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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유교와 기독교 02]
문화·신학·목회 (2023년 10월호)

 

  유교의 성선설과 기독교의 원죄론
  

본문

 

고대 인문주의자들은 신에게 빌지 않고 인간이 주재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간 마음속의 선한 힘을 믿었다. 그리고 선한 마음의 힘에 대한 믿음은 성선설로 펼쳐졌다. 맹자는 인(仁)에 관한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인간 본성론을 정립했고, 유교는 철학적 체계를 갖춘다.
반면에 기독교는 본성의 철저한 부패를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을 따른다. 원죄론은 성선설이 아니지만, 성악설도 아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 때문에 인간에게 희망을 둔다. 기독교의 인간관은 유교를 비롯한 동서양의 인문주의와 비교해서 조금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복잡함을 너무 단순화시키면 기독교 신앙은 미신이 되거나 이단이 될 수 있다.

유교의 성선설

맹자의 성선설의 의미를 몇 가지 관점에서 분석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인간에게 세상을 주재할 자격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것은 일종의 계몽과 설득 작업이었다. 설득력 있는 주장을 위해 그는 인간의 공통된 경험으로부터 출발했다.
그가 예시한 일반적 경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측은지심과 관련이 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누구나 깜짝 놀라 측은지심이 생긴다.”(皆有怵惕惻隱之心. 『맹자』, 공손추 상 6)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면 누구나 지체없이 달려가 아이를 구하게 된다. 그런 행동을 이끄는 것은 측은지심이라는 감정이다. 이때의 감정은 도덕적 의무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으니, 곧 도덕 감정인 셈이다.
측은지심은 남의 고통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니, 인(仁)에 가깝다. 공자는 인을 가리켜 ‘남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했다. 측은지심을 통해 맹자는 사람의 마음에는 본래부터 남을 사랑하는 인(仁)의 덕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성선설의 내용이다.
인간 마음속의 도덕 감정에는 측은지심 외에도 자신의 불의한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세상의 불의를 싫어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다. 이 네 가지 마음은 인간 본성의 선함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 해서 사단(四端)이라고 불린다.
사단의 감정을 통해 알 수 있는 인간 본성은 네 가지 덕성으로 설명되는데, 곧 인(仁)과 의(義)와 예(禮)와 지(智)이다. 인간은 마음속에 본래부터 인의예지라고 하는 네 가지 덕성, 곧 도덕적 힘을 가지고 있다. 한(漢) 나라를 거치면서 신(信)이 추가되어 ‘인의예지신’을 말하게 되는데, 이를 5상(五常)이라고 부른다. 어떻든, 맹자의 성선설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들어 있는 도덕적 힘에 관한 논의이다. 맹자는 말한다.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어찌 인의의 마음이 없겠는가.”(雖存乎人者, 豈無人義之心哉? 고자 상 8) “인의예지는 외부로부터 내게 들어온 것이 아니고 내가 본래 지니고 있던 것이다.”(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고자 상 6)
맹자의 성선설은 사단 중에서도 측은지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인의예지(仁義禮智) 중에서도 인이 다른 덕들의 기초이고, 또한 인이 다른 덕들을 완성하는 덕이기 때문이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이다.”(仁, 人心也. 義, 人路也. 고자 상 11)라고 했으니, 인의 마음으로 의의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과 정의는 분명히 다른 덕목이지만, 정의로운 마음 안에 사랑이 들어 있어야 한다.
이 점은 대체로 기독교윤리의 통찰과 비슷하다. 기독교윤리에서는 사랑(仁)과 정의(義)를 모두 중시하지만, 사랑을 좀 더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덕목으로 본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정의가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정의의 심판은 복수심을 낳을 수 있어 불화의 씨앗이 제거되지 않는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정의의 시작과 끝은 사랑이어야 함을 주장해 왔다. 맹자의 성선설 역시 측은지심과 인을 중심으로 사람의 본래적 덕성들을 열거했다.
