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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18년 9월호)

 

  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기독교의 편린들 16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빌던 기도문

본문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국가 차원의 기도
우리 고전문학에서 첫 번째 기도는 단군신화에 보인다. “그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에게 빌면서, 변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우리 문학과 역사에 기록된 첫 번째 기도는 변화하여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되자 곰은 다시 기도하였다. “곰네(熊女)는 자기와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늘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주십사’ 하고 빌었다. 환웅이 잠깐 변하여 결혼하고 아들을 배어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곰네의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는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였던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져 신약에 기록된 것과 같은 구조이다.
일연은 곰과 범이 신웅(神雄), 즉 그들이 신이라고 생각한 환웅(桓雄)에게 기도했다고 기록했지만, 환웅이 누구인지는 그 이상의 설명이 없다. 단군의 다음 세대들은 신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여, 일 년 농사가 끝나면 하늘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 부여에서는 영고(迎鼓)라 하고, 고구려에서는 동맹(東盟)이라 했으며, 예(濊)에서는 무천(舞天)이라 했지만, 하늘에 제사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한에서는 천신(天神)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천군(天君)이라고 했으니, 부족의 기도를 하늘에 대신 전하는 제사장까지 세운 셈이다. 고구려 시조 왕이 천제(天帝)의 아들 손자라는 신화는 부족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하늘에 기도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금와왕의 아들들이 주몽을 죽이려 하자 주몽이 세 친구와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엄수(淹水)가 가로막히자 물에게 이렇게 기도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손자입니다. 오늘 도망하는 중인데 쫓아오는 자들에게 거의 따라잡히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이루어 주몽 일행을 건너가게 한 뒤에 다리가 풀어졌다. 물의 신이 바로 외할아버지 하백(河伯)이었으므로 그의 기도가 응답받았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세워진 후 역대 문학작품을 국가 차원에서 정비하여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는데, 여기에 다양한 형태의 기도문이 많이 실려 있다. 가장 숫자가 많은 기도문은 제문(祭文)인데, 권109에 실린 첫 번째 제문은 신라 최치원이 지은 “제오방문”(祭五方文), 즉 오방의 신에게 제사하며 바치는 기도문이다.

모년 모월 모일 아무 벼슬 아무개는 삼가 청작(淸酌)과 서수(庶羞), 후폐(厚幣)의 전(奠)으로써 감히 오방신(五方神)의 영(靈)에게 고합니다. …신령(神靈)께서는 금(金)・목(木)・수(水)・화(火)를 조화시키고, 풍(風)・우(雨)・상(霜)・설(雪)을 역사시켜서 춘・하・추・동으로 하여금 길이 재앙의 기운을 없게 하고, 동・서・남・북으로 하여금 분침(氛祲)의 근원을 고요히 제거해주소서. 희생과 폐백을 갖추고 서수(庶羞)를 깨끗이 장만하여 정성을 드림은 중유(中霤)에 훼손되지 않게 하고 은혜를 베풂은 큰 변방에 가득하게 해주소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기도를 드리나이다. 상향(尙饗).

권110에는 신에게 비는 축(祝)이 실렸는데, 고려 김극기가 지은 “후토축”(后土祝)은 토지신에게 비는 기도문이다. “정기(精氣)가 하늘에 오르니 육성(六星)을 운행하여 조짐을 드러내 보이고, 땅에서 제사를 받으니 오방(五方)의 토지에 각기 맡은 신(神)을 배치하였습니다. 이제 좋은 때를 가려서 감히 간략한 제전을 드리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굽어 붙들어주시는 힘을 바라오니, 풍년이 드는 것을 보게 하소서.”
‘축복’(祝福)이란 인간이 신에게 복을 비는 행위이니, 목사가 하나님께 ‘복을 비는 기도’ 곧 축도를 하는 것은 옳지만, 하나님께 ‘축복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은 제3의 누군가에게 복을 빌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서 복을 내려주는, 즉 강복(降福)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왕에게 올리는 글을 ‘소’(疏)라고 하였는데, 부처에게 올리는 기도문 역시 같은 용어를 썼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 이첨(李詹)은 왕의 생일을 맞아 “탄일소”(誕日疏)를 지었다.

