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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박충구의 죽음의 윤리 이야기 04
문화·신학·목회 (2018년 9월호)

 

  죽음의 과정
  

본문

 

우리는 결국 늙기 때문에 죽는다 - 장 아므리(Jean Amery)

카네기 멜론대학의 컴퓨터공학 교수 랜디 포쉬는 2006년 췌장암이 발병하여 절제수술을 받았으나 2007년 9월 병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 강의를 하던 순간 건강해 보이는 그의 몸에는 종양이 열 개나 자라고 있었다. 그는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는 어린 자식들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듬해 7월 그는 아내와 세 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둔 그는 우리에게 “인생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시간이 없다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으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잊고 산다. 사람의 생애에는 죽음이 거의 잊혀진 채 화려하고 빛나는 시간도 있고, 견디기 어려워 신속하게 지나가기를 바라는 의미 없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노년기에 이르면 우리는 우리가 시간 속에서 존재하고 시간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달력을 바라보며 삶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가늠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죽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몸에서 이미 죽음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인식은 정신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우리 몸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생물학적 변화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근육의 퇴화와 각종 장기에서 일어나는 노화의 징후는 우리의 유한함을 매우 근본적으로 드러낸다. 수명이 짧았던 지난 세기의 사람들과는 달리 수명이 배나 길어진 현대인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길고도 지속적인 노화를 경험하게 된다.
평균수명이 높지 않았던 과거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 비교적 짧았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맞는 명료한 이유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죽어감의 시간을 가진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의료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대부분 자신의 죽음이 왜 일어나는지를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이고, 의료과학 기술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여 죽음을 상당 기간 미뤄주기 때문이다.
지난 7월 둘째 주 나는 제수씨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경기도 파평에서 목회를 하던 나의 아우는 건강이 여의치 않아 은퇴를 서둘렀다.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던 제수씨는 남편의 건강에 도움이 될 만한 최적의 지역을 찾으며 은퇴 후의 평온한 생활을 꿈꾸었다. 마침내 홍천에 있는 농가 하나를 구입했고, 어느 정도 수리만 하면 될 것이라며 앞마당에서는 유기농 채소를 키우며 지낼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목사 부부가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던 그 계획은 제수씨가 지난 1월 난소암 판정을 받으면서 방향을 잃었다. 암이 발병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낙심이 깊었으나 절망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치유의 길을 찾았다. 그러나 죽음이 그렇게 빨리, 집요하게 그녀에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초기에는 정체가 불분명하게 다가오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은 매우 강렬하게 그 정체를 드러냈다. 죽음은 지난 6개월 동안 우리의 희망을 하나씩 서서히 제거하더니 제수씨의 존재를 견딜 수 없는 고통 끝에 지워버렸다.

엘리자베스의 고백
2005년 겨울, 나는 미국 필라델피아 퀘이커 수도원 펜들힐(Pendle Hill)에 머물면서 매일 아침 퀘이커의 침묵 기도회에 참석했다. 펜들힐의 침묵예배는 매일 아침 7시 사각형으로 놓인 몇 겹의 장의자에 예배자들이 둘러앉아 침묵으로 예배를 시작하여 침묵으로 끝난다. 어느 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간혹 참석자 중 한두 명이 자신의 신앙을 아주 짧고 명료하게 증언하는 경우도 있다.
펜실베이니아의 겨울 숲으로 둘러싸인 펜들힐의 아침 침묵예배는 숲의 고요와 차가운 겨울 기운이 참석자들의 의식을 명료하게 깨워주는 시간이었다. 성탄절이 다가오던 어느 날, 누군가가 힘겹게 일어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수도원 식구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일흔 후반의 엘리자베스였다. 그녀는 지난 가을 심한 골절상을 입어 두 달 가까이 아침 예배에 나오지 못했다. 오랜만에 기도회에 나타난 그녀는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이번에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사랑하는 것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도 있었고, 나의 자식들도 곁에 있었고, 화려한 젊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넘치는 에너지와 건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나갔습니다. 나는 남편을 잃었고, 아이들도 성장하여 나를 떠나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젊음도 서서히 나를 떠나갔고, 이제 건강도 나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번에 자리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머지않아 나의 생명도 나를 떠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나를 떠나가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주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후 조용한 침묵이 예배실을 가득 채웠다. 모든 것이 떠나갈지라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녀와 함께 머물 것이라는 그녀의 고백은 그날의 아침 기도회를 참으로 풍요롭게 만들었다. 예배 후 우리는 그녀에게 다가가 따듯한 포옹을 나누었다.

