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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18년 11월호)

 

  박충구의 죽음의 윤리 이야기 06
  죽음의 공포에 대하여

본문

 

그는 나의 북쪽이며, 나의 남쪽, 나의 동쪽과 서쪽이었고
나의 일하는 주중이었으며 내 휴식의 일요일이었고
나의 정오, 나의 한밤중, 나의 이야기, 나의 노래였다
나는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다. 나는 틀렸다.
- 오든(W. H. Oden), 〈슬픈 장례식〉에서


공상과학 소설 『멋진 신세계』를 쓴 헉슬리(Aldous L. Huxley)는 그가 상상한 세계에서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인위적으로 극복하는 세상을 그렸다. 고통에 대해서는 심신의 안정과 평화를 주는 ‘소마’를 먹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어려서부터 조건반사훈련을 시킨다. 모든 고통과 공포를 제거한 인조세계에서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사회공학적으로 생산, 조정된다. 이 세계에서 사람은 수명이 다하면 아무런 공포나 두려움 없이 죽음의 방으로 들어가서 죽고, 화장터로 이송된다.
노화와 죽음의 공포가 제거된 세상을 그린 헉슬리의 상상력은 노화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인간성의 위기를 오히려 더 첨예하게 드러낸다. 신체적 생명력의 소멸 과정이 죽음이라면, 인간은 자기 존재가 소멸하여 부존재(不存在)를 향하는 죽어감의 과정을 피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자기 상실의 두려움을 느끼고, 사랑하는 이와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향해 영원한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일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는 순간 충격을 받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 충격을 잘 극복하고 이를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이도 있지만, 감추거나 태연자약하게 행동함으로써 죽음의 위협에 저항하거나 이를 부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두려움은 비이성적인 것
불쾌한 것을 피하고 진정으로 즐거운 것을 찾으며 살아가기를 권한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1-270)와 그의 제자격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4-55)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비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았듯이 앞으로 일어날 우리의 비존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다분히 이성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라는 공포가 존재한다고 할 경우,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람이 그 죽음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어야 그 공포가 존재한다고 최소한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일단 죽으면 죽은 후에는 경험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죽었다는 상태는 그 사람에게 나쁜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작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데 그가 이를 미리 두려워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성적인 태도가 아니다. - 에피쿠로스, “The Principal Doctrines”

죽음이 오기 전에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이니 두려워할 것이 없고, 죽음이 오면 그 죽음을 느낄 주체가 없으니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명이란 자연법칙 안에서 이루어진 원자의 특정한 조합이며, 죽음이란 그것의 해체라는 관점에 근거하여 사람이 죽은 후에는 주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 위에서 죽음을 일종의 자연스러운 생명 해체로 보는 견해이다. 죽음이 오면 죽음을 두려워하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파이돈』(Phaedo)에서 “철학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죽는 것과 죽음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새로움을 향한 개방적 사유를 자극하는 것이었기에 보수적인 사람에게는 기존의 질서를 흔들어 사회적 안정을 해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그는 아테네의 ‘불경건 처벌법’에 의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형 판결은 501명의 아테네 배심원 중에서 281명의 찬성으로 결정되었다. 억울한 죽음이 선고된 순간에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에 반하여 소리 높여 변증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구차하게 살아남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죽음에 관하여, 그리고 죽음 이후에 관하여 좋고 나쁨을 명료하게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생각으로 내심 분명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평소의 주장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입증했다.
죽음에 대하여 초연하려 했던 그리스 철학 전통은 에피쿠로스 전통만이 아니라 그와는 다른 주장을 했던 스토아 전통으로도 이어졌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죽음을 일종의 해방으로 여겼고, 심지어 타인에 의한 죽음을 겪느니 차라리 스스로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일련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영혼 불멸을 믿는 마음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태도도 보였다. 기원후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세계에서 공고해졌고, 영혼 구원이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여겨졌다. 죽음을 넘어 연장될 내세를 믿고 그것을 현세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김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온 이들의 삶이 그러했다.

