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편에 대한 평행법적 의미 해석-<토라트 아도나이>가 이끄는 경건의 길”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21
[기(起)] 시편 119편이 갖는 장엄함에 대한 고대, 중세 해석자들의 입장
시편 119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깊은 존재론적 차원의 관계가 구구절절 드러나 있는 기도시이다. 176절로 구성된 이 웅장한 기도문에는 두 가지 어조가 교차되는데, 표면적으로 상반된 두 어조는 모두 결핍(defectus)된 인간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는 깊은 관계성의 운동을 반영한다.
우리말 성서에서는 번역의 한계로 인해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어로 쓰인 시편 119편(22연×8행=총 176절)은 이합체 시(알파벳 시)이다. 즉 이 시는, 히브리어 첫 알파벳인 ‘알렙’(א)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알파벳 ‘타브’(ת)에 이르기까지 22개의 알파벳이 순서대로 각 연의 첫 글자를 이루고, 연을 구성하는 행 또한 그 알파벳이 8번 일관되게 첫 글자로 반복되며 구조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웅장한 시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시편집의 나머지 모든 시편을 주해할 수 있었지만, 시편 119편은 잘 알려진 대로 그 방대한 길이 때문만이 아니라 소수를 제외하고는 헤아릴 수 없는 그 깊이로 인해서 그 주해를 회피해 왔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주해를 요청해 왔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 시편을 반추하면 할수록 그것은 늘 나의 능력의 최대범위를 넘어서곤 했으며, 일부분이 조금 더 열리는 듯 보이면 그것은 더 깊이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1 그리고 칼뱅은 시편 119편의 말씀들이 엄격한 순서 없이 마치 들에서 크게 자란 잡초처럼 매우 복잡한 마음에서 자유롭게 솟아나고 있으며, 이 뛰어난 저자에 대해서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길은 이 시에 나타난 아름다운 다양성과 사상의 여러 갈래 그리고 다채로운 지혜를 올바로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였다.2
[승(承)] 상반된 두 어조의 기저에 흐르는 공통의 맥락은 무엇인가
· 길이 온전하여 복이 있는 이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로 행하는 이들입니다.(1절, 이하 필자 사역)
· 제 생명이 당신의 구원을 향하여 지쳤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제가 기다렸습니다.(81절)
위의 두 구절에는 공통된 무언가가 있을까? 먼저 첫 번째 진술의 어조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길을 행하고자 하는 확정된 마음을 진리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반면 두 번째 진술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인의 내밀한 심경을 주님 앞에 말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서로 다른 화자처럼 보이는 두 표현은 시편 119편 총 176절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전반부(1-88절) 첫 연의 첫 행과 마지막 연(11연)의 첫 행에 해당하며, 전반부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어조 변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혹여 말씀을 향한 시인의 믿음이 쇠퇴했음을 드러내는 것인가?
· 영원토록 주님 당신의 말씀은 하늘 가운데 서 있습니다. 당신의 신실하심이 대대에 있으며 당신께서 땅을 세우셨기에 그것이 굳게 섰습니다.(89-90절)
· 잃어버린 양과 같이 제가 헤매었으니 당신의 종을 찾아내소서. 당신의 명령들을 진정 제가 잊지 않았습니다.(176절)
시편 119편의 후반부를 시작하는 연(12연)의 첫 구절(89-90절)은 전반부 시작 첫 구절(1절)과 마찬가지로 힘 있는 어조로 진리를 선언하며 말씀의 전능성에 대한 계시적 이해를 드러내고 있다. 반면 후반부 마지막 연(22연)의 마지막 행(176절)은 전반부 마지막 연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시인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을 길 잃은 양에 빗대는 이 마지막 문장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인은 결국 믿음에서 떠난 것인가? 혹은 자신의 쇠약함 때문에 말씀을 더 깊이 의존하는 전적인 신뢰 상태로 접어든 것인가?
시편 119편 전체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길을 가는 이들의 복에 대하여 힘 있게 선언하며 시작하여 자신의 길 잃음과 방황을 드러내어 위탁하는 기도로 마친다. 총 176절에 달하는 기도의 흐름 속에서 반복해서 교차를 이루는 상이한 두 어조를 단절되지 않고 일맥상통하는 그 무엇으로 읽을 수 있을까? 이 시편 기도문의 기저에 흐르는 일치된 거대한 흐름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전(轉) 1] 악하고 절망적인 현실의 배경
표면적으로 상이한 두 어조의 교차에도 불구하고, 시편 119편 전체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통일성의 요소로서 이 시의 배경을 들 수 있다. 시인은 악하고 절망적인 현실에 처해 있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낮아짐’ 가운데 있다.
