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대담
문화·신학·목회 (2018년 5월호)

 

  (1) 다석 유영모의 생활 모습
  

본문

 

* 이 대담은 다석 유영모 연구가인 박영호와 박재순이 다석의 일상생활과 사상을 주제로 2004년 12월 12일 성천문화재단에서 한 것이다. 다석은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사와 교장을 지냈고 서울YMCA 연경반(성서연구반)을 지도한 사상가였다. 대담은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은 한신대 프로젝트(“한국개신교가 한국근현대의 사회 문화적 변동에 끼친 영향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의 허락을 받아 박영호와 박재순의 대화를 두 회에 걸쳐 소개한다. - 편집자 주

박재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가장 가까웠던 제자이신 박영호 선생님을 모시고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사상과 삶의 모습에 대해서 듣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다석에 대해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깊숙한 그런 말씀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박영호: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씨의 소리」에 발표된 다석 선생님에 대한 박 교수님의 논문을 봤습니다. “공부 많이 하셨다.” 했는데, 가까이 뵙게 돼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박재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유영모 선생님을 세상에 널리 알린 첫 번째 업적을 가진 분으로 저는 박영호 선생님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유영모 선생님의 강좌를 가장 충실하게 들으셔서 유영모 선생님으로부터 마침보람, 졸업장을 받으신 유일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제자로서 스승 유영모 선생님을 어떤 분으로 보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박영호: 제 나이가 다석 선생님하고 40년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제가 그렇게 오래 모신 편은 아닙니다. 다석 선생님이 69, 70세 되셨을 때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보다는 한 30년 이상 늦게 다석을 만났지요. 제가 다석 선생님께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말은 옳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석의 만년에는 다른 분이 안 계시고, 김흥호 선생님만 계시고, 제가 자주 구기동 드나들면서 선생님 가르침도 받고 그랬습니다. 제가 다석의 전기(傳記)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려고 하는데 다석 선생님께서 전기에 대한 것은 김흥호 교수님하고 두 사람이 의논해서 처리하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에 대한 내 사상의 멀고 가깝고 바르고 거슬리는 것에 대한 것은 김흥호 님과 상의해서 해라.” 하는 공식적인 통보를 받고서 처음부터 김흥호 교수님하고 둘이서 유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김흥호 선생님께서 그때 이대에 계시니까 바쁘셨어요. “난 바쁘니까 필요한 자료가 있다고 그러면 대학 도서관에서 다 뽑아줄 테니까 박 선생님이 전적으로 맡아서 하시오.” 그래서 제가 만년에 선생님하고 더 가깝게 지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재순: 어떻게 박 선생님만 마침보람을 받으셨는지요?
박영호: 저만 받았다 그러니까 다른 분들께는 굉장히 송구스럽게 되었는데요. 마침보람을 받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내가 선생님을 자주 집으로 찾아가고 편지를 하고 그랬습니다. 하루는 고향에 계시는 형님 내외분이 찾아왔기에 창경원 구경하시라고 모셔다드리고, 나는 또 구기동으로 선생님 뵈러 갔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뜻밖에, 선생님께서 “날 찾아올 생각도 말고, 편지할 생각도 말아야 된다. 그걸 단사(斷辭)라 한다.” 하시면서, 찾아오지 말라 이거예요. 내게는 너무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박재순: 선생님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죠?
박영호: 그렇지요. 정신적으로 독립하란 말이죠. 보통 소들이 어미 소가 송아지를 잘 먹이다가 젖 뗄 때가 되면 발길질 탁 하면서 젖 떼는 것처럼 딱 이렇게 자르는 걸 느꼈어요. 나는 정신적 독립은 못 되었는데, 『주역』의 단사, 말씀 사(辭) 자 끊을 단(斷) 자 ‘단사’라 그러면서 그 단사를 하고 정신적 독립을 해서 다 흩어져서 각기 제 노릇을 해야 하지 않느냐 하셨습니다. “그냥 함께 어리바리 있으면 뭐 되느냐, 너는 너대로 가서 너 한 사람 구실하고, 나는 나대로 하는 거지, 이렇게 오래 붙잡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셔요. 그래서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말씀이 옳거든요. 함 선생님이 “자기 지어서 자기가 먹는 거다. 내가 생산하는 게 내 자신의 식량이 되는 거다.” 하고 말씀을 하셨지만, 아직 나 스스로 정신적인 생산을 할 정도도 못 되었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이제 선생님께서 우리 집 앞을 지나가더라도 선생님 만나러 안 가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제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고요.
그렇게 한 5년 정도 선생님을 찾아뵙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정병호 선생이라는 분을 보내서 박영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보라고 하셨어요. 그때 내가 상처(喪妻)했다는 소리를 들으셨던가 봐요. 정병호 선생이 이제 선생님이 찾으시니까 한번 가보라고 그래서, 다시 5년 만에 구기동 선생님 댁을 찾아가 “저는 이제 선생님 곁을 떠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어요. 선생님도 “나는 ‘은혜’라는 말을 쓰기 싫어가지고, ‘힘입어’라고 말하는데, 앞으로 힘입어서 잘 사시오.” 하셨습니다. 이렇게 둘이 고별인사를 했어요. 그랬더니 뒤에 봉합 엽서에다 마침보람, 졸업장이라 그러고, 그 안에다 당신 한시를 적어서 우편으로 보내오셨어요.
