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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중세 사람들의 삶과 죽음 02
문화·신학·목회 (2018년 9월호)

 

  중세인들의 동물 사랑과 학대, 그리고 동물 재판
  

본문

 

중세인들의 동물 사랑
중세의 명화들을 자세히 보면 동물이 자주 등장한다. 필자가 독일에 체류하던 시절에 관심이 있어서 흥미 있는 자료들을 모았는데, 그중에는 중세의 개와 사냥에 관한 논문도 있다. 그런데 동물 사랑과 학대는 오늘날에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동물 재판’까지 했다는 사실은 좀 놀랍고 믿기지도 않기에 미리 참고자료들을 밝힌다. 프랑크푸르트의 독문학 교수 헬무트 브락커르트(Helmut Brackert) 박사, 함부르크대학의 스포츠학 교수인 카타리나 피에트체(Katharina Fietze), 중세사학자인 로베르트 데로르트(Robert Delort), 중세/근세사 교수인 프랑크 마이어(Frank Meier) 박사, 구약신학자인 실비아 슈로어(Silvia Schroer) 교수 등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고, 중세사가인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페터 딘젤바허(Peter Dinzelbacher) 교수의 저서는 인용문을 통해서 언급하였다.
마인츠의 주교 하토 2세의 쥐 이야기 등도 잘 알려져 있지만, 코끼리 얘기를 보기로 하자. 코끼리는 중세 때 왕이나 교황에게 드리는 선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교황 레오 10세(1475-1521)는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던 코끼리 ‘하노’가 아프자 금가루를 먹일 정도였단다. 그는 당시 바티칸에 코끼리는 물론 사자, 원숭이, 길들여진 표범, 앵무새, 카멜레온 등을 소유했다고! 또 1513년 10월 2일 사자를 데리고 온 이에게 6골드두카텐(Golddukaten), 1514년 6월 29일 헝가리에서 온 곰 한 마리 값으로 18골드두카텐을 지불했다는 기록도 있다. 15세기 중엽, 바이에른 지방의 귀족인 지그문트는 정치를 하는 것보다 동물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고!
다음은 740년경의 개 사랑 이야기이다. 당시에는 개를 죽이면 6헬러(Heller, 900년경에는 1헬러로 닭 5마리를 살 수 있었다고 함)의 벌금을 물었고, 789년에는 자그마치 40-60헬러의 벌금을 물었다고 하는데, 개 한 마리를 죽이고 이 정도의 벌금을 물었다니 개가 귀해서였을까? 아니면 진정한 동물 사랑의 차원이었을까?
빠질 수 없는 이야기 중 하나는 개 사랑이 유난했던 카를 대제(재위 768-814)에 관한 것이다. 그는 늘 개를 성당에 데리고 들어가 미사를 참례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개를 성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을 뿐, 미사 중에 그 개를 잘 바라볼 수 있는 장소에 두었다고 한다. 당시에 만약 일반인이 이렇게 했다면 ‘미사 중에 감히!’ 하고선 아마도 신성모독죄로 걸렸을 듯하다. 그의 딸이 남긴 일기를 보면, 그는 부인도 참 많이 두었던데 개까지 지나치게 사랑했다니 에너지가 넘치는 왕이었나 보다.
10세기의 성인 후베르투스의 이야기이다. 그는 사냥 중에 사슴뿔 위에 광채 나는 십자가를 본 후 회심하여 성인이 되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뱀에 물리는 것도 그가 보호해주고, ‘후베르투스’라는 가죽끈을 단추 구멍에 달고 다니면 야생개 혹은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리는 것도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는 또 푸줏간 장사들의 수호성인도 되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딴 ‘후베르투스’라는 검은 개를 사육하였고, 프랑스 왕은 이 개를 아주 비싼 값으로 여섯 마리나 사갔다고 한다. 11세기의 ‘그레이 하운드’라는 개는 노예 한 사람 값으로 팔릴 정도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좀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중세인들의 동물 학대와 사냥 이야기
힌크마르 폰 라임스(Hinkmar von Reims, 810-882)를 인용한 마이어 교수에 의하면, 이 시대에는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다니면서 군중들에게 곰들의 재주를 보여주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곰의 머리털은 약용과 부적으로 팔았다고! 1542년 쾰른의 연대기에는 순례객들이 길거리에서 곰에게 춤을 추게 하고선 돈을 벌기도 했단다.
