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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기독교의 편린들 13
문화·신학·목회 (2018년 6월호)

 

  하나님을 유교 어휘 상제(上帝)로 표현한 한시
  

본문

 

한국 천주교의 기원을 천진암 강학회에서 찾는 학자들이 있는데, 강학회 참석자들의 시에서 기독교의 편린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혹시 그 시기에 천주를 숭앙하는 시를 지었더라도, 천주교 박해를 겪으면서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강학회 개최 18년 뒤인 1797년 단옷날 천진암에 들려 지은 시가 『여유당전서』에 실려 있는데 “흐르는 물에 발 씻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臨流濯足知何意) / 조선 천지 많은 먼지를 밟았기 때문일세(曾踏東華萬斛塵)”라는 구절처럼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려는 생각이 보이기는 하지만, 천주에게 귀의하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이벽이 독서하던 곳 아직도 있건마는
원공이 살던 자취 아득하여 못 찾겠네.
풍류와 문채도 신령스런 지경이어야 하건만
반나절은 술잔 돌리고 반나절은 시를 읊었네.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했던 8년 선배 이벽의 이름을 그대로 쓸 정도로 저만치 거리를 두고 있으며, 인생무상 이상의 감회를 보이지는 않는다. “누가 이 좋은 언덕과 골짜기를 가져다가(誰將好丘壑) / 두어 명 스님들만 차지하게 했단 말인가(留與數僧專)”라는 구절을 보면 천진암은 더 이상 천주교의 강학회 터가 아니라 경치 좋은 절간일 뿐이다.

| 신구약 성서와 교리를 사언시로 지은 『성교요지』
한국인이 지은 최초의 신앙서적 가운데 하나가 이벽(李蘗, 1754-86)이 지은 『성교요지』(聖敎要旨)이다. 이 작품이 실린 『만천유고』(蔓川遺稿)는 이승훈(李承薰, 1756-1801)과 관련된 글을 모은 책인데, 여기에서 ‘만천’이 이승훈의 호라는 점에는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천주교 학자들은 이 책의 편집자 무극관인(無極觀人)이 다산 정약용일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이화는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서 이승훈의 막내아들 이신규(李身逵)일 것으로 추정하였다.1
이처럼 『만천유고』의 편집자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지만, 『성교요지』를 지은 시인이 이벽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한동안 이설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 작품이 개신교를 아는 어떤 문인이 이벽, 이승훈 등의 천주교인 이름에 가탁하여서 지은 위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 이 글에서는 『성교요지』의 작자가 이벽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당시 지식인의 문학이었던 한시 형식을 빌려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고 받아들였다는 관점에서 작품을 읽어보고자 한다.
『만천유고』는 목록과 발문 이외에 잡고(雜稿), 시고(詩稿), 수의록(隨意錄)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고에는 농부가, 천주실의발,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경세가, 성교요지 등이 실려 있는데, 『천주실의』(天主實義) 발문 이외에는 모두 시가(詩歌)이며, 이승훈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지은 글이어서 잡고로 분류된다. 이이화의 검토3에 의하면 시고에 실린 70수 모두 이승훈이 지은 한시인데, 천주교 관련 내용은 없다고 한다.
잡고로 분류되는 글들은 대부분 국문으로 된 천주가사인데, 『성교요지』는 사언 장편 한시이다. 제목 아래에는 “『천학초함』을 읽고서 이광암(李曠庵)이 짓고 주를 달아 기록하다.”(讀天學初函 李曠庵作註記之)라고 쓰여 있다. 『천학초함』은 명나라 천주교 문인 이지조(李之藻, 1565-1630)가 1629년에 천주교 서적들을 한문으로 번역한 총서이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이 천주교인이라는 죄명으로 순교당하자 정약용이 묘지명을 지어주었다.