그런데 공자는 인을 가리켜 “자기를 미루어 남에 이르는 것”(推己及人)이라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소극적으로는 서(恕)로 나타나고, 적극적으로는 충(忠)으로 나타난다. 서란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않음”(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 안연 2)을 가리키고, 충이란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영달하고 싶으면 남을 영달시켜 줌”(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술이 28)이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 곧 남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충이 아닌 서에 해당한다. 충에 비해 서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도덕적 행위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의 관찰에 따르면, 인간은 남의 불행에 공감하는 본성을 지녔다. 남의 불행 중에서도 특히 어린아이의 불행에 대해서는 매우 높은 감수성을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일반적 경험과 일치한다. 그렇게 보면, 맹자가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실례 삼아 말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경우를 들어서 성선설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자기가 잘되고 싶을 때에 남을 잘되게 해주는 충의 덕목은 실천하기 어렵다. 사람은 남의 불행을 보고 가엾게 여길 수 있지만, 남의 성공을 축하하거나 남이 잘되도록 돕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경쟁 상대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진화생물학, 그리고 사회윤리학의 대세를 이루는 공리주의 윤리는 지나친 이타성의 요구가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맹자는, 인간의 일반적 경험과 일치해서 쉽게 설득할 수 있는 측은지심과 서(恕)에서 출발해서 인간 본성의 선함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성선설의 설득력을 높임으로써, 맹자는 인간이 세상을 주재해서 평화롭게 만들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성선설은 선한 힘이 인간 내면에 있으니 선을 실현하라는 당위의 명령이다. 본성은 도덕적 힘이면서 동시에 도덕 명령이기도 하다. “하늘의 명령, 그것을 가리켜 본성이라고 한다.”(天命之謂性. 『중용』)
맹자가 성선설을 말했다고 해서 인간의 악한 현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한 본성을 발휘하려면 본능에서 나오는 물욕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그 싸움은 만만치 않다. 맹자는 세상 현실을 보고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하늘의 벼슬(天爵)이라는 것이 있고 사람의 벼슬(人爵)이라는 것이 있다. 인의충신의 덕, 그리고 선을 즐거워하며 싫증 내지 않는 것, 그것이 하늘의 벼슬이다. 공경대부의 지위는 사람의 벼슬이다. 옛날에는 하늘의 벼슬을 잘 닦으면 사람의 벼슬이 뒤따라 주어졌다. 요즘 사람들은 사람의 벼슬을 얻으려고 하늘의 벼슬을 닦는다. 그리고 사람의 벼슬을 얻은 후에는 하늘의 벼슬을 버리니, 미혹됨이 심하다.”(고자 상 16)
덕을 가진 자가 인정(仁政)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 맹자이지만, 현실을 보면 사람들의 관심은 덕을 닦는 데 있지 않고 오직 높은 자리에만 관심이 있다. 마음을 닦는 경전 공부도 벼슬을 위해서 할 뿐이고, 벼슬자리에 앉은 후에는 끊임없는 권력 다툼에 빠져드는 것이 인간의 현실 아닌가. 그렇게 보면, 맹자는 부당한 힘의 행사가 난무하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를 잘 알면서도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맹자는 자신의 성선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실정으로 보자면 선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이른바 선이다.”(乃若其情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也. 고자 상 6) 맹자가 본성의 선함을 말한 것은 인간이 선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현실의 실정을 보자면 인간이 꼭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선의 가능성과 악의 가능성이 같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선의 가능성을 보고 ‘인간은 선하다’고 말한다.