죽음의 과정
인간의 죽음이 아름다울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일면 잔인한 일이다. 모든 삶의 에너지와 희망을 박탈당하고 마침내 숨을 들이쉴 힘조차 없어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 것으로 우리의 생명은 종료된다. 아름다움이나 잔인함, 혹은 의미 있는 죽음 등등의 수사는 살아 있는 이들이 그린 낭만적인 묘사일 뿐이다. 죽음이란 그저 유한한 생명을 가졌던 인간에게서 생명의 조건이 하나둘씩 모두 떠나는 자연적인 사건이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유일한 희망과 기쁨으로 남을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숨을 거두기 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라고 고백했다.
죽음의 과정은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가는 과정이다. 살아 있는 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생명의 상실 과정이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어머니의 죽음 과정을 지켜보며 그 죽음을 일러 ‘폭력’이라고 했듯이 죽음은 살아 있는 이에게서 생명의 모든 조건을 박탈한다. 산 자는 아무리 사소하여도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지만, 죽음은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게 만드는 삶의 끝이다.
인간의 죽음은 하나의 생물학적 사건이다. 죽음은 신체의 변화에 따른 것이며, 뇌 작용의 정지와 더불어 일어나는 정신적 기능의 상실을 동반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 생명을 존속시켜 온 신체적 기능의 정지, 뇌 활동의 정지에 의해 일어나는 의식의 상실과 더불어 한 개인의 생존이 종료된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다양한 음식과 영양을 섭취해야 하고, 이를 온몸에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뇌의 활동에는 산소 공급이 꼭 필요하고,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심폐기능이 원활해야 한다. 또한 신진대사와 영양 공급의 통로가 되는 혈액 순환도 원활해야 하고 노폐물들을 끊임없이 걸러 배출하는 배변 기능에도 이상이 없어야 한다. 모든 기능이 정상적일 경우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며 생명을 지속시킨다. 그러나 이런 최적의 상태를 상실할 경우 우리 몸은 병에 걸리고 마침내 죽음을 향해 그 중심이 이동한다.
생명유지에 있어서 심장의 박동, 폐의 호흡, 그리고 여타 모든 기능을 통제 제어하는 뇌의 작용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이 세 가지 기능 중 어느 하나가 정지하면 결과적으로 인간의 생명은 자연적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심장사, 뇌사, 호흡사는 자연의 상태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죽음이란 결국 생명을 유지, 존속시키는 모든 기능에 이상이 생겨 그것들이 완전하게 정지하는 것이다.
비록 뇌사 상태라 할지라도 인공호흡기나 인공심장박동기를 통해 우리 몸에 산소를 공급하거나 혈액을 공급할 수도 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호흡을 하거나 눈을 깜박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식물인간 상태라 한다면, 뇌사는 뇌의 기능이 전적으로 정지되어 인공적인 도움 없이는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단계를 이른다. 따라서 뇌사 상태에서 돌이켜 생존으로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죽음의 과정과 신체적 변화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경우, 신체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징후가 있다. 이런 징후가 나타나면 경험이 없는 이는 당황하며 어려움을 겪는다. 사고로 인한 죽음의 급습이 아니라면 말기 환자의 경우 죽어감의 과정이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노환일 경우에는 어느 정도 병세가 진행되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죽어가는 과정은 개인마다 다소 다를 수 있지만 죽음이 가까이 이른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1) 환자가 어지러움을 느끼고 잠을 더 많이 자며 반응이 적어진다. 이 상태에서 환자의 청력은 상대적으로 잘 작동한다. 이런 정황이 오면 환자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눌 준비를 해야 한다. 환자가 죽어가는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가능한 한 부드럽게, 그리고 환자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다. 주변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슬픔을 표현한다든지 소란을 떠는 것은 죽어가는 이를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거나 번거롭게 하는 것일 수 있다.