부처님의 지혜는 연못처럼 맑으므로 방편으로 만물에 응하여 주시며, 임금님의 은덕은 산처럼 높으므로 지성으로 복을 빕니다. …신은 용렬하고 고루한 바탕으로 성명(聖明)을 만나서, 국가를 열고 사직을 정할 때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훈장을 책정하여 공을 주는 은총을 입었으니, 어찌 감당하리이까. …이제 탄일을 맞이하여 성심껏 기도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기에 절에 나아가서 삼가 훌륭한 법식을 차립니다. 향은 신묘한 공양을 훈훈하게 하고 법은 참된 종지를 연설하오니, 장만한 것은 빈약하오나 부처님께서 곧 감통하여 주셔서, 복이 냇물처럼 이르러 길이 아름다운 복을 누리고, 수명은 하늘과 더불어 가지런하여 더욱 창성하여지이다.

먼저 기도받는 신의 권능을 찬양한 다음, 자신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은총을 입었음을 감사하고, 준비한 제물을 바친 다음, 왕의 복을 빌었다. 기도문의 전형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권114의 재사(齋詞), 권115의 청사(靑詞)는 도교의 기도문이며, 일반적으로 많이 지은 제문(祭文)은 조상신에게 바치는 기도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 눈이 오지 않으면 기설제(祈雪祭), 비가 너무 많이 오면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 제물을 바치고 음악을 연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춤을 춘 다음 기도문을 읽었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비가 오게 하려고 정성껏 지었으므로 많은 작가들이 기도문을 문집에 실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문들은 지식인 작가가 지어 국가 차원의 제사에서 낭독된 것으로, 한문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짓거나 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아주 간단하고 쉽게 기도를 가르쳤다. “그가 일찍부터 이 무애를 가지고 천촌(千村) 만락(萬落)에 다니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교화하고 읊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오두막집의 어리석은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참으로 컸다.”1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범어로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라는 뜻인데,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에 가게 해달라.”라는 기도이다. 원효는 불경을 읽어본 적이 없는 신자들에게 극락에 가는 가장 간단한 기도를 가르쳤는데, 이는 곧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다 아는 기도가 되었다. 무당들도 조상굿을 하며 죽은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때에 ‘나무아미타불’을 외운다.

『천주성교공과』에서 가르친 12가지 기도문
유몽인은 『어우야담』에 “천주교가 이미 동남제권에서 행하여 받들어 믿는 자가 많았다. 우리나라만 모르고 있었는데, 허균이 중국에 갔다가 (세계)지도와 게(偈) 12장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라고 기록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이 허균임을 밝혔다. 허균이 가져왔다는 ‘게’(偈)는 천주교 기도문의 불교식 표현으로, 12가지 기도문이라는 뜻이다.
한국 천주교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가 파리외방선교회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데, 편지 곳곳에 기도문이 실려 있다. 상해에서 1847년 9월 30일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주여 보소서. 우리의 비탄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 우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2라고 하였으니, 이 편지집에 실린 기도들이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기도문일 것이다. 그의 편지는 1842년에 마카오에서 보낸 첫 번째 편지부터 언제나 “예수 마리아 요셉”으로 시작하여 간구하는 문체로 이어졌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스승 신부들에게 편지를 쓰다 보니 여기저기서 저도 모르게 천주에게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천주가사를 많이 지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기도문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신도들도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였다.
초기 천주교인들은 제사 때에 축문(祝文)을 한자음으로 읽은 것처럼 한자 기도문의 뜻도 모르면서 한자음으로 읽었는데, 앵베르 주교는 천주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한자음으로 기도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38년 12월 1일 자로 포교성성에 보낸 보고서에 “한국 신자들은 천주교를 받아들인 그 시초부터 방언(우리말)을 천시하는 습관에 따라 천주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그렇게 합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3라고 기록하였다. 초기 천주교인에 양반 지식층이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교 제사에서 축문(祝文)을 읽던 습관이 이어졌기 때문에 천주교 기도문도 자연스럽게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이후 여성 교우들이 많아지자 앵베르 주교가 기도문을 국문으로 번역했고, 순교 이후 최양업 신부가 뒤를 이어서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천주교의 공식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工課)는 1862년에 목판으로 인쇄되어, 1972년 『가톨릭기도서』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성당에서 사용되었다. 그중 성호경과 삼종경, 천주경 등 중요한 12가지 기도문을 ‘십이단’이라 불렀다.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면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교인들은 모든 일에 감사하며 기도로 응답했고, 기도하는 시간이 길수록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천자문』을 외우던 것처럼 기도문도 외웠는데, 첫 번째 기도문 “성수를 찍을 때 하는 경(기도)”을 외울 때에는 실제로 자신의 몸만이 아니라 죄도 씻겨져 깨끗해진다고 믿었다.
『천주성교공과』 머리말에 “기구(기도)는 그 자체가 천주 공경이니, 천주를 흠숭하며 이왕 받은 은혜를 사례하며 죄 사하여 주심을 빌며 우리와 다른 이를 위하여 유익한 은혜를 구함으로써, 우리가 온전히 천주께 종속돼 있는, 그의 피조물임을 승복하는 연고니라.”라고 설명하였다. 청원기도도 필요한 기도이지만, 감사기도가 우선되지 않은 청원기도는 그저 기복신앙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 것이다.
많은 천주교인이 새벽기도를 했다. 조막달레나는 10살도 되기 전인 1814년부터 새벽에 기도했으며, 권득인(베드로)은 1838년 초여름 수탉이 울 때 일어나서 불을 켜고 기도하였다. 김호연(바울)은 1831년 여름에 수탉이 울 때에 새벽기도를 이미 마쳤다.4 김세박(암브로시오)은 매일 자정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하는데, 전통적인 제사를 하루의 첫 시간인 자정에 하던 관습에서 유래한 기도이다.

