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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유교와 기독교 05]
문화·신학·목회 (2024년 1월호)

 

  퇴계의 체용일원론과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본문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론의 독특성을 보여주는데, 퇴계의 경우에도 성리학의 체용일원론을 심화하여 삼위일체론과 유사한 사유를 전개한다. 퇴계의 독특한 체용일원론은 유학의 종교적 영성을 한껏 고양시킨다.
원래 체용론(體用論)은 불교에서 발전된 것으로서, 용(用)은 일상의 다양한 사태에 올바르게 응하는 갖가지 마음 씀씀이를 가리키고, 체(體)는 올바른 마음 씀씀이의 근원이 되는 진공(眞空)의 진리 혹은 진리와 하나가 된 불심을 가리킨다. 체용일원(體用一源)이란 불심 또는 일심(一心)과 일상의 마음 씀씀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요, 다른 말로 하면 일상의 여러 행동이 본체인 불심의 작용이라는 의미이다. 체용일원이 이루어지면 자유로운 회통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므로 체용일원론은 구원의 경지를 묘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경지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주희는 불교의 체용론을 이기론에 적용했다. 유학의 체용론에서 체는 이(理)를 가리키고, 용은 기(氣)를 가리킨다. 체용일원이란 기의 활동이 이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가리킨다. 그것은 구체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다양한 도덕 행위가 보편적 진리인 이의 주재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하나에서 여럿이 생겨난다는 말은 체용일원을 우주론의 용어로 표현한 것이고, 하나의 진리로 여러 상황을 관통한다는 말은 체용일원을 도덕 실천의 시각에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퇴계의 체용일원론에는 일반적인 성리학과 다른 독특한 점이 있다. 그것은 퇴계가 체 안에 다시 용을 두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태극과 이가 기로 발현되기 전에, 이 안에서 사전적 발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퇴계의 체용일원은 체가 내부적 용을 거쳐 인간 마음의 활동으로 발현되고 구현되는 논리를 갖추게 된다. 그것은 하나가 여럿으로 구현되기 이전에, 하나 안에 이미 여럿이 갖추어져 있는 형태로 설명된다.
퇴계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체용일원론은 그가 보편적 진리인 이의 초월성을 매우 강조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역시 진리의 하나님이 절대 초월자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절대 초월자인 성부는 성자와 관계를 이루며 성자와 성령을 통해 세상과 접촉하고 일한다. 유학의 체용일원론과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유사점과 차이점을 보인다.

퇴계, 이(理)의 초월성을 강조하다

성리학에서 이와 기는 불상잡(不相雜) 불상리(不相離)의 관계에 있다. 이와 기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퇴계는 불상잡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해서 이가 기와 별개인 것처럼 말하면서 이의 초월성을 중심으로 사유를 전개한다. 이처럼 극대화된 이의 초월성은 퇴계가 칠정론을 통해 죄의 일상성을 말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인간론과 신론이 상호 영향을 주는 것과 같으니, 기독교의 원죄론이 하나님의 절대 초월성으로 연결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의 초월성은 우주론적으로 이가 기에 앞서 기의 기원이 된다는 점, 곧 이의 우선성(priority)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이가 기와 같지 않음, 곧 이의 타자성(alterity)을 강조하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퇴계는 도와 기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기(器)를 떠나서 도(道)를 찾을 수 없고… 도를 벗어나서 기가 있을 수 없다.”(『퇴계선생문집』, 41,20) 이 문장에서 도는 기보다 우위에 있다. 기를 떠나 도를 찾을 수 없지만, 기를 벗어나 도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를 떠나서 도를 찾을 수 없다.’고 함으로써 퇴계는 이기 불상리라고 하는 성리학의 기본 명제를 붙들고 있다. 그러나 ‘도를 벗어나 기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기를 벗어나 도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음으로써 퇴계는 기가 없을 때에도 도는 있었음을 말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진리인 이(理)가 세상 곧 기(氣)의 기원이라는 점을 가리키며, 기에 대한 이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에 대한 이의 우선성(priority)이라고 하는 우주론적 표현은 진리의 힘이 인간의 죄의 힘보다 우월하다(primacy)는 도덕론적 믿음을 드러낸다.
