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박충구의 죽음의 윤리 이야기 01
문화·신학·목회 (2018년 6월호)

 

  통계로 본 현대인의 죽음
  

본문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 시편 90:12


| 죽음에 대한 기억
나에게는 인간의 죽음에 관한 여러 기억이 중첩되어 있다. 내가 사람의 죽음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 집 건넌방에는 뇌졸중으로 인해 몸의 절반이 마비된 외할머니가 늘 앉아 계셨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나는 제일 먼저 할머니 방으로 가서 인사를 드리곤 했다. 할머니는 인사를 받으실 때마다 함박웃음을 보이셨는데 그때마다 할머니 입에서는 침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침을 가제 수건으로 닦아드리면 할머니는 행복해하셨다. 훗날 시간이 흘러 내게 손녀가 생긴 이후에야 왜 할머니가 나를 그리도 반기며 즐거워하셨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할머니 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슬픈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온몸으로 직감했다. 어른들은 내가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 후 할머니가 늘 머무시던 그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어린 나이의 나는 죽음이란 슬픈 것이며 자리를 텅 비우는 것이라는 느낌을 경험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에게 슬픔을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 내가 살던 동네에서 이따금 어느 집 대문 앞에 등불이 켜지고 짚신과 음식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상집 마당에는 멍석이 깔리거나 천막이 세워지고, 문상을 온 이들은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장면을 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 절차를 진행하는 장의사 집이 동네마다 있었고, 아이들은 그 장의사 집 근처에 가는 것을 꺼리곤 했다. 요즈음에는 이런 풍습이 거의 사라져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신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장례를 치른 것은 1979년 2월경이었다. 신학 수업을 마치고 첫 목회지인 경기도 가평 북면의 목동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동네에서 폐결핵을 오래 앓던 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시신을 수습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병을 앓기 전에 교회에 나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나는 교인들과 의논한 후 그의 장례를 치러주기로 결정했다.
그가 살던 오두막을 찾아갔더니 그의 주검이 숨진 모습 그대로 차가운 방에 놓여 있었다. 그가 폐결핵을 앓았다는 이유로 아무도 나서지 않아 내가 직접 그의 몸을 알코올로 닦아내고 수습을 했다. 그의 장례에는 손님도 없었고, 천막도 없었다.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는 이도 없는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아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찾아온 그의 형과 의논한 후 여러 절차를 생략하고 그의 시신을 화장했다. 나는 그의 장례를 치르며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깊이 느꼈다.
그러나 죽음 중에는 허망함으로 느껴지는 죽음이 아닌 편안한 죽음도 있다. 2006년 나는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퀘이커 수도원에서 한 학기 동안 머물고 있었다.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어머니가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머무르시던 동생 집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저녁 늦은 시간에 야위고 야윈 어머니의 차가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온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평생 하나님 신앙으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내가 목사 안수를 받자 그때부터 나에게 존대를 하셨던 분이다. 그러지 마시라고 해도 나를 자기 아들이 아니라 주의 종이라 여기는 그런 신앙으로 사신 분이었다.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은 깊고 맑았지만 나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와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하여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이제 하나님 나라 가실 마음의 준비가 되셨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시며 조용히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잠자듯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셨다. 2006년 성탄절 전날이었다. 죽음까지도 하나님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신 어머니는 타오르던 촛불이 더 탈 것이 없어 스스로 꺼지듯 숨을 거두셨다. 나도, 어머니도 받아들인 조용한 이별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내 의식 속에서 나 자신의 죽음이 멀리 바라다보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그분들로 인하여 내 죽음이 시야에서 가려진 상태였는데, 그때부터 멀리 있는 나 자신의 죽음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10년이 지난 시점에 나는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직에서 정년은퇴했고, 은퇴와 더불어 나의 죽음에 대하여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인간의 죽음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이런 독서의 결과를 「기독교사상」 독자들과 함께 나누려 이 연재를 시작한다.