맹자가 말한 성(性), 곧 본성은 다른 말로 본심(本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악한 일을 좋아하거나 또는 악을 싫어하면서도 행하는 것, “그것을 일러 본심을 잃었다고 한다.”(고자 상 10) 맹자가 사용한 본심이란 말을 후대의 학자들은 진심(眞心)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악해 보이더라도, 그 사람의 본심은 선하다. 세상이 악하게 돌아간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진짜 마음(眞心)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어진 덕의 단초, 곧 사단을 잘 보존하고 키워야 한다. 사단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알게 하는 인식론적 단초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잘 키워야 할 덕의 단초이다. 맹자는 사단을 확충(擴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인간은 선의 가능성을 선의 현실로 만들 수 있다. 사람은 본래 선하고 의로운 존재이지만, 선하고 의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본성이 선하니 악을 이길 힘이 각자의 내면에 있다. 그러니 악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이길 수 있으니 이겨야 한다. 성선설은 인간 내면의 악의 성향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당위의 명령이요, 선의 승리를 위해 수양의 길을 제시하는 교육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선과 악의 싸움은 치열하다. 본성과 본능은 모두 자연스럽게 발휘된다. 그러므로 선한 본성이 악의 성향을 이기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인간이 금수와 다른 차이는 정말 작다. 서민은 그 차이를 버리고 군자는 그 차이를 보존한다.”(人之所以異於禽獸者 幾希. 庶民 去之 君子 存之. 『맹자』, 이루 하 19)
이 문장 속의 ‘정말 작다’(幾希)는 부정적으로 말하면 차이가 거의 없다는 뜻이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아주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서민’은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니 군중 또는 보통 사람들을 가리킨다. 맹자는 대부분의 사람이 물욕에 빠져 주어진 도덕성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서민과 군자의 차이는 본래적 선한 마음을 잘 지키는 일, 곧 짐승과의 작은 차이를 잘 보존하고 기르는 일(存心養性)에 있다.
그래서 맹자는 말한다. “구하면 얻을 것이요, 버리면 잃을 것이다. 구하여 얻으면 유익이 있으니, 구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求則得之 舍則失之 是求 有益於得 求在我者也. 진심 상 3) ‘내게 있는 것’(在我者)은 천명(天命)과 인의예지의 덕이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지만 구하여 얻어야 정말 내 것이 된다. 그렇게 구하여 얻으면 천하를 보존할 선하고 의로운 능력이 생기니 그 유익이 크다. 밖의 것을 얻으려면 남들과 부딪히고, 구해서 얻어 봐야 그 유익이 일시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 본성의 덕을 구하여 사용하지 않고 묵혀두면(放心) 천명도 흐릿해지고 천명을 실천할 능력도 사라진다는 점이다. 선한 본성이 힘을 잃고 악에 익숙해진다.
“구하면 얻을 것이요, 버리면 잃을 것이다.”라는 구절은 성서의 달란트 비유를 연상케 한다. 달란트 비유의 결론은 “가진 자는 받아 더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이 구절을 도덕적 실천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한 소질을 활용하여 자꾸 선을 행하면 도덕적 능력이 더 커지지만, 악의 성향을 좇아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으면 본래의 선한 소질도 잃게 된다. 칸트의 성서 해석과 맹자의 가르침은 동서양 인문주의자들의 공통된 관심을 보여준다.
셋째,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측은지심은 일상적인 생활감정과 다른 것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 점은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맹자는 측은지심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절로 생겨나는 감정임을 강조한다.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이익이든, 명예든 행위의 결과에 대한 어떤 계산도 없이 자연스레 생기는 감정이다.
그런데 측은지심뿐 아니라 모든 감정은 순간적으로 저절로 발생하여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인간의 의지를 움직여 행동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인간의 주재를 확립하려고 했던 인문주의자들은 감정을 멀리했다. 동서양 인문주의자들에게 감정은 이성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이때의 감정은 이른바 생활감정을 가리킨다.
