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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만주 유이민 소설 속의 기독교 04
문화·신학·목회 (2018년 10월호)

 

  기독교 사회주의의 모색-이기영의 『대지의 아들』
  

본문

 

한국 기독교와 사회주의
선교 초기 기독교는 이 땅에 하나의 충격이었다. 조상신이 아닌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점, 술 드리고 절 올리는 대신 창가 부르고 기도하는 예배방식은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더구나 남녀가 내외 없이 한데 어울리다니. 수백 년 동안 삼강오륜의 규범에 젖어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이 이방인의 종교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가(儒家)의 저항이 드세고 민간에서는 만만치 않은 긴장과 갈등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행운이었다. 개화와 문명화가 국권 수호의 아이콘으로 떠올라 있던 그때 이미 이 땅의 지식인들은 막강한 국력을 앞세워 식민지 경영에 경쟁적이던 서구 열강의 정신적 토대가 기독교임을 알고 있었다.

上帝(상제)로 大主宰(대주재)를 삼고 基督(기독)으로 大元帥(대원수)를 삼고 聖神(성신)으로 劍(검)을 삼고 信(신)으로 盾(순)을 삼아 勇往直前(용왕직전) 誰(수)가 服罪(복죄)치 아니며 順命(순명)치 아니리오. 現今(현금) 英美法德(영미법덕)이 耶蘇敎(야소교)로 宗敎(종교)를 삼는 者(자)ㅣ 其(기) 國步(국보)와 國光(국광)이 果如何哉(과여하재)아. 吾同胞(오동포)도 此(차)를 羨(선)커든 其(기) 諸國(제국)의 崇奉(숭봉)하는 바 宗敎(종교)를 從(종)할지니라. - 신채호, 『서호문답』


위에서 보듯 신채호, 장지연, 박은식 등 정통 유학자들까지 기독교가 나라를 지키고 부강하게 할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정도였다. 게다가 나라는 앞서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던 시절과 같은 광기조차 잃어버린 식물 국가. 이 땅의 기독교는 비교적 자유롭게 선교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이 땅의 기독교는 전에 없던 도전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선교 30여 년 만에 벌써 신도가 30만 명에 이르는 교세로 성장했으나, 적지 않은 역기능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었다. 신채호가 맹목적 열광주의와 제국주의 침략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나(“국민과 종교”, 1910) 이광수가 교회의 반지성적 교회중심주의와 사회의식의 결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 1917)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기독교 비판이 단순히 기독교인들의 신앙 양태에 대한 개인적 불만 수준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이념적 차원의 집단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923년 3월에 있었던 ‘전조선청년당대회’가 처음이다. 여러 사회주의 단체 중 특히 배타적 극좌 노선을 견지한 서울청년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계기로 국내 사회주의 진영의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반기독교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1925년 10월에는 감리교와 장로교 연합으로 개최한 ‘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에 맞서 한양청년연맹은 ‘반기독 대회’와 ‘반기독교 강연회’를 주최하여 실력행사를 벌이려는 시도를 하였다. 천도교 기관지 「개벽」이 반기독교 운동에 동원되기도 했다.
기독교계의 일부 주류 세력은 사회주의 진영이 벌인 일련의 반기독교 운동에 대하여 반박했으나 조직적이지는 못했고 대체로 무시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YMCA 기관지 「청년」을 중심으로 주도된 기독교와 사회주의 담론은 탈역사적인 신학적 이데올로기 또는 교회의 보수성에 대한 성찰과 함께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는 경향을 보였다. 기독교를 통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구현 또는 사회주의를 통한 기독교 이상의 실현 가능성을 궁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이 형성되는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1929년 6월, 숭실전문학교 내 YMCA 회원인 배민수, 유재기, 최문식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기독교농촌연구회’는 초창기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을 실천적으로 구현해내고자 한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이기영의 장편소설 『대지의 아들』은 이렇게 형성된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을 만주 유이민 사회의 현실 개변 수단으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 이기영의 기독교 입신과 배교
이기영(1895-1984)은 남북한 현대 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소설가이다. 해방 후 임화와 맞서 좌익 문학운동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 밀려 월북한 뒤 북한 문단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한설야와 더불어 ‘좌기영 우설야’라 불러도 좋을 만큼 김일성의 지근거리에서 정치, 문화예술 분야의 막강한 지위를 번갈아 거치며 초창기 북한의 문화예술 정책을 주도했다. 이 같은 이력으로 인해 남한에서는 그가 아직도 접근 금지 인물로 묶여 있는, 몇 안 되는 문인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으나 『고향』으로 대표되는 월북 이전의 문학적 성과만으로도 그는 한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김일성의 토지개혁을 미화한 『땅』, 김형직을 칭송한 『력사의 새벽길』, 대하소설 『두만강』 등은 월북 후 그가 남긴 대표적인 문학적 성과들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에는 좌익 문학운동 단체인 카프(KAPF)의 핵심 멤버 중 하나였고, 월북 뒤에는 김일성 우상화 문학을 앞장서서 추동한 그가 한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1924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거듭 기독교인들의 신앙 양태를 냉소하고 비판해온 작가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럴 법한 일이다. 1895년 지금의 아산시 배방면 태생인 그는 천안으로 이사해 성장기를 보내는 동안 기독교인이 되었다.

