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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중세 사람들의 삶과 죽음 03
문화·신학·목회 (2018년 10월호)

 

  수녀원이냐 결혼이냐 -중세 수녀원과 결혼 지참금
  

본문

 

베네치아의 수녀원

사학자인 마리 라벤(Mary Laven)이 14세기경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수녀원들에 관하여 3년에 걸친 연구를 토대로 밝힌 바에 따르면, 중세 시기의 수녀원 생활은 오늘날과는 달리 ‘신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빛과 그늘이 공존하던 암울한 장소였다. 베네치아에는 640년부터 수녀원이 생겼으며, 1600년대 중반에는 50여 개의 수녀원이 있었다. 그중 33개는 베네치아 시내에, 그 나머지는 주변 17개의 섬(라구네, 무라노, 브라노, 마쪼로보, 토르첼로 등)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이 수녀원들에는 3,0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왜 이리도 많은 여인들이 수녀원에 들어갔을까? 종교심에 불타는 시대였기 때문에 당연히 신을 섬기는 여인들이 늘어난 것일까? 라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불행히도 이런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진정으로 청빈, 정결, 순명을 지향하며 수녀 생활을 하는 부류도 있었지만, 그 반대로 불행한 삶을 살아간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사료로 남아서 오늘날 우리에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전해준다.

| 당시 수녀가 된다는 것은

수녀원에서의 삶이 어찌하여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까? 라벤은 한 수녀의 모습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수녀의 이름은 엘레나 카산드라 타라보티(Elena Cassandra Tarabotti)이며, 종교적인 이름으로는 아르칸겔라(Arcangela Tarabotti)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가톨릭에서 수녀들이 수녀원에 서원(Profess)을 할 때 이름을 바꾸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인다.
그녀는 신의 부르심 곧 성소(聖召)로 인해 자발적으로 수녀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부모에 의해 강제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30여 년의 긴 세월을 수녀원에서 살아간 그녀는 50세가 되던 해에 수녀원에서 당했던 치욕적인 일들을 중심으로 ‘수녀의 지옥’(Höelle der Nonne)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이 글은 자신이 원하지 않은 감옥 같은 삶을 살아오며 가슴에 차곡차곡 쌓인 분노와 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는 어느 한 개인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도원에 억지로 떠밀려 들어가 바깥세상을 잘 볼 수 없던 많은 여인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수녀가 된다는 것은 ‘산 제물’, ‘순교자’, ‘희생자 예식’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수녀원에서 서약하고 서원하는 과정은 바깥의 청춘남녀가 약혼하고 결혼에 이르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들이 오른손을 들고 수녀원에 서약한 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나는 전능하신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을 한다. 2) 나는 신의 배우자가 되어 살아가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3) 그런고로 성령의 표징으로서 이 믿음의 반지를 받아들인다.
이들은 보이는 신랑 대신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신랑’ 예수를 모시고 평생 살아야만 한다. 자발적으로 수녀원 생활을 택한 심신이 깊은 여인들이나 환시와 계시 체험을 한 신비주의 수녀들의 경우에는 이런 서약이 너무 기쁜 나머지 황홀경에 빠질 수 있겠지만, 앞에 언급한 엘레나처럼 부모에 의해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졌을 때는 얼마나 큰 내적 고통이 뒤따랐을까? 아마도 절망 속에서 입으로만 서약했을지도 모른다.