· 제가 낮아지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으나 이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킵니다.(67절)
· 제가 낮아지는 것이 제게 선하오니 이로 인해 당신의 율례들을 제가 배울 것입니다.(71절)
위의 두 구절에서 ‘낮아짐’을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아나’(ענה) 개역개정판에서 ‘고난’으로 번역되었다. 최초의 한글 구약성서인 『시편촬요』는 “내가 고난을 밧기 젼”과 “고난을 밧은 거시”로 표현하였고, 가장 최근에 나온 새한글성경은 “내가 괴로움을 겪기 전”과 “내가 괴로움을 겪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난과 괴로움은 시인이 진정으로 말씀을 지키고 배우게 되는 발판이자 배경으로 작동한다. 인간은 대부분 고난과 괴로움을 겪으며 비로소 가난한 마음, 애통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찾고 그 말씀을 붙들게 된다.
“제 생명이 흙바닥에 붙어있으니”(25절), “슬픔으로 내 영혼이 녹습니다”(28절), “저의 수치를 없애소서”(39절), “오만한 자들이 심하게 저를 조소하였어도”(51절), “악인들의 옭아매는 것들에 제가 둘러싸여도”(61절), “오만한 자들이 저를 거짓으로 쳤습니다”(69절), “오만한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할지니 거짓으로 저를 헤매게 하였습니다”(78절), “저들이 거짓으로 저를 뒤엎었으니”(86절), “악인들은 제가 멸망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95절), “악인들이 제게 그물 덫을 쳤으나”(110절), “저를 착취하는 자들에게 저를 절대 그냥 놓아두지 마십시오”(121절), “사람의 착취로부터 저를 속량하소서”(134절), “저는 작으며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141절), “악한 것을 좇는 자들이 가까이 왔습니다”(150절), “저를 추격하는 자들과 제 대적들이 많지만”(157절), “다스리는 자들이 이유없이 저를 압박하나”(161절) 등 총 176개의 구절 중 대략 3분의 1에 해당하는 57개 절에 이러한 고난과 괴로움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시인이 드리는 기도의 전체적인 배경이 된다.
이러한 극심한 고난과 괴로움, 곧 낮아짐은 시인으로 하여금 인간 본연의 연약함, ‘결핍’(defectus)을 자각하도록 안내한다. 그리고 이 결핍은 시인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동인이 된다.
[전(轉) 2] 결핍된 인간
고난과 괴로움의 현실에 놓인 시인은 기도 중에 인간의 본질적 연약함, 즉 결핍을 드러낸다. ‘결핍’은 쇠퇴, 장애, 약화, 결함 등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며, 해와 달이 일시적으로 소멸하는 일식과 월식을 지칭하기도 한다.3 시편 119편의 기도에서는 시인이 고난과 괴로움을 겪으며 비로소 인간 본연의 결핍을 자각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강화’나 ‘발전’은 긍정적인 의미로, ‘결핍’은 부정적이며 지양되는 가치로 여겨지지만, 시편에서의 결핍은 단순히 부정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결핍이 시인으로 하여금 끝없는 갈망으로 주님의 말씀을 바라고 찾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편 119편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결핍은 말씀을 강렬하게 갈망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과 결핍의 주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주해에서 주목할 만하게 다뤄진다. 인간의 결핍이 그 자체로만 머물러 있으면 부정적일 수밖에 없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과 말씀을 갈망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이 결핍과 연약함은 더 이상 부정적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과 말씀을 향한 이러한 부류의 결핍은 마땅히 갈망되어야 하는, 칭찬받을 만한 것이다.4 이 인간의 근본적 결핍은 다만 말씀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아래 구절들은 결핍의 이러한 특성을 명백히 드러낸다.