나는 고향에 돌아와서 전에 없던 예수 교회당이 읍내에 생긴 것을 알았다. 어느 주일날 아침에 나는 우정 예배당을 찾아갔다. 나는 그때까지 예수교의 내막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목사의 설교를 처음 들어보니 마디마디가 착하고 옳은 말 같았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속옷이 없는 사람을 보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고 하였다.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선행을 하면 하느님이 기뻐하신다는 것과 남의 눈에 든 티끌을 보기 전에 네 눈에 든 대들보를 빼라는 말들이 나의 귀에는 매우 신기하게 들리었다. 나는 그날 례배가 파하자 당장에 예수를 믿겠다고 자원해 나섰다. 그 후부터 나는 주일 례배는 물론, 3일, 5일 밤 기도회에도 한 번 지각이 없이 례배를 보러 다녔다. - 『리상과 노력』

그러나 그가 만난 하나님은 인격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아니었다. 신 또는 인간 문제의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결과도 아니고, 초월적 누미노제(numinose) 체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가 만난 기독교란 다만 유교를 대신할 새로운 윤리이자 갈급하던 새로운 문명적 제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가문의 몰락으로 인한 지독한 궁핍과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식민주의 억압 아래서 출구 없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던 청년 이기영 앞에 나타난 희미한 불빛,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가 잠시 몸을 기울인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기영은 같은 시기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의 기독교 체험과 유사하다.
필연도 당위도 없이 성사된 쉬운 만남. 그가 나간 교회는 지금 이름이 바뀌어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나 추억이 제한된 옛 천안제일감리교회이다. 1903년 7월, 천안 군수로 부임한 윤치호 주도로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토대가 되어 설립되었다. 속장을 거쳐 권사의 직분까지 얻었다고 했으니 교회에서 그가 차지하던 위치와 역할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논산제일감리교회 부설 영화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연적인 내적 동기 없이 하나의 제도로 만난 ‘신앙’이란 언제든지 쉽게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도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공기도 바깥 사회만 못지않게 부패하였음을 발견하였다. 유명한 교역자들이 모두 바리새 교인인 줄 알게 될 때 나도 바리새 교인이 되었다. 그들이 갸롯 유다가 되는 대로 나도 갸롯 유다가 되었다. 나중에는 예배당에 가는 유일한 흥미가 여학생을 쳐다보는 데로 집중되고 말았다. - 『헤매이던 발자취』