중세의 직업 중 ‘개를 때려잡는 직업인’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임무는 계약된 돈을 받고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를 잡아서 죽이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의 경우, 1444년에 이런 직업인들이 거리에 떠돌아다니는 866마리의 개를 없앴다고 한다. 이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칭호가 따로 있었으며, 이들은 ‘비주류’ 인생으로 분류된 최하층민이었다.
이와 비슷한 직업인들은 중세에 상당히 많은데, 이후 더러 언급될 사형 집행인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식당에 들어갈 때도 먼저 신고를 해야 하고, 식당에서도 원하는 대로 앉을 수 없었다. 이들은 지정된 곳에 외톨이로 앉아서 밥을 먹어야 했는데, 지금의 우리말로 하면 혼밥을 먹어야만 하던 이들이다.
당시 ‘개를 옮긴다’는 말이나 행동은 치욕과 굴욕을 의미했다. 오늘날 우리의 언어생활에서도 ‘개’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욕으로 폄하되는 것과 같다. 개를 옮기는 행위는 중세인들에게는 하나의 벌이었다. 처음에는 프랑켄 지방과 슈바벤에서, 훗날에는 독일 전 지역에서 행해졌는데, 특별히 지역 간의 평화를 깨는 귀족들에게 내려진 형벌이다. 이런 연유로 938년 오토 1세(912-973)가 바이에른 지역의 평화를 깨는 에버하르트(Eberhard, 912-940)의 추종자들에게 한 지방에서 다른 곳으로 개를 옮기는 벌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잠시 사냥 이야기를 해보자. 중세시대에 많은 이들이 사냥놀이에 빠졌는데, 사제들까지 이런 사냥놀이에 동참하자 교회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먼저 덴마크 왕인 크누트(Knut der Grosse)의 얘기인데, 1016년 그는 자신이 소유한 숲에서 약 15km 이내에 있는 모든 개의 다리를 부러뜨리라는 훈령을 내렸다. 자기 숲의 동물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내린 조치였단다. 하지만 어린 개나 다른 동물을 해칠 위험이 적은 경우는 예외로 했다니 그나마 다행으로 보인다.
영국의 왕 빌헬름(Wilhelm der Eroberer, 1037-87)은 귀족의 영역에 속하지 않은 곳에 존재하는 모든 사냥개의 이빨 세 개를 뽑게 한 적도 있단다. 이렇게 하면 달리는 사냥개의 속도가 느려진다고 한다. 순전히 자기 숲을 보호하겠다는 차원이었을까? 그 이유가 불분명한데, 어쨌든 당시 왕의 말 한마디에 개의 생이빨이 뽑혔다니….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봉건 영주들이 사냥을 좋아해서 생겨난 문제도 있었다. 이들이 사냥 행차를 하면 수도원장들이 애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수도원이 주로 숲 부근에 있으니 그랬나 보다. 수도원 사람들은 귀족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조달해야 했다. 귀족들이 사냥을 구실로 장기간 머물면 수도원의 분위기도 흐트러지고, 귀족들의 수행원까지 뒷바라지를 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을 듯하다. 만약 수도원 원장이 ‘갑’이고, 귀족이 ‘을’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터인데….
이런 문제점 때문에 1418년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이에 관한 규정이 생겼다. 한 귀족이 사냥 행차를 할 때에는 3명 이상의 귀족이 동행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다만 10명의 종들이 동행하도록 허락했다. 또한 말은 5마리까지, 사냥개는 25마리까지만 허용하였다. 수도원 측에서는 사냥개 25마리를 먹이고 관리하는 데도 많은 에너지와 손길이 들었을 터인데, 여기다 귀족들과 그의 동행인들을 위한 음식, 숙박, 또 말 관리까지! 정말 갑이라는 이유로 을에게 지나친 요구를 한 듯하다. 수도원 측에서 받들어야 할 귀족이 한 사람 뿐이었겠는가? 동서남북에서 찾아온 이들의 사냥놀이에 뒤치다꺼리를 해야만 했을 것이니 얼마나 고달팠을까?