퇴계가 이와 기의 다름을 강조하는 까닭도 똑같다. 그는 이의 초월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와 기가 같은 것이 아님을 주장함”(非理氣爲一物辯證)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이 글에서 퇴계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음양은 태극이 낳은 것”(陰陽太極所生)이라고 정리한다. 이전 호에서 밝혔듯이 ‘낳았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이가 기의 기원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이와 기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퇴계는 전자를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이와 기가 본래 한 물체였다면 태극이 바로 양의일 것이다. 어찌 태극이 양의를 낳을 수 있겠는가.”(若曰理氣本一物 則太極卽是兩儀 安有能生者乎, 『퇴계선생문집』, 41,20)
이처럼 이를 기와 별개로 보았다고 해서 퇴계가 이와 기를 서로 다른 두 개의 실체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퇴계가 이기 불상잡을 강조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기 불상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여전히 이가 기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를 기와 다른 것으로 보려는 퇴계의 관점은 유학의 우주론인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에 대한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정자중에게 보낸 글에서 퇴계는 이렇게 말한다.

살펴보건대 주희는 일찍이 말하기를 “이에 동정이 있기 때문에 기도 동정이 있는 것이다. 만약 이가 동정이 없으면 기가 어디로부터 동정이 있을 것인가? 대개 이가 동하면 기가 따라서 생겨나고, 기가 동하면 이가 따라서 나타난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돈이는 이르기를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가 동하면 기가 따라 생김을 말한 것이요, 주역에는 “복괘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기가 동하면 이가 나타나기 때문에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퇴계선생문집』, 25,34)

이 글에서 퇴계는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는다.’(太極動而生陽)고 하는 주돈이의 문장을 ‘이가 움직여 기가 생긴다.’(理動而氣生)라고 풀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반적으로 성리학자들이 ‘낳는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생’(生) 자를 퇴계는 자동사로 바꾸어 ‘생긴다’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전 호의 글에서 말했듯이, ‘낳는다’고 하면 낳는 자와 낳아진 자가 동일한 종류의 사물이 된다. 생이라는 글자를 낳는다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퇴계는 이와 기가 동일한 종류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이가 기와 같은 종류가 아님을 분명히 하여 기에 대한 이의 초월성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가 기를 낳는다고 해도 이가 기에 앞서서 서로 다른 사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에 대한 이의 힘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의 우선성만으로는 부족하며, 퇴계는 이가 기와 별개의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야 했다. 그래서 퇴계는 이와 기가 동일 종류의 것이 아님을 말해야 했고, 따라서 ‘이가 움직여 기를 낳는다.’(理動而生氣)는 성리학의 숙어를 바꾸어 ‘이가 움직여 기가 생긴다.’(理動而氣生)고 말한 것이다.
진리의 하나님을 절대 초월자로 보는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생성한 분이 하나님인데, ‘생’(生) 자를 타동사로 사용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낳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니 세상이 ‘생겨났다’는 말은 성립된다. 그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절대 초월자이기 때문이다. 퇴계 역시 이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와 기의 관계를 자동사 ‘생’ 자로 연결한 것이다.
이처럼 이의 우선성(priority)과 타자성(alterity)을 통해 퇴계는 이의 초월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의 초월성은 이의 우월성(primacy)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사느라고 타락하고 오염된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 무지하고 무능하며, 그와 대조적으로 변치 않는 진리인 이(理)는 인간의 속된 마음을 이기는 선한 힘을 지니고 있다.