1926년의 고백이다. 기독교를 버린 배교의 변이지만 더 명징하기는 입신(入信)의 동기이다. 그가 받아들인 기독교가 인격신으로서의 하나님이나 신앙 그 자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하나의 윤리 규범이고 제도였음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것들은 주체의 이해에 따라 언제든지 취사(取捨)가 자유로운 선택적인 것이다. 그렇게나마 이기영이 신앙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은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었다.
1924년 문단에 이름을 올린 데뷔작에서부터 기독교를 냉소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집요하게 기독교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일을 주저치 않는다. 성서나 교리 등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시비나 회의가 아니라 한갓 교인들의 도덕적 일탈이나 허위, 위선 등을 시비하는 것이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 비판이라 할 수도 없다. 그가 기독교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은 교회 공동체 내부의 모순과 부조리에 안목이 트일 무렵,
3・1운동의 실패를 경험한 지식인들 사이에 사회주의가 민족 해방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사실, 같은 시기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기 시작한 반기독교 운동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 『가난한 사람들』에서 기독교 신앙에 열심이던 주인공 ‘성호’나 『고향』의 ‘박훈’ 등이 사회주의자가 되어 교회를 떠나는 것은 이기영의 기독교 비판이 결국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로서의 의미가 있다.

| 창작 배경
장편 『대지의 아들』은 일제가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에 돌입해 있던 1939년에서 1940년 사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생산소설이다. 생산소설은 가혹한 수탈로 인해 침체된 생산 의욕을 자극해 생산성을 끌어올림으로써 전쟁 수행에 소요되는 각종 군수 조달을 원활히 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국책문학이다. 전 서울대 교수 김윤식은 “국책적 정신에다 기록적 보고적 방법으로 농, 어, 광, 공장, 이민 등을 취급하는 소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더러 친일문학의 범주에서 거론되기도 하지만 꼭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모든 문화예술인까지 물샐틈없이 조직화하여 폭력적으로 국책에 동원했다. 당시 파리가 독일에 함락당하고 중국의 무한삼진(武漢三鎭)이 일본에 무너진 뒤 힘겹게 버텨오던 지식인들의 저항의지가 지리멸렬해져 전향자들이 속출했다. ‘독립’이나 ‘저항’과 같은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에 눈을 돌리지 말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현재의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이고 인정하자는 백철의 ‘사실수리론’이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다.
카프 안에서 누구보다도 강고한 입장을 견지해온 이기영에게도 시국의 압력은 버거웠다. 이기영의 만주행은 두 차례 확인된다. 1933년의 만주행은 각각 용정과 도문에 살고 있던 강경애와 현경준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으니, 사적인 방문이라 할 것이다. 그는 이 방문을 “나날이 달라지는 정세발전의 추이를 알고 답답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서였다.”라고 했다.(『태양을 따라서』) 두 번째 만주행은 총독부의 요구에 따른 억지 ‘시찰’ 여행이었다. 일제는 시찰, 견학, 위문, 강연 등 각종 명목으로 문인들을 강제 동원한 뒤 ‘보고문’을 발표하도록 했다. 이기영은 1939년 7월, 총독부가 주재한 시국간담회에 참석해 만주 시찰을 요구받고 이해 8월 18일부터 20여 일간 만주를 여행했다. 돌아와서는 “국경의 도시”, “대지의 아들을 찾아서”, “만주와 농민문학” 등의 보고문을 썼다. 『대지의 아들』은 이때의 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이 작품에서 당대 이기영이 누리던 문학적 명성에 걸맞는 현실 비판의식이나 저항의식 같은 것을 기대하기란 처음부터 무망한 일이었다. 6년 전 이기영을 초청해 극진히 대접한 바 있는 현경준의 실망이 컸다. 연재가 아직 다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대지의 아들』은 처음부터 기대를 할 수 없었다면서 “이 씨는 만주를 모른다. 산도 물도 사람도 모른다.”라고 혹평했다.(『문학풍토기–간도편』) 만주의 실정을 왜곡하고 있다는 불평일 것이다. 현경준(玄卿駿, 1910-51)은 1935년 문단에 나와 『격랑』, 『귀향』, 『탁류』 등의 작품을 통해 일제 식민주의에 시종 완강한 저항의지를 보여 준 작가이다. 그의 불만이 억지가 아닌 것이, 실제로 작품에 반영된 만주 유이민 사회는 실재하는 만주 현실이라기보다는 가상의 이상촌에 가깝다. 1920년대의 한설야나 최서해의 소설, 1930년대 강경애나 안수길의 소설 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핍진성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사뭇 낭만적인 서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만주 유이민 사회의 실상을 거듭 만주사변 전과 후로 구분해 사변 후의 형편을 미화하고 있는 것은 국책문학으로서의 혐의를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 유물론적 기독교 인식