지난 건륭(乾隆) 갑진년(1784) 겨울 망우(亡友) 이벽(李檗)이 수표교(水標橋)에서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할 때에 공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나도 예전에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의 책을 보니, 그 내용이 비록 좋은 가르침이기는 하나 정학(正學)은 아니었는데, 이벽이 이 서교로 오도(吾道)를 변역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곧바로 수표교로 가서 이벽을 꾸짖었으나, 이벽이 능란한 말솜씨로 서교를 설명하며 자신의 주장을 철벽처럼 고수하므로 공은 말로 다툴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발을 끊고 가지 않았다. 이 뒤로는 공에게 의심할 만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벽은 『천학초함』을 읽고 『성교요지』를 지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천학초함』 이편(理編)의 『천주실의』와 『칠극』을 보고 지은 것이다. 그러나 요약하여 전달한 것은 아니니, 산문과 운문이라는 형식부터가 아주 다르다. 모두 49절로 되어 있는데, 1-15절은 천지창조, 원죄론, 노아 홍수, 예수의 탄생, 전교 활동, 부활 등 신구약 성서를 요약 설명한 내용이고, 16-49절은 인간의 도리, 교리 실천, 창조주의 공적과 오묘함, 구원을 위한 실천 도리 등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입교를 유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일종의 교리 해설서인데, 1절을 보자.

未生民來 사람이 나기 전에
前有上帝 상제가 먼저 계셨네.
唯一眞神 유일한 참 신이시니
無聖能比 비길 데 없이 거룩한 분일세.
六日力作 엿새 동안 힘써
先闢天地 먼저 천지를 여셨으니
萬物多焉 만물이 그 안에 많으면서도
旣希且異 저마다 다르기를 바랐네.
遂办和土 힘써 흙을 빚어서
捋爲㚑矣 생령이 되게 하시고
命處賜臺 편히 쉴 곳과 살 곳 주시고
千百皆與 온갖 것을 다 주셨네.
復使宜家 또한 가정 이루도록
女兮往事 한 여자를 주시고
謂之曰夫 지아비라 부르게 하시니
爾我如自 너와 내가 한 몸이라.
凡所求者 필요한 모든 것이
毋不立豫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 없었으나
然欲善惡 선악을 알려고
勿聽手取 손을 대지는 말라셨네.
告云可食 먹어도 된다는 유혹 받고
或當見耳 보고 듣게 될까 하여
聞言摩拿 (여자의) 말 듣고 손을 대니
得罪因此 이로 인해 죄를 지었네.

右節記上主造物之多 所以備人之用也 人奈何犯基禁令而自取罪戾哉
이 절은 상주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어 사람에게 쓰라고 주셨는데도, 사람이 어찌 그 금령을 어기고 스스로 죄와 허물을 얻었는지를 쓴 것이다.

이 시는 평측법(平仄法)을 지킨 오언이나 칠언의 근체시가 아니라, 시경(詩經)체의 사언시이다. 제(帝), 비(比), 지(地), 이(異), 의(矣), 여(與), 사(事), 자(自), 예(豫), 취(取), 이(耳), 차(此) 자를 운으로 썼는데, 생민(生民), 상제(上帝), 의가(宜家, 宜爾室家), 여혜(女兮), 이아(爾我, 鮮我覯爾) 등이 모두 『시경』에서 나온 말이다.
이 시인이 국문 가사체를 쓰지 않고 시경체의 한시를 쓴 것은 당대 지식인을 독자로 상정한 것인데, 개신교 선교사들이 ‘하나님’으로 번역한 ‘God’을 독자들이 아는 어휘 ‘상제’(上帝)로 번역하여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1658년 교황 알렉산더 7세(Alexander Ⅶ)가 중국의 선교사들에게 선교지의 토착 관습들이 채택되어 선교지역 교회가 ‘본방화’(本邦化, indigenization)되어야 한다는 지침을 내린 영향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4 유학자들의 거부를 피하기 위한 초기 기독교 선교자의 조심스러운 태도라고 보면 당연한 시도였다.
중국이나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미 유학의 삼경(三經)인 『서경』(書經)에서 “하늘과 땅은 만물의 부모이며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다.”(惟天地 萬物父母 惟人 萬物之靈)라고 배웠고, 『시경』의 “하늘이 천하 만민을 낳으시고 만물에 법칙을 정하셨다.”(天生烝民 有物有則)라는 구절을 다들 외우고 있었다.