개인 기도를 가르친 『원입교인규조』(願入敎人規條)
천주교인의 기도문은 개인적인 기도문이 아니라 공동체 기도문이어서, 혼자 하든지 함께 하든지 정해진 기도문을 같은 어조로 외웠다. 개신교의 한문기도문은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기도문식』(祈禱文式)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번역되지 않고, 1895년에 목판본으로 출판된 새신자 교재인 『원입교인규조』(願入敎人規條)5에서 “각식도고문”(各式禱告文), 즉 여러 가지 형식의 기도문을 소개하였다. “각식도고문” 첫머리에 “도고(禱告)하는 것은 하나님께 사귀어 화친하고 하나님께 빌고 구하는 것이니라. …예수밖에는 하나님과 죄인에게 중보가 없으니, 아무 사람이든지 예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 빌 수 있느니라.”라고 설명하며, 천주교처럼 사제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아뢰고 싶은 것을 기도하라고 하였다.
본문은 여전히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과 예수 앞에는 한 글자를 비우는 공격(空格)을 사용하였다. 성령 앞에는 비우지 않아, 삼위일체에 관한 인식이 조금은 다르다. “무슨 물건과 향촉(香燭)으로써 할 것이 아니오, 다만 정성으로 예수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니라.”라고 당부하여, 예전의 제사처럼 제물을 차리거나 향불을 피우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할 것을 강조하였다. “기도문 몇 가지를 기록하였으나, 그대로만 할 것이 아니라 각각 제 마음대로 할 것이니라.”라고 설명하여, 온 교인이 다 함께 외우는 천주교 기도와 달리 각 개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기도문을 작성하게 하였다. 이 책에는 일종의 예문만 보인 셈이다.
첫 번째 기도문인 ‘認罪悔改禱告文’(죄를 알아 회개한 사람의 첫째 기도하는 말이라)을 보면 가장 먼저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옳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찾은 다음, “저를 어여삐 여기사 구원얻는 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한 후, “제가 어떻게 하여야 마땅히 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 가르쳐주옵소서.”라고 빌었으며, “구원하여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라고 마무리하였다. 사람마다 자기 상황에 맞게 사연을 넣어서 자신만의 기도를 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7가지 기도 예문을 제시했는데, 제목은 다음과 같다.

認罪悔改禱告文 죄를 알아 회개한 사람이 기도하는 말이라
信徒黙禱告文 예수를 믿는 사람이 조용히 기도하는 말이라
率眷屬禱告文 권속을 데리고 기도하는 말이라
衆敎友禮拜時禱告文 여러 교우가 예배할 때에 기도하는 말이라
飯時禱告文 음식 먹을 때에 기도하는 말이라
幼兒禱告文 어린아이 기도하는 말이라
主祈禱文 주기도문


개인 기도문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복을 비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문들이다. 『원입교인규조』는 그 뒤에 활자본으로도 여러 차례 간행되어,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개인적으로 기도문을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성공회 박요한(배드콕) 신부가 1912년에 편집 발행한 『성공회공도문』(聖公會公禱文)에는 만도(晩禱)·조도(早禱)·총도문(總禱文) 순으로 공동기도문을 소개했지만, 1917년에는 일반 신도들이 일상생활에서 활용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사도문』(私禱文)을 출판하였다.