| 억지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 이유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전적으로 결혼 지참금 때문이다. 영국의 대사였던 헨리(Henry Wotton, 1568-1639)가 1608년에 쓴 편지에 베네치아의 수녀원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당시는 결혼 지참금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러 명의 딸을 가진 한 귀족 집안이 딸들을 다 시집보내려면 많은 지참금이 필요했다. 사실 좀 떵떵거리는 집안일지라도, 딸자식이 많은 경우는 지참금을 다 챙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딸 한둘 정도는 결혼 지참금을 챙겨서 시집을 보내고, 나머지는 수녀원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베네치아에서 신분 높은 집안에서 태어난 소녀들은 부모에 의해 결혼이냐 수도원이냐의 여부가 결정되었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결혼 지참금에 대한 법률적인 규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 금액은 결혼하는 남자 집안의 명성에 따라서 달랐으며, 남자 집안이 권력 있는 소위 ‘빵빵한’ 귀족일수록 더 많은 지참금이 요구되었다. 부모는 어찌하든지 간에 높은 지참금을 마련하여 더 높은 신분을 가진 귀족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서 안달이었다. 이는 딸의 혼사를 통해서 사회적인 신분 상승과 정치적인 명예를 꾀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소녀들이 신부로 선택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유사하다. 바로 건강과 외모다! 외모가 출중하지 않은 소녀는 경쟁이 치열한 결혼시장에서 뒤처진다는 뜻이다. 여기에 빠뜨릴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조건은 위의 언급대로 어느 정도의 높은 지참금을 마련할 수 있는 그 집안의 재력이다. 여기에다 당시 엘리트층의 결혼시장에서 지참금이 서서히 올라가는 인플레이션 현상이 있었기에, 같은 귀족일지라도 상대적으로 재력이 있는 가문이 결혼시장에 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력 있고 권력 있는 귀족들은 여러 딸 중에서 인물이 반반한 한두 명에게 결혼 지참금을 몰아주면서 결혼을 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반면에 이런 베네치아의 환경에서 가장 낮은 지참금을 가지고 딸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유일하게 수녀원이었다. 사학자 후타 스페어링(Hutta Sperling)에 의하면, 어쩔 수 없이 비자발적으로 수녀원에 들어간 여인의 수가 베네치아 수녀의 50% 이상을 차지했다고 하니, 수녀원 안에 있는 수많은 여성은 적성에 맞지 않은 감옥 같은 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결혼 지참금과 수녀원의 지참금

그렇다면 결혼 지참금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다행히 기록이 남아 있다. 1400-1420년에 베네치아공화국은 법적으로 1,600두카텐(Dukaten)까지로 그 액수를 규정했다. 1505년에 이르러서 원로원은 다시 3,000두카텐으로 금액을 올렸지만, 훗날에는 2만 두카텐까지도 올라갔다. 이 시기에 석수장이의 1년 수입이 50두카텐이라고 하니, 지참금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베네치아 밖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시 결혼 지참금 액수와 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524년 브란덴슈바이크의 군주 에리히
1세(1470-1540)와 딸을 가진 브란넨부르크의 요아힘 사이에 결혼 계약이 성립했다.(당시 문화에서는 결혼계약서가 필수였다.) 에리히 1세에게는 첫 부인이 있었으나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요아힘의 딸 엘리자벳(1510-58)과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다. 1525년에 거행된 이 결혼에서(당시 엘리자벳의 나이는 14살이다.) 신부의 아버지 요아힘은 늙은 신랑 에리히 1세를 위해 2만 플(당시 돈 단위)을 지참금으로 보냈다. 신랑 측에서도 같은 금액을 신부에게 내놓았다. 이 금액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상황에서 엘리자벳이 과부가 될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금이었다.
신부가 나중에 과부가 되어서 재혼하게 될 경우는 어떠했을까? 위의 엘리자벳도 결국 과부가 되었는데, 영락해가는 귀족과 재혼을 한 그녀는 재혼하는 남편으로부터 재혼 당시 가져간 지참금만큼을 다시 받았다. 이렇게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가는 여인들은 남편이 죽더라도 재혼을 통해서 또다시 지참금을 챙길 수 있었으니, 돈에 돈이 묻어 굴러가는 현상처럼 보인다.
물론 엘리자벳의 이야기는 중세의 결혼 지참금을 대표하는 경우가 아닌 일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중세 유럽이라 함은 시기적으로는 1,000년이 넘는 세월인 데다가 지역적으로 광범위한 땅덩어리를 포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깊이 들어가 보면 지역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각기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이에 비해 수도원 지참금은 결혼 지참금보다 훨씬 적었다. 1600년에 공포된 새 법에 따르면, 수도원 지참금은 1,000두카텐까지로 정해졌고, 더불어 매년 60두카텐을 따로 지불해야 했다. 이 금액은 결혼 지참금의 20분의 1에 해당한다. 하지만 수도원 지참금에는 단점이 있다. 앞의 엘리자벳의 예에서도 보았듯이 결혼 지참금은 남편이 죽으면 본인에게 다시 귀속되거나 자식에게 물려주지만, 수도원 지참금은 사라져 없어지는 돈이라는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1650년경에는 규정이 바뀌어 수도원 지참금이 800두카텐으로 내렸지만, 수도원에 내는 연회비는 90두카텐으로 올랐다.
당시 여인들은 시집을 갈 때 필수품 중 하나로 궤를 들고 갔다. 수도원에 들어가는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인들은 이 함 속에 귀중품을 챙겨갔는데, 이것은 일종의 개인 재산이자 귀족으로서 호화롭게 살던 자취를 함께 들고 가는 의미였다. 또 부잣집 딸들은 지참금 외의 돈도 가져갔고, 수녀원 안에서 종교의식이 있을 때나 축일을 맞이한 동료 등에게 축하의 의미로 5-6두카텐을 선물로 주었다.
1600년 이후로는 이런 축하금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또 특별 지참금이 자꾸 오르자, 부모들은 수녀원과의 협약서를 쓸 때, 아예 기부금을 내거나 증여를 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법적인 지참금에 더하여 추가로 돈이 들어가는 셈이지만, 그래도 결혼 지참금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당시 부모들은 딸의 인생 자체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이는데, 이것 역시 현대인의 관점일 뿐 당시 그들의 문화에서 통용되는 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부모들의 책략과 아들들의 공동체