그때 난 톨스토이를 좋아했는데 “대학은 학문의 묘지”라고 말한 톨스토이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대학을 가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도 대학 중퇴한 사람이거든요. 내가 톨스토이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신앙도 비정통이 되다 보니깐, 비정통을 용납해줄 한국 신학교가 없잖아요. 그래서 신학교도 못 갔지요.
「문화일보」가 처음에는 정치 기사를 못 쓰게 되어 있었어요. 정주영 씨 정치적 활동을 억제하려고 그랬지요. 「문화일보」 이규영 회장이, 다석 선생님을 소개함으로써 「문화일보」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내게 글을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를 소개해야 할 텐데, 난 대학이라고는 안 가봤고, 졸업장 하나 받은 게 있다면 다석 선생님께 졸업장 하나 받은 거 하나 있다고 하니까 그럼 몇 분이나 그런 졸업장을 받았냐고 묻더라고요. 글쎄 난 모르겠는데, 아마 다른 사람이 받았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고, 그랬더니 그 말이 커져서, 다른 제자분들한테는 굉장히 송구스럽게 되었어요.
박재순: 유영모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북두칠성처럼 빛나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한마디로 다석 선생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유달영 선생님은 다석을 공자 같은 분이라고 하셨지만, 공자하고는 다른 면도 느껴집니다. 공자는 유영모 선생님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분으로서, 유영모 선생님처럼 철저한 금욕과 영의 세계를 탐구한 분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가 3,000명이었다고 하니까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현실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석의 정신세계가 공자보다 내면적으로는 훨씬 더 깊은 거 아닐까요?
박영호: 성천 유달영 선생님도 다석 선생님은 공자 이상 가는 인물이라고 추모 모임 때 자주 말씀하시곤 그랬어요. 저는 한마디로 다석 선생님은 우리에게,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업그레이드된 어떤 고차적인 신관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국부적이고 저차원적인 신관에서 보다 높은, 21세기의 정신을 이끌어갈 수 있을 만한 신관을 제시하셨습니다. 강남신학대학교 대학원장 지내신 심일섭 교수가 “21세기에도 다석 사상 이상의 어떤 신학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다석은 21세기에 두루두루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신관을 제시해준 분이라고 봅니다. 모든 종교를 다 같이 아우르면서, 그야말로 회통할 수 있는 신관이지요. 그러나 혼합종교는 아니에요. 김흥호 교수님조차도 박영호처럼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혼합종교가 되는 거 아니냐 그러셔요. 나는 그 소리를 듣고서 깜짝 놀랐어요. 그렇지 않아요. 다른 종교들을 소화하면서 다석 선생 나름의 하나의 새로운 신관을 만들어낸 거지, 그냥 혼합만은 아니죠. 그것을 종합하고, 새롭게 하나의 신관을 제시하는 거죠.
박재순: 다석의 신관의 새로운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박영호: 하나님은 상대적, 부분적 존재가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모든 존재 그 자체, 전체가 하나님이다 이거예요. 상대적인 것은 하나님의 하나의 부속품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닙니다. 하나님 한 분만 계시는 것이고, 그 하나님 영역 안에 우리 인간들도 있고, 별도 있고, 만물들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하는 것보다 더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은 있다 없다의 지경을 넘어서 없음(無)과 있음(有)을 아우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본 정체는 허공이시며 성령이신 없이 계신 님입니다. ‘없이 계신 하나님’이지요. 그러니까 유신론 무신론을 다 넘어섭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계시고 허공으로 계시기 때문에 없이 계시는 것이고, 그게 말씀으로 만물이 되었다고 그렇듯이, 성령의 일부가 절대성을 잃어버리면서 상대화되어서 만물이 되었다고 하니까 만물조차도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습니다. 성령과 허공으로 계시는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고, 상대적인 만물은 자꾸 생겨나면서 변하는 존재니까 하나님은 변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유와 무를 합한 이 전체가 하나님입니다. 전체로서는 하나님만 존재하는데,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인간이, 뭇 생명이 잠시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석의 신은 인간적인 신화적 신도 아니고 범신론도 아닙니다. 성령과 허공으로 계시면서 만물을 창조하고 생성하는 하나님입니다. 불교의 허공과 기독교의 하나님이 여기서 회통됩니다. 그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거죠.
박재순: 하나님을 성령과 허공으로 표현하는 것도 아주 새롭게 들리고, 유와 무를 통합한다고 하는 말씀도 새롭게 들립니다. 다석 선생님이 하나님은 유무상통(有無相通)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지요.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이 함께 쓰는 것을 유무상통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유무상통이라고 하니까 더욱 새롭게 들렸습니다.
참 좋은 말씀인 것 같고, 두고두고 새기고 좀 더 생각을 이어가야겠지요. 그런데 유영모 선생님의 사상은 남기신 글을 보고, 또 박영호 선생님이나 김흥호 선생님이 또 많이 풀이를 해주셨으니까 그런 걸 연구하면 될 것 같은데, 유영모 선생님의 생활의 구체적인 모습, 그런 건 사실은 박 선생님이 안 계시면 어디 가서 여쭤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 걸 꼭 여쭤봐야겠다 싶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데요. 우선, 저희가 유 선생님을 보면 ‘1일 1식을 한국에서 처음 시작하신 분이다. 1일 1식을 통해서 건강도 유지하고 정신적인 깊은 세계까지 들어갔다.’고 알려져 있는데, 식사하는 모습에 대해서, 식사량이나 식사시간이나 반찬 가지 수나 그런 거를 자세하게 말씀해주세요.