주교가 이 사도문을 발간함은 모든 형제자매를 위하여 사사 기도를 열심히 하게 함이니 공기도할 때에 누구든지 이 도문을 사사로이 사용하는 것이 무방하나… 사람마다 한 모양으로 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이 도문 전편 중에 긴요한 것과 유익한 것을 자기 마음대로 택하여 쓸 것이니라6

조마가(트롤로프) 주교는 이 서문에서 기도를 영혼의 호흡으로 비유하면서, 성직자의 허락 없이 개인적인 목적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권면하였다. 일상적인 신자매일도문(信者每日禱文) 뒤에 축문집(祝文集)을 실었는데, 기우축문(祈雨祝文)·피화축문(避禍祝文)·위교자녀축문(爲敎子女祝文)·위병자축문(爲病者祝文)·위별세자축문(爲別世者祝文) 등 18종의 축문이 실려 있다. 농경사회였음을 감안하더라도 기우축문(祈雨祝文)은 기우제의 축문을 연상케 하며, 재앙·자녀·질병·임종 등 나머지 축문들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빌던 주기도문에서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한 걸음 나아왔음이 느껴진다.

“하나님 맙소사!”는 이제 그만
한국인이 다급한 일을 당했을 때에 저도 모르게 내뱉는 말이 “하나님(하느님) 맙소사!”인데, 번역 성경투로 풀어쓰면 “하나님! 그리 마옵소서.”라는 기도가 된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저절로 “하나님 맙소사!”라고 탄식할 때가 있으니, 우리 민족이 영성이 넘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구절은 신구약에 모두 보이는데, 창세기 48장 18절에서는 요셉이 야곱에게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외쳤으며, 마태복음 16장 22절에서는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간청하였다. 둘 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신에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한 것인데, 누가복음 22장 42절에 보이는 예수의 기도는 이와 달랐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리 마옵소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기도문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주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에서 복을 빌거나 물질을 받기 원하는 내용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이다. 고전문학에 보이는 도교나 샤머니즘의 기도가 대부분 개인적인 복을 빌던 것과는 다르다.
천주교인들도 개인적으로 새벽기도를 하였지만, 본격적인 새벽기도는 개신교에서 시작되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막 1:35)한 것을 본받아 새벽기도를 시작했지만, 우리 민족은 도교나 불교 같은 종교에서도 예전부터 새벽기도를 해왔다.
길선주(吉善宙, 1869-1935) 목사의 아들의 기록에 의하면 길선주 목사는 20세가 되기 전부터 산속에 가서 밤을 지새우며 관성교(關聖敎)의 ‘산신차력주문’(山神借力呪文)과 선도(仙道) 『옥추경』(玉樞經)을 외웠다고 한다. 24세부터는 정화수를 떠놓고 상제에게 예배하며 자기만의 기도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모펫 선교사를 만나고 한문 성서를 구해 읽으며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가 1896년 어느 가을날 주일 새벽에 기도하다가 부르심을 받고 회심했다.7 도교 수련의 기도에서 기독교의 기도로 바뀐 뒤에도 새벽기도를 계속하여 평양대부흥운동을 일으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길선주 목사의 기도는 도교식 수련에서 출발했지만, 도교식으로 개인의 복과 장수를 빈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기를 빌었다. 이 땅에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를 빈 것이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필자의 장인어른은 육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전선 7사단에 배치되었다가 1951년 5월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장인어른은 아군과 적군의 포격 속에 평안북도 강계까지 60일간 행군한 끝에, 압록강 만포진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이뤄진 뒤에도 서너 달이 더 지나서야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친척들은 그가 전사했다고 생각하여 장모님에게 개가(改嫁)를 권했지만, 장모님은 3년 내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천지신명께 기도하고 있었다.
필자가 결혼할 때에 가장 귀한 선물이라면서 성서와 찬송가를 처가에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과 산에 기도하러 다니던 장모님은 선물보따리를 풀어보고는 실망하여 다락에 던져놓으셨다. 처가의 남매들이 경주 이씨 작은 지파의 종손부인 장모님을 위해서 몇 년 동안 기도하자,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날 남매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장모님이 “찬송가 360장이 무슨 내용이냐?” 하고 물으셨다. 어린 시절 즐겨 듣던 라디오 연속극에서 유관순이 날마다 부르던 찬송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기도의 응답을 받았음이 곧바로 느껴졌다. 다락에 던져놓았던 찬송가를 꺼내다가 <예수 나를 오라 하네>라는 찬송을 펼쳐드리자, 한 번 읽어보시고 그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가셨다. 그동안 절과 산에 다니며 열심히 기도드리던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었던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자, 우리보다 더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셨다.
백령도 중화동에 사시던 필자의 고조부는 1897년에 유배온 진사 김성진 선생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증조부가 서당을 운영하셨기에 선생은 서당에 머물면서 동네 소년들을 가르쳤다. 1889년생인 할아버지가 아침에 서당에 가면 김성진 선생은 자주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훈장님이 배가 아픈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고조부가 소래교회에 청원하여 1898년 10월에 중화동교회를 세웠다. 고조부가 어느 날 예배시간에 기도를 하다가 기도문이 바람에 날아가자 “기도문 잡아 와라” 하고 소리를 쳐서 증조모가 기도문을 주워다 바쳐 기도가 이어졌다. 제사할 때에 축(祝)을 읽던 식으로, 두루마리 종이에 붓으로 기도문을 써서 교회 어른이 낭송했던 것이다.
전에는 기도 순서를 정하지 않고, 사회자가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합시다.” 하면 두세 명이 자발적으로 기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날의 대표기도자를 따로 준비하지 않았지만 늘 기도 속에 살았던 셈이다.
필자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기도순서 며칠 전에 대표기도 안내문을 보내준다. 안내문에는 ‘개인기도로 착각하지 않고, 중언부언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문을 미리 준비해오고 마이크를 잘 활용하기를 권한다고 쓰여 있다. 조선시대 축문처럼 써서 읽는 형식이지만, ‘찬양과 감사’, ‘회개와 고백’, ‘간구’, ‘예수님의 이름’, ‘아멘’의 다섯 가지가 들어가면서 예배시간의 대표기도가 된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준비 없이 나서서 하는 기도도 좋고, 한 주일 동안 묵상하며 써 와서 읽는 기도도 좋다.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을 때에 누군가에게 복을 빌던 기도와 달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비는 기도가 기독교의 기도이다.