· 제 생명이 당신의 구원을 향하여 지쳤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제가 기다렸습니다.(81절)
· 당신의 말씀을 향하기를 제 두 눈이 기력을 다하였고 “언제 당신께서 저를 안위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82절)
전반부(1-11연, 1-88절)를 마무리하는 지점에서 이 두 구절은 히브리어 동사 ‘칼라’(כלה)를 사용하여 시인의 기력이 다하여 지쳤고 소진되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결핍은 주님을 향한 절대적 갈망을 드러낸다. 자신의 연약한 한계에 대해 깊이 절망하는 인간으로서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 숨 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단순히 영혼의 허약함에서 나오는 결핍이 아니며 말씀으로서의 약속에 대한 힘 있는 갈망으로서 칭찬받을 만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결핍이다.”5 낮아짐 속에 비로소 자각되는 이러한 인간 본연의 결핍은 말씀을 끝없이 갈망하게 한다. 이 결핍은 119편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붙들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전(轉) 3]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그 앞에 다시 세워진 마음
프리드만(D. N. Freedman), 쨍어(E. Zenger)와 같은 학자들은 이 시편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11연(81-88절)과 12연(89-96절)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에 주목하였다. 바로 위에서 살펴보았듯, 11연에서는 분명 지치고 소진된 시인의 결핍 상태가 정점으로 표현되었는데, 바로 뒤 12연에서는 무게중심이 급격하게 전환된다.
· 영원토록 주님, 당신의 말씀은 하늘 가운데 설 것입니다.(89절)
· 당신의 진실하심이 대대에 있으며 당신께서 땅을 세우셨기에 그것이 굳게 섰습니다.(90절)
· 당신의 규례들을 향하여 오늘도 그것들이 서 있으니 참으로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종들입니다.(91절)
후반부(12-22연, 89-176절)를 여는 위의 세 구절에서 시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계시적으로 바라보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서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89절에서는 נצב(나차브), 90절과 91절에서는 עמד(아마드)]가 반복되는데, 온 피조세계를 서게 하시며 하늘에 서 계신 전능하신 말씀에 의하여 시인은 굳건히 서게 된다. 11연의 극심한 절망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말씀에 대한 소망의 불씨가 12연에서 거대한 반전을 이룬다. 그러면서 11-12연은 119편의 중심부로서 온 피조세계를 유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굳건하게 다시 세워진 시인의 내면과 삶을 증거한다.
이 89절에서 91절은 전반부(1-11연, 1-88절)를 시작하는 첫 세 구절인 1-3절과 더불어서 진리 선언의 어조로 119편 전체의 이정표 노릇을 한다. 후반부 첫 절인 89절에서 ‘영원토록 하늘 가운데 서실 말씀’은 전반부 첫 절(1절)의 ‘토라트 아도나이’(תורת יהוה)와 연결된다. ‘주님의 가르침(instruction)’을 뜻하는 이 표현은 시편 내에서 1, 19, 119편에서만 나타나는 중요한 표현이다. 먼저 1편에서 나타나는 ‘토라트 아도나이’는 119편 1-3절과 개념적으로 관련이 깊다. 1편에서 ‘주님의 가르침’은 악인들의 조언,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와 대비되는, 의인의 길과 관련되는 개념이다. 기록된 모세오경을 넘어서 의인의 복된 생활방식과 삶의 원리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담지한다. 한편 19편에서 나타나는 ‘토라트 아도나이’는 119편 89-91절과 관련이 깊다. 19편에서 ‘토라트 아도나이’는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저 끝으로 달음박질하는 왕적인 전사로서의 태양 이미지를 갖는다. 태양의 열기가 만물에 미치는 것과 같이 ‘주님의 가르침’은 온 피조세계로 뻗어나가 만물을 다스리고 생명을 소생케 한다. 119편의 ‘토라트 아도나이’는 이처럼 죄인과 대비되는 의인의 길을 가르치는 지혜적 차원(1편)과 하늘에서부터 온 피조세계에 이르는 계시적 차원(19편)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로 이것이 시인의 결핍을 극적으로 채운다.
시의 무게중심은 결핍에서 말씀으로 옮겨졌다. 물론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1연에서 22연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여전히 고난받고 있다. 그런데 지금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 119편의 가장 중심부에서 행해지는 이러한 반전은 결핍된 인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순간 이루어진다. 11연과 12연은 일종의 액자구조를 형성하면서 1연부터 22연 전체 맥락의 중심부로서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의 중심성은 176개의 각 절에서 평행법(parallelism)적 진행을 이루면서 계속해서 표현된다.