실존적 두려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주장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의 감정을 간과하거나 소외시키는 경향을 드러낸다. 루크레티우스의 주장과 같이 비존재를 두려워하지 않거나 에피쿠로스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죽음에 대한 감정적 개입을 차단하려는 논리는 사실 실존하는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나 몸을 가진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게 되는 죽음의 공포는 죽어가는 과정이 상당히 길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가는 시간, 즉 죽어감의 과정도 아울러 생각하고 예측하게 된다. 과거에는 죽음이 일종의 예고되지 않은 급습(急襲)의 형태로 다가왔지만, 오늘날 고령사회에서의 죽음은 대부분 예고된다. 어윈은(R. Ewin)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Reasons and the Fear of Death)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성적 사유에 앞서는 것이므로 죽음의 현실로부터 공포를 느끼는 것이지 우리가 죽음의 현실을 굳이 이성적으로 상상하여 지레 겁을 먹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예고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그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인간다운, 자연스러운 일이다. 죽음의 공포와 위협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바르게 수용하는 방법, ‘잘 죽는 법’(ars bene moriendi)을 찾았다. 잘 죽는 법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 사람이 죽음에 대하여 그저 두려워하거나 공포만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죽음은 부정적 이미지만이 아니라 긍정적 의미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캄(F. A. Kamm)은 죽음의 이중적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분명 우리가 향유하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우리 존재를 상처낸다. 죽음은 우리가 엄연히 살아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것을 제거하려 듦으로써 우리를 모욕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종식시킴으로써 우리를 가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은 우리에게 영구적인 생각, 본연의 가치, 그리고 감사에 대한 관심을 되찾게 한다. 죽음 앞에서 진실을 되찾고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돌아보며 참된 내적 평화를 찾는 것과 같은 개인적 차원의 숙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킨다. - 캄, 『도덕성과 사멸성』(Morality and Mortality)