중세인들의 동물 재판
중세인들은 재판을 참 좋아한 듯하다.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재판이 더러 있는데 ‘신의 심판’도 그중 하나이다. ‘신의 심판’(재판)이란 법정에서의 재판 자체에 신이 개입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심판은 사실 게르만족의 관습에서 출발하였지만, 나중에 기독교가 이 방편을 취해서 발달시켰다. 그 일부를 살펴보자.
먼저 물을 통한 시험이다. 마녀로 몰린 사람을 물에 넣은 후 만약 물에 뜨면 마귀가 도왔다고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다. 사람이 물에 가라앉아 있으면 숨을 쉬지 못하기에 당연히 죽게 마련이고, 물에 뜨면 마녀로 판단되어 역시 죽게 되는, 신의 이름을 붙인 기이한 심판인 셈이다. 또다른 방식으로 솥에 물을 끓인 후 거기에 손을 담구어 솥 바닥에 넣어둔 물건을 건지라고 명하는 시험도 있었다. 주로 도둑이나 강도, 불법화폐를 주조한 사람들에게 사용된 방법이다. 이런 시험을 하기 전에 사제들이 올리는 기도가 있었다. ‘오! 주여! 혐의자가 이런 시험을 받고도 다치지 않게 해주소서!’ 정말 병 주고 약 주는 모습이지만 이들에게는 타당한 심판으로 여겨졌다니 시대적인 생각의 틀에 박힌다는 게 정말 무섭기도 하다.
불을 통한 시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불타는 석탄 위를 걸어가라는 명령이다. 당연히 타 죽거나 피부에 상처를 입을 터인데, 어찌 신이 관여한다고 생각했을까? 아찔하다. 하지만 이런 신의 심판이 성행하자 신을 능가하는 인간의 지혜가 발휘되기도 했다는데, 그 묘수는 다름 아니라 불에 들어가기 전에 온몸에 왁스 칠을 단단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불이 직접적으로 붙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가지고 하는 시험도 있었다. 죄의 혐의가 있는 사람을 십자가 앞에 세우고 미사가 끝날 때까지 팔을 들고 있게 한다. 이때 그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미사가 끝나기 전에 팔을 내리는 경우에는 여지없이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또 버터나 빵으로 만든 ‘축성된 음식’으로 하는 시험도 있다. 혐의자에게 쉴 새 없이 기도를 하게 하고 ‘축성된 음식’을 혐의자의 입에 순식간에 집어넣은 후, 이 혐의자가 그 음식을 즉시 삼키지 못하면 곧바로 죄인으로 몰렸다고 한다.
눈물을 통한 시험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눈물에는 신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물 시험은 마녀라면 절대 눈물을 흘릴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방식이다. 그러기에 한 여인이 잘 우는 모습을 보이면, 그녀는 마녀가 아닌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마녀로 몰린 여인 중에는 이렇게 철철 잘 울어서, 성녀(聖女)로 재판단을 받아 오늘날까지 공경받는 이도 있다.
기사들이 넘쳐나던 중세 때에는 기사들 사이에서 결투를 하는 방식이 신명재판으로 널리 행해졌다. 싸움에서 이기면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었고, 두 사람이 격투를 벌이다 한 사람이 죽더라도, 신이 개입한 그야말로 신명재판이니까, 그 정당성이 고스란히 인정되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범인을 확정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은 살인 혐의자가 죽은 이의 관에 접근하면, 그 관에 피가 흐른다는 생각에서 연유한 것이다. 꼭 관이 아니더라도 살인 혐의자를 이끌고 시체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대게 했을 때, 갑자기 시체의 얼굴이 붉게 변하거나 떤다든가, 시체에서 피가 나는 등 심한 변화가 나타날 경우에 그 사람은 곧바로 범인으로 확정되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영역에서는 17세기까지 이런 종류의 재판 방식이 사용되었다.