이 작품에서 기독교 담론은 전체 22개의 서사 단락 중 ‘전도대회’장에 집중돼 있다. 중심인물은 서치달, 신학생 신분의 기독교 사회주의자이다. 모델이 된 실제 인물은 변성옥(邊成玉, 1891-1950)이다. 교회사 연구에 기대면, 평양 태생의 변성옥은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시카고대학에 유학해 신학을 공부한 감리교 목사이다. 만주 하얼빈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던 1935년 1월, 감리교 북만지방 감리사 현성원(玄聖元)을 비롯한 한동규(韓東圭), 우인철(禹仁哲), 박세평(朴世平), 김병택(金炳澤) 등과 함께 조선감리회를 탈퇴하고, 장로교, 동아기독대, 성결교 등의 일부 다른 교파 인사들을 합류시켜 독립교단인 조선기독교회를 창립했다. 만주 지방에서의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교파주의의 극복과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비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 행정이 필요하다며 교파 초월과 연합, 교역자와 교회의 자급자족, 기성교회의 부패 극복과 개혁 등을 내세웠다. 길림학원과 길림신학교를 세우고 ‘자작자급’의 정신을 강조하여 농사철에는 집단농장에서 일하며 농한기에만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김장호, 김종태 계의 또 다른 조선기독교회와 이호빈이 이끌던 조선예수교회 등 유사 독립교단들과 연계를 맺으며 교세를 키워 갔지만,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민경배, 『한국민족교회형성사론』 외)
작품에서 서술자는 이 같은 독립교회가 출현하게 된 배경을, 기성교회가 선교사의 손에 지배되고 내용은 없이 형식에만 기울어져 기독교 정신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교회의 현저한 특색은 신학교에 농장을 건설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전부 농사를 짓게 한다. 그것은 아무리 부자의 자질이라도 이 학교에 입학을 한 이상에는 일체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엄격한 제도로 되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설명은 길지만 ‘자주와 자립’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선교사들의 선교 방식은 작중 인물 서치달을 통해 송두리째 부정되고 있다. 황당한 소리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거나, 몇십 년 전 야만 민족에게나 어울릴 선교 방식을 답습한다고 지적하지만 이 주장에 대한 근거나 구체성이 없으니 설득력은 약하다.
작품은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일부 신학적 주제들을 호명해 시비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지금까지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들은 많았지만, 이기영을 포함한 그 누구도 성서나 교리와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를 담론화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한갓 교회 혹은 교인들의 도덕적 일탈을 비난하는 수준이거나, 정치적・사상적인 범주 안에서 맹목적으로 비판, 부정하는 식이었다. 이 점에서 『대지의 아들』은 거칠게나마 기독교의 본질 문제에 관한 논의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는 정통 기독교 교리를 송두리째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천당이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죽은 뒤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세상에서는 고생을 하더라도 죽어서 천당에 갈 것을 믿고 위안을 얻고자 하는 믿음은 황당한 소리일 뿐,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 정신을 배반한 것이거나 미신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들을 붙들기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천당은 오히려 이 세상, 이 땅의 현실 세계 속에 있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지옥이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사실을 모르고 그릇된 믿음에 젖어 사는 무지와 편견, 불의한 욕심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 속의 천당이란 무엇인가? 그의 논리는 좀 혼란스럽게 서술되어 있지만, 고된 노동 끝에 얻는 생산의 기쁨 또는 창조의 기쁨이 곧 천당이라는 뜻으로 정리할 수 있다. 노동은 비록 고되지만 생산과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인 만큼 그 자체로서 천당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뜻에서 노동은 고되지만 거룩하다는 주장이다. 서치달은 스스로 천당의 의미를 명료하게 정의해 보이고 있다.