박영호: 함석헌 선생님하고는 다르게 다석 선생님은 자신에 대해서나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쓰신 일도 없고, 강연을 하실 때도 그런 얘기는 별로 말씀 안 하셨어요. 함석헌 선생님조차도, 다석 선생님이 장로 아버지의 아들이라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데, 사실은 다석 선생님이 먼저 교회 다니고 그 뒤에 아버님이 교회 다니게 되었습니다. 다석 선생님이 성령을 받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때가 쉰두 살 때입니다.
이때부터 생활 패턴이 확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인하고 해혼하고, 금욕생활에 들어가고, 1일 1식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남이 알지 못하는 어떤 영적인 체험을 하신 것 같아요. 그전에도 알 만큼은 다 아셨어요. 그때 인간이라는 건 몸뚱이로는 완전히 동물, 짐승이라고 여기셨어요. 동물들은 먹어야 하고, 싸워야 하고, 새끼 쳐야 하는데, 그걸 불교적 용어로 말하자면 ‘탐진치’거든요. 탐(貪)–탐욕부리고, 진(瞋)–성내고, 치(癡)-색욕인데, 그게 동물의 본능인데, 예수님과 부처님은 뭐냐면, 동물이면서 동물이기를 거부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 아들 노릇하는 거거든요.
다석 선생님에 따르면 예수님 말씀대로 산 이가 부처님이고, 부처님 말씀대로 산 분이 예수님이지요. 전구가 여러 개 있지만 전원은 똑같듯이, 예수나 석가의 인격체, 객체로는 다 다른데 영적인 근원은 다 같기 때문에 그렇게 똑같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나 부처님한테는 우리가 탐진치의 냄새를 맡을 수가 없잖아요. 식욕에서 모든 탐욕이 시작되니까 먹는 걸 절제해야 된다, 안 먹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완전히 안 먹으면 죽어버리니깐 하루 한 끼 먹는 거지요. 이 몸은 우리 머슴인데, 이걸 심부름 시키자면 안 죽을 만치만 먹는 게 한 끼 먹는 거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타고나기를 아주 평화적인 인물로 나셨기 때문에 자기와의 싸움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식색에 대한 금욕을 강조해요. 1일 1식 하면서 성생활 딱 끊어버린 것은 탐진치를 완전히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래서 해혼도 하셨지요.
다석 선생은 저녁을 잡수시는데, 그냥 젊은이 밥 한 그릇 정도 드셨어요. 나는 70세 때 만났는데 그때도 젊은이 밥그릇 정도로 잡수셨습니다. 원래 소년 시절에 학교 다닐 때도 도시락 안 가지고 다니셨거든요. 2식밖에 안 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2식을 아주 오래 하셨죠. 1식하기 전에는 생식도 하시고 솔잎도 잡수실 때도 있고, 콩이나 쌀 불려서 생식도 한 1년인가 하시기도 했어요. 육식을 좋아하시지도 않고, 그냥 반찬이 올라오면 ‘나 오늘 돼지고기 몇 점 먹었어.’ 할 정도로 공개하시고. 반찬 몇 가지 안 드셨어요. 워낙 살기를 그렇게 사셨으니깐요.
박재순: 저도 70년 중반에 딱 한 번 퀘이커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하고 같이 세검정 유 선생님 댁을 찾아뵈었어요. 두세 시간 앉아서 여러 분들하고 말씀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너무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얼굴이 그냥 신선 같으시더라고요. 머리카락은 완전 하얗고, 볼은 발갛고, 어린아이처럼 입술도 새빨갛고, 입에서는 늘 침이 고이신다고 하시는데, 정말로 입에는 물이 가득하시더라구요. 국이나 물은 많이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박영호: 그리고 또 국물이 있더라도 밥은 밥대로 먹고, 국은 국대로 먹어야지, 같이 먹으면 덜 씹힌다고, 밥만 먹어야 꼭꼭 씹힌다고. 또 비벼서 잘 드셨어요. 속에 들어가면 저절로 위 속에서 다 비벼지는데, 미리 비벼서 먹는 게 좋다고. 썩썩 비비시진 않고, 설설 비벼서 드셨지요.
박재순: 밥을 제물이라고 하고, 식사하는 것을 진정한 예배라고도 하셨지요. 왜 1일 1식을 하냐. 아침은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고, 점심은 이웃을 위해 드리고, 저녁만 나를 위해서 먹는다고 그러셨다는데, 혹시 그런 말씀 들은 적 없으십니까?
박영호: 서울YMCA 총무 하신 현동완 선생님이 그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과일을 안 먹는 건 환자를 위해 안 먹는 거”라는 그런 소리를 자주 하셨어요. 도산 선생님이 ‘나는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나라를 위해서 한다.’ 그러듯이, 유 선생님은 밥을 먹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먹고, 잠자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잔다고 하셨고,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기도하기 위해 밥 먹는 것이고, 밥 먹는 것도 기도하기 위해서 밥 먹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유 선생님이 마지막 2년 동안은 기억상실증에 걸리셨거든요. 사모님과 나를 보시고, “저 얼굴이나 이 얼굴이나 눈에는 익었는데 시작을 모르겠다.” 말씀하시기도 하셨지요. 그러면 부인도, 제자도 못 알아보신 거죠.
