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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와 윤치호 01
문화·신학·목회 (2018년 10월호)

 

  <애국가> 작사자는 왜 자기 이름을 숨겼나
  

본문

 

<애국가>는 나라가 망해가던 을사늑약(1905) 이후 한일합병(1910) 이전에 작사되어서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많은 국민이 사무치게 불렀던 우리 민족의 노래이다. 특히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에서 간절하고 힘차게 불렀다. 이 노래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불리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사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55년에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애국가>의 작사자에 대한 문의를 해오자, 국사편찬위원회는 안창호를 작사자로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있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년 반 이상을 조사하고 안창호와 윤치호를 두고 오랜 토론을 벌였다. 문헌 자료가 많은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주장으로 대부분 기울었으나 반대 의견도 있어서 결정을 짓지는 못하였다. 애국독립운동의 사표인 안창호와 친일파의 거두인 윤치호 사이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규명하는 일은 그 후 60년이 넘도록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토론을 이어왔으나, 아직까지도 미로에 빠져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로 있다.
내년 2019년은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아직도 명확하게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필자는 지난 몇 해 동안 안창호의 정신과 철학을 연구하는 일에 집중해왔다. 그러다가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 생각이 박혀서 이에 관한 그간의 논의들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윤치호 관련 저서들까지도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안창호와 윤치호의 역사적·사상적 연속성과 그 차이를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의 역사관과 세계관의 차이, 심리적·철학적 차이를 파악하게 되었다. 증언이나 2-3차 문헌 자료를 토대로 한 기존의 접근 방식이 아닌 당시의 절박한 역사적 상황과 위기에 대응하는 두 사람의 근본적 차이, 문학적 성향과 심리 지향 및 신념과 실천의 차이를 살펴보고 이를 기반으로 접근한다면, <애국가> 작사자와 관련된 의혹과 어둠은 생각보다 쉽게 걷힐 수 있을 것이다.

