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 1921-2011)는 영국 잉글랜드 상류층 가정의 4남매 중 막내 외동아들로 수도 런던에서 태어나, 줄곧 일류 코스를 밟은 수재였다. 그는 예비학교(기숙사립초등학교)인 오클리홀을 거쳐 공립학교[기숙사립중등학교, public school; 영국 잉글랜드에서는 원래 학생의 배경과 상관없이 입학이 가능한 중등사립학교를 공립학교라 부르고, 세금으로 운영하는 학교를 국립학교(state school)라고 불러서, 용어상 오해 소지가 있다]인 럭비스쿨을 나왔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현대 및 중세 언어와 신학을 공부한 그는 복수 전공 우등생(Double First-class Honours)으로 졸업했고, 졸업 후 성공회 목회자 훈련 과정을 밟고자 케임브리지신학교연맹 중 하나요 영국성공회 복음주의 계열 신학교인 리들리홀에서 공부했다.1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의사로 전쟁 중 군의로 활약하였고 사실상 명목상의 기독교인이었지만, 어머니는 루터교 배경을 지닌 신앙인으로 집 근처 영국성공회 교구교회(parish church, 한 교구의 중심이 되는 교회)인 랭햄플레이스 올소울즈교회(All Souls Church, Langham Place)를 다녔다.
스토트는 어머니를 따라 올소울즈교회를 다녔고, 나중에 그 교회의 부사제(curate, 1945-50), 주임사제(rector, 1950-75), 명예사제(rector emeritus, 1975-2011)가 되면서, 평생 한 교회를 섬긴 독특한 신앙 이력의 소유자가 되었다.2 특히 그 교회의 주임사제는 왕실이 직접 임명하는 왕실사제(Chaplain, 1959)라서, 그는 은퇴 후 교회의 명예사제 겸 왕실특별사제(Extra Chaplain)가 되었다.
스토트는 럭비스쿨에 다니던 중 신앙적 갈등을 겪다가 1938년 초에 배시(Eric John Hewitson Nash, 별칭 Bash)와의 만남을 계기로 회심했고, 그해 여름에는 배시가 인도하는 공립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유언 캠프(Iwerne Camp)에 참석했으며, 그 후에 성공회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3 그러나 그의 결심은 가족, 특히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쳤고, 그는 일단 케임브리지대학교 학부부터 나온 뒤에 리들리홀에서 공부하였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그가 대학교에 다닐 때 ‘기독학생회’(CICCU, 1928년 영국 연합기독학생회인 SCM의 보수적인 집단이 분립한 단체로, 한국에는 IVF로 잘 알려짐)에 정식 가입하는 것조차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비회원 자격으로 회원 이상의 열심을 냈고, 기독학생회 발전에 기여했으며, 유언 캠프 간사로 사역했다.
스토트는 부제(deacon, 1945) 서품을 받은 직후 올소울즈교회의 부사제로 사역을 시작하여 무려 30년가량이나 그 교회를 섬겼다. 그의 사역은 중년 이후 계속 확산되었다. 그는 자기가 맡은 교회의 사역을 넘어 영국교회의 복음주의 활성화에 기여했고, 나아가 세계 복음주의운동의 발전을 주도했으며, 그 결과 세계 복음주의운동의 대부가 되었다. 그의 영향력은 2005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힌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설교, 강의, 서적 등을 통해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영적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스토트는 무엇보다 목회자였다. 그의 책은 대부분 목회 현장에서 비롯되었고, 몇 권은 목회 관련 주제를 직접 다뤘다. 그런데도 그에 관한 연구는 전도, 양육, 선교, 복음주의 등 특정 주제에 관한 신학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목회 측면을 다룬 연구는 부족해 아쉬울 뿐이다.4 그의 목회 분야에 대해서는 다음 책이 도움이 된다. 그는 자서전을 남기지 않았지만 자신의 회심을 다룬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썼고, 관련된 두 권의 평전이 있다. 바로 1999년에 출간된 더들리-스미스의 『존 스토트: 탁월한 복음주의 지도자』와 10년 뒤인 2009년에 출간된 로저 스티어의 『존 스토트의 생애』이다. 또한 제자들의 회상기를 모은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가 그의 사망 직전에 출간되었다.5 흥미롭게도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에는 원래 35편의 글이 수록되었는데, 한국어 번역판에는 한국인 기고자 9명의 글을 추가하였다. 이런 시도를 통해 한국 복음주의계가 그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스토트는 목회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그는 평전 작가인 스티어에게 자신이 세 가지를 포기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첫째는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학자의 길을 포기한 것입니다. 제 교수님은 케임브리지에 연구원으로 남아 학자의 길을 걸으라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지만 저는 하나님이 저를 학자보다는 목회자로 부르셨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다음은 결혼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결혼을 안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늘 주변을 관찰했고 20대와 30대 초반에는 적절한 신붓감을 찾기도 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두 명 있었는데, 물론 동시에 사귄 것은 아니고 한 번에 한 사람과만 사귀었습니다! 그런데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닥쳤을 때 제게 확신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네요. 셋째로는 교계의 고위직, 즉 주교나 대주교가 될 수 있는 길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도 하나님이 저를 목회로 부르셨다고 믿습니다.6