[전(轉) 4] ‘말씀’을 중심으로 누적되는 히브리 시의 평행법(parallelism)적 진행
중심부(11-12연, 81-96절)의 액자구조 내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인간이 결핍 상태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향하고 이를 통해 다시금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운동은 시편 119편의 기도 전체에 걸쳐 모든 절마다 표현된다. 때로는 정한 마음을 드리는 고양된 어조로, 때로는 결핍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낮아짐의 어조로 말이다. 이에 대해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시는 어디에서 시작하든 처음 시작으로 보이고 어디에서 끝을 맺든 그 의미는 완전하게 보이는데, 그럼에도 이 시는 별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많은 부분들이 전체를 이루어 그 전체가 필히 완전한 것으로 보인다.”6
이러한 특징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말씀’을 중심으로 누적되는 히브리 시의 평행법(parallelism)적 진행이라 할 수 있다. 1절부터 마지막 176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절들은 각각 ‘말씀’에 해당하는 어휘를 갖는다. 처음 1절에서 말씀에 해당하는 용어는 주님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토라트 아도나이’이다. 이 용어는 주님께 기원을 두는 강조의 표현이며, 기록된 모세오경으로서의 토라 그 이상을 의미하면서 2절부터 176절의 ‘말씀’에 해당되는 어휘들을 자신에게로 합류시킨다.
평행법은 히브리 시문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 시문의 형식적, 의미적 질서를 부여한다. 평행법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한 절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과 상응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시편 119편에도 이러한 기본적인 형태의 상응 관계가 상당히 자주 나타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시편 119편에서는 절과 절 사이에서도 평행법이 비교적 자유로운 범주 내에서 나타난다. 알파벳 순의 시문으로서 이 시편은 각 절이 알파벳 순서로 시작하는 것과 더불어 거의 모든 절이 말씀에 해당하는 어휘를 하나씩 가지면서 절과 절 사이에서 상응하는 등가적 요소를 갖는다.
쿠겔(James L. Kugel)은 이러한 평행법을 통하여 진술이 갖게 되는 힘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평행법에서 A와 B의 두 부분(parallelistic line)의 상응 관계에 대하여 “A is so, and what’s more, B”라는 평행법 해석의 틀을 제시하였다.7 이는 A와 B의 상응 관계가 단순한 반복을 넘어, 진술을 강화하거나 의미를 확장한다는 의미이다. 구조적으로나 의미적으로 나란히 놓인 두 진술은 서로를 강화하고 확장한다. 평행법에서 A는 B와의 관계를 통하여 의미적으로 강화되고 확장된다. 마찬가지로 B는 A와의 상응 속에 강화되고 확장된 의미로 다가온다. 평행법적으로 상응하는 A와 B는 각각 고유의 진술을 하는 동시에 서로를 강화하고 확장한다. 이로써 A와 B는 합류하는 한 줄기 의미의 흐름을 형성한다.
· 제가 온 마음으로 불렀사오니 주님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의 법령들을 제가 지킬 것입니다.(145절)
· 제가 당신을 불렀사오니 저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제가 당신의 증거들을 지킬 것입니다.(146절)
· 동이 트기를 제가 기다렸으며 제가 도움을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들을 기다렸습니다.(147절)
위의 145절부터 147절을 평행법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각 절은 고유의 진술을 함과 동시에 상응하는 요소들을 공유하면서 구조적으로나 의미적으로 일종의 연결된 흐름을 형성한다. 평행법적 진행이 두드러지는 이 절들 외에도 시편 전체 절들은 비교적 유연한 범주 내에서 일종의 상응을 이루는 가운데 각각 고유의 개별 진술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의미의 강화와 확장을 이룬다. 그리하여 시편 119편은 절마다 마치 삶의 단면을 모아 삶의 여정을 형성하듯 전체 기도를 구성한다. 이로써 절마다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한 줄기로 합류하는 거대한 주제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말씀을 중심으로 한 여러 동사들이 이렇게 평행법으로 사용되면서 그 진술은 누적되고 강화된다. 여러 동사들에 대하여 때로는 말씀, 하나님이 주어가 되고 시인인 ‘나’는 목적어가 되어 결속된다. 또한 때로는 말씀과 하나님이 목적어가 되고 시인 ‘나’가 주어가 되어 연결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시인의 긴밀한 관계는 동사를 중심으로 어휘들의 반복과 누적을 통해 확인된다.