그러면 우리 교인들은 부지런히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먼저 생활의 안정을 얻는 동시에 또한 예수를 잘 믿어서 정신적으로도 영혼의 양식을 쌓아 놓는다면,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지금보다는 훨씬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게 즉 천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농민의 천당이 그 밖에 또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우리 농민 동포들이 모두 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 만주의 농촌은 당장 지금이라도 곳곳마다 천당을 건설할 수 있게 될 것이올시다.


생산과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노동 자체가 천당이라던 앞의 진술과는 좀 달라 보이지만, 결국 노동을 통한 물질적 풍요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점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은 진술은 기독교인이나 신학생으로서의 기독교 인식이라기보다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억지춘향격 교리 해설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서치달에 따르면, 예수교인의 근본 목적은 농민의 자주적 정신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박애주의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서치달의 생각은 철저하게 유물론에 기초해 있다. 그는 우리의 육신이 물질을 토대로 삼아 사는 만큼 “물질적 실력이 없이는 정신을 구할 수가 없”다고 전제하고, “물질적 생활은 의식주이므로 물질적 실력이란 즉 경제적 실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먼저 산 사람만이 남을 구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무당이나 판수와 같은 미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서치달의 이 같은 주장이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나 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다. 전도대회에서 행한 서치달의 설교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성서적 접근이나 신학적 해석을 근거로 한 것도 아니다. 기독교 비판은 이기영이 앞서 다른 소설들에서 거듭 되풀이해온 피상적인 비난 이상의 수준이 되지 못하고, 노동의 가치에 공동체 의식의 필요성을 덧입힌 그의 천당론은 굳이 종교나 신학적 형식에 가탁할 것도 없는 것이다. 한때 권사직에 올랐다고는 하나 작가의 기독교 인식이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니면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과도한 신뢰가 기독교 인식 자체를 왜곡시킨 것일 수도 있다.
앞서 이 소설이 변성옥의 조선기독교회를 제재로 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서치달을 통해 강변하고 있는 신학적 주제들이 변성옥이나 조선기독교회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교사들의 선교비 지원에 의존하는 선교 방식을 지양하고 자작자급을 원칙으로 했다는 점만 사실과 부합할 뿐이다. 물론 변성옥이 작중인물 서치달 같은 사회주의자였던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에 맞서 반사회주의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1925년 2월, 이창제, 이갑성, 현신덕, 조철호, 배집 등과 더불어 시사구락부 결성에 참여한 것이 그것이다. 작가는 다만 변성옥의 조선기독교회에서 자작자급, 교파초월 같은 제국의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구현에 합당한 언표들만을 취했을 뿐이다.

| 자기 검열
해방 이전의 카프 문인 가운데 이기영만큼 반기독교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없다. 비록 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제도로서의 만남이었지만 오랜 교회 공동체 체험을 통해 체득한 폭넓은 이해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기독교계의 주류를 부정하면서도 대안으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내세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가 배교한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 개변을 위한 기독교의 공능을 신뢰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작품 속에서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굳이 변성옥의 독립교단을 끌어들인 것은 자기 검열의 방편일 것이다. 작품이 발표된 것은 민족 공동체가 통째로 제국의 식민주의 총동원 체제 아래 통제되고 있던 시기였다. 총독부의 지원으로 만주를 시찰하고 돌아와 쓴 보고용 작품이라는 점에서, 만주국의 지원을 받아 보도소를 시찰한 뒤 쓴 현경준의 “유맹”과 유사하다. 외연상 국책 협력의 모양새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변성옥 등의 독립교단들이 서양 선교사들에 대해 배타적으로 거리두기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을 신민화(臣民化)할 수 없는 제국의 입맛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면서 갈등 관계가 깊어진 기성 교단들의 내부 모순을 폭로하고 비판을 대행해주는 것도 유쾌했을 것이다. 더구나 독립교단들이 내세우고 있던 ‘초교파주의’는 기성 교단을 통폐합해 제국종교화를 꾀하던 일제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원군으로 여겼을 법하다. 이기영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일제의 눈총을 피해가기 위한 자기 검열의 방편으로 활용하면서 기성교회에 대한 배타적 감정을 위무했을 법하다.

표언복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해방 전 중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러시아, 미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관심을 확장해 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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