(2) 시간, 장소, 친구와 가족들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죽음이 가까워진 환자는 죽은 이들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볼 수도 있고, 그 환상을 향해 말을 건네기도 한다. 악몽을 꾸는 것과 환상을 보는 것은 다르다.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을 보는 것은 죽어가는 환자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고, 이는 간혹 환자에게 위안이 되기도 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를 만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꿈을 꾸기도 한다.
(3) 환자가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이며 주변을 멀리한다. 본능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자신의 평화가 깨진다는 것을 감지한다. 죽어가는 이는 번거로운 것들을 피하고 싶어 한다. 이때 억지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신앙고백이 강요되거나 주변에서 과도하게 슬퍼하는 것에 대하여 죽어가는 이가 불편을 느끼기도 한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죽음을 늦추려는 시도조차도 고통의 연장이거나 번거로운 일이 된다.
(4) 환자의 식욕이 떨어지고 음식과 물을 적게 섭취한다. 이 경우 마른 입술을 축이는 정도의 시도는 필요하지만, 물이나 음식을 억지로 먹이려다가 환자의 목이 막히거나 물이 폐로 들어가는 경우 상태는 급격히 악화된다. 이 상태는 몸이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생물학적으로 닫는 과정이다. 이때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머물며 마음을 나누는 것
이다.
(5) 환자의 방광 기능과 배변 기능이 상실된다. 몸의 다양한 기능이 상실되어 가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환자가 소변을 지리거나 배변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이로 인해 환자들은 수치를 느끼며 그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현상은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주변에서 곤란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즉시 처리하여 쾌적함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6) 소변의 양이 줄고, 그 색이 검은색을 띤다. 신체 기능이 떨어지면 몸에서 소변을 배출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중환자실의 환자 대부분은 스스로 대소변을 배출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주기적으로 관장을 해주고 환자의 배뇨를 돕는 도뇨관을 이용한다.
(7) 혈액 순환이 저하되어 피부가 차가워지고 부분적으로 푸른색을 띠게 된다. 하지만 환자는 체온이 내려감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담요로 환자의 몸을 따듯하게 덮어주어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 좋다.
(8) 숨을 쉴 때 헐떡거리거나 꾸르륵 소리가 나기도 한다. 몸의 신진대사 기능이 떨어지고 뇌에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 환자는 자신의 몸에 생기는 이상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혼란과 불편함, 그리고 급격한 동요를 보일 수도 있다. 이때 주변에서는 당황해하지 말고 환자를 가볍게 어루만지면서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필요한 경우 산소 공급을 해주는 것이 좋다. 경험이 없는 이들 중에는 죽어가는 이가 보내는 이러한 마지막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지켜주어야 한다.
(9) 임종이 가까워지면 시력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눈의 기능이 저하되고 시력이 떨어지면 주변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간단한 대화를 나눌 때에는 가까이 접근하여 환자가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시력이 떨어질수록 죽어가는 이는 밝은 쪽으로 향하고 싶어 한다.
(10) 신체가 차가워지면 말초신경에서 통증을 느낄 수 있다. 심장에서 먼 신체에서부터 몸이 식어가기 때문에 간혹 환자가 그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의료진이 진통제를 투여할 수도 있다. 죽어가는 이를 향하여 작별을 고하고, 그의 소중함을 말해주는 것, 가슴에 담고 기억할 것이라는 약속, 가족 간에 평화를 나누며 살 것을 약속하는 등의 말을 전하는 것이 좋다. 죽어가는 환자와 함께 있어준다는 것은 그에게는 무엇보다 큰 위로요 위안이다.
(11) 환자의 마지막 숨은 들이쉬는 것이 아니라 다소 불완전하게 내쉬는 숨일 때가 많다. 톨스토이(Leo Tolstoy)는 인간의 죽어감의 과정을 다룬 소설에서 주인공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썼다.