| 윤치호와 안창호의 이상한 침묵
1907년에 작사되어 곧 많은 사람이 부르고 널리 보급했던 <애국가>의 작사자를 모른다는 사실은 너무도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현행 <애국가>보다 10여 년 전에 나온 다른 애국가들은 작사자가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나온 애국가를 살펴보면, 1896년 나필균 작 <애국가>, 제물포 전경택의 <애국가>, 한명원의 <애국가>, 유태성의 <애국가>, 달성 예수교인들의 <애국가>, 새문안교회의 <애국가>, 최병희의 <애국가>, 평양 김종섭의 <애국가>, 배재학당 문경호의 <애국가>, 이용우의 <애국가>, 배재학당의 <애국가> 등이 있다. 또한 1896년 독립문 정초식과 1897년 조선 개국 505주년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무궁화가>는 현행 <애국가>와 후렴이 같은데 윤치호가 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1
이렇듯 1890년대에 등장하여 잠시 불리다가 사라진 많은 애국가의 작사자들이 알려져 있는 것을 생각하면, 1907년에 지어진 <애국가>의 작사자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그동안 윤치호, 안창호 외에도 민영환, 최병헌, 김인식이 작사자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아무도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런 주장들은 현행 <애국가>와 다른 <독립가>, <대한제국 애국가>와 혼동한 주장이거나 수십 년이 지난 후 가족들과 친지들의 불확실한 기억과 잘못된 추측에 근거한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에는 <애국가>가 작사된 시기와 상황, 이 노래를 부르고 보급한 과정, 작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많이 확보되어 이 문제를 전체적으로 보고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애국가>의 작사자는 안창호와 윤치호 둘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안창호 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수많은 증언과 전언을 내세우고, 윤치호 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상당한 문헌 증거와 자료를 제시한다. 그러나 안창호와 윤치호 두 사람은 <애국가>가 작사되었던 1907년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그 작사자에 대해서 깊은 침묵을 지키거나 모호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만일 안창호가 <애국가>는 윤치호가 지었다고 명확하고 일관성 있게 말했다면 작사자에 대한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또 윤치호가 처음부터 이 노래를 자신이 지었다고 말했어도 이런 혼란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며, 반대로 안창호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라고 일관성 있고 명확하게 말했어도 <애국가> 작사자를 모르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혼란과 의혹은 <애국가>가 지어진 1907년 당시부터 생겼다. 도산은 1908년 9월에 대성학교를 창립할 때부터 <애국가>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열심히 부르고 널리 보급하였다. 1907년 신민회를 창립하고 전국에 연설을 하며 돌아다닐 때부터 도산은 무궁화를 나라의 상징으로 널리 알리고 <애국가>를 부르고 보급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맹렬히 민족운동 즉 국수운동을 일으킬 때에 조선을 무궁화에 비겨 웅변을 토할 때마다 ‘우리 무궁화 동산은…’ 하고는 주먹이 깨질 듯이 책상을 두드리고 연단이 부서질 듯 발을 굴렀습니다.”(「동아일보」, 1925. 10. 21.)
도산이 한국에서 민족운동을 맹렬히 일으켰던 때는 1907-1910년이었다. 1908년 6월에 발행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에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으므로 그 이전에 <애국가>가 지어진 것은 분명하다. 만일 <애국가>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은밀하게 민중 사이에 스며들 듯 알려지고 보급되었다면 작사자가 누구인지 잊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국가>는 생겨난 즉시 알려졌고 처음부터 열렬하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곧바로 널리 보급되었다. 한일합병 이전이기 때문에 아직 일제의 탄압도 가혹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애국가>의 작사자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았다면 작사자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애국가>의 문학적 완성도를 볼 때 우연히 생겨났다고 볼 수도 없다. 이름 없는 사람이 지었다고 해도 도산은 반드시 이 노래의 작사자를 알려고 했을 것이고 또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산처럼 세심하고 꼼꼼한 사람이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고 그냥 부르고 알리기만 했을 리가 없다. 또한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나 윤치호가 아닌 다른 인물이라면, 그렇게 많은 국민이 사랑하며 부르는 자신의 노래에 대해 자신이 작사자라고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가 가족이나 친구에게 자신이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한 번이라도 알렸다면 그 사실은 은폐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안창호가 <애국가>를 열렬히 부르고 보급했던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는 안창호가 설립한 기관이다. 그런데 <애국가>의 또 다른 작사자로 주장되는 윤치호는 바로 대성학교의 교장이었고 청년학우회의 회장이었다. 이 시기 안창호와 윤치호의 긴밀하고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면 안창호와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모를 수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만일 제3자가 <애국가> 작사자였다면 두 사람은 이를 숨길 수도 없었고 또 숨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애국가> 작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떤 이유와 필요 때문에 <애국가> 작사에 관해서 두 사람은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이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두 사람은 작사자가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을 터인데 두 사람 다 1945년 해방되기까지 이에 관하여 밝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안창호와 윤치호 두 사람에게는 <애국가>의 작사자를 알면서도 그것을 밝히고 싶지 않았고 숨겨야 할 어떤 이유와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안창호가 죽고 해방이 될 때까지 40-50년 동안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침묵이 지켜졌다고 여겨진다. <애국가> 작사자를 모르게 된 이유와 까닭은 안창호와 윤치호의 특별한 관계와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비밀을 지켜야 했던 이유
안창호와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비밀을 지켜야 했던 이유는 윤치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창호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윤치호가 작사했다면 두 사람 모두 그것을 비밀로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윤치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명망가였고 정치문화의 주류세력이었던 기호파의 중심인물이었다. 또한 적어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애국가>를 작사한 것이 위험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치호는 자신이 역술한 『찬미가』에 <애국가> 가사를 수록했다. 더욱이 안창호로서는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면 안창호로서는 자신이 작사자임을 숨겨야 할 필요와 이유가 여러 가지로 있었다. 먼저 안창호는 자신이 지은 <애국가>를 자신이 부르며 보급에 앞장서기가 난처했을 것이다. 또한 안창호가 속한 서북 세력은 정치적・문화적으로 한국 사회를 주도했던 기호 세력과 경쟁과 대결 관계에 있었다. 서북 세력은 500년 조선왕조 동안 기호 세력으로부터 당한 차별과 억압과 소외로 인해서 그들에 대한 저항감과 분노가 컸고, 반대로 기호 세력은 기독교와 서양 문화를 먼저 받아들이고 힘차게 일어서는 서북 세력에 대한 견제심리와 경쟁심이 강했다.
안창호 자신은 이러한 지역감정과 대결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 노력했지만 언제나 기호 세력의 견제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중심과 선봉에 있었던 안창호는 많은 사람의 지지와 후원을 받는 동시에 ‘야심가’, ‘지방열의 화신’이라는 끊임없는 음해와 비방에 시달렸다. 특히 평안도 출신으로서 평안도 청년들의 열렬한 존경과 지지를 받았던 안창호는 기호 세력의 강력한 견제와 저항에 직면했다. 당시 안창호에게는 기호 세력의 중심인물이며 명망가였던 윤치호를 앞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창호는 자신을 <애국가> 작사자로 밝히면 이 노래를 보급하는 데 큰 장애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 노래가 이름 없이 민중 속으로 스며들기를 바랐기 때문에 작사자를 어둠 속에 남겨 두려고 했을 것이다.
안창호는 1919년에서 1921년까지 2년 동안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조회 때마다 <애국가>를 1절에서 4절까지 열심히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야말로 안창호가 정치적 경쟁자들로부터 집중적인 견제와 비난을 한 몸에 받을 때였다. 안창호는 이 시기에 가장 열렬히 <애국가>를 불렀지만 자신이 작사자라는 사실을 꼭꼭 숨겨야 할 때였다.
그래서 김구 또한 <애국가>를 열심히 부르면서도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김구는 해방 후에 새 애국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3・1운동과 임시정부 이래 독립운동가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독립운동을 했다면서 이 노래를 존중하고 지지하면서도, 노래의 작사자에 대하여는 모호하게 말했다. 1945년 10월 18일 임시정부 주석 명으로 중국 충칭의 음악월간사가 펴낸 『한중영문중국판 한국애국가』(韓中英文中國版 韓國愛國歌)에서 김구는 <애국가>의 고사(故事)을 간략하게 밝혔다. “이 애국가는 50년 전에 한 한국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된 것인데 이미 그 이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김구의 이런 발언은 <애국
가> 작사자에 대한 단서를 주기보다는 이를 둘러싼 모호함과 어둠을 드러낼 뿐이었다. 김구의 말대로 ‘50년 전’에 <애국가>가 지어졌다면 1890년대인데, 이때는 현행 <애국가>가 나오지 않았을 때이다.