박재순: 왜 그러셨을까요? 말년에 뇌를 한 번 다치셨던 것이, 그것이 재발하셨나요?
박영호: 낙상하셨는데, 그래서 그때 제가 의사이신 최태사 선생한테 물어봤었는데, 직접적인 관계는 없을 것 같다 그래요. 요즘 의사들에 따르면 이하고 뇌하고 관계가 깊어서, 많이 씹어야 뇌의 혈액순환이 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석 선생님이 이가 안 좋으셔서 일찍 빠졌습니다.
박재순: 왜 그러셨을까요. 다른 데는 다 건강하셨는데.
박영호: 이를 해 넣지도 않았는데 그게 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만으로 아흔한 살 사셨는데, 돌아가시기 2년 전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셨어요. 부인이 6개월 먼저 돌아가셔서, 산에서 그날 밤을 새우는데, 왜 집에 안 가느냐고 하셨어요. 당신 부인 돌아가신 것도 모르는 거죠. 그러니 기억을 완전히 잃으셨는데도, ‘아버지~ 아버지’ 하고 간헐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것은, 신앙이 잠재의식에까지 뿌리를 내렸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어요.
박재순: 그리고 그럴 때도 무릎 꿇고 계셨다고….
박영호: 늘 무릎 꿇고 계셨죠. 선생님은 한복을 안 입으셨어요. 선생님은 요가에 대해 일가견을 가지셨어요. 그래서 몸에 균형을 잡는 걸 굉장히 강조하고 그러셨는데, 그래서 마지막까지 일어서서 바지를 입으셨어요. 마지막에 일어서서 바지를 입으시다가 넘어지셨어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 못 일어나시고,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그때만 오줌똥 받아내고 그랬지, 깨끗하게 돌아가셨어요.
박재순: 대단하시네요. 완전한 기억상실 상태인데도 2년 동안 그렇게 깨끗하게 지내셨다니! 이가 빠진 것은 60대 때 빠진 건가요?
박영호: 내가 69살 때 뵈었는데, 그때도 앞니만 몇 개 있더라고요. 그런데 5년 뒤에 가니깐 몽땅 다 빠셔서, 저 어금니 한두 개만, 하하 웃으실 때 어금니 한두 개만 있더라고요.
박재순: 왜 그러셨을까요? 저작을 많이 안 하셔서 그런가요?
박영호: 그게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는데, 아드님들이 의치를 자꾸 하라고 해도. 어머님도 90 가까이 사셨는데, 내가 어머니한테도 못 해드렸는데, 내가 뭐 틀니까지 해야겠느냐고, 그냥 살다가 죽겠다고.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데, 잇몸으로 살면 되는 거지 하시며 그냥 사셨어요.
박재순: 잇몸으로도 식사는 잘하셨나요?
박영호: 그렇죠. 경제적으로 근검절약하는 거 몸에 밴 분들이지요. 함 선생님도 마지막에 서울대학 병원에 계실 때, 하루는 홍익재 사장이 ‘선생님 가까이서 봬야지.’ 해서 내가 홍익재 사장하고 함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화장실에 가야 되는데, 따님이 혼자 있어서 우리가 모시고 화장실 갔었는데, 화장실에서 종이를 뜯어드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종이를 좀 길게 뜯었더니, 그러면 되겠느냐 하시며 반을 뚝 잘라가지고 쓰시더라고요. 그런데 다석 선생님도 아주 근검절약 하세요. 달력 뒷치에 글 쓰시고, 시 쓰시고 하셨어요. 그렇게 물건 아끼는 것은 두 분이 똑같아요. 함 선생님 그 휴지 조금 많이 뜯은 거 딱 갈라서 쓰시는 거 보고 홍 선생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박재순: 선생님의 자제분들 얘기 들어보니까, 생선을 먹을 때는 가시 채로 먹으라고, 가시를 발라내지 못하게 하셨대요.
박영호: 가시에 영양분이 있지요.
박재순: 함 선생님의 삶과 정신은 유 선생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함 선생님에게 여자 문제가 있어서 유 선생님은 서운해하셨지만, 함 선생님의 많은 부분이 유영모 선생님한테서 왔습니다. 유 선생님의 깊은 사상과 높은 정신세계가 있기 때문에 함 선생님의 사상과 실천이 깊고 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영호: 이기백 교수의 아버님 이찬갑 선생님이 왜 함석헌이 자꾸 유영모를 닮아가느냐고 공개적으로 비난을 했어요. 한동안 함 선생님도 한복 입고, 머리를 좀 깎으시고 그랬거든요. 유달영 선생님에 따르면 함 선생님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석 선생님 닮으려고 애쓰신 분이다. 1일 1식하고, 한복 입은 거나, 고무신 신고 다니는 거나. 다석 선생님은 가난한 사람 차림으로는 나가도 부르주아지 차림을 해서는 바깥에 못 나간다 그러셔요. 나도 이거 넥타이 맨 지 얼마 안 돼요. 넥타이 매다가도 선생님한테 갈 때는 풀고 가고 그랬어요.
박재순: 유 선생님이 잠은 어떻게 주무셨나요?