죽음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는 두렵고 위협적인 것이지만, 우리를 진실 앞에 서게 하고, 윤리적인 판단을 통해 자기 삶의 의미를 바로 볼 수 있게 만든다. 죽음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평가하고 매듭짓는 일은 어쩌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과제이기도 하다. 공포를 넘어선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죽음이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지만, ‘무엇인가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바르고 고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심성에 관한 파이펠의 연구(Herman Feifel, 1974)와 레스터의 연구(D. Lester, 1967)는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 모두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데 있어서 특별한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을 막론하고 비교적 건강한 경우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만, 결국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밖의 일이라 보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모두 죽음에 대하여 양극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죽음에 대해 종교인들은 비교적 ‘깨끗하고 공정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비종교인들은 다소 ‘잔인하고 어두운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이 연구는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의 선택권에 관한 인식에서도 종교인 집단과 비종교인 집단 모두에서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지만, 비종교인들에 비해 종교인들이 죽음에 대하여 비교적 더 자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이렇듯 파이펠의 연구는 종교적인 행동 양식이 고착되었다고 여겨지는 종교인 집단과 그렇지 않은 비종교인 집단 간에 죽음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크게 다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양자 간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결국 ‘종교를 통한 죽음의 공포 극복’의 정도는 예상과는 달리 높지 않았고,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모두에게 죽음의 공포는 보편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죽음의 공포가 가진 속성
죽음은 사람의 몸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신체 현상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마다, 그리고 사회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소 상이하기도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첫째, 죽음을 일종의 징벌로 여기는 감정이 있다. 고대 사회에서부터 죽음은 가장 큰 징벌로 여겨졌다.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죽음을 ‘죄의 값’으로 해석함으로써 일종의 징벌로 해석해온 전통이 있다. 이런 전통에서는 자연사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는 경우에도 자신이 징벌을 받는다고 여기게 된다. 어떤 이는 죽음 이후의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신화적 세계관에 깊이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이런 두려움은 더욱 크다.
둘째, 죽음을 겪는 이는 산 자들로부터 격리, 소외, 고립, 버려짐을 겪어야 한다는 이해가 대부분의 문화권에 깃들어 있다. 오래전부터 죽음은 미지의 세계로 홀로 떠나야 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베커(Ernest Becker)는 『죽음의 부정』(The Denial of Death)에서 죽음 앞에 홀로 남겨지는 두려움, 사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 사람은 이를 수용하기보다는 거부와 저항, 혹은 강한 공포의 감정을 가진다고 했다.
셋째, 죽음은 추하다는 인식이 있다. 죽음은 산 자에게서 생명의 이름다움을 빼앗으며 이로 인해 사람은 생명력을 잃고 부패되어 추한 사체(死體)로 남기 때문에 죽은 자를 신속히 산 자의 세계에서 격리시켜야 한다는 이해가 있다. 심지어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이자나기(イザナギ)는 창조신이자 일본 천황가의 황조신(皇祖神)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이자나미와 사별한 후 그리워하다가 결국 그녀를 찾아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아내는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얼굴에 구더기가 들끓는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자나키는 환상에서 깨어나 지상으로 도망쳐 나와 죽음의 세계를 털어버리듯 온몸을 씻는다. 이 신화는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갈라놓고, 죽은 자의 세계는 청결하지 못한 곳, 더럽고 추한 곳, 그래서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는 사례이다.
넷째, 죽음은 살아서 누리던 모든 것의 전적인 박탈을 의미하기 때문에 끝없는 상실감의 공포를 초래한다. 사람은 죽으면 자신이 소멸하여 사라진다는 생각에서 이해 불가능한 무(無)의 심연에 빠지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생명의 모든 좋은 것, 아름다움을 향유할 기회와 가능성을 모두 박탈당하는 까닭에 죽음이란 산 자에게는 가장 두려운 적대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죽음 이후의 것들에 대하여 확증하여 알 수 없다는 사실에서 또한 공포를 느낀다. 그러므로 산 자로서 누리던 모든 기쁨의 종말을 의미하는 죽음이 다가오면 우리는 슬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간혹 두려워하게 된다.
다섯째, 죽음은 회귀 불가능한 영원한 추방이다. 죽음은 생명 세계로부터의 추방을 결과한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영역을 떠나야 한다. 죽음은 우리를 생명 세계에서 강제로 추방하고 그곳으로의 회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떤 형태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결과는 동일하다. 우리는 이런 추방을 당연시하거나 죽음을 애써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무기력한 패배감과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여섯째, 죽음은 습격당하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는 “내일 아침 그대가 살아 있을 것이라며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라고 노래했다. 건강하게 살다가 노환으로 죽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죽음은 급작스러운, ‘이른’ 죽음이다. 어떤 이는 잠을 자다가 세상을 떠나고, 어떤 이는 불의의 사고로 귀가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암으로 잃고 ‘웰 다잉’ 강사가 된 최철주는 그의 책 『존엄한 죽음』에서 “나도 죽음이 두렵다. 이러다가 밤사이에 죽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고독사 걱정도 이런 것이리라.”라고 고백했다. 우리 주변에 고령의 독거노인이 점점 많아지고, 홀로 죽음을 맞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 온다. 자신의 죽음이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라는 사실은 두려움을 자아낸다.
일곱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예전에 비해 수명이 배나 연장된 시대에 사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이 겪게 될 죽음의 과정이 길고 고통스러울 것을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우리는 자신의 뒤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을 겪다가 죽게 될 것을, 치매에 걸려 자신의 인격을 상실한 채 그림자처럼 살다가 죽게 될 것을,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다가 죽게 될 것을 염려한다.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음의 기나긴 과정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극복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불안의 표출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불안의 양태를 뱀과 같은 ‘포식자에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불안’, 누군가를 치명적으로 ‘해할 것을 두려워하는 불안’, 그리고 ‘실존적인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나누어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염려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며 ‘해로움’을 당할 것이라는 심리에서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 때 그 내면의 의식에서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죽음을 두려워하는 심리가 형성된다는 프로이트의 해명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이런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무엇일까?
죽음을 앞둔 이의 마음에 보편적으로 유발되는 공포와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주의적으로 달관한 정신, 자신의 삶에 대한 상대적 만족, 그리고 깊은 신앙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게 해준다. 발달심리학자 에릭슨(Erik Erickson)은 노년기에 자신의 삶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견지하며 자기 정립을 이루어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가 다르다고 했다. 성숙한 사람은 죽음을 이해하고 그 죽음을 수용할 준비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는 뜻이다.
메이(Rollo May)와 프랭클(Victor Frankl)도 삶이란 생명과 죽음의 현실 속에서 무수한 선택과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전제한 후 일종의 ‘후회이론’을 적용하여 죽음에 대한 태도를 살폈다. 이들은 우리가 각자 살아온 삶에 대한 자기 평가가 어떠하냐에 따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고 보았다. 후회이론에 의하면 후회할 것 없이 잘 살았다는 생각을 가진 이와 그렇지 못한 이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완연히 다르다. 죽음,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도 결국 자신이 살아온 삶의 태도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와 위협은 우리가 죽음을 위협으로, 무서운 것으로, 무화시키는 힘으로, 시간의 찬탈자로, 생명의 파괴자로 이미지화하는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죽음과 노화 과정은 인간의 유한함을 잊고 살아왔던 시간들과는 다른 의미의 시간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죽음이 다가와도 모든 것을 박탈당하지 않고 여전히 우리가 지니고 있을 수 있는 ‘의미’란 어떤 것일까?
죽음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시한 아메리(Jean Amery)는 굴욕적으로 감내해야 할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는 곧 우리 존재의 부정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향해 나간다는 뜻이다. 명백한 진리인 탓에 그 어떤 이성적 위로도 발가벗겨지고 마는 황량한 삶의 지대가 ‘늙음’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는 결국 죽어감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한다. 그야말로 괴이하고 감당하기 힘든 부조리한 요구다.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만 하는 굴욕이랄까.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을 강요받은 굴종으로 늙어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치유가 불가능한 병의 모든 증상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감염된 죽음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가 벌이는 알 수 없는 작용 탓으로 빚어진다. 젊었던 시절, 바이러스는 독성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런 바이러스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나이를 먹어가며 죽음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는 잠복해 있던 은신처에서 빠져나온다. -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아메리가 말하려는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늙어가는 낯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그 “완전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와해”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내심 한탄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죽어감의 과정 혹은 존재의 소멸은 죽어가는 이에게 필경 두려움과 근심을 자아낸다.
예수회 사제였던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은 죽음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유한함을 불안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아래와 같은 기도문을 남겼다.