연재를 마치며
우리나라 고전문학에 기독교가 들어설 자리는 거의 없었다. 천주교가 들어온 시기에는 박해 때문에 작품을 지을 여유도 없었거니와, 지었다 하더라도 간행되는 문집에 편집할 수가 없었다. 외부에 공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 천주교 지도자들이 뛰어난 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집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근대화가 시작되었기에, 개신교 작가들은 고전문학 시대에 살지 않았던 셈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편린’(片鱗)이라는 어정쩡한 용어를 제목에 넣었다. 그러나 기도문까지 마무리하고 보니 ‘편린’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그나마 초기 개신교 목회자들이 고전문학이나 한문학의 바탕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터라 그런대로 그들의 이런저런 글에서 편린을 찾아낼 수 있었다. 최병헌 목사는 한시를 많이 지었는데 『성산명경』을 소개하다 보니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한시를 소개하지 못했고, 길선주 목사의 『만사성취』도 다른 소설과 층위가 조금 달라서 다루지 했다.
다행히 여러 출판사에서 이 연재의 독자가 되어 의견을 주셨기에, 아쉬운 부분을 보완하여 곧바로 단행본으로 내고자 한다. 연재를 하느라고 읽어본 초기 개신교의 한문학 작품들이 누군가에 의해서 좀 더 많이, 제대로 소개되기를 빈다.

* 허경진 교수님의 “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기독교의 편린들”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1 일연, 이가원・허경진 역, 『삼국유사』(한길사, 2006), 366.
2 정진석 옮김,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최양업 신부의 편지 모음집』(바오로딸, 1995), 45.
3 정중호, “한문성경기(漢文聖經期)와 성경 해석,” 「신학사상」(165집, 2014): 115.
4 이말테, “18-19세기 조선 천주교인들의 새벽기도(회)에 관한 연구,” 「신학과 실천」(39호): 153-156.
5 1895년 간행본의 표지에는 ‘원입교인규조’(願入敎人規條), 속표지에는 ‘위원입교인규조’(爲願入敎人規條), 목록에는 ‘위원입교인규조’, 판심(版心)에는 ‘원입교인규조’라고 되어 있는데, 나중에 나온 책들은 ‘원입교인규조’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 제목으로 통일하였다.
6 민재은, 『사도문(私禱文)』(조선성공회, 1917), 1-2.
7 길진경, 『영계 길선주(靈溪 吉善宙)』(종로서적, 1980), 28-73.


허경진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면서 시 <요나서>로 연세문화상을 받았고, 『허균평전』, 『중인』,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 등의 저서와 『삼국유사』, 『서유견문』, 『주해 천자문』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18년 9월호(통권 7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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