박영호: 잠은 보통 열 시 전후에 주무셔요. 드러누웠다고 하면, 코 소리가 아주 요란해요. 그래서 코 곤다는 걸 글로 쓰신 것도 있어요. 당신도 모르시는데, 아마 코 곤다는 소리는 들으셨나 봐요. 그래서 코 고는 그걸 가지고 시조로 쓰신 것도 있어요. 아주 죽은 듯이 그렇게 주무셨어요. 잠이 안 오고 그런 거는 없어요. 세 시, 네 시면 딱 깨셨어요. 그때 깨가지고 다석일지 쓰시는 거예요. 저녁에 쓰는 게 아니에요. 아침에 생산하는 거죠. 암탉이 꼬꼬댁 하면서 새벽에 알 하나 낳듯이, 다석 선생님은 시 한 수 내놓는다고 서영훈 선생님이 자주 말씀하셨죠. 일기라 해서 내가 뭐 했다는 것을 쓰지 않고, 전부 다 한시 아니면 시조를 쓰셨는데, 한시가 한 1,300수, 시조가 한 1,700수 됩니다. 쓸 게 없으면 그냥 날짜만 이렇게 써놓으셨어요. 여행을 하신 경우에는 일지를 쓰지 못하셨지요.
박재순: 주무실 때는 어떻게 주무셨나요? 대 자로 주무셨나요?
박영호: 그렇죠. 선생님은 널판에 주무셨잖아요. 관 하나를 사서 관의 밑바닥 판만 갖다 놓고 그 위에서 주무셨어요. 이만치 두꺼워요. 관에서 주무셨던 셈이지요. 죽기 전에 관 속에 들어가는 체험을 하기 위해서, 죽음하고 가깝게 지내기 위해 그렇게 주무셨어요. 사람이 죽음을 잊어버리면 잡념이 자꾸 들어오거든요. 죽음을 마주해야 잡념이 안 들어오기 때문에. 쉰두 살 때부터 그렇게 주무셨습니다. 공자님은 송장 잠을 자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선생님은 송장 잠을 자야 한다는 거예요. 송장처럼. 인간들이 허리가 펴져야 하는데, 낮에는 자꾸 굽어지잖아요. 그러니깐 허리가 딱 펴질 정도로 바로 자야 한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은 잠을 깊이 주무셨어요.
박재순: 선생님은 숨 쉬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셨는데, 자면서 숨을 깊이 쉰다고 했으니까.
박영호: 숨은 자는 동안 더 활달하게 호흡을 한다고 그래요. 다석 선생님은 성령을 숨님이라고 했어요. 어떤 때는 기라고 하기도 하는데, 몸도 늘 숨을 쉬어야 되듯이, 잠자는 동안에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숨 쉬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우리도 글 쓰다가 꽉 막혀서 안 될 때는 한잠 자고 깨면 이 잠재의식에서 다 풀어져서 글이 되는 그런 경험, 교수님도 잘 아실 거예요. 그게 잠재의식이 활동을 해서 영적으로 해결이 되는데, 그것을 선생님은 성령의 활동으로 생각하셨지요. 자고 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는 동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내 의식에, 잠재의식에 어떤 역사를 하셔서, 어떤 영감(inspiration)을 받는 거라고.
박재순: 잠자는 게 수행이네요. 잠자는 게 기도고. 숨을 쉬어서 하나님의 성령과 통하는 것이군요.
박영호: 낮에 기도할 때 왜 눈을 감느냐? 이 세상 보면서 하나님하고는 대화하기는 어려우니까 눈 감고 기도하는 거니까, 밤에 아무것도 안 보일 때에는 기도가 더 잘 되는 거지요.
박재순: 선생님이 한 서너 시에 일어나서 맨 처음 하는 것이 무엇이었나요? 냉수마찰이요?
박영호: 나중에는 마른 수건 마찰도 하시고, 수건이 없으면 손으로 빠닥빠닥 소리가 날 정도로 온몸을 문지르세요. 집에 계시면 대야에 물 떠다가 하셔요. 세숫대야 하나면 목욕 다 되는데, 목욕탕 갈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박재순: 그러면 냉수마찰을 20대 때 처음 하셨다고 하는데, 밖에서 하셨다고 했는데.
박영호: 물이 꽝꽝 얼었는데, 그거 깨가지고 하셨죠. 그래도 감기 한 번 안 걸리셨어요.
박재순: 그래서 말년까지 냉수마찰을 밖에서 하셨나요?
박영호: 선생님이 물 길어다가, 그때 사랑방에 계실 때는 사랑방 안에서 하시고, 마당에서도 하시고, 우물가에서도 하시고. 그다음에는 옛날 주택이 많이 들어서기 전에는 개울 앞에서도 하시고. 그래서 지금도, 평창 둘째 아드님 댁에 계실 때 개울에서 냉수마찰 하는 거 보신 분들이 많아요. 그 노인이 그렇게 훌륭한 분이신 줄은 몰랐다고요. 요즘 새벽사람 가르치지, 다석 선생님은 진짜 새벽사람이지. 아드님이 그러는데, 젊을 때는 늦잠 자고 그러셨대요. 원고 써놓고 늦게까지 주무셨는데, 쉰두 살 이후로는 완전히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져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셨어요.