시편 전반부(1-88절, 1-11연)에는 다음의 어휘들이 우세하게 나타나면서 고난 중에서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반복하여 표현한다. ‘신뢰하다’(아만 혹은 바타흐), ‘딱 붙어 있다’(다바크), ‘기억하다’(자카르), ‘기다리다/소망하다’(야할), ‘숙고하다/말하다’(시아흐), ‘응시하다’(나바트), ‘위로하다/위로받다’(나함), ‘위로’(네하마), ‘구원’(테슈아)과 같은 어휘들이 우세하게 나타나면서 의지할 곳 없는 시인에게 유일한 기업이자 위로, 소망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그의 삶을 유지하고 이끄신다.
후반부(89-91절, 12-22연)에는 다음의 어휘들이 우세하게 나타나면서 말씀을 향한 강렬한 사랑을 반복하여 표현한다. ‘토라트 아도나이’에 대하여는 ‘사랑하다’(아하브), ‘갈망하다’(야아브)라는 동사를 통해, 토라를 저버리는 삶의 부류에 대하여는 ‘미워하다’(사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시인의 마음을 선명하게 표현한다. 지혜와 계시적 이해를 구하는 표현들로는 ‘빛나게 하다/비추다’(오르), ‘분별하다/이해하다’(빈), ‘지혜롭게 하다’(하캄), ‘현명하게 하다’(사칼) 등의 동사가 우세하게 나타난다. ‘서다’(나차브 혹은 아마드), ‘기대다/떠받치다’(사마크), ‘지탱하다’(사아드)와 같은 동사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트 아도나이’가 시인의 삶을 보존하는 생명의 능력으로 표현된다.
앞서 쿠겔이 표현했던 평행법의 정의에 따르면, 시인(나)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간의 결속 관계는 시편 119편에서 수많은 동사들로 표현되는 말씀 중심의 평행법적 진행 속에서 그 진술의 강화와 의미의 확장을 이루고 있다. 독자들은 어느새 한 절 한 절의 평행법적 진행 속에서 고난 중 시인에게 형성되고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보게 된다.
[전(轉) 5] 두 어조의 역동 가운데 깊어지는 믿음, 사랑
느슨한 범주에서의 평행법적 진행 가운데 119편 각 절들은 서로 다른 두 어조 사이를 역동적으로 교차한다. 이는 우리가 기도할 때 “제가 ~하도록 주께서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때로는 “~하기를 제가 원하고 확정하였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정한 마음의 선택과 지향,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과 결핍에 대한 자각과 전적 의존의 믿음, 이 두 축의 역동 속에서 시편 119편의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더 깊은 믿음, 더 강렬한 사랑으로 진입한다.
인간의 연약함 중에 ‘토라트 아도나이’,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어 의지하는 표현이 겸비와 연약함의 어조로 나타난다. 많은 경우 이 약함의 어조는 고난과 괴로움, 대적들과 관련되면서 대화 속 2인칭이신 주님을 향한 간청의 형태(Imperative)로 표현된다. 반면 시인의 확정된 마음, 곧 말씀의 능력으로 굳게 세워진 마음의 표현, 그리고 토라트 아도나이를 강렬하게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은 고양되고 확정된 어조(말투)로 나타난다. 이 강함의 어조는 많은 경우 대화 속 1인칭 화자의 의지와 바람, 목적성을 드러내는 문장 형태(Cohortative)로 표현된다.
마치 진자의 움직임과 같이 시편 119편의 기도는 두 어조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달라 보이는 이 두 어조 모두 결국 동일한 목적을 향해 있다. 두 어조의 기도 모두 결핍된 인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삶을 강렬하게 지향하고 선택한다. 시작과 끝이 서로 달라 보이는 시편의 두 기도는 결국 한 줄기, 말씀을 향한 더 깊은 믿음과 더 깊은 사랑으로 결속되어 나아가는 거대한 흐름에 합류한다.