유학에서 생활감정은 보통 칠정(七情)으로 설명되니, 곧 희로애구애오욕(喜怒愛懼哀惡欲)이다. 조선의 송시열은 칠정을 오(惡)와 욕(欲)으로 압축해서 설명했으니, 각각 싫어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가리킨다. 사람은 외부 사물이나 사태에 접해서 반응을 보이는데,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좋아하는 감정이 생긴다. 그리고 손해가 되는 일에 대해서는 저절로 싫어하는 감정이 생긴다. 일상적 생활감정은 이익을 얻고 손해를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의지를 움직이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이득(利)보다는 의로움(義)을 추구하게 만들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인문주의자들이 감정을 멀리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탈피하는 아파테이아(a-patheia)를 주장했다. 그리스어 파토스(pathos)는 감정이란 뜻이면서 동시에 병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일상적 생활감정에 이끌려 행동하면 개인적인 욕심에 휩쓸려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보이기 십상이다. 감정은 자칫 사람과 세상을 병들게 만든다. 감정의 통제는 인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주제였다. 유학자들이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맹자는 소체(小體)와 대체(大體)를 구분하여 감정과 이성의 대립을 말하고자 했다. 소체는 이목구비의 감각기관을 가리키니, 곧 외부 사물이나 사태에 반응하여 본능적 감정을 일으키는 매개체이다. 대체는 마음을 가리키는데, 이때 맹자가 강조한 마음의 기능은 ‘생각’에 있다.(心之官則思. 고자 상 15) 생각은 서양철학의 용어로 말하면 이성의 기능인데, 맹자가 말하는 마음의 생각은 서양철학의 실천이성을 가리킨다. 그렇게 보면, 맹자가 말한 소체와 대체의 대립은 감정과 이성의 대립임을 알 수 있다. 맹자는 소체를 따르면 소인(小人)이 되고 대체를 따르면 대인(大人)이 된다고 말하는데, 소체를 따르지 않고 대체를 따른다는 것은 결국 이성으로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칠정과 달리 측은지심이라는 감정은 외부 사물에 이끌려 생기는 생활감정이 아니다. 측은지심이란 감각기관이 외부 사물이나 사태에 접해서 생겨난 결과물이 아니요,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와 도덕적 행위를 하도록 의지를 움직이는 도덕 감정이다. 맹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이 내게 준 것”(天之所與我者. 고자 상 15)이다. 도덕 감정 역시 일상적 생활감정처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발로된다. 그런데 도덕 감정에 대해서는 생각 없이 이끌릴수록 순수한 선에 가깝다. 그 점에서 측은지심은 생활감정과 다르다.
본능적 생활감정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서 의지로 감정을 다스려야 하지만, 본성의 도덕 감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 감정에 이끌리는 것이 좋다. 부도덕함도 생각 없이 행동하는 데서 생겨나지만, 가장 높은 도덕성도 생각 없이 저절로 행위가 나가는 데서 생겨난다. 양자 모두 생각 없이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외부의 사물에 마음이 이끌려 세상을 주재하지 못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기 내면의 선한 힘에 이끌려 세상을 주재하는 힘이 가장 커진 상태이다.

성리학의 기질지성(氣質之性)

맹자의 성선설은 유교의 인간관으로, 그 정통성을 오랫동안 유지해 오고 있다. 다만 중세 유학에서 약간의 변형이 생겼음을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맹자도 인간의 악함을 모르고 있지 않았으나, 악의 문제를 독립된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선한 본성의 발현을 방해하는 본능적 욕구의 힘을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 후대의 학자들은 인간 내면의 악의 성향을 중요하게 다루어 맹자의 성선설을 보충할 필요를 느꼈다. 유학자들에게 그 문제는 적어도 자기수양의 방법론을 위해 필요한 과제였다.
11세기에 이르러 북송의 정호(程顥)가 맹자를 비판했다. “성을 논하면서 기를 논하지 않으면 부족하다.”(論性不論氣不備) 맹자가 인간의 선한 본성만 주장할 뿐 본성의 발휘를 방해하는 물욕의 힘(氣)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정호와 같은 시대의 학자인 장재(張載)는 ‘기질의 성’(氣質之性)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형상을 가진 후에는 기질의 성이 있게 된다. 그 점을 잘 생각하면 천지의 성(天地之性)을 보존할 수 있다. 그래서 군자는 기질지성을 성(性)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장재는 성(性)이라는 글자를 기질(氣質)과 연관시켜 ‘기질의 성’을 말한다. 그것은 맹자의 본성(천지의 성)과 다른 것이다. 성은 원래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재는 두 종류의 본성을 말하는 것같이 보인다. 기질의 성은 형상(形象), 곧 육체가 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육체적 욕망으로 뒤얽혀 있는 인간의 현실 속에서 선하게만 살 수 없으며 실제로 선하지 않은 경우가 많음을 반영하는 용어이다. 본능에서 비롯된 내면의 악한 힘이 맹자의 선한 본성만큼이나 근원적인 인간 본성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장재는 기질지성을 공취지성(攻取之性)이라고도 불렀다. 이것은 남을 공격해서 빼앗고자 하는 공격본능을 가리킨다.