그러나 스토트는 셋째 사안은 확실치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내가 주교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교가 천사나 천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청하는 모습을 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주교가 되면 제가 생각해 봐도 부러워할 만한 발판을 마련하게 되니까요.”7
둘째 사안에 대해서도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영국의 대학교, 특히 옥스퍼드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중세에 교회 기관으로 설립되면서 대학교 산하 칼리지의 핵심 구성원인 연구원(fellow) 혹은 칼리지 소속 교수(tutor)를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를 가리키는 용어인 ‘돈’(don, ‘주’라는 의미인 라틴어 ‘dominus’에서 왔는데 대학의 경우는 ‘university don’이라고도 부른다)으로 지칭했다. 칼리지의 구조도 수도원과 유사하다. 중세 성직자가 독신이었듯이, 칼리지 연구원과 교수도 독신이었고, 이들이 결혼하기 시작된 것은 역사상 비교적 후대의 일이다. 따라서 영국 대학교에는 독신 학자의 전통이 낯설지 않다. 유명한 문필가 루이스(C. S. Lewis)도 노년에 접어들던 56세에 가서야 결혼했다. 스토트가 엄청난 연구와 집필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경우는 막대한 양의 책을 저작한 선교 역사가 라투렛(Kenneth Scott Latourette)이 있다.
이제 그의 목회자로서의 삶을 세 가지 측면에서 차례로 살펴보자. 스토트는 교구목사로서, 세계 복음주의운동의 대부로서, 멘토로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교구목사 스토트
스토트는 세계적인 학자요 복음주의 운동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사역의 핵심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목회였다. 그는 자신의 경력을 목회자로서 시작하여 30년 동안 한 교회에서 사역했으며, 세계적 차원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교회 사역에서 조기 은퇴했다. 그러나 그의 은퇴는 엄격한 의미의 은퇴는 아니었는데, 이 점은 아래에서 재론하겠다.
스토트의 목회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교회 내적 사역으로, 설교와 전도, 양육, 행정과 심방이 주를 이뤘다. 다른 하나는 교회 외적 사역으로, 강연과 신학 작업, 세계 선교가 주를 이뤘다. 두 가지 사역 중에서 후자는 그가 세계 복음주의운동의 대부로 활약하면서 본격화되었기에 해당 부분에서 재론하겠다. 여기서는 교회 내적 사역을 살펴보자.
첫째, 설교이다. 스토트는 특히 설교가로 유명했다. 그는 런던 교회의 목회자요 대설교가였던 스펄전의 뒤를 이어 위대한 설교가의 반열에 들어섰다. 그가 세계적인 인물이 된 다음, 올소울즈교회는 영국 전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그는 설교론 관련 서적을 다수 냈고, 세계 설교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로이드-존스(David Martin Lloyd-Jones)와 더불어 강해 설교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사실 그의 많은 책, 특히 ‘오늘의 성경’(BST, The Bible Speaks Today) 시리즈는 그의 설교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목회의 축이었다. 한마디로 그의 설교 목적은 회중으로 하여금 성서를 생생하게 맛보고 속속들이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 전도와 양육이다. 스토트는 학원선교운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학교 학원선교운동인 기독학생회 활동은 물론이고, 중등교육 과정인 공립학교 학생을 목표로 한 청소년학원선교운동도 경험했다. 그는 청소년학원선교운동을 주도한 배시의 강의와 개인적 만남을 통해 회심에 이르렀고, 배시가 주도한 유언 캠프에 참가했으며, 나중에는 유언 캠프의 간사가 되었다. 배시의 청소년학원선교운동은 예수를 영접하는 결신(決信)을 직접 요구하는 적극적인 것이었다. 배시는 스토트의 결신을 돕고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라는 성서 구절을 인용했다. 스토트도 나중에 결신을 강조할 때, 이 구절을 애용했다. 그는 설교, 강의 등에서 결신을 요청했다. 즉 그는 전도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스토트는 전도가 결신으로 끝나지 않고 신앙 성장을 위한 양육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에 유의했다. 따라서 그의 책 가운데는 새신자의 신앙을 다지고 격려하는 내용이 많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 신앙의 기초, 신앙의 핵심 및 신앙의 성장을 다룬 책이 나온 것이다.
