 자격을 박탈하자 이를 빌미로 동맹휴교로 맞서다 무려 150여 명의 학생들이 집단 자퇴하여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로 전학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바로 그 중심에 작가 김창걸이 있었던 것이다.
반종교 운동이 본격화된 1926년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김창걸은 이듬해 “반동적 종교교육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한 후 대성중학교로 전학했다. 이 무렵 대성중학교는 한발 앞서 반종교 운동의 풍파를 겪고 사회주의의 온상이 되어 있었다. 1923년 일제가 조작한 ‘작발탄사건’(炸發彈事件)은 대성중학교의 부설기관인 동양학원 탄압 사건이었다. 동양학원은 사회주의자 김사국(金思國)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연구하고 가르치기 위해 대성중학교 안에 부설한 학원이었다. 김창걸이 전학을 온 1927년 무렵에는 학교 안에 ‘청년총연맹’, ‘소년총회’ 등의 사회주의 운동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구 학교 연합 지부가 설치되어 교장이 직접 책임비서직을 맡을 만큼 사회주의 활동이 활발한 학교였다. 그가 대성중학교에 재학한 것은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이 같은 학풍에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난 때문에 중도에 학교를 그만둔 후 명동촌을 중심으로 조직된 혁명 청년 단체에 가입해 대중적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등 적극적인 공산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기념사진>은 작가가 직접 주도적으로 참여한 1927년 은진중학교의 반기독교 운동을 재현해낸 작품이다. 원제는 <스트라이크>, 『김창걸단편소설선집』에 수록하면서 제목을 바꿨다. 김창걸의 소설 중에는 이렇게 제목이 바뀐 것들이 많아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주인공 ‘나’는 작가 김창걸, ‘E중학교’는 은진중학교일 터이다.
작품에 재현된 사건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경 과목 교사인 이 목사의 설교에 대한 불만으로 촉발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성희 학생에 대한 징계로 인해 야기된 사건이다. 앞의 것은 동산교회 담임목사이자 은진중학교 성경 교사인 이 목사가 수업 중 “무릇 권세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누구나 그에 복종해야 마땅하다.”라고 한 수업 내용이 발단이 됐다. 이에 학생들이, “그러면 우리 민족은 죄를 얻어 나라가 망했고 일본은 선덕을 쌓아 남의 나라를 지배하며 사느냐?”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같은 불만으로 학생들이 동맹휴학의 배수진을 치고 이 목사의 해임과 성경 과목의 폐지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단편이긴 하지만 작품에는 사태의 전모가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작품의 서사 폭은 장편으로 담아내야 더 좋았을 만큼 넓다. 캐나다 유학을 미끼로 한 학교 당국의 주모자 회유책, 학생들에 의해 외부 출타를 저지당하고 사택 연금 상태에 놓인 교장, 학교 편에 선 학생에 대한 집단 폭력, 밤이면 집을 비우고 대피하는 학교 책임자들의 대처 등은 모두 하나의 독립된 서사 단락으로 처리해도 좋을 대목이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모두 화자의 짧은 언술 형식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그런데도 학교 당국과 학생들 사이의 긴장 관계, 특히 사태 수습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학교 측의 고심은 직접 보고 있는 듯 생생하다.
작가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사회주의자가 된 뒤 반기독교 운동에 앞장선 과거 이력을 자랑스럽게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당시 기독교에 대한 사회주의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당시 사회주의가 교육 현장을 얼마나 황폐케 하고 있었는가를 일깨워주기도 한다. 사태 당시 은진중학교는 선교사 페레스(裵禮士)가 교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문재린 목사가 이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반기독교 소설의 한계와 의미
1920-30년대 반기독교 소설은 주로 카프 계열의 작가들이나 사회주의 작가들에 의해 창작되었다. 따라서 현실 개변의 가능성이나 효용성이 주요 잣대로 동원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 현상 자체로 이해하기보다는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재단하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반기독교 소설들에서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아직 제대로 인식되거나 뿌리내리지 못하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며, 과도한 사회의식에 매몰된 나머지 기독교에 대한 객관적 안목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익숙지 않은 종교의식을 냉소하거나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일탈을 시비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박화성의 <한귀>나 김창걸의 <부흥회>에서 보듯, 가뭄에 비를 내려주거나 병을 치료해주는 것과 같은 기복적・현세적 욕망 실현의 수단이 되지 못하는 기독교의 한계를 폭로해 보여주는 경우들도 성숙한 기독교 인식의 성과라 할 수는 없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보다 성숙한 기독교 담론은 김동리나 황순원 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만주를 배경으로 한 반기독교 소설 몇 편을 살펴보았거니와 예외 없이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이고 신학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주 한인사회의 비극적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유치한 우월감이나 즐기려 드는 기독교 지식인의 허위를 고발하는 강경애의 <그 여자>는 기독교인의 자기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김창걸의 <부흥회>와 <기념사진>은 기독교가 아닌 사회주의가 현실 개변의 대안임을 내세우고자 한 의도의 과잉으로 미학적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기독교의 본령에서 벗어나 기복신앙에 빠져들던 부흥회나 역사의식의 허약성을 드러낸 안이한 성서 해석, 소통이 없는 기독교 교육의 맹목성 등을 반성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들 작품이 1920-30년대 만주의 교회가 처한 영욕의 실상을 핍진하게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보족하는 소설의 중요한 순기능 중 하나이다.

* 표언복 교수님의 연재 ‘만주 유이민 소설 속의 기독교’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표언복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해방 전 중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러시아, 미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관심을 확장해 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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