皇矣上帝 위대하신 상제께서
臨下有赫 이 땅에 위엄있게 임하시어
臨觀四方 사방의 나라들을 살펴보시고
求民之莫 백성들이 안정할 곳을 찾으셨네.5

위의 시처럼 상제는 위대한 존재이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는 존재이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인들에게 유교적인 용어로 천주교를 선교한 것처럼, 『성교요지』의 시인도 기독교의 ‘God’을 ‘상제’나 ‘천’(天)으로 번역하여 익숙한 문장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접근하였다. ‘천주’(天主)라는 용어를 한 번도 쓰지 않을 정도로 조심하였다.

| 애산 김진호 목사의 서대문 감옥 체험과 한시
애산(愛山) 김진호(金鎭浩, 1873-1960) 목사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종조부인 율재(栗齋) 김각성(金覺性)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1899년에 서울에 올라와 안동네거리 노암(魯菴) 이용태(李容泰, 1854-1922) 판서의 집에 머물다가, 1906년 그가 궁내부대신서리사무에 임명되자 세무주사로 수행하였지만, 이 시기는 이미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어 탁지부 고문(顧問)인 키카타(目賀田)가 세정(稅政)을 주관하고 조선인 관리는 아무 힘이 없을 때여서 곧바로 그만두었다.
오준영이 찾아와서 기독교에 다녀보자고 권하기에 몇 주일 승동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았는데, 어느 날 저녁예배를 마친 뒤에 교회 사무실에서 서장로(徐長老)와 민영환(閔泳煥) 자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민보국(閔輔國)은 역적’이라는 말을 듣고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모르는 썩은 놈들’이라고 생각되어 그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래도 궁금하여 그때 명성이 높은 전덕기(全德基, 1875-1914) 목사를 찾아가서 장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였더니 전 목사는 듣고 깜짝 놀라며 “그 말은 옳은 말이지만 잘못 들으면 낙심됩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인데 민보국이 자의로 죽었으니 하나님을 거스림이란 말이요, 나라의 역적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민보국 양심으로 죽었으면 하나님이 죄로 아시지 않습니다.”6 하였다. 김진호 목사는 국가와 신앙을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는 1905년에 전덕기 목사의 인품에 감화되어 기독교에 입교하여, 1907년 12월 25일에 세례를 받았다. 공옥학교,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다가, 피어선성서학원, 협성신학교(현 감신대)를 수료하고 상동교회 전도사가 된 뒤에 YMCA, 배재학당에서 한문, 성서, 역사를 가르쳤다. 한문이 몸에 밴 상태에서 성서를 가르친 것이다.
김진호 목사는 평생 한시를 지었는데, 기독교의 신앙 체험을 한시로 표현한 것도 많지만, 일상생활을 읊은 시도 많다. 자신이 지은 한시를 『빙어』(氷語)라는 제목으로 직접 편집했는데, 그 서문 ‘애산자서’(愛山自序)에 감옥 속의 신비 체험과 함께 ‘애산’이라는 호에 대해 설명해 놓
았다.

어젯밤에 홀연히 서너 사람인 듯 악대(樂隊)가 되어 병창(竝唱)으로 찬미(讚美)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갑자기 몇 번 정신을 차리고 옆 사람에게 말했다. ‘이는 필시 나의 교회 형제들이 나를 위하여 깊숙이 갇혀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찬미하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당일에는 두려워 감히 크게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 소리도 들림이 없었던 게 명백하였다. 이에 동료 죄수[囚人]들인 최성모(崔聖模, 1873-1936), 정춘수(鄭春洙, 1875-1951) 두 형을 불러서 말했더니 역시 모두 그 환희의 찬미가 산처럼 솟아오른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세 사람이 산을 올려다보며 산허리에 올라가는 얘기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올라가며 내려다보니 그 옷이 오문필(吳門匹)과 같았으나 누구인지는 몰랐다. 최성모 형이 내게 말하기를, ‘형이 만약 먼저 나가거든 나의 아들 경환(景煥)으로 하여금 저기 오르게 하여 그 아들의 손을 잡고 함께 올라가셔서 나로 하여금 그를 보게 해 주시오.’라고 했다. 내가 그러마고 허락하였고 인왕산은 위안이 되었으니, 어찌 나 호(浩)에게 그리되는 축복이 아니리요? 나 또한 감복하여 따라서 시를 읊었다. “명산은 나라를 둘러 서쪽 동쪽을 진정시키니, 비에도 닳지 않고 바람도 흔들지 못하네. 만백성이 우러르고 독립을 생각하니, 특별한 땅에 굳게 서서 하늘에 접하였다네.”7