| 태어난 생명은 죽음을 맞는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말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수한 죽음의 위협을 겪는다. 시편 기자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그가 험난한 삶을 살아내면서 무수한 죽음의 계곡을 지나왔다는 성찰을 담은 고백일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젊은 나이에 병으로, 또 갑작스러운 사고로 졸지에 세상을 떠난 이들의 소식을 듣는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고통과 슬픔도 겪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스치듯 여러 번 지나다가 언젠가는 각자 ‘자신의 죽음’을 만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이 지구라는 행성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 1년간 지구에서는 대략 1억 3,000만 명이 태어나고 5,500만 명이 죽음을 맞는다. 오늘 하루에도 이 지구에서는 35만 명 정도가 태어났고 15만 명 정도가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태어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새로운 죽음도 늘어난다.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한 해 동안 약 35만 7,700명이 태어났고, 28만 5,600명이 사망했다. 사망자가 가장 많은 연령층은 주로 8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었다. 하루로 환산하면 매일 782명 정도가 죽음을 맞는다. 대부분은 우리가 모르는 이들의 죽음이지만 간혹 우리가 알고 지내던 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도 있다.
과거와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삶의 익숙한 현장에서 먼 곳, 사람들의 시야에서 가려진 곳에서 만난다. 오늘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은 황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낯선 의료진에게 맡겨진다. 낯선 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이다가 병원 침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신이 살아온 익숙한 환경에서, 함께 삶을 살아온 이들의 곁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병원의 낯선 의료진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아리에스(Philippe Ariès)가 말한 대로 과거의 사람들은 죽음을 일상에서 만나 죽음에 길들여지고 익숙하지만, 오늘날에는 죽음이 숨겨지고 가려져서 낯설고 무서운 죽음이 되었다. 과거에는 죽어가는 사람 곁에 가족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의료진이 그 역할을 한다. 의료진은 죽어가는 이에게 죽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다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에는 죽어가는 이를 두고 병실을 떠난다. 이런 현대인의 죽음을 일러 일종의 ‘의료화된 죽음’(medicalized death)이라고 부른다.

| 죽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
인간의 생명에 대한 최초의 성서적 진술은 창세기 2장 7절에 담겨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성서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심으로 살아 있는 최초의 인간이 탄생했다고 증언한다. 그러니 생명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여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최초의 진술 역시 창세기 2장 17절에 기술되어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브와 아담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 먹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분이 정하신 범주를 벗어난 인간에 대하여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한다. 인간의 죽음은 ‘형벌’이나 ‘죄의 값’이라는 기독교적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도서 12장 7절에 나타나듯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고 성서는 언급하고 있어서 사람의 죽음은 오래전부터 육체의 죽음과 영의 죽음으로 나누어 이해되었다. 사람을 몸과 영혼으로 나누어 이원적으로 생각하는 신학적 전통에서 육체의 죽음은 잠정적인 죽음이라 여겨졌다. 루터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이란 실제로 진짜 죽는 것이 아니라 달콤하고 짧은 잠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참된 죽음은 영의 죽음과 파멸과 관계된다.
칼뱅은 죽음의 위협을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그에게 육체의 죽음이란 죄를 지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구속받은 이는 죽음의 심연과 저주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죄로 인하여 초래된 인간의 죽음의 위협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제거된다. 칼뱅은 로마서 6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가르쳤다. 이 맥락에서 볼 때 칼뱅은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을 상정하고 있고, 마지막 부활의 날에 몸이 부활할 것을 굳게 믿는다. 결국 죄는 영과 몸의 분리를 통하여 각각 영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을 불러왔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영과 육체의 온전한 부활을 희망하게 된 것이다.
죽음이 죄의 삯이며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의 결과라는 기독교적 이해는 그리스도 없는 죽음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죽음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만든다. 전자는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의 결과로 몸과 영혼의 파멸을 초래하지만, 후자는 부활의 날에 영의 구원과 몸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죽음은 무(無)와 파멸이고, 저주와 심판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따라서 몸과 영혼의 구속이 일어나지 않는 죽음은 저주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죽음은 영원한 복의 통로가 된다.
죽음은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근심과 두려움을 불러오지만 칼뱅은 이를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죽음이란 비록 현실적으로 가장 큰 악이지만,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는 그 죽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바로 죽음을 거쳐서 우리는 완전한 복에 이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이런 교의학적인 죽음 이해는 현대인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에서 두 가지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오늘날 ‘죽음’에 대한 해석 그 자체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주제가 되어버린 ‘오랫동안 죽어가는 몸과 고통’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수명이 길어진 현대인에게 ‘죽어감’에 대한 이해는 죽음 자체에 대한 정의나 이해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둘째, 죽어감의 과정에서는 자신의 삶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생각해야 하는데, 죽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그러한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다. 죽음을 죄의 삯으로 간주하는 신학적 이해는 죽음 자체를 관리해야 하는 현대인의 마지막 과제에 대한 이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은 우리 몸에서 일찍 시작된다. 우리 몸에서는 20대를 전후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가는 과정이 실존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잘 관리해야 하는 책임에 더하여 오랜 기간 죽어가는 과정 역시 인간의 책임이 신실하게 미쳐야 할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나누고, 삶에 대한 책임만을 다루던 종래의 신학적 이해에 더하여 몸의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며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는 상황인 것이다.