늙음의 흔적이 내 몸에 생기고 그것들이 내 마음을 상처낼 때,
내 존재를 소멸하게 하거나 생을 그치게 할 질병이 급습하거나 내게 다가왔을 때,
내가 홀연히 병들었거나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그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그리고 나를 지은 그 알 수 없는 위대한 힘 안에서
내가 나의 몸을 스스로 가눌 수 없어 전적인 수동성에 처하게 될 때
이 모든 어둠의 순간 속에서, 오 하나님!
내 존재의 결들을 고통스럽게 갈라 내 본질의 정수까지 헤아려 데려가시는 분이
하나님 당신이심을 알게 하소서.
- 샤르댕, “잘 늙어갈 은총을 구하는 기도문”


“이 모든 어둠의 순간 속에서 내 존재의 결을 고통스럽게 갈라 내 본질의 정수까지 헤아려 데려가시는 분, 그분이 하나님 당신임을 알게 하소서.”라는 샤르댕의 기도 속에는 몸의 노화와 소멸의 지평 너머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신뢰가 우리 안에 차오를 때 비로소 우리가 이 죽음의 불안과 미지의 공포에서 놓임을 받으리라는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박충구 |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 대학원을 마치고 독일 본대학 및 미국 드루대학에서 공부했다.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생명과평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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