그러나 장재는 “군자는 기질지성을 본성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맹자의 성선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점을 잘 알아야 천지지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구절은, 기질지성을 말하는 까닭이 인간의 자기수양을 돕는 데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싸움의 상대를 명확하게 알아야 승리할 수 있듯이, 기질지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선한 본성만 강조하면 사람이 내면의 악한 힘을 이기고 선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2세기 남송의 주희는 북송 선배들의 가르침을 높이 평가하며 본연지성(本然之性), 곧 맹자의 본성과 기질지성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말한다. 주희는 기질지성을 본연지성에 맞설 만한 힘을 가진 또 하나의 본성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가진 힘을 맹자보다 심각하게 보았고, 그것을 전면적인 주제로 삼아 새로운 철학체계를 만들었다.
중세 유학인 성리학, 곧 주자학이 우주론을 가진 형이상학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인간 내면에 있는 악의 힘을 이기기 위해서, 질서정연한 만물의 생성변화 속에 유행(流行)하는 우주의 선한 힘을 빌리려는 데에 동서양 형이상학의 탄생 배경이 있다. 성리(性理)의 ‘성’은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고, ‘리’는 우주의 운행을 섭리하는 선한 힘을 가리킨다. 성즉리(性卽理)란 인간 본성이 우주를 섭리하는 이치의 힘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그 점은 뒤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우주생성론을 비교하며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한편, 조선의 퇴계 이황은 악의 힘을 주희보다 더 심각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는 기질지성이 인간 내면에서 본연지성에 맞설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물론 유학자인 퇴계가 맹자의 성선설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기질지성이라는 악의 성향을 또 하나의 본성처럼 보았다. 고봉과 벌인 사단칠정 논쟁의 핵심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퇴계의 사상이 강한 종교성을 띠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악의 힘이 강하면 선의 실현을 위해 어떤 초월적 힘에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퇴계는 진리인 태극이 매우 초월적일 뿐 아니라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여기는 글들을 썼다. 그렇게 되면 신학에 가까워지는 측면이 생긴다. 물론 퇴계가 신을 믿었던 것은 아니나, 초월적 실체의 주재를 말하는 부분이 보인다. 조선시대 내내 퇴계 학파와 율곡 학파의 논쟁이 이어지는 이유도, 조선 후기에 퇴계 학파의 일부가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기독교의 원죄론

원죄론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핵심이고, 529년에 프랑스 남부의 오랑주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기독교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경험과 성서를 바탕으로 원죄론을 정립했다. 원죄론은 서양의 문화와 정치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죄론 때문에 기독교는 인문주의와 다른 구원관을 갖게 되었다. 원죄론은 생각보다 매우 복잡한 개념이고 그만큼 심오하고도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원죄론이 모든 형태의 인간 숭배를 거부하고 어떤 형태의 권위주의도 거부한다는 점, 원죄는 인간의 관습과 제도에 들어 있는 죄 곧 구조악을 가리킨다는 점, 그래서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과 서구의 사회비판 사상의 배경에 원죄론이 있다는 점,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기독론 및 교회론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 등은 매우 중요하며, 유교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유교에서 중시하는 인간의 자기수양과 관련하여 원죄론의 의미를 짧게 언급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첫째, 성서와 기독교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악의 힘을 유교보다 훨씬 심각하게 본다. 그래서 희망을 초월적 존재, 곧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원죄론을 통해 기독교는 인간 본성의 철저한 부패를 말한다. 원죄(原罪)의 원(原)은 인간 행위의 근원이 되는 본성을 가리킨다. 본성이 썩어 있으면 썩은 행위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원죄론은 죄의 필연성을 말한다.
맹자가 고자와의 논쟁을 통해 인간 본성의 선함을 주장한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인간 본성이 죄의 노예 상태임을 주장한다. 인간은 선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ignorantia), 알아도 행할 능력이 없다(difficultas). 원죄론이 주장하는 무지(無知)와 무능(無能)은 맹자의 성선설이 주장하는 양지(良知), 양능(良能)과 대비된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을 양심(良心)이라고 부르고, 선악을 잘 구분하여 알고(良知) 아는 대로 행할 수 있는(良能) 양심의 능력을 신뢰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양심이 철저하게 부패해 있다고 보았다. 모두가 잘못하고 있으면, 잘못을 잘못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은 모두 부패했다. 본성이 부패했으므로 사람은 “죄 짓지 않을 가능성이 없다.”(non posse non peccare) 사람은 죄의 필연성에 빠졌고, 자유를 잃고 죄의 노예가 되어 있다. 16세기에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노예의지론’을 펼치며 ‘자유의지론’을 전개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인다.