영국의 복음주의 역사학자 베빙턴(David W. Bebbington)은 복음주의의 네 가지 특징으로 ‘성서주의’(biblicism), ‘십자가 중심주의’(crucicentrism), ‘회심주의’(conversionism), ‘행동주의’(activism)를 들었다.8 스토트는 무려 50권가량의 책을 썼는데, 이것들을 대략 이 네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그의 첫 번째 책은 성서를 다룬 『신약의 메시지: 저자별로 풀어낸 입체적 성경 연구』이고, 사실상 그의 출세작인 『기독교의 기본 진리』는 신앙 기초 입문서이다. 그의 대표적인 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최후에 쓴 책이 『제자도』라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신학의 궤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9 한마디로 그의 신학의 바탕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의 영어 제목대로 ‘기초적 기독교’(Basic Christianity)였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단순한 기독교’로 번역할 수 있다)처럼 신앙의 기초를 다루면서 전도와 변증을 추구한 것이었다.
스토트는 이후에 『존 스토트의 균형 잡힌 기독교』(Balanced Christi-anity)를 냈고, 그의 평전 작가 더들리-스미스는 그의 글 선집인 『진정한 기독교』(Authentic Christianity)를 냈는데, 이 제목들을 모으면 그의 신학이 기초적 기독교에서 균형적 기독교로, 다시 진정한 기독교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10 그리고 그는 확장된 신학을 위해 하나님과 세상 모두에 귀 기울이는 ‘이중적 귀 기울임’을 강조했다.
여하튼 스토트는 학생선교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은 목회와 사역에 반영되었다. 즉 기초적 기독교를 토대로 구성된 소위 ‘학원선교신학’[전도서, 신앙입문서, 묵상(QT), 성경공부, 제자훈련 등 전도와 양육 중심의 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한국교회에도 나타났다. 20세기 후반에 한국에 도래한 서구 학원선교운동이 목회자를 다수 배출하는 가운데, 학원선교단체 출신 목회자들이 그들에게 익숙한 학원선교신학을 목회에 반영하였고, 그 결과 한국교회의 교육에 영향을 미쳤고 교회 성장에도 기여했다.
셋째, 행정과 심방이다. 스토트는 실무에 치밀하고 능숙한 목회자였다. 그는 원활한 사무를 위해 1956년 프랜시스 화이트헤드(Frances Whitehead)를 개인비서로 삼았는데, 화이트헤드는 50년 이상 그를 돌보았다. 화이트헤드는 바르트의 비서 샬로트 폰 커쉬바움(Charlotte von Kirschbaum)과 견줄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다만 폰 커쉬바움이 주로 연구비서 역할을 했다면, 화이트헤드는 사무 및 출판 업무를 도왔다. 스토트는 조기 은퇴 이후 연구를 위해, 1976년부터 로이 맥클라우리(Roy McCloughry)를 필두로 연구비서를 두었다. 연구비서진 명단에는 풀러신학교 총장 마크 레버튼(Mark Labberton) 등 저명인사가 수두룩하다. 스토트, 화이트헤드, 연구비서(연구비서는 계속 바뀜)는 3인조를 이루어 많은 일을 감당했다. 이런 협업이야말로, 그가 많은 업무와 연구를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였다.
스토트는 목회에서 기록을 중시했고, 이것을 후배 목회자에게도 강조했다. 원래 전문가(professional)는 업무 관련 기록을 남기는 것이 필수이다. 가령 서구 중세 이후 3대 전문가로 법률가, 의사, 목회자가 있는데, 법률가와 의사는 기록을 중시하되 목회자는 기록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특히 심방 기록을 통해서 교인을 파악하고 기억했다.