서대문 감옥에서 날마다 창밖으로 인왕산을 내다보았는데, 꿈속에서 찬미 소리와 함께 신비 체험을 한 후 위안을 받고, 나라를 지켜주는 진산(鎭山)이라는 확신이 생겨 산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애산자서’를 쓰던 1919년8에 지은 시는 『빙어』 3권 실국편(失國編)에 실려 있다. 실국편은 고종의 붕어를 슬퍼하는 <태황제 폐하께 만사(輓詞)를 받들어 올림>(奉輓太皇帝陛下)이라는 시부터 시작되는데, <서대문 감옥에서 여러 가지 읊음>(西監雜詠) 16수가 3권의 대표작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여러 가지 읊음>이라는 제목 아래에 “이 해 3월 1일 만세의 소요(騷擾)가 있어서 나 역시 혐의를 받아 서대문 감옥에 들어감”(是歲三月一日, 有萬歲之騷, 余亦被疑入西獄)이라는 자주(自註)가 있고, 칠언절구와 칠언율시들이 시작된다.

瓢匏身勢墜陰房 조롱박 신세와 같이 감방으로 떨어져
鐵限牢門如獸防 꼼짝없이 우리에 짐승 가두듯 하였네.
萬死福甘食笑入 만사일생도 복처럼 달게 여기며 들고
更思我屋似天堂 다시 생각하면 나의 방도 천당이로다.

제1수는 방(房), 방(防), 당(堂)의 평성 양운(陽韻)으로 지었는데, 서대문 감방을 일본인은 짐승우리라 생각하고 가두었지만 자신에게는 천당이라고 술회하였다. ‘애산자서’에 감방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찬미 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제1수가 바로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간증의 찬송이다. 제2수의 “감옥살이 경험도 모두 은총의 빛이로다”(鐵囱的歷徧恩光)라는 구절은 그 부연 설명이다.

相看相笑鬂毛生 살쩍에 흰머리 생겼다고 서로 보고 웃으니
屋裡秋聲動客情 감옥 속 가을 소리에 객의 마음 울리네.
讀物矜能忘病苦 읽을거리가 병의 아픔을 잊게 해주니
家書恍若得聽明 집에서 오는 편지가 정신이 나게 해주네.
未知安市今何處 안시성이 지금의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나
有說瀋陽卽我城 심양이 우리의 도성이라는 설도 있네.
不久遠鴻南北路 머잖아 멀리서 기러기가 남북의 길을 올텐데
蒼蒼在彼白雲橫 푸른 하늘엔 흰 구름만이 가로질러 있구나.9

제12수는 날마다 책을 읽던 시인이 책을 볼 수 없어 동지의 흰머리나 보며 서글프게 웃다가, 집에서 온 편지를 보며 위안을 받는 모습이다. 기러기는 편지를 전해주는 새인데, 감옥에 갇힌 시인은 해방될 조국의 영토를 한반도로 상정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전성기의 안시성과 심양을 포함하는 만주 대륙까지 꿈꾸었다. 지금은 흰 구름이 눈앞을 막고 있지만, 머지 않아 북에서 독립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기러기가 돌아올 날을 그려본 것이다. 김진호 목사가 배재학당에서 한문과 성서, 역사를 가르치다 감옥에 들어갔으니, 감옥 속 가을 소리에 그의 마음이 울린 것은 흰머리가 늘어서가 아니라 기러기 울음소리에 조국 광복의 소식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가 감옥에서 들었던 가을 소리가 단순히 철새의 울음소리가 아님은 <서대문 감옥에서 여러 가지 읊음>에 이어지는 시 <출애굽기를 읽고 느낌이 있어>(讀出埃及有感), <부활>, <복음> 등의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主破寘權復起身 주님이 사망의 권세 깨뜨려 몸 다시 살리니
門徒五百目其眞 오백 문도들이 그 진실을 목격하였네.
時來角響雲間發 때가 오면 나팔소리 구름 사이에 들려와
喚起春山大寧人 봄 산을 불러 일으켜 사람들 크게 평안케 하리라.
- <부활>