원죄론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선, 곧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희망을 초월적 존재 곧 사랑의 신에게서 찾는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인간세상의 악의 힘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절대적 초월자에 희망을 두게 되고, 그 희망이 믿음이 된다. 종교를 인간론으로부터 출발해서 이해하면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신론은 원죄론의 배경을 이루는 성서의 인간관과 무관하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나의 모든 희망은 오로지 당신의 크신 자비에만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명하시고,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주소서.”(『고백록』, Ⅹ,29,40) 이 문장은 수도사 펠라기우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가 볼 때 인간은 신의 뜻을 실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명하는 것을 주소서.”라는 말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오직 신의 은총만 구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사람을 선하게 만들어 도덕적 주체로 삼으신 신을 모독하는 주장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이 주어진 신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선한 능력을 지녔다고 믿었다. 그의 생각은 본성을 천명(天命)과 그 천명을 수행할 도덕 능력의 결합으로 본 유교의 관점과 유사하다. 펠라기우스는 기독교를 인문주의와 가까운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인간은 아담이 죄 짓기 이전의 상태에서 태어난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3장의 이야기 전체가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선하게 만들어진 아담이 타락하여 악과 고통이 시작된 이야기 전체가 인간 본성을 보여주며, 인간의 본래적 본성은 선하지만, 타락으로 인해 지금의 본성은 부패해 있고, 그래서 인간은 탐심과 상호 폭력과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죄와 고통의 필연성에 이르게 된 과정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좀 더 철학적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내 의지가 왜곡되어 육욕(libido)이 생겼고, 육욕을 계속 따름으로 습관(consuetudo)이 생겼으며, 그 습관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necessitas)이 생겼습니다.”(『고백록』, Ⅷ,5,10)
인간은 본래 자유롭게 만들어졌다. 그 자유는 ‘죄 짓지 않을 가능성’(posse non peccare)이다. 그것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이며, 따라서 선택의 자유(liberum arbitrium)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죄를 짓는 쪽으로 사용하였고, 육욕을 따르는 의지의 왜곡을 반복하다 보니 습관이 되었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습관이 ‘제2의 본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원죄론은 두 가지의 본성을 말하는 셈이다. 처음에 신이 준 선한 본성이 있고, 인간의 타락으로 생긴 제2의 본성이 있다. 그리고 제2의 본성이 본래의 본성을 대체했다. 따라서 ‘본래’ 인간은 선했지만, ‘지금은’ 죄의 필연성 속에 갇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본래의 본성은 주희와 퇴계가 말하는 본연지성과 일치하고, 제2의 본성은 기질지성과 일치한다. 다만, 주희와 퇴계는 본연지성이 기질지성을 이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성리학자들은 악의 문제를 맹자보다 심각하게 다루어 두 가지 본성을 말했지만, 인간 본성의 부패를 성서와 기독교만큼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다. 그 점에서 그들은 인문주의자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악한 습관이 굳어져 생긴 제2의 본성이 본래의 선한 본성을 완전히 대체했다고 본다. 맹자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마음속의 본성을 구하지 않고 버려두어 잃어버렸기에 천명이 흐릿해지고 천명을 실천할 능력도 사라진 상태이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맹자는 인간이 그런 상태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보고, 성선설을 말한 것이다.
둘째, 원죄론은 인문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원죄론은 인간 본성의 철저한 타락과 부패를 말하지만, 본래의 본성은 선하다고 보는 점에서 성악설이 아니다. ‘타락’이나 ‘부패’라는 말 자체도 원형은 좋았음을 전제로 한다. 그 점에서 원죄론은 비관주의와 거리가 멀다. 원죄론의 의미는 사람의 가능성을 완전히 박탈하는 데에 있지 않다. 다만, 자기부인을 통해 참된 주체성을 되찾게 하는 데 의미가 있다.