다석 선생님에 따르면 정신이란 에너지, 호르몬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 왕성해야 기도도 할 수 있고, 철학도 할 수 있고, 예술도 할 수 있는 거지요. 정력이 있어야 예술도 하고, 노동도 하고, 기도도 할 수 있는 건데 왜 자꾸 그것을 방사로, 사정을 해버리고, 아까운 에너지를 낭비하느냐는 겁니다. 새벽은 피로가 다 풀려서 제일 정력이 왕성할 때거든요. 그때 정신활동도 제일 잘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새벽 시간을 요긴하게 쓰신 거죠. 저도 나중에 그렇게 해보니까 하루 온종일 글 쓰는 것보다도 새벽에 하는 것이 더 성과가 좋아요.
박재순: 묵상을 어떻게 하시나요?
박영호: 언젠가는 내가 새벽에 가니까, 아직도 글 쓰고 있으면서 ‘내게는 쓰는 게 기도다.’고 하셨는데, ‘내 기도는 참선에 가깝다.’ 그러셨어요. 명상을 하는 그런 타입이고, 그다음엔 글 쓰는 것 자체가 영감 받는 기도의 시간이었지요.
박재순: 시간을 정해놓고 참선과 묵상을 하셨나요?
박영호: 새벽마다 주로 무릎 꿇고 눈 감고, 몸을 이렇게 흔들흔들 하시면서 명상하셨지요. 선생님은 하루 온종일, 전천후 비행기라고 하듯이, 전천후 기도예요. 하루 특별한 시간만 내놓고 기도하는 분이 아니에요. 늘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분이지, 어느 시간만 딱 정해놓고 그 시간에만 기도하는 분은 아니었어요. 하루 온종일 하나님하고 떨어지는 일이 없는 그런 생활을 하셨죠.
박재순: 선생님이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법이 있으셨습니까? 이를테면 다리를 쭉 뻗는다든지, 기댄다든지.
박영호: 그런 거 없어요. 다석 선생님은 앉는 자세, 무릎 꿇는 자세가 달라요. 보통 우리는 이렇게 발을 깔잖아요. 다석 선생님은 안 그래요. 다리를 여덟 팔 자로 이렇게 펴고, 궁둥이가 땅에 닿게 해서 온종일 좌상에 앉으셔서 지내셨어요. 이 자세를 궤(跪) 자, 발족 변에 위험하다 위를 써서 궤 자라고 하는데, 온종일 이 자세로 똑바로 앉아 계셨어요. 늘 긴장이 되고 허리를 굽힐 수가 없는 자세로, 하루 온종일 이렇게 지내셨어요. 함 선생님하고 ‘「성서조선」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셨는데, 간수들이 자꾸 무릎 꿇으라고 하는데 유 선생님은 시키지도 않는데 온종일 무릎 꿇고 있으니깐 간수들이 탄복을 하더래요. 그러니 선생님이 무릎에 혹이 달릴 정도로 굳은살이 배겼어요. 그렇게 온종일 앉아있는 거예요. 낮에는 눕는 일이 없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꿇어앉으시니까, 우리가 편하게 앉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우리가 꿇어앉아 있으면 한 시간만 지나면 아파서 이렇게 앉다 저렇게 앉다 그러는데, 선생님은 꿈쩍하지 않으셨어요. 참 기적 같은 일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치매 상태가 되었는데도, 그렇게 앉는 것은 똑같아요.
박재순: 제가 70년대 중반쯤에 유 선생님 찾아뵙고, 참 짧은 말씀이었지만 큰 인상을 받은 것 중 하나는 ‘스스로 해야 한다. 손이 하는 일을 발이 도우면 안 되고, 발이 하는 일을 손이 도우면 안 된다.’ 하시고 ‘이렇게 하는 거다.’ 그러면서 80이 넘은 노인이 무릎 꿇고 앉으셨다가 갑자기 한쪽 발을 세우시더니 그 발로 번쩍 일어나시더라고요.
박영호: 그리고 누웠다가 손 안 대고 딱 일어나셨지요.
박재순: 그러니까 늘 앉아서 단전호흡을 이렇게 하시고 그러셨나 봐요. 또 영감이 나면 글을 쓰시고, 시를 쓰시고. 그 당시에 정인보 선생님이나 최남선 선생이나 다 학자셨는데, 유영모 선생님이 특별히 한학에 깊고 동양학의 대가라는 평판을 들으셨다고 그러는데, 유영모 선생님의 한문 실력이라고 할까, 또 공부법은 어떻게 하셨나요?
박영호: 오산학교 교장으로 오는데, 육당 선생이 두려워하는 분은 오직 이 분뿐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니깐 춘원 선생이 지금 상명여대 있는 데 이사 왔을 때, 다석에게 노자 이야기를 들었다고 나와요. 김흥호 교수님도 정인보 선생님한테 물으니깐, 동양학에 대해서는 다석 선생님한테 배워라 하셨고, 그다음엔 춘원 선생님한테 가니까 또 다석 선생한테 가서 배워라 하셨대요. 보통 우리나라에 옛날 삼천재라는 분이 육당 최남선 선생하고, 춘원 이광수 선생하고, 원래 이북에 간 홍명희 선생인데, 그분 빼고 정인보 선생을 집어넣었는데, 김교신 선생님 하는 말이 삼천재, 사천재 하는데 다석 선생님도 포함하더라고요. 김교신 선생은 이 삼천재가 두려워하는 분은 유영모 선생이라고 하셨지요. 다석 선생도 천자 책을 집에서 아버님한테 배웠는데, 다섯 살 때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도 하고, 뒤에서부터 거꾸로 암송을 했다고 해요. 다 알고 눈에 환하게 보인데요, 천자 책이. 그러니 이래도 외우고 저래도 외울 정도로 비상한 머리를 타고나신 것 같아요.