스토트는 심방과 기도를 중시했다. 교회 역사상 많은 목회자가 심방을 목회의 핵심으로 꼽았다. 그는 심지어 목회 초기에 노숙자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고, 다양한 교인층(특히 젊은이)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겼다. 그리고 그는 교인과 지인을 기억하는 탁월한 기억력으로 유명했는데, 이런 기억력도 따지고 보면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은 물론이고, 꼼꼼한 기록을 통해 중보기도를 하며 이름을 일일이 거명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계 복음주의운동의 대부 스토트
스토트는 교회 외적 사역이 증가하면서, 사역의 일대 전환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 그는 교회 사역을 중심으로 하던 때부터 이미 외부로부터 수많은 요청을 받았다. 더 이상 두 가지를 병행하기 어려웠다. 그는 교회 내적 사역을 분담하기 위해 역할 조정을 시도했다. 그는 주임사제직은 유지했지만, 마이클 보건(Michael Baughen)을 대리사제(vicar)로 삼아 교회 내적 사역을 전부 맡겼다. 영국교회는 교회의 대표를 주임사제(rector)라고 하고, 그를 대신하는(vicarious) 사제를 대리사제라고 한다. 그는 업무 조정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했다. 먼저 보건이 법률적인 담임 목회자는 아니지만 실질적인 담임 역할을 하도록 모든 일을 맡기고 일체 간섭하지 않았으며 필요한 서류에 서명만 했다. 위임을 상징하기 위하여, 그는 사제관을 비우고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보건이 스토트 은퇴 이후에 올소울즈교회의 주임사제가 될 보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올소울즈교회는 왕실이 주임사제 임명에 개입하기에, 스토트가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보건은 대리사제가 될 것을 수락했다. 이제 스토트는 교회 외적 사역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와 여유를 얻게 되었다. 그가 펼친 교회 외적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강연이다. 스토트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러 곳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고, 이에 응답했다. 그는 명설교가요 명강연자였다. 학원선교운동과 세계선교운동은 캠프, 집회 등에 있어서 모임과 강연이 매우 중요하다. 20세기 후반부터 재활성화되기 시작한 학원선교운동과 세계선교운동은 그에게 빚진 바가 크다. 그는 이제 웨슬리처럼 세계를 그의 교구로 삼았다. 그래서 그의 책 중에는 설교를 묶은 것도 많지만, 강연을 다듬은 것도 많다.
둘째, 신학 작업이다. 스토트는 박사 학위 과정을 밟지 않았지만, 복음주의 신학 발전에 기여한 위대한 신학자였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1971년 미국 시카고주에 있는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1983년 영국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가 수여하는 명예신학박사 학위(D.D.; Lambeth degree)를 받았다. 위에서 스토트의 책이 복음주의의 네 가지 특성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고 언급했는데, 신학이 발전하면서 점차 그런 범주를 벗어나는 특징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먼저 스토트는 복음주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복음주의의 비이성적 혹은 반이성적인 성향을 교정하려 애썼고, 그 결과 복음주의 신학의 지성화에 기여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스토트와 복음주의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토트는 복음주의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한 흐름 속에서 성장했고, 복음주의운동은 스토트라는 걸출한 대변인을 통해서 발전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복음주의는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주류 취급을 받았고, 신학적인 대상으로 여겨지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일군의 정상급 학자들이 복음주의 연구에 나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복음주의라는 주제가 당당히 학계에 진출했다. 이런 학자 가운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스토트였다. 복음주의 역사에서 그의 위상이 어떠한지는 세계 복음주의운동의 역사를 다룬 ‘복음주의 역사 시리즈’ 중에서 현대 복음주의운동에 관한 제5권의 제목이 『복음주의 세계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라는 사실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11 즉 20세기 후반의 복음주의는 스토트를 빼고 논할 수 없다.