유교도 자기 부인을 중시했다. 유교는 ‘나를 비우니 어둠이 사라진다.’고 하는 허령불매(虛靈不昧)나 ‘나를 비워서 모든 상황을 꿰뚫어 밝힌다.’고 하는 허령통철(虛靈通徹)을 말했으니, 이는 자기를 비울 때 오히려 세상을 주재하는 힘이 점점 커짐을 알려준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간결한 방식으로 자기를 부인하게 한다. 특히 원죄론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공적을 완전히 배제하고,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게 만든다.
그 점에서 원죄론은 사람의 성장을 위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자기수양의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신앙을 ‘내적 성장’과 관련해서 말했다. 내적 성장이란 맹자가 말하는 사단의 확충처럼 인간 내면에서 하늘의 뜻(天命)이 더욱 분명해지고 사랑(仁)의 힘이 커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내적 성장은 초월자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를 주장할 때에 가능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의지에 앞서 선한 의지에 대한 원함이 생기도록 하시고 선한 의지대로 행하도록 하신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의로운 행위를 도우신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심으로써 내적 성장을 주시는 것이다.(『영과 문자』, ⅩⅩⅤ,42)

인간은 선에 대해 무지하고 무능하므로, 선과 의를 원하고 행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은 참회와 믿음에 있다. 참회는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는 자각 행위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선한 힘이 내게 들어와 작동하도록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참회와 믿음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선행의 길에 들어선다.
맹자에 따르면, 인간은 대체로 소체를 이기는 자기수양을 통해 대인이 되고, 대인이 될 때 세상을 주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욕망을 잘 통제하는 자율적 자유가 있는 사람이어야 세상에 평화를 심는 대인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율이 아닌 신율을 말한다.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세상을 위한 희망적 존재가 되려면, 먼저 자신이 탐심과 지배욕을 벗어나지 못하는 죄의 노예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존엄함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함(dignitas)도 말한다. 다만 신 앞에서 참회를 통해 자기를 낮출 때 인간은 존엄한 자가 된다. “참회하는 낮아짐으로 자신의 높음을 되찾는다.”(poenitendi humilitate altitudinem suam recipit. 『자유의지론』, Ⅲ,5,15)
유교의 성인(聖人)에 해당하는 개념이 기독교에도 있고, 중세에는 성인(saint) 숭배가 있었다. 그런데 유교와 달리 기독교의 성인은 덕을 완성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다. 성인에 가까울수록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자신이 누구보다도 큰 죄인임을 고백한다. 기독교의 성인은 참회와 믿음으로 자유롭게 된 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가 참회에서 생긴다고 보았다. 참회로 인한 자유는 성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한다. 그래서 신앙인의 무리를 가리켜 성도(saints)라고 부른다. 참회와 신앙은 인간을 인문주의의 도덕적 강박 관념, 곧 도덕주의(moralism)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그러한 자유는 부족한 자기를 수용하는 능력을 키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사랑’을 말한다.
유교 윤리나 칸트 윤리에서 자기 사랑은 죄의 핵심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사랑을 윤리의 핵심으로 본다.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우리는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같은 사랑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며, 우리 자신과 이웃도 하나님 때문에 사랑한다.”(『삼위일체론』, Ⅷ,8,12)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된다. 이때의 자기 사랑은 이기심이 아니라 죄인의 자기 수용이고, 비천한 자의 존엄함을 가리킨다. 낮은 곳에서 자기를 존엄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자기 사랑이 있을 때, 이웃을 사람 그 자체로 사랑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자기를 사랑할 때 비로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과 자기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을 통해 더욱 자유로워진 인간을 가리켜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의 주인(dominus mundi)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희망이다.
기독교에서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인간 또한 세상의 주인이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인간은 책임적 주체이다. 하나님이 희망이지만, 하나님 때문에 사람이 희망이다.
만일 신의 은총만 구하면서 책임적 주체인 인간의 주재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어도 원죄론의 의미와 거리가 멀다. 또한 하나님의 존엄성을 말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의 인간관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를 마음의 수양과 거리가 먼 종교로 가르친다면, 기독교 신앙은 사람의 성장을 막는 미신이 될 가능성이 크다.

양명수|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퇴계사상의 신학적 이해』, 『성명에서 생명으로: 서구의 기독교적 인문주의와 동아시아의 자연주의적 인문주의』,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3년 11월호(통권 7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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