박재순: 강의는 어떻게 하셨나요?
박영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할 때 틀거리에 맞게 미리 구상을 해서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한 주제가 떠오르면 그에 대해서 아는 걸 다 말씀하시니까 끝이 없어요. 네 시간도 좋고 다섯 시간도 좋고. 난 농사짓는 사람이니까 짐승들이 들에 있으니까 말씀을 듣다 말고 먼저 나와야 돼요. 세계대학봉사회에서는 일곱 시간 강의를 했다고 해요. 보통 오후 두 시에 모여서 겨울에는 컴컴할 때까지 했지요. 12월 한 달, 8월 한 달은 쉬고. 보통 두 시에 모여서 일찍 끝나야 보통 여섯 시 또는 네 시에 끝났고, 보통 서너 시간 다 넘어요.
박재순: 혼자만 말씀하시나요? 질의응답 같은 건 없고요?
박영호: 없어요. 당신 혼자만 말씀하셨어요. 이따금 유승국 교수, 김흥호 교수님도 오셨지요. 당신 혼자만 말씀하시기에도 시간이 없었는데요. 주소록 하나 만들지 않고, 인사시키는 일도 없고 얼굴은 얼굴대로 알고 지냈지요. 김흥호 선생님이 그러잖아요. 구기동 가서 『중용』을 배우는데 하루는 같이 나오는 분한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니 평안도 용천이라고 해서, ‘그러면 함 선생님을 아세요?’ 그러니까 ‘내가 함석헌이요.’ 그랬대요.
박재순: 유 선생님은 언제부터 가르치셨대요?
박영호: 월남 이상재 선생님 돌아가시고, 1928년인가 YMCA 연경반에서 후임자를 구하는데, 최남선 선생님이나 김정식 선생님을 비롯해서 여러 분들이 다석 선생님을 추천했다고 해요. 현동완 총무가 집으로 왔더래요. 그래서 거기서 강의하시게 되었대요. 『노자』하고 『중용』은 집에서 강의했어요. 선생님이 『중용』과 『노자』는 완역했고, 『장자』나 『맹자』는 발췌를 해서 가르쳐 주셨거든요. 집에서 아침 일곱 시에 시작했는데 함 선생님은 오류동에서 구기동까지 걸어가셨다는 거 아니에요. 김흥호 교수는 서대문에서 댁까지 걸어오셨고. 일곱 시에 시작하면 열두 시 될 때까지 말씀을 하셨어요. 서경덕 상서의 글을 번역해서 가르쳐주시고, 불경도 많이 가르치시고, 『반야심경』은 완전히 강의를 해주셨어요. 『반야심경』 번역도 있죠. 그러니까 우리 성경만 읽던 사람들이 불교를 알게 됐어요. 유승국 교수님도 다석 선생님을 만나서 불경도 읽게 되고 성경도 읽게 됐다고 해요. 다석 선생님을 먼저 알아서 함 선생님을 알게 된 경우도 있고, 함 선생님을 먼저 알아서 유 선생님한테로 넘어간 경우도 있지요. 물론 함 선생님 쪽에서 넘어간 사람이 숫자가 많지요. 네 그렇지요. 그렇죠. 머 넘어간 게 아니죠. 나는 넘어갔는지 몰라도.
박재순: 유 선생님이 집안일이나 농사일은 어떻게 하셨나요? 농사를 직접 지으셨나요?
박영호: 나도 체력이 약하지만 선생님의 손발은 나보다 크시더라고요. 키는 나보다 작고. 선생님의 아버님이 선생님보고 ‘니가 뭔 농사짓느냐? 농사 감독이나 하면 하겠지’ 하셨대요. 그러나 당신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집안 청소에 이르기까지 제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어요. 다석 선생님의 가방을 받아드리려고 하면 안 시켜요. 어린아이들에게도 잔심부름 안 시켰어요. 양반들이 잔심부름 시키는 거, 안 한다는 거지. 잔심부름 시키면 둘 다 병신 된다는 거지. 사모님이 다리가 아프실 때 당신이 가셔서 사골 뼈 사다가 고아드렸어요. 큰일 할 때, 다른 사람 힘 빌려야 할 때만 빌리지요. 첨에는 머 며느리 없을 때는 아예 물 한 컵도 안 주시고, 며느리 생기면서 꿀도 타오고 차도 타오고 그런 일이 자꾸 벌어져요. 밥상을 당신이 부엌 앞에 갖다놓으셔요. 당신은 아무것도 안 잡수셔요. 우리만 손님으로 왔으니까 마시지요. 설거지를 하시지는 않았어요. 한번은 내가 구두를 신고 갔는데, 구두 위에 뭐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시고 가족들이 떨어뜨렸다 생각하고 선생님께서 내 구두를 닦아놓으신 일도 있어요.
선생님은 그렇게 서민적이셔요. ‘귀족화되면 안 된다 이거야. 기독교가 상놈의 종교인데 귀족 종교가 되면 안 된다 이거야’. 권위는 전연 부리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함 선생님은 그 앞에서 두려워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권위는 영적인 힘에서 오는 권위였지요. 겨울이 되어야 두루마기 입으시고, 두루마기 고름 아닌 단추 끼우시고, 여름에는 베 고이 입으시고. 아주 서민적이셨어요.