이 시에는 “그리스도가 일찍이 ‘사람은 반드시 부활한다.’ 말했는데, 십자가에 운명한 후 삼일에 과연 부활하였으니 제자들이 다 목격하였다.”(基督曾言 人必復活 十字殞命後三日 果復活 門徒皆目擊)라는 자주가 붙어 있다. 둘째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 6절, 셋째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 52절을 시로 쓴 것인데, 감옥에 있는 김진호와 신앙의 동지들뿐만 아니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던 조선 2,000만 동포가 언젠가 독립의 기쁜 소식이 들려올 때를 기다렸다.
예수의 부활처럼 나라를 빼앗긴 조선 민족의 부활을 김진호 목사는
<복음>에서도 고대했으니, “복된 소식이 이천 년 만에 들리니, 평화가 팔만 리에 퍼지네.”(消息二千年 平和八萬里)라는 간증이 바로 그것이다. 출애굽기를 즐겨 읽던 조선 민족에게 복음이란 바로 해방과 평화였는데,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상제의 등불을 길이 밝히네.”(長明上帝燈)라고 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복음으로 여겼던 상제의 말씀이 김진호목사에게는 어두운 세상을 밝혀줄 등불이자 복음이었던 것이다.

| 전덕기 목사 기념비를 한시로 새기다
비석은 사연을 오래 전하기 위해 글을 새겨 세워놓은 돌이다. 비문은 산문으로 짓지만, 산문 끝에 사언시를 붙이면 묘비명(墓碑銘)이 된다. 자신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어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1914년에 세상을 떠나자, 1922년에 공옥학교 제자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그 비문을 김진호 목사가 지었다.

神佑東方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도우셔서
公乃挺生 공이 우뚝 태어나셨네.
畏心鐵血 두려워하는 마음과 쇠 같은 피로
其身犧牲 그 몸을 희생하시고
默悟天酎 하늘이 내리신 뜻 묵묵히 깨달아
牧羊盡忠 양떼를 먹이기에 충성을 다하셨네.
敎育泰斗 교육에는 태두시며
宗敎棟梁 종교에는 동량이셨으니
于于我民 아! 우리 우리 백성들을
何法拯救 어느 법으로 건져 구원하랴.
居常痛悔 평소에 가슴 아프게 회개하다
臨命哀悼 운명을 앞두고 슬퍼하니
再臨何日 재림이 어느 날인가
復觀面目 그 모습 다시 보리라.
衆心感泣 여러 사람이 느껴워 울며
以竪片石 조각 돌을 세우노라.

비문을 당연히 산문으로 짓던 시기에 전통적인 명(銘)으로 지었던 이유는 김진호 목사가 한시 짓기를 일상화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일보」에 한시를 게재하는 사조(詞藻) 난이 있었는데, 1920년 7월 20일에는 「동아일보」를 읽어본 느낌, 23일에는 미국 감리교 총회에 참석하러 가는 오기선, 김영섭, 안동원을 송별하며 지은 시, 24일에는 인천 내리교회에 설교하러 가며 지은 시를 잇달아 발표하였다. 『성교요지』를 지은 시인처럼 이름을 감추고 상제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애산 김진호’라는 이름으로 떳떳하게 기독교 한시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번역을 마친 『빙어』가 빨리 출판되어 독자들에게 널리 전해지기를 고대한다.

1 이이화, “이승훈 관계문헌의 검토–만천유고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제8집, 1992).
2 윤민구,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국학자료원, 2014).
3 이이화, 위의 글.
4 남상범, “이벽의 「성교요지」에 나타난 하느님 이해와 토착화 원리에 관한 연구”(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08), 14.
5 이가원・허경진 공역, 『시경신역(詩經新譯)』(청아출판사, 1991), “大雅 皇矣”, 285.
6 김진호, “병중쇄록”(病中瑣錄). 김주황 목사가 제공한 1953년 회고록을 요약하여 인용하였다.
7 김진호 목사가 지은 서문과 한시는 모두 송병혁 목사의 번역인데, 김진호 목사의 손자 김주황 목사가 출판하기 위해 편집을 마친 상태이다. 출판되지 않은 원고와 사진을 보내준 김주황 목사(애산교회)에게 감사드린다.
8 이때 서문을 직접 쓴 것은 아니다. “一九一九年 己未秋 於西監中 腹稿”라고 하였으니, “1919년 기미년 가을 서대문 감옥에서 마음속에 생각해놓은 원고”라는 뜻이다. 감옥 속이라 종이에 쓰지 못하고 마음속에 구상만 했던 내용을 나중에 썼다.
9 필자가 번역문을 자연스럽게 고쳤다.


허경진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면서 시 <요나서>로 연세문화상을 받았고, 『허균평전』, 『중인』,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 등의 저서와 『삼국유사』, 『서유견문』, 『주해 천자문』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18년 6월호(통권 7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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