| 죽어가는 기간이 길어진 죽음
그러면 우리 몸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죽음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 이전에 하나의 현실이며, 육체적이고 또한 생물학적인 사건이다. 생명은 우리 몸의 여러 기관과 그 기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어서 몸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그 결과 생명의 정지 곧 죽음을 맞게 된다.
과거에는 인간의 수명이 무척이나 짧았다. 예기치 못한 감염이나 사고로 인하여 생명이 쉽게 손상받기 때문이었다. 로마 시대의 평균수명이 21세에 불과한 것은 5세 미만 아이들의 죽음이 너무나 빈번해서인데 그 당시 5세까지 죽지 않고 살아 남았을 경우 사람들은 대부분 40세 이상까지 살았다.
이런 경향은 중세를 거쳐 18세기까지 이어졌다. 18세기 유럽인의 평균수명이 40-45세로 알려진 것만 보아도 로마 시대나 18세기나 사람의 수명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생명에 대한 과학적 대처 방안이 늦게 도입된 우리나라의 경우 1940년대 평균수명은 남자가 36.4세, 여자는 38.5세에 불과했다. 약 70년 전까지만 해도 높은 유아 사망률이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크게 낮춘 것이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에서 수명 연장이라는 변화는 사실 지난 한 세기 동안 급격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오늘날 평균수명은 100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물론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후진국의 경우 아직도 평균수명이 매우 낮은 나라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에이즈가 창궐한 스와질란드의 경우 2011년 평균수명이 31.88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평균수명이 80세를 상회한다. 우리나라 또한 유럽 선진국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현재 평균수명이 가장 긴 나라는 일본으로 82.25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30년대가 되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평균수명이 가장 긴 나라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수명 연장이라는 변화는 양질의 공중보건, 건강한 식생활, 그리고 의료과학 기술의 발전이 불러온 것이다.
수명이 길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학자마다 약간씩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인간의 몸은 16세에서 24세 정도에서 성숙의 정점을 이루고 그 이후부터는 신체 각 장기에서 노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현대인은 수명이 길어져 오래 살지만, 또한 오래오래 늙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장 아메리(Jean Améri)는 “젊어서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늙어서 죽는다.”라고 했다. 비록 좋은 위생환경과 좋은 식생활을 누린다 하여도 우리는 몸에서 일어나는 노화와 질병의 위협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칼뱅보다 24년 늦게 태어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는 프랑스 대법관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37살에 서둘러 은퇴를 하고 평안한 노후를 맞으려 했다. 그가 살던 16세기에는 30대 후반이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야만 하는 그런 시대였다. 그는 나이 든 노인의 죽음을 일러 진귀한 죽음이라고 생각했고, 나이가 들어 몸이 노화되는 과정에서 실상 우리 몸의 절반 혹은 3분의 2는 이미 죽어왔으며,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그 나머지가 죽음을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16세기의 몽테뉴가 진기한 죽음이라 여기던 그런 죽음이 너무나 흔한 것이 되어 죽음의 문화 자체가 바뀌고 있다. 40세 이전에 죽음을 맞던 시대의 죽음 이해와 80세 이후에 죽음을 맞는 오늘날의 죽음 이해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 노인의 죽음
과거의 죽음 이해는 일반적인 인간의 죽음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현대인의 죽음, 즉 나이가 들어가고 몸이 노화하면서 신체적 기능이 서서히 저하되어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노화와 죽어감에 대해서도 진지한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