세수할 때 비누 같은 것도 안 쓰시고 이는 소금으로 닦으셨어요. 아주 서민적이세요. 『주역』에 ‘지천대통’(地天大通)이라는 말이 있지요. 지금 서대문의 독립문에 있는 천지비석처럼 하늘궤가 위에 있고 땅궤가 아래 있으면 답답하다는 거예요. 지가 위에 올라가고 하늘이 아래로 가면 확 트인다는 거예요. 시골서 사는 사람 서울서 살고, 서울서 사는 사람 시골서 살고. 그래서 왜 뭣 좀 안다는 사람들이 자꾸 시골로 내려가야 지천대통이 되지, 자꾸 권위만 부리고 있어서는 서민들이 살지를 못한단 말이에요. 나는 맨 끄트머리가 되고 땅의 먼지하고 가깝게 되는 게 자기라는 거예요.
박재순: 예수님 가르침하고 같네요. 예수님의 성육신하고 같네요.
박영호: 그렇죠. 땅의 권위를 부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드님들도 대학공부 안 시켰죠. 하기야 그때만 해도 중학교 한 고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시기예요. 사람들한테 떠받드는 사람 되면 하나님한테 미움받는다는 거예요. 공부를 많이 해서 지배층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서민들을 수탈해먹는 죄를 짓게 되어서 하나님한테 미움받는 존재가 되는데, 왜 그렇게 자꾸 그렇게 되느냐 이거지. 사람들한테 떠받드는 존재가 되면 하나님한테 미움받는 거 누가복음 17장엔가 나와요. ‘왜 자꾸 자식들 공부 많이 시켜서 귀족 만들려 하냐, 지배계급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서민들 피 빨아 먹는 존재가 되려 하느냐.’ 그런 서민의식이 철저해요. 그래서 내가 농사짓는 거 와 보시고, 내가 쓴 『새 시대의 신앙』이라는 책을 보시고 내 사상을 변질시키지는 않겠다고 여기셔서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나 생각해요.
박재순: 선생님은 어떻게 보면 기독교 신앙이나 성서로부터 자유롭게 나간 것도 같지만, 어떻게 보면 유 선생님처럼 성서를 문자적으로 실천한 사람도 없다고 여겨져요.
박영호: 그렇죠. 선생님은 예수님하고는 아주 가까운데 현 기독교하고는 멀죠. 선생님은 오늘날 기독교하고는 가까울 수 없다고 하셨어요. 유교를 통해서는 공자나 맹자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지금 불교를 봐서는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하셨어요. 진짜 예수님을 알려면 어떤 의미에서는 다석 사상을 알아야죠. 그래서 지금 톨스토이 주장은 사도 바울은 자기의 도그마를 위해서 예수님을 양념으로 써먹었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다석 선생님이 톨스토이 영향을 받았지요.
박재순: 바울 얘기는 하지 않으셨나요?
박영호: 지금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얼굴마담 정도로 되어 있는 거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는 않는 거죠. 다석 선생님은 몸으로, 삶으로 산제사를 드린 것 같아요. 평생이, 전부가 예배였어요. 성경을 철저하게 생활화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예수님 가르침대로 사신 분이에요. 내가 밥 먹는 거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먹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상의 미사가 어디 있습니까? 비정통이 아니라 정통이죠. 선생님은 식사하실 때 가족들이랑 같이 드시지 않고 따로 드셨어요. 손님이 오시면 겸상을 하죠.
박재순: 일상생활에서 유 선생님의 특징이 있나요?
박영호: 괴짜라는 말 많이 들을 정도로 생활 자체가 남다르셨지요. 걸어갈 수 있는 데는 다 걸어가셨죠. 오류동 송두영 선생 모임에 가실 때도 몇십 리 되는 길을 걸어가셨죠. 인천까지 걸어서 다녀오기도 하셨습니다. 김흥호 선생님은 <개성당일 왕복래>(開城當日 往復來)라는 한시가 「성서조선」에 실린 것을 보시고 유 선생님이 하루에 개성까지 걸어갔다 오셨다고 하는데, 그건 불가능해요. ‘개성당일’은 일본이 항복한다는 뜻을 함축한 말인데, 함 선생님만 그 뜻을 파악하셨어요. 포천에 할아버지 산소가 있었는데, 하루 한 끼 먹는 일을 시작하고 새벽같이 가서 당일에 오셨어요. 송두영 선생하고는 굉장히 가깝게 지내셨어요. 송두영 선생의 신앙은 정통적인데도 두 분이 친하셨어요. 송두영 선생님과 함 선생님이 만나면 방에서 서로 큰절을 하고 “선생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인사한 후 서로 대화를 나누셨다고 해요. 다석 선생님은 남한테 엎드려서 큰절하는 걸 싫어하셨어요. 마을 젊은이들이 세배하러 왔는데 ‘그거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나는 세배 대신에 선생님 시를 암송하면 선생님이 좋으셔서 ‘아멘’ 하셨어요. 일제 때 신채호 선생님이 세수할 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하셨다고 그래요. 일제에 굴하지 않기 위해서, 사대주의가 싫으니까. 자주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지요. 오랜 세월 중국 앞에 고개를 숙이고 살았으니까 그게 너무 분통해서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거지요.(다음 호에 계속)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