당시 딸을 가진 베네치아 귀족들은 지참금 때문에 휘청거렸지만, 이들 역시 당시의 이 사회제도 때문에 그 흐름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베네치아의 귀족층들은 의도적으로 전략을 세우기도 했다. ‘도시 귀족’의 경우 그들과 다른 수준의 가문과 혼인 맺는 일을 거절하는 방식의 전략을 세웠다. 끼리끼리 혼인을 맺으면서 아마도 지참금이 뛰어오르는 것을 막자는 의도인 듯하다. 반면에 ‘전통 귀족’들은 그들의 부와 지위를 더 확고히 다지기 위하여, 딸들을 가장 명망 있는 집안과 엮으려고 안달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묘한 사회 분위기가 등장하는데, 바로 여러 아들 중의 몇 명은 결혼하지 못하게 의도적으로 저지한 것이다. 많은 수의 아들을 결혼시키다 보면, 그만큼 가문의 유산이 쪼개지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서 나온 책략이다. 정치계에서 성공을 거두거나 군인 또는 직업적으로 성공한 경우, 결혼을 하지 않고 형제들이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인구 감소를 염려하지 않았을까? 중세 유럽에서 창궐한 페스트는 유럽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일으켰다. 피렌체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젊은 남녀가 서둘러 결혼하여 인구를 늘려도 모자란 상황인데도, 오히려 동성애자가 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렌체에서는 인구 증가 정책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들을 처벌하겠다는 방이 내걸리고, 특별 단속 수사대까지 결성되었다. 이 수사대의 명칭은 이름하여 ‘밤의 관청’이다. 이 ‘밤의 관청’은 70년이 지나고 나서야 없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남자들은 결혼하지 못한 채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살기도 했으니, 자연스럽게 신랑감이 줄어들고 신부들은 신랑감 찾기가 더 힘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또다시 결혼 지참금이 오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가진 부모들은 지참금을 높여서라도 더 재력을 갖춘 신분 높은 집안으로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 수녀원 문제에 대한 루터의 비판