진리의 초월성과 우월성에 대한 퇴계의 확신은 진리를 절대자처럼 말하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퇴계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본래 그 존엄성을 상대할 자가 없어서 사물을 명하지 사물에게서 명을 받지는 않는 것이니, 기가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理本其尊無對 命物而不命於物 非氣所當勝也, 『퇴계선생문집』, 13,17)

‘무대’(無對)란 상대할 자가 없다는 뜻이니, 상대하기를 끊었다는 뜻의 절대(絶對)와 같은 의미이다. 이처럼 기에 대한 이의 절대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 진리의 힘을 이길 수 없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을 이길 때 어긋남 없이 바르게 가는 자유의 길이 열린다고 보듯이, 퇴계는 진리 곧 이가 인간의 마음을 이기는 데에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자유로운 구원의 경지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도의 실현은 도심(道心)이 인심(人心)을 이기고, 하늘의 도가 인간을 이김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가 기를 이긴다는 말도 같은 의미이다. 그것은 사람 안에서 벌어지는 두 마음의 싸움에서 본연지성이 기질지성을 이기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퇴계는 기질지성 곧 악의 성향의 힘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태극 또는 이라고 하는 우주적 진리가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이기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이가 기를 이기는 것은 하늘의 도가 인간의 마음을 주재하는 형태로 표현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이에 동정이 있기 때문에 기도 동정이 있는 것이다. 만약 이가 동정이 없으면 기가 어디로부터 동정이 있을 것인가?”(理有動靜 故氣有動靜 若理無動靜 氣何自而有動靜乎)라는 구절은 이가 기의 운동을 주도한다는 뜻이다. ‘이가 동하면 기가 따라서 생겨난다.’(理動則氣隨而生)는 말은 우주발생론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하늘의 진리가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교화시킨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이(理)는 능동인(能動因, causa efficiens)이라고 할 수 있다. 능동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오는 개념이고, 아퀴나스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설명할 때 유용하게 활용하는 개념이다. 유학에서는 능동인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지만, 기를 낳고 기를 이기는 이는 서양철학과 신학의 능동인 개념과 일치한다.
능동인이란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적 힘을 가리킨다. 여기서 세상은 우주의 자연현상을 말하는 것이지만, 인간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능동인은 자연의 운행을 섭리하는 힘이자 동시에 인간 세상이 바르게 돌아가도록 사람을 움직이는 도덕적 힘이다.
인문주의자들은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사람의 마음의 힘이요, 마음속의 선한 본성의 힘이기도 하며, 또한 양심의 명령 곧 의리(義理)에 맞는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의 힘이기도 하다. 마음속의 도덕명령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인문주의인 유학의 기본 명제이다. “해야 한다면 할 수 있다.”라는 칸트의 유명한 명제는 동서양 인문주의자들의 공통된 신념을 표현한다.
그런데 형이상학을 정립한 중세의 성리학자들은 진리의 힘을 사람의 마음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려고 했다. 바깥이란 이의 초월성을 가리키는데, 인간의 일상적 감정 속에서 죄의 힘을 본 퇴계는 두드러지게 이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퇴계에게서 세상을 움직이는 하늘의 진리 곧 이의 힘은 사람 바깥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에 동정이 있기 때문에 기도 동정이 있는 것이다.”(理有動靜 故氣有動靜)라고 할 때에, 이의 동정은 사람의 마음을 주재하는 진리의 운동력을 가리킨다. 기의 동정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마음의 움직임 곧 감정과 의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에 동정이 있기 때문에 기도 동정이 있는 것이다.”라는 말은 사람의 감정과 의지가 능동인인 진리의 운동력에 의해 발생한다는 뜻이다.
이의 주재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면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 곧 완전한 자유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이처럼 이의 주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진리가 인간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를 가리켜 성리학자들은 미발(未發)이라고 부르는데, 미발이란 인간 마음의 움직임이 없어 감정과 의지가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감정과 의지가 전혀 없기보다는, 진리에 대한 경외심이라는 이성 감정 속에서 인간의 의지가 진리의 인도를 따라 움직이는 수동성을 가리킨다.
퇴계는 선을 낳는 사단을 가리켜 ‘이가 발하고 기가 이를 따른다.’는 뜻의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의도와 의지를 뒤로 물리고 진리를 앞세워 진리를 따라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능동인인 진리 앞에서 수동적으로 됨으로써 인간은 가장 조화롭고 능동적인 생명의 힘을 보인다.
이런 상태를 진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뜻에서 중(中)이라고 부른다. 중은 진리인 이가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는 상태이니, 달리 말하면 사람이 진리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 ‘주의 종’이라는 말이나, 사도 바울이 ‘죄의 종’과 대비해서 말하는 ‘의의 종’이라는 말에서 ‘종’이란 모두 구원의 진리에 사로잡힌 상태 곧 하나님의 말씀의 운동력 앞에서 수동적이 되는 것을 가리키니, 유학에서 말하는 중의 경지와 유사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의 주재는 불완전하다. 사람의 마음이 진리의 힘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혼란스럽고 평화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힘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자연이 언제나 조화를 이루며 돌아가듯이, 이(理)는 세상의 섭리자로서 언제나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고 있다. 다만 이의 힘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어 악이 발생한다. 유학자들은 이의 온전한 주재를 막는 인간의 과오를 가리켜 과불급(過不及), 곧 ‘지나치거나 모자람’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악은 덕의 지나침이나 모자람이니, 악은 선의 기생물이다. 악이 없는 선이라는 개념은 성립되지만, 선이 없는 악은 개념 모순이다.