2016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성은 70대에, 여성은 80대에 가장 많이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노인의 약 28%가 암으로 사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지표는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편차에서도 나타나는데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평균 82세인 데 비하여 건강수명은 73세이다. 이는 통상적으로 9년간 앓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의미이다. 누군가 오래오래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다면, 누군가는 더 오래 앓다가 죽음을 맞는다.
노년에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리는 기간은 남성의 경우 약 15년, 여성은 약 20년에 이른다. 이 유병기간에 노인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주요 통로는 노화의 결과로 일어나는 각종 암, 뇌혈관 질환, 그리고 순환기 질환을 포함한 3대 중증 질환, 그리고 점점 증가하고 있는 치매이다. 이런 현상은 고령화사회의 전형적 특징이다. 작년 기준 우리나라도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를 넘게 차지하여 고령화사회(aging society)를 넘어 고령사회(aged society)로 접어들었다. 고령화된 사회에서 급증하는 질환은 치매이다. 치매는 유병기간이 평균 9-12년으로 말기에 이르면 자신의 인격과 기억, 인지능력을 모두 상실한 채 몸만 살아 있도록 만든다. 치매 역시 남성에 비하여 수명이 더 긴 여성에게서 발병률이 높다.
생애 후기에 도달한 노인들의 경우 자신의 몸과 정신 건강을 관리하는 일, 또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여건의 조성은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노인들의 노후 대책은 선진국에 비하면 빈약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 66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국가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OECD의 평균 노인 빈곤율이 2017년 기준 12.6%인 데 비하여 우리나라는 거의 네 배에 이르는 49.6%나 된다. 네덜란드의 노인 빈곤율이 2% 정도인 것에 비한다면 우리나라는 최악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최악의 상태에 처한 노인 중 일부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노인의 자살률은 20대 자살률의 5배이다. 외국과 비교해보면, 65세 이상 자살률은 미국의 3.5배이다. 독일 노인 1명이 자살하는 동안 우리나라 노인은 4명이 자살하고 있다. 특히 2016년 80대의 자살률은 놀랍게도 83.7명(인구 10만 명당)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은 경제적 곤궁(40.3%)과 건강문제(24.3%), 그리고 외로움(13.3%)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노인들이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안전망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우리 사회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 나오는 말
40대 전후에 죽음을 맞던 시대에는 죽음을 필연적인 자연적 과정, 일종의 저주, 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여겼다.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신학적 이해 역시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죽음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의 수명이 배나 길어진 오늘날, 죽음에 대한 과거의 이해를 통해 현대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죽음보다 ‘오랜 죽어감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신체의 변화, 즉 노화와 질병, 고통에 대하여 보다 심원한 이해와 신학적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통계는 현대인의 죽음에 관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노화되어, 즉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과 그 죽어감의 시간 속에서 우리 중 50% 정도가 각종 중증 질환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과거와는 달리 오랜 기간 고통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에 대한 책임만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의 과정에서 짊어져야 할 마지막 책임이 무엇인지 보다 깊이 규명해 둘 필요가 있다.

박충구 |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 대학원을 마치고 독일 본 대학 및 미국 드루 대학에서 공부했다.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생명과평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