간단하게 요약을 해보았는데, 사실 각각의 내용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기이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이런 재판들이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점차적으로 인지했다고는 하지만, 중세시대에 이런 행위를 신이 내리는 재판(심판)으로 천연덕스럽게 믿었다는 사실이 참 의아하다. 필자는 당시의 ‘허접스러운’ 사고에 사로잡혀 살아간 이들의 모습을 현대인들에게 자주 대입시켜 보곤 한다. 혹 지금 우리도 인간이 만든 설(說)이나 사상에 얽매여 그것이 절대불변의 진리인 양 꼭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왜 허접스럽다고 하는가? 이런 사고의 잣대에 짓눌려 너무나 많은 중세인들이 억울하게 죽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의 잣대는 대체 누가 정한 것인가? 이는 교회의 수장, 왕, 그리고 귀족들의 합작품이 아닐까?
앞서 살펴본 ‘신의 재판’처럼 동물 재판의 이름도 다양하다.(메뚜기 재판, 풍뎅이 재판, 돼지 재판, 쥐 재판, 벌레들의 재판 등) 이런 재판들은 특히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 많이 열렸고, 수많은 재판 보고서가 남아 있기에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판결을 받은 동물들은 마치 인간처럼 목을 쳐서, 목을 졸라서, 목을 매달아서, 때려서, 물에 빠뜨려서, 태워서 죽였다고 전해진다. 한 예로 1386년 프랑스의 도시 펠레에서 어떤 돼지가 아이를 다치게 했다. 이 돼지는 당연히 재판에 회부되었고, 판결에 따라 이 돼지에게 사람의 옷을 입혀서 교수대에 매달아 사형집행을 했다. 단젤바허 교수와 마이어 교수는 말하기를, 해충이나 동물들이 인간에게 해를 입히면 앙갚음으로 재판 없이 그냥 죽이던 시기도 있었지만, 13세기부터 유럽에서는 이런 동물 재판이 생겨났으며 자그마치 19세기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인간을 다치게 한 동물들의 경우는 세속 법정에서 다루었다. 주로 개나 소, 돼지 등 인간에게 유용한 가축인 경우가 많았으며, 이 동물들의 죄를 인간의 범죄와 동일시했다. 때로는 재판 동안 구치소에 가두어 두기도 했다.(1408년 프랑스의 감옥장이 구치소에 있던 돼지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들어간 비용을 청구해서 그 돈을 받아내기도 했다.) 또 재판에 회부되는 거의 모든 동물은 공공 장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동물 재판을 할 때 참고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요일이었다. 만약 어떤 돼지가 사람을 물어서 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게 금요일이라면 그 돼지는 더 엄한 벌을 받았다. 중세 가톨릭의 금욕일(중세의 금요일은 생선은 먹을 수 있으나, 육식은 불가능한 날이었다.)을 지키지 않았다는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돼지는 재판 결과 목 졸리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가톨릭의 성체를 먹었기 때문이다. 어느 부활절 아침에 돼지가 집안으로 들어와 요람에 누워 있는 아이의 얼굴과 목덜미를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이 돼지의 운명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뻔하다.
1494년 6월 14일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나온 자료에 의하면, 돼지 재판임에도 불구하고, 법정 선서를 한 여러 명의 증인에게 심문을 하였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결국 이 돼지도 잡혔지만, 곧바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일단 한 수도원에 가두어 두었다고 한다. 나중에 법관의 의견의 개진되었는데, 혐오스럽고 경악스러운 이런 돼지를 정의의 이름으로 교수대에 묶어서 목을 졸라 죽여야 한다고!
한편 죄를 지은 동물들에 대해서 감형이나 사면 요청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져서 그대로 실행된 경우도 있었다. 1379년 사람을 죽여 고발된 두 마리의 돼지에게 ‘퀘네의 필립’(Philipp der Kühne)이라 불리는 귀족이 감형증서를 부여한 기록이 보인다. 이 공식적인 증서는 인간에게 쓰는 은사(恩赦) 문서의 형식과 내용에 준해서 발급되었으며, 그 결과 한 돼지는 살았고, 다른 돼지는 목을 쳐 죽였다고 전해진다. 후자의 죄질이 더 나빴기 때문이었을까?
어떤 경우에는 동물 자체를 증인으로 세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동물을 증인으로 세울 수 있었는지 상세한 기록을 아직 찾을 수 없어서 유감이지만, 어쨌든 동물이 마치 인간처럼 다루어진다는 사실이 놀랍다.