악을 선의 종속 개념으로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주의 존재와 삶을 좋게 보고 우주의 바탕에 선한 힘이 있다고 보는 유학의 긍정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래서 주희는 말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낳으니, 모든 사물이 참되다.”(天之生物也, 一物與一无妄)라고 했다. 주희의 말은 현실 세계를 공허하게 보는 불교를 반박하는 발언이지만, 우주의 선한 기운이 삶을 받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세계관과도 통한다.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고 주재한다는 믿음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라고 말했고, 아퀴나스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참되다.”라고 말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선의 결핍(privatio bonum)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악을 선의 종속 개념으로 보는 점에서 유학의 선악관과 통한다.
정리해보자. 퇴계는 이의 초월성을 강조했다. 이가 기에 앞선다거나, 이가 기와 다르다거나, 이가 기의 바깥이라는 표현은 모두 이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의 초월성은 이의 우월성을 가리키니, 곧 진리가 인간을 이기고 주재하여 선을 이루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를 강력한 주재력을 가진 능동인으로 봄으로써 퇴계는 궁극적으로 선이 악을 이기는 낙관적 세계관을 제시할 수 있었다. 체용일원론도 이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마음 씀씀이가 진리의 자기발현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데 체용일원론의 목적이 있다.

체용일원론과 체(體) 안의 용(用)

성리학의 체용론에서 체는 이(理)이고, 용은 기(氣)를 가리킨다. 체용일원(體用一源)이란 기가 이와 별개가 아니며, 기의 활동과 운동은 이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능동인으로서 기의 활동의 본체이고, 기는 이의 작용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퇴계는 이가 기와 별개임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기가 이와 별개가 아님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의 초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의 주재력을 높여 기를 철저하게 이의 자기발현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은 결국 이와 기 사이의 체용일원을 뚜렷하게 확립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퇴계는 이 안에 다시 용을 둔다. 이것은 이의 초월성을 강조한 퇴계가 이의 내재 작용을 말하기 위해 중간 단계를 설정할 필요가 생겨서 일어난 현상이다. 중간 단계는 이의 내부에 기의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안에 용을 두고 기의 요소를 둔 것은 이를 살아 있는 실체처럼 보이게 해서 인간의 마음과 세상을 주재하는 이의 힘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 안의 용을 말하기 위해 퇴계는 먼저 이의 움직임을 말한다. 원래 움직임은 기의 속성이다. 이는 정과 의지가 없고(無情意), 만들어 조작하는 것이 없어서(無造作) 무위(無爲)이니, 움직임이 없다. 이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만물 곧 기를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퇴계는 이에도 움직임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을 나타내는 말이 앞에서 본 대로 이동이기생(理動而氣生)이다. 물론 이의 무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리학자가 적극적으로 이동(理動)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퇴계는 명확하게 이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퇴계는 이의 움직임 곧 이동을 가리켜 이의 용이라고 한다. 이공호에게 보낸 글에서 퇴계는 이렇게 말한다. “대체로 정의(情意)가 없다고 운운한 것은 본연의 체를 말한 것이고, 발현할 수 있고 낳을 수 있는 것은 지묘한 용을 말한 것이지요. …이 자체도 용이 있습니다.”(『退溪先生文集』, 39,28) 이에게 정과 의지가 없어서 움직임이 없다고 말한 것은 이의 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만, 이에도 움직임이 있어서 기의 활동을 가능하게 만드니, 기의 활동의 원천이 되는 이의 움직임은 이 자체의 용이다. 퇴계는 분명히 말한다. “이 자체도 용이 있습니다.”(理自有用) 원래 이의 작용은 기를 가리키지만, 퇴계는 체인 이가 기의 운동으로 발현하여 작용하기 이전에 이 자체 내의 작용이 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퇴계는 말한다. “이(理)로부터 말하자면, 이는 체인데, 용이 그 가운데 있다. 그래서 일원이라고 한다.”(自理而言 則卽體而用在其中 所謂一源也, 『퇴계선생문집』, 25,5) 흔히 체용일원이라면 이와 기의 관계를 가리키지만, 퇴계는 이 문장에서 이 안에 발생하는 체용일원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퇴계는 이 내부의 체용일원을 거쳐 이와 기의 체용일원이 성립되는 구도를 만들었다. 이것은 뒤에서 보듯이 기독교 신학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 내부의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가 자기 안에서 발현한 용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퇴계는 두 가지로 설명한다. 우주론적인 설명과 도덕적인 설명이다.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에 이 안에 이미 만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은 우주론적인 설명이다. 이가 만 가지 상황에서 도리에 맞는 행위를 이끌어내기 이전에 이 안에 이미 만사의 이치가 들어 있다는 말은 도덕론적인 설명이다. 퇴계는 이렇게 말한다.