· 길이 온전하여 복이 있는 이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로 행하는 이들입니다.(1절)
· 잃어버린 양과 같이 제가 헤매었으니 당신의 종을 찾아내소서. 당신의 명령들을 진정 제가 잊지 않았습니다.(176절)
지금까지의 흐름을 정리해보면, 시편 119편의 전반부(1-11연, 1-88절)에서는 고난에 대한 표현들이 거의 끊이지 않으며, 전반부를 마무리 짓는 11연(81-88절)에서 정점에 다다른다. 이러한 고난 중에 시인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연약함이다. 인간의 결핍을 맞닥뜨리는 시인은 말씀 외에 의지할 곳이 없다. 이러한 절망 한가운데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시인이 붙들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자 소망이다. 절망은 시인을 죽음의 상태로 이끌고자 하지만, 살아계신 그 말씀이 시인으로 하여금 더욱더 말씀만을 붙들고 의지하게 하는 삶으로 이끌어 간다. 이로써 시인은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말씀을 따르는 삶으로 인도된다.
후반부(12-22연, 89-176절)는 ‘고난 속에서 말씀을 사랑하는 삶’을 표현한다. 시인은 여전히 고난받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고난을 초월하는 지혜의 근원으로서 주님의 계시적 말씀에 대한 사랑을 계속 표현한다. 후반부에서는 첫 세 절(89-91절)의 계시적 이해의 선언에 바로 뒤이어서 12연 92절의 ‘사라지다/멸망하다’(아바드)라는 동사를 활용하여 고난적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표현되는 고난적 현실은 더 이상 시인을 절망으로 끌어내리지 못한다. 현실을 초월하는 말씀에 대한 사랑이 고난적 현실과 함께 표현되기 때문이다. 후반부에서 고난은 시인에게는 뛰어난 지혜의 근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무대이자 배경이 될 뿐이며 죽음의 위협조차도 이를 훼방하지 못한다.
[결(結)] “이제는 날 일으켜 세우신 당신의 말씀 따라 걷겠습니다”
·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이시며 제 길을 향한 빛이십니다.(105절)
고난 중의 결핍 가운데 비로소 다가오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시인의 걸음걸음을 인도하는 유일한 등불이자 소망의 빛이 된다. 잃어버린 양처럼 방황하고 있을 때조차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아뢸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나의 길을 향한 빛이 되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금 나를 일으켜 힘차게 달려가도록 하는 생명의 능력이 되심을 마음 깊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19편을 마치는 176절에서 아주 약한 어조로 드리는 시인의 고백은 중심부(11-12연) 액자구조에서 보았던, 결핍 상태로부터 말씀에 의한 급격한 전환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기대하게 한다.
때로는 가장 힘 있게, 때로는 가장 약하게 모든 삶의 여정을 그분과 함께 공유하고 아뢰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 모든 성도의 특권이다. 그 가운데 모든 결핍을 채우고도 남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친히 등불이 되어 주셔서 당신의 양떼를 더 깊은 결속, 더 깊은 신뢰, 더 깊은 사랑으로 이끄신다. 그리하여 시인은 삶의 모든 여정의 걸음을 비추시는 그분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밖에 없다.
주(註)
1 Augustinus, Expositions of the Psalms Enarrationes in Psalmos 99-120, trans. Maria Boulding (Hyde Park, New York: New City Press, 2003), 342.
2 칼뱅은 자신의 글에서 옙(Jebb)의 Jebbs Literal translation of the Book of Psalms, with Dissertations에서의 표현을 인용하여 논증한다, J. Calvin, 김종흡 외 옮김, 『존 칼빈 原著 聖經註釋』 제6권(성서원, 2001), 21.
3 “defectus,” Augustinus Lexikonvol.2 (Basel: Schwabe, 1986), 260-261.
4 “non omnis defectus vel culpae putandus est esse, vel poenae; est etiam defectus laudbilis vel optabilis,” Augustinus, Enarrationes in Psalmos, psalmus: 118, sermo: 20, par.: 1, Patrologia Latina, ed. Jacques Paul Migne, vol.37 (Paris: Imprimérie Catholique, 1865), 1556.
5 “ecce rursus in oculis, sed utique interioribus, laudabilis et felix ille defectus, non veniens ex infirmitate animi, sed ex fortitudine desiderii in promissum dei; hoc enim ait: in eloquium tuum,” Augustinus, 위의 책, 1558.
6 Calvin, 앞의 책, 156.
7 James L. Kugel, The idea of biblical poetry parallelism and its history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8), 1-58.
임성권|연세대학교에서 동양사(B.A.),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역학(M.Div.) 및 구약학(Th.M., Ph.D.)을 공부하였다. 말씀이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깊은 존재론적 결속 관계에 대해 관심을 두고 성서를 연구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찬양교회 전도목사, 경민대학교 강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