재판 결과 동물들의 죄목이 드러나면, 앞서 언급했듯 사형이 뒤따랐다. 인간을 처형하듯 머리를 자르거나 목을 매달거나 불에 태우거나 산 채로 땅에 묻는 등의 방식을 사용했다.
동물 재판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니, 판결과 사형 집행에 필요한 비용도 있었다. 펠레의 한 사형 집행인의 기록을 보면, 그는 한 암퇘지의 사형 집행비를 요구하고, 장갑을 산 비용을 청구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중세에는 사형 집행에 쓴 초 값, 기도 값, 사형 집행장까지의 동행비까지 다 받았다고 한다. 또한 전문가와 권위자가 법정에서 진술하기 위해 때때로 소환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에게도 돈이 지불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동물에도 영혼이 있었다고 믿었으니 인간과 같은 급으로 처리한 모양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해충과 유충에 대한 재판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재판은 주로 교회 법정에서 열렸으며, 이 재판에서 언급되는 해충으로는 쥐, 메뚜기 등이 있다. 예방적인 목적으로 이들을 고소하고 고발하였다는데, 어떤 예방을 위해서인지 알 수 없다.
해충에 관한 재판으로 아주 잘 알려진 예로는 1478-79년 로잔느의 주교좌 법정에서 열린 풍뎅이를 법정에 세운 재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폭풍우나 우박 등을 일으키는 등 악마적인 시도를 하면서 인간을 괴롭힌다는 명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들만이 아니다. 나무를 깎아먹는 곤충류, 게 등도 살인죄, 신성모독죄, 혹은 곡식을 전멸시킨다는 죄목에 걸려들었다. 이후에 언급하겠지만, 이들에 대한 재판에는 변호자를 임명했고 증인을 세웠다고 한다.
재판을 통해 해충을 몰아낼 때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하면서 몰아내기도 했다. 1452년 로잔느에서의 일이다. 한 주교가 법정에서 귀신을 쫓아낸 의례/양식이 전해 내려온다. “병을 야기시키는 벌레들, 쥐들을 아버지인 신의 이름으로, 아들인 예수의 이름으로, 신과 예수 사이의 성령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쫓아낸다. 너희들은 즉시 물로 가야 할 유충은 물쪽으로, 들판으로 가야 할 유충들은 들판으로, 포도밭으로 가야 하는 유충은 포도 밭으로 가라! 그러면 목숨만은 부지할 것이다.”
1481년 마콩에서 진행된 한 판결을 통해서 교회가 해충에 대해 어떤 징벌을 내렸는지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해충은 사탄의 명령에만 따를 뿐 교회와 신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해충들을 저주하면서 파문한다.” 이런 판결을 내리면서 전지전능한 신과 또 모든 성인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위 판결 내용의 주어 ‘해충’을 생략하면 마치 사람에게 내리는 판결처럼 보인다. 이런 예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참으로 낯설게 느껴지며, 마치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500년경에는 논밭을 엉망으로 만든 유충들에 대한 재판이 자주 열렸다. 이런 재판은 대리인의 임명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 대리인은 먼저 해당 밭으로 가서 밭의 유충들을 눈으로 확인한다. 이 유충들이 밭의 식물을 뜯고 있는 것이 직접 목격되면 벌레들은 법정에 소환된다. 법정 앞에서 고소장이 낭독되면, 법관은 몇 마리의 벌레를 손에 들고서 아주 엄정한 목소리로 3일 안에 이 지역을 떠나라고 명령한다. 이런 재판은 일종의 연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몇 마리의 표본은 그렇게 처형당하고, 나머지는 그 지역의 사제에게 위임하여 밭에서 행하는 행렬 때, 사제가 가톨릭의 축성된 물인 성수를 밭에 뿌리면서 멀리 떠나라고 하면서 추방시켰다고 한다.