아! 충막무짐(沖漠無朕)이란 것이 건곤(乾坤)에 있으면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체(體)가 되어 만상(萬象)이 이미 갖추어져 있고,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정(靜)한 체(體)가 되어 만사의 용(用)이 반드시 구비되어 있으며, 사물에 있어서는 또 발현되고 유행하는 용(用)이 되어 때와 장소에 따라 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퇴계선생문집』, 41,18)

위의 글을 세 문장으로 나누어볼 때 마지막 문장의 ‘사물에서 발현되고 유행하는 용’은 이가 기에서 작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에 앞의 두 문장은 이 안의 용을 말한다.
첫 문장의 ‘충막무짐’이란 텅 비고 움직임이 없어 어떤 일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건곤에 있으면’은 ‘우주론으로 보면’이란 뜻이다. 우주론으로 말하면, 만물의 생성은 텅 빈 고요함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충막무짐은 만물의 본체이다. 그런데 텅 빈 고요함 안에 ‘만상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萬象已具) 만물이 생기기 이전에 만물의 갖가지 모양이 태극과 이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의 내부 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이 안의 용이다. 태극과 이의 체는 충막무짐이어서 어떤 움직임과 작용도 없지만, 이가 자기 안에 만물의 상을 갖추어 지니는 작용이 있다. 그것이 퇴계가 말하는 ‘이 자체의 용’(理自有用) 또는 ‘체 안의 용’(用在體中)이다.
둘째 문장의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이란 말은 ‘도덕론으로 보면’이란 뜻이다. 사실 체용일원론의 초점은 도덕론에 있으며, 우주론은 도덕론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 마음속의 충막무짐을 가리켜 퇴계는 ‘지극하게 비었고 지극하게 고요하다.’는 뜻의 지허지정(至虛至靜)이란 말로 바꾸어 표현한다. 지허지정은 체로서의 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만사의 용이 반드시 구비되어 있음’(萬事用必備)은 체인 이 안의 용을 가리킨다. 만사의 용이란 다양한 사태에 반응하는 다양한 행동을 가리킨다. 도와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다양한 도덕적 상황에 맞도록 다양한 행동으로 발휘된다. 이처럼 이가 만 가지 사태에 작용하여 의리에 맞는 갖가지 행동으로 발현되기 전에, 하나의 도 곧 이 안에 이미 만 가지 이치가 들어 있다. 만 가지 이치는 ‘하나’인 이와 다르지만 하나의 이에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내부의 체용일원이다.