대주교 기오바니 티폴로(Giovanni Tiepolo)는 부모에 의해 강제로 수녀가 된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만약 2,000명이 넘는 귀족 여인이 결혼하지 않고 살게 될 경우를 상상해보면, 혼돈과 위험, 수많은 스캔들 등 사회적으로 매우 많은 해를 끼치며, 남성들로부터 자연히 성적인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기오바니는 수녀원에서 여인들의 삶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강조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이들 중에는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수녀원을 뛰쳐나온 이들도 있었다. 강제로 수녀원에 들어간 파우스티나 수녀는 1555년에 산 기오바니(San Giovanni) 수녀원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임신을 했다고 한다. 이런 예들은 수두룩하다. 기로라모 프리울리(Girolamo Priuli)가 쓴 일지에 따르면, 시에 세워진 수녀원은 마치 ‘공적인 창녀촌’ 같았고, 수녀들은 ‘창녀’처럼 살았다고 한다. 언급을 좀 더 하자면, 대개 중세의 큰 도시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의 성적 욕구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시에서 직접 공창을 운영하였다. 이런 공창 제도는 토마스 아퀴나스 등 당대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청년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진정시키고, 동시에 귀족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그 공창에 있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인들은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이런 상황에서 베네치아 관청은 아주 혁명적인 개혁을 시도했는데, 1509년 원로원은 성스럽고 거룩한 수녀원을 더럽힐 경우 징벌을 내린다고 발표했다. 수녀원에 허가 없이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나 수녀가 수녀원을 도망칠 수 있도록 돕는 행위를 하는 자들을 감옥에 넣거나 아니면 평생을 유배지로 보낸다는 법을 만든 것이다. 교회의 수장들도 이에 동조해 수녀원의 혁신에 가담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수녀원의 이런 불합리성에 대해서 심도 있는 비판을 했다. 루터의 영향을 받은 베네치아에서는 수도원을 비판하는 개혁적인 글이 전 수도원에 퍼졌다. 루터는 수도원에 있는 딸을 데리고 나와 자유로운 삶을 부여하고 도둑 같은 교회 수장들의 성적인 노리갯감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하라고 부모들에게 강력히 촉구했다.
이런 비판 글을 읽은 수녀들은 수도원에서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당시 루터의 글에 영향을 받은 9명의 수녀가 1523년 님브쉔에 있는 치스터치엔저–마리엔트론 수도원을 탈출했다. 이 탈출을 선도한 이가 바로 카타리나였는데, 그녀는 바깥에서 도움을 주었던 3명의 용감한 시민과 목사 가브리엘 츠빌링(Gabriel Zwilling)과 함께 철저한 사전 계획을 세웠다. 사학자 마르타 샤드(Martha Schad) 박사가 이런 종류의 탈출은 당시 상황에서는 사형감이었다고 밝힌 것을 보면, 이들은 목숨을 담보로 내놓고 탈출을 감행한 용기 있는 여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탈출에 성공한 가브리엘 목사와 평신도 3인은 9명의 수녀를 즉시 루터에게 데리고 갔다. 이때 루터는 생사를 걸고 수녀원을 뛰쳐나온 이 처녀들을 잘 보살펴주었고, 결혼까지 성사시켜 주었다. 당시 이런 여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결혼을 하거나, 하녀로 살거나! 이 두 경우가 아니면 창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고 한다.
루터를 찾아간 9명의 수녀 중 8명은 결혼에 성공하였으나, 유일하게 카타리나는 짝을 못 찾았다. 운명이었을까? 아버지에게서 대를 이어갈 걱정의 말을 들은 루터는 카타리나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42세의 루터와 26세의 카타리나가 1525년 6월 13일 결혼식을 올렸는데, 아마도 과거 영국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식처럼 세계적으로 떠들썩한 뉴스거리였을 것이다.
물론 같은 이유로 수녀원에 떠밀려 들어갔지만, 그 반대로 유럽문화사에 특출한 자취를 남긴 이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힐데가르드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을 들 수 있다. 8살의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 들어간 그녀는 윤리학, 의학, 우주학에 대한 지식이 탁월했고, 시인, 음악가, 예언자로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한편으로 당시에는 오늘날과는 다른 형태의 수녀원도 있었다.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들이 모여서 만든 ‘뉘우치는 여인들의 수녀원’도 있었고, 남자들의 수사원과 여자들의 수녀원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수도원도 한때 있었다.
베네치아의 수녀원 이야기는 중세 문화사를 엿보게 하는 흘러간 옛날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그곳 수도원에 갇혀서 몸부림쳤을 여인들을 상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양태자 독일 마르부르크 필립스대학교에서 비교문화학과 비교종교학 석사학위를, 예나 프리드리히 쉴러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 『중세의 뒷골목 사랑』,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 등의 저서를 집필하였고, 영성 번역서로 『파도가 바다다』가 있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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