누군가 건너편에서 “끝났어!”라고 말했다.
그 소리를 알아듣고 그는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는 “죽음이 끝난 거야. 이제 죽음은 없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숨을 내쉬는 듯하더니 중간에서 숨을 멈추고,
팔을 늘어뜨렸다.


(12) 숨이 멈추면 신체를 방어하던 모든 면역기능도 정지한다. 사자의 몸은 온기를 잃어가기 시작하고 신체의 취약한 부분에서는 미생물의 공격이 본격화되어 부패가 시작된다. 신체의 각 기능을 유지하며 긴장하고 있던 근육도 풀어져 중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늘어진다.
비록 사망이 선고된 이후라 할지라도 사람의 세포는 당분간 살아 있어 미세한 변화가 지속된다. 예컨대 수염이 자라는 것과 같은 신체적 변화가 일시적으로 지속된다. 이것은 말단의 세포들이 완전히 정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어쩌면 모든 세포가 정지했을 때, 즉 세포까지 생명력을 상실한 세포사의 경우라야 한 인간의 죽음 과정이 온전히 마무리된 것이라 할 것이다.

아름답거나 추한 죽음은 없다
시인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죽음을 다룬 최재천의 글은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기대를 넘어 죽음의 현실을 일깨워준다. 그는 노화의 긴 과정을 거쳐 늙고 지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목련에 비유한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담긴 글을 소개한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도 않고 한꺼번에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 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김훈이 바라본 목련 꽃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 닮았다. 아니 같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남루하고 누더기가 되어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힘이 하나도 없을 때 비로소 ‘펄썩’ 소리를 내면서 허공에서 땅으로 무너져내린다. 누가 이런 죽음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목련의 죽음을 일러 추하다 여기는 것은 다소 무례하다. 복호근은 <목련후기>라는 시에서 떠나는 이가 작별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 것, 동백 같은 순교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지저분한 욕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삶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나 죽음까지 아름다워지라고 하는 것은 과도한 요구라고 여긴다.

목련 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나는 김훈이 바라본 목련의 낙화(落花) 같은 모습이 대다수의 현대인에게 나타나는 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김훈은 목련의 낙화를 색이 누렇게 바래기까지 끈질기게 가지에 붙어 있다가 그 순백의 아름다움을 모두 잃은 채 털썩 허공에서 떨어지는 흉한 죽음이라 여겼다. 나도 김훈의 관찰에는 동의하지만, 평가에는 반대한다. 목련과 같은 죽음이 우리의 죽음과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최재천은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서 오랜 병상에서 긴 죽음을 맞고 있는 이를 두고 있는 이들을 향해 이렇게 작별하기를 권고한다.

만일 오랜 병상의 세월을 보내는 노인이 있다면 존중하라.
그 모습을 결코 추하다고 하지 마라.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과 결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헤어짐은 헤어짐다워야 한다.
오랜 사랑의 무게는 시간의 절약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다.
안녕이라는 인사는 기능적이지만,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고 나서도,
적어도 동네 어귀까지 나가서 떠나는 이의 꼭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드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참된 예의다.
그것이 작별이다.


작별은 이렇게 하는 것이 도리다. 아름답거나 추한 죽음은 없다. 인간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박충구 |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 대학원을 마치고 독일 본대학 및 미국 드루대학에서 공부했다.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생명과평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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