이처럼 퇴계는 이 안에서의 체와 용 사이에 성립되는 체용일원 곧 이 내부의 체용일원을 말함으로써, 이를 살아 있는 실체처럼 만드는 효과를 보게 된다. 하나인 태극과 이가 자신 안에 ‘만사의 용을 갖추는 것’, 곧 갖가지 상황에 맞는 만 가지 행동 지침을 갖추는 것은 세상에서 자신을 구현하기 위한 진리의 내적 활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퇴계가 이를 활물(活物)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는데, 송시열의 비판은 이가 기를 움직이는 것, 다시 말해서 이가 직접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보는 퇴계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퇴계가 이를 활물 곧 살아 있는 실체처럼 만드는 것은 이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이전에 이가 자기 내부에서 자기에게 작용하는 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 내부의 체용일원을 말함으로써 그는 우주 자연의 덕이 스스로 자기 발현을 통해 인간의 도덕 행위를 이끌어내는 듯한 구도를 만들 수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안의 용은 초월자가 내재하기 위해 거치는 중간 단계를 설정하여 이의 활동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초월자는 결국 내재(內在)하여 세상에서 사람을 움직여 일하는데, 퇴계처럼 이의 초월성을 강조하면 이가 세상에 내려와 활동하기 위한 매개체 곧 중간 단계가 필요하다. 따라서 ‘만상’이나 ‘만사의 용’은 초월적인 하나의 보편적 진리가 구체적 삶의 상황에 접촉하여 구현되기 위해 필요한 중간 단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가 여럿으로 구체화되기 전에 하나 안에 여럿을 품는 모양새는 세상을 주재하는 이의 활동을 매우 능동적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서 퇴계가 이 내부의 체용일원을 말한 것은 성리학의 일반적 체용일원 곧 이와 기 사이의 체용일원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퇴계의 사유 방식은 기독교 신학의 삼위일체론과 유사성을 보이는 동시에 차이점을 보인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유학이 체용일원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주재하는 진리의 힘에 대한 믿음을 확보하려고 했듯이,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통해 세상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퇴계가 말하는 이 안의 용과 삼위일체 하나님 안의 성자의 차이는 구원에 대한 이해와 진리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질적인 차이를 만든다. 초대교회에서 벌어진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삼위일체의 의미를 살펴보겠다.
먼저 퇴계의 체용일원론과 삼위일체론의 유사점을 살펴보자.
유학의 체용일원이 하늘의 이와 세상의 기 사이에 적용되는 말이듯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세상에서 일하는 그리스도 및 그의 영인 성령의 활동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는 교리이다.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구원의 진리인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일하고,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이다. 이를 가리켜 경세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라고 부른다.
그런데 세상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활동을 하나님 자신의 활동으로 보기 위해서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보게 된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님의 계시이면서 하나님 자신이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는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과 다르지만, 그러나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distinctio inseparabilis) 그리하여 기독교는 한 분 하나님 안의 서로 다른 신격(神格)을 말하게 된다. 그것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이루는 내부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이다.
퇴계가 이 안의 체용일원을 말한 것이 이와 기 사이의 체용일원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듯이 기독교의 내부적 삼위일체는 경세적 삼위일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일하며 인간 세상의 죄의 힘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내부적 삼위일체로 표현되었다. 이 안의 용이 절대 초월의 이가 기에 작용하기 위한 중간 단계인 것처럼 성자는 절대 초월의 하나님이 세상에 깊이 관여하기 위해 거치는 중간자가 된다.
세상의 죄를 크게 인식한 기독교에서 진리의 하나님은 세상 바깥의 매우 초월적 존재가 되는데, 중간자인 성자의 존재로 인해 절대 초월자인 하나님은 영지주의나 마니교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피하고 세상에 거하며 세상에 깊이 관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성자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 초월성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세상과 접촉하고 세상에서 일하는 하나님으로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부는 초월자 하나님이며, 성자와 성령 역시 하나님인데 성부와 관계하며 세상에서 일하는 하나님이다.
그리하여 창조 사건의 경우에도 성부가 성자를 통해 세상을 만들었다고 표현된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표현을 플라톤의 우주발생론인 형성설에서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최고의 신이자 진리인 선의 이데아가 데미우르고스를 통해 세상을 탄생시켰다고 말한다. 그런데 데미우르고스는 가장 낮은 신이다. 이처럼 신격에 차등을 두어 직접 세상을 탄생시키는 신을 가장 낮은 신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고고한 초월적 신이 세상과의 직접 접촉을 꺼린다는 뜻이다. 결국 플라톤의 진리는 세상을 위에서 보편적 도덕명령으로 통치하는 일방성은 지니되, 죄로 오염된 세상과 교통하며 세상에 깊이 관여하는 인격적 관계는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는 인문주의의 진리가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반면에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과 접촉하기 위한 매개체 역할을 하는 성자가 절대 초월자인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임을 고백한다. 그런 믿음을 표현하는 교리가 내부적 삼위일체론이다. 세상과 접촉하는 성자는 낮은 신이 아니고 절대 초월자 곧 성부와 같은 하나님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세 신격(神格)의 하나 됨이라는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깊은 내재를 모두 말하고자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신격이 중간자인 성자인 것이다.
성자를 하나님의 통치를 위한 중간자로 보는 시각은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잘 드러난다. 신학을 철학과 가깝게 만든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은 성자 하나님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오는 형상인(形相因, causa formalis)으로 이해했다.