|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일까
이처럼 복잡하고 특별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안창호는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서 모호하고 엇갈리며 상반된 태도를 취하였다. 안창호와 가까웠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전문은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성학교 교원을 지낸 채필근은 안창호에게서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광수 등의 증언에 따르면 안창호는 “선생님이 애국가를 지었지요?” 하는 물음에 대하여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또 도산에게서 <애국가>를 자신이 지었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이들도 많다.2 도산이 <애국가>를 지어놓고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하자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3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가 아니었다면 안창호의 이러한 모호한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윤치호가 작사자였다면 안창호가 윤치호를 제쳐 놓고 자신이 작사자인 체한 것은 부정직할 뿐 아니라 불의하고 부도덕한 짓이다. 대성학교 시절에 안창호는 거짓이 나라를 망하게 한 원수라며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痛悔)하라.”라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어떤 학생이 결석계를 내는데 자기 도장이 없었던지 남의 도장을 찍고 손으로 비벼서 모호하게 만들어서 제출했다. 이것을 알게 된 도산은 대성학교의 정신에 어그러진 것이라면서 그 학생에게 무기정학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4
이렇게 절대 정직을 가르치고 행동한 도산이 자기가 짓지 않은 노래를 자기가 지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준엄했던 안창호가 자신의 <애국가> 작사설에 대해서 진실과 다르게 모호한 태도, 이중적이고 상반된 말을 하고 거짓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자신의 스승이며 존경하는 선배인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를 가로채려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애국가> 작사자로 추정되는 두 사람인 안창호와 윤치호는 작사자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모호하고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작사자는 어둠의 베일에 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작사자에 대한 이러한 침묵과 혼란은 그 시대 상황과 배경에 비추어 보면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애국가> 작사자에 얽힌 비밀과 어둠은 안창호가 작사했다고 볼 때 비로소 밝혀지고 풀린다. 윤치호가 작사했다면 굳이 작사자를 숨겨야 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1896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중심으로 애국가를 지어 부르는 운동이 일어난 이래 생겨난 애국가들을 살펴보면 1907년 이전에는 현행
<애국가>가 나오지 않았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후 나라를 구할 큰 뜻과 계획을 가지고 1907년 2월 20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잠자는 민족을 깨워 일으키기 위해서 애국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도쿄에 잠시 머물렀던 안창호는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을 만나서 애국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했으나 유길준은 노래 지을 재주가 없다며 사양하였다.5
윤정경의 전언에 따르면 1907년 3월 6일 평북 선천교회에서 “백두산이 다 닳고 두만강이 마르고 닳도록” 하는 노래를 듣고 도산이 두만강을 동해물로 바꾸어 4절의 가사를 만들었다.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를 바탕으로 <애국가> 가사를 지었다. <애국가> 가사는 <무궁화가>의 가사와 글자 수가 꼭 같다. 그리고 <무궁화가>의 후렴을 그대로 가져왔을 뿐 아니라 곡조도 <올드랭 사인>으로 같았다. 따라서
<무궁화가>와 현행 <애국가>의 외형적 연속성이 두드러진다.
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와 <애국가>의 형식적 연속성과 유사성이 있으므로 안창호는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에 참여한 것으로 인정하고 존중했을 것이다. 따라서 안창호는 윤치호를 <애국가>의 작사자로 내세울 수도 있었고 자기가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숨기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부정하지 않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시인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1 ‘애국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1897년 8월 13일 정부와 독립협회가 서대문 독립관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제505회 조선 개국 기원절 경축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National Flower)를 불렀다는 점은 당시 독립협회 회장이며 「독립신문」 사장인 서재필이 영문판 「독립신문」(The Independent)의 편집자 주(Editorial Notes)에서 명확히 밝혔다. 신동립, “애국가, 계관시인 윤치호 작사, 서재필 증언 최초 발굴”, 윤경남 편저, 『좌옹 윤치호 평전』(신앙과 지성사, 2017). 408-409.
2 도산이 <애국가>를 지었다는 증언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안용환, 『독립과 건국을 이룩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 (청미디어, 2016), 152, 169, 285-286 참조.
3 주요한 편저, 『안도산전서』(흥사단, 2015), 120-121.
4 위의 책, 106-107.
5 위의 책, 82.


박재순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씨사상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씨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씨사상』,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다석 유영모』 등이 있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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