바르텔레미 드 샤상뇌(Barthélemy de Chasseneuz, 1480-1541)의 변호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는 당시 법관들 중 지혜로운 최고의 법관으로 칭송받았는데, 마치 사람을 변호하듯 동물 변호에도 아주 능란했다고 한다. 그는 1508년에 아우툰 교구의 법정에서 쥐들의 변호를 맡았는데, 재판정에서 재판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쥐들이 재판정에 오는 길에 배고픈 고양이들이 득실거려서 이를 피하느라 재판정에 도착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변호인들은 인간을 변호하듯 고발된 동물들을 변호했다고 한다.
동물에 대한 변호에는 이처럼 엉뚱한 내용도 있지만, 때로는 사실에 부합한 변호를 한 경우도 보인다. 동물도 이 지상에서 신이 부여한 권리가 있기 때문에 이들도 논밭의 열매를 갉아먹고 영양을 취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런 논증은 효과를 발휘하여 실제로 메뚜기가 논에서 마음껏 곡식을 갉아먹게 한 경우도 있었다.

중세인들의 ‘동물 재판’은 도대체 왜?
그전까지는 아이나 사람에게 해를 입힌 맷돼지나 개, 늑대, 소, 말 등을 재판 없이 산 채 땅에 묻기도 하고, 범법을 저지른 동물을 소유한 주인들을 고발하기도 하고, 그 대가로 주인에게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물론 이런 동물 재판에 반대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프랑스의 법학자인 필립 드 보마누아르(Philipp de Beaumanoir, 1250-96)가 1283년에 공표하기를, 사실 동물들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주장하며 이성이 없는 동물은 법적인 권리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죄의식 측면에서 그들 스스로 나쁜 의도를 가질 수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법적인 재판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 동물 재판은 결코 재미로 하는 재판이 아니었다. 재판의 변호인들조차도 대학에서 공부한 일종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3세기 이래 동물 재판이 빈번하게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관한 여러 설이 있다. 한 학설에 따르면 당시 돈에 대한 욕심이 가득 찬 재판관들이 이런 동물 재판을 부추겼다고 한다. 동물 재판 때마다 많은 수입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래로 일부 지식인 재판관들은 이런 고수익에 대한 탐욕을 비판하면서 동물 재판을 단호하게 거부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이 강하게 대두되었다지만, 묘하게도 이 시기에 오히려 동물 재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과 더불어 강한 개혁이 일어나고, 계몽적인 이성주의 때문에 점점 더 동물 재판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1789년에 이르러서도 브라반트에서 한 황소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어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다. 심지어 20세기에도 동물 재판이 자행되어 그 동물을 사형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측면에서 동물 재판을 한 이유를 추정해보자. 중세인들은 신이 땅과 하늘을 창조하고, 거기에 피조물들을 살게 만들었으니 이들 중에서는 인간이 왕이라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도 앞서 언급했듯 동물들도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중세인들의 특수한 관념 때문에 동물들이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동물 재판은 마녀 사냥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기에 동물 재판이 성행했다는 견해도 있다. 동물, 특히 고양이와 까마귀의 몸에는 귀신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곤충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신이 원하는 시험이자 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의 유명한 신학자라지만, 이런 이들의 말 한마디에 흔들거리는 중세인들의 사고와 행위가 늘 애처롭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던져본다.
어떤 학자들은 동물 재판이 성서와 연관성이 크다고 말한다. 헬무트 브락커르트 교수는 출애굽기 21장 28-32절 “황소가 남자든 여자든 사람을 뿔로 받아 죽였을 경우에는 그 황소를 돌로 쳐 죽여야 한다. …황소가 남의 아들이나 딸을 받았을 경우에도 이와 꼭 같은 법이 적용된다.”라는 성서의 내용이 그 근원이라고 보기도 한다.
인간과 동물은 자연의 일부로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의 창조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성서와 연결시켜서 동물 재판을 벌인 중세인들을 보면, 너무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동물 재판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혹시 지금 우리도 성서에 기댄 어이없는 해석으로 중세인들처럼 어떤 연극 비슷한 무언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은 뒤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양태자 | 독일 마르부르크 필립스대학교에서 비교문화학과 비교종교학 석사학위를, 예나 프리드리히 쉴러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 『중세의 뒷골목 사랑』,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 등의 저서를 집필하였고, 영성 번역서로 『파도가 바다다』가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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