형상(形相, forma)이란 사물의 원형을 말하며, 원형은 사물의 참된 됨됨이를 가리킨다. 중세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여 만물이 생겨났다고 보았으므로 형상이 만물 생성의 기원이요 원인이 된다는 의미에서 ‘형상인’이라고 한다. 또한 형상은 참인간의 원형이요 이념으로서 인간의 마음을 규정하고 이끌어 선한 변화의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도 형상인이라고 불린다.
아퀴나스는 하나님 안에서 만물의 형상인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생각에 형상이 들어 있고, 하나님의 생각이 곧 만물의 형상인이다. 구약 신학에서는 태초에 하나님과 같이 있었다고 기록된 지혜를 성자로 보는데, 태초의 지혜는 하나님의 생각과 같다고 보면 된다. 성부가 성자를 통해서 세상을 지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과 지혜로 세상을 지었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자신과 다르지만, 신학에서 하나님의 활동은 곧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과 같다.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생각은 형상인으로서 만물의 다양한 종의 원형을 품고 있다. 성자는 하나의 보편진리가 세상에서 여럿으로 구현되기 전에 품고 있는 여럿과 같으니, 퇴계가 말한 이 안의 용 곧 ‘만상’과 ‘만사’와도 일치한다. 이처럼 내부적 삼위일체론의 성자와 내부적 체용일원론의 용의 지위가 유사한 것은 기독교와 퇴계의 사상이 모두 초월적 진리의 힘이 강력하게 세상을 지배하고 주재하는 구도를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절대 초월자의 내재를 위해서는 중간의 매개자가 필요하고, 그것이 하나님 안의 성자와 체 안의 용으로 표현된 것이다.
아퀴나스 신학과 퇴계 사상의 유사성은, 기독교의 신앙이 유학자들의 진리에 대한 믿음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신앙에는 보편적 진리를 받들고 도를 두려워하며 섬기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유학에서 말하는 미발(未發)과 중(中)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자유와 충만함의 큰 부분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체용일원론과 삼위일체론의 차이를 보자. 성자는 이 안의 용처럼 하나님의 전능한 힘이 세상에 전달되는 매개자요 중간자일 뿐 아니라, 이 안의 용과 달리 세상의 죄와 고난이 하나님에게 전가되는 중보자의 역할을 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성자로부터 인간 세상의 죄와 고난을 품고 있다. 세상이 하나님을 품고 있으면 범신론이 되지만, 세상을 품고 있는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절대 초월자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고난을 자기 고난으로 삼는 하나님이다. 절대 초월자 곧 수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은 성부요, 세상의 죄와 고난을 짊어진 하나님은 성자이다. 기에 작용하는 이의 능동성을 말하기 위해 중간 단계로 삼은 것이 이 안의 용이라면, 하나님 안의 성자는 세상의 고난이 성부에게까지 미치는 과정의 중보자라는 점이 특이하다. 말하자면 기가 이에 작용한 것이다.
삼위일체론에서 그리스도 곧 성자는 절대(絶對)의 초월자가 세상을 상대(相對)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된 하나님으로 믿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곧 성자는 인간을 마주하며 맞이한다. 그는 인간을 상대하기 때문에 인간의 영향을 입는다. 하나님의 수난도 거기서 생긴다.
중세 신학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사용하는 순수 현실태(actus purus)라는 말의 의미 중 하나는 하나님이 언제나 능동적(active)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능동인으로 본 중세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인성(人性)의 수난으로 이해했지만, 신성(神性) 곧 하나님의 수난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점에서 가톨릭 신학 곧 아퀴나스 신학은 성부 중심의 신학이다. 성부는 수난받지 않는 절대 초월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 중심의 개신교 신학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단순히 인성이 아닌 신성의 수난을 본다. 십자가 위의 하나님의 수난(Passion)은 하나님의 수동성(passive)에서 온다. 능동인으로서 오직 세상을 주재하고 영향을 주어야 할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하여 인간의 영향을 입는다. 영향을 입는다는 것은 인간의 악 곧 죄와 고통이 하나님에게 전가됨을 의미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수난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넘어 기독교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되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수난에서 하나님의 가장 능동적인 사랑의 행위를 보고, 십자가를 하나님의 승리로 본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는 하나님의 수난과 하나님의 전능이 양립되는 길을 택한 종교이다. 내부적 삼위일체가 바로 그런 믿음을 표현하고 있으니, 성자와 성령과 성부의 통일성을 통해 수난받는 하나님과 전능한 하나님이 양립한다. 하나님의 전능함은 자신이 만든 세상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수난당하면서도 결국은 세상을 이기고 세상과 함께 자신의 뜻을 이루는 힘을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성자는 성부에게 타자이다.”(Filius est alius a Pater)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낯선 자기를 겪고 관계한다. 하나님 내부의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절대와 상대, 보편과 구체, 능동성과 수동성, 수난받을 수 없는 하나님과 수난받는 하나님의 관계이다. 삼위일체로 표현되는 구원의 진리는 상대를 품은 절대요, 구체성을 품은 보편성이고, 수동성을 거친 능동성이요, 수난을 품은 전능이다. 동일성으로 정체되어 있지 않고 타자성을 겪으면서 하나의 자기 자신으로 통합되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인격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내부의 세 신격을 세 인격(persona)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체(a person)는 아니지만 인격적(personal)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인간을 상대하여 수난받지만, 인격적이기 때문에 세상을 주재하는 능동인으로서의 힘도 퇴계의 이(理)보다 더욱 크다. 퇴계가 말하는 이 안의 체용일원이 이와 기 사이의 체용일원을 강화하지만, 기독교의 내부적 삼위일체가 경세적 삼위일체를 강화하는 힘은 더욱 크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만드는 내부적 삼위일체는 선의 승리를 이끄는 진리의 힘에 대한 믿음을 퇴계의 체용일원보다 더 크게 만든다.
이 점에서도 인문주의와 기독교 신앙은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데, 정과 의지가 없는 퇴계의 이와 달리 인격적인 하나님은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구체적 상황에서 의지적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 세상의 죄의 힘을 이기는 사랑의 진리의 힘이 이 안의 체용일원보다 내부적 삼위일체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수난 때문에 전능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지만 장차 역사의 끝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삼위일체론은 종말론으로 이어지는데, 하나님의 뜻이 마침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죽이고 자신과 세상의 죄의 힘을 이기는 길로 들어선다. 수난받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인간은 절대 수동성을 통해 가장 능동적인 주체가 되고 구원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절대 수동성은 하나님의 수동성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퇴계학이 열어놓은 진리 앞에서의 수동성과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수난을 통해 인간에 대한 무한책임을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 안에서 인간은 치유를 받으며 건강한 책임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수난 곧 하나님의 수동성은 하나님의 사랑의 주권 안에서 절대 수동성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인간의 자유와 구원의 길을 여는 문이다.
이제 정리해보자. 퇴계는 이 내부의 체용일원론을 통해 이의 초월성을 한껏 강화하면서 동시에 이를 살아 있는 실체처럼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마음을 주재하고 주도하는 진리의 능동적 활동력을 드높이면서 유학의 종교적 영성을 고양시켰다. 이를 대할 때 살아 있는 신을 대하듯 함으로써 퇴계는 철저한 자기 비움의 수양 생활을 지속한 것이다. 삼위일체론과 체용일원론의 유사성은 기독교 신앙이 도덕적인 보편 가치를 실현하는 진리의 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한편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세상에 대한 신의 절대 주권을 확립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고통을 자신 안에 품어 자신의 고난으로 삼는 하나님을 말한다. 내부적 삼위일체의 성자는 신의 절대 주권이 세상에 행사되기 위한 중간자일 뿐 아니라, 세상의 고난이 성부에 전달되는 중보자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성자는 퇴계가 말하는 이 안의 용과 다르다. 이 안의 용은 초월적 선인 이의 힘이 세상에서 발휘되기 이전에 거치는 중간자이지만, 세상 곧 기가 이에 전가되는 중보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진리관과 구원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보편적 도덕명령이기 이전에 세상의 고통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사랑의 힘이다. 구원은 악을 이기고 도덕적 자기 완성을 이루기 이전에 먼저 삶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유교의 영성과 연속적 불연속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양명수|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퇴계사상의 신학적 이해』, 『성명에서 생명으로: 서구의 기독교적 인문주의와 동아시아의 자연주의적 인문주의』,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4년 1월호(통권 7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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