또한 그는 신학 작업의 폭을 넓혔고, 그 결과 1988년 자유주의 신학과의 대화 및 변증서 성격을 지닌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가 출간되었다. 즉 그는 복음주의를 적극적으로 변증하는 역할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불신자의 운명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내용이 복음주의계에서 문제된 바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뿐만 아니라 스토트는 교회론을 강조했다. 그는 다른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신자 개인과 더불어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런 입장은 그가 국교회인 성공회 출신 목회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가령 그는 1966년 복음주의자들이 기성 교단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 로이드-존스에 맞서, 교단에 머물면서 복음주의운동을 전개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설명한 “나는 왜 여전히 영국성공회 교인인가?”라는 글에서, 영국성공회가 역사적, 고백적, 국가적, 예전적인 교회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12 또한 그는 교회 일치와 연합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타 교파에 대해 다소 편협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가령 그는 은사주의를 인정하는 데 불편함을 느꼈는데, 은사주의운동이 세계화되는 추세를 고려할 때, 다른 가능성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혹시 지성적 복음주의운동의 역기능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셋째, 세계선교이다. 그는 세계적 부흥가인 빌리 그레이엄과 동역했다. 그런 모습은 마치 복음주의운동 초기에 대서양 양안을 사이에 두고 웨슬리, 휫필드, 에드워즈 등이 동역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는 이후에 범위를 넓혀 세계선교에 동역했다. 그는 그레이엄과 더불어 1966년 베를린대회, 1974년 로잔대회에 참여하여 복음주의의 세계선교를 재정의하는 일을 했다. 특히 그는 현대 복음주의운동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로잔언약’의 초안을 작성했고 로잔언약 해설서도 집필했다. 이후 로잔언약은 복음주의운동이 복음전도 일색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선교의 균형으로 나가는 물꼬를 텄고, 이런 변화는 비서구교회 지도자들과 공감대를 이루는 자리가 되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현대화, 문화, 사회, 세계 등으로 신학적 주제를 넓혀갔다. 또한 그는 신학적 교류의 폭을 넓혀, 1975년 세계교회협의회 나이로비 총회에 참여하여 강연하면서, 복음전도와 사회선교를 모두 인정하되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강조했다.
멘토 스토트
스토트는 뛰어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발굴하여 큰 인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후배들은 목회자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그는 한마디로 위대한 멘토(mentor)였다. 사실 스토트 자신이 먼저 훌륭한 멘토의 덕을 보았는데, 특히 배시와 올소울즈교회 주임사제였던 해럴드 언쇼스미스(Harold Earnshaw-Smith)를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배시는 그가 회심하는 것을 도왔을 뿐 아니라 회심 이후에 수년간 꾸준히 편지를 보내 그의 성장을 도왔다. 그 편지에는 양육을 위한 견책 등 직설적인 내용이 많아서, 그가 편지 읽기를 두려워할 정도였다. 그만큼 멘토와 멘티(mentee)의 관계가 끈끈했다. 편지를 통한 멘토링은 바울의 목회서신, 아우구스티누스의 편지 등 역사가 유구하다. 한편 언쇼스미스는 부사제인 스토트에게 설교 및 목회 행정을 잘 가르쳐주었다. 스토트가 언쇼스미스를 ‘아주 훌륭한 역할 모델’이라고 생각하여 “그분의 구두라도 기꺼이 닦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13
특히 배시는 훌륭한 멘토였다. 그는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대신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평범한 사람의 위대성이라고 할까? 배시 사후에 그를 기리는 『친밀한 권위자: 존 스토트의 영적 멘토, 에릭 내쉬의 삶과 비전』이 출간되었다. 스토트를 비롯한 배시의 제자 10명의 회상기를 모은 이 책에서 “상담자이자 친구”라는 제목의 글을 쓴 스토트는 “나와 아버지의 관계가 멀어진 이후 배시는 내게 대부(代父)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라고 술회했고, 배시가 “책임을 부여한 사람들을 깊게 믿고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했다.”라고 기억했다.14 이런 경험이 스토트의 조기 은퇴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많은데, 둘 다 독신이었고, 스토트도 편지 멘토링을 했다. 특히 개인적 관심과 배려를 통해서 멘티를 얻고 성장을 도왔다. 그 결과 멘토-멘티-멘토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스토트는 목회자를 비롯하여 광의의 기독교 리더십에 대하여 많은 교훈을 남겼다. 먼저 목사는 그리스도의 종이고, 계시의 청지기이며, 세상의 찌꺼기이고, 교회 가족의 아비라고 정의했다.15 또한 그는 광의의 기독교 리더십의 원리로 낙심 극복, 자기 훈련, 관계, 권위 등 네 가지를 제시하기도 하고, 비전, 근면, 인내, 섬김, 훈련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하기도 하였다.16 그는 마지막 저서 중 하나요 후기 근대사회의 교회론인 『살아 있는 교회』의 결론부 글 제목을 “21세기의 디모데를 찾아서”라고 붙이면서, 차세대 지도자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뿐만 아니라 스토트는 자신의 멘토링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그것을 유지, 발전시킬 구조도 만들었다. 바로 오늘날의 ‘랭햄 파트너십 인터내셔널’(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인데, 이 기관은 학자 양성, 목회자 훈련, 도서 출판을 3대 사업으로 삼는다. 특히 그는 다수 세계(비서구)의 출판 및 장학 지원을 통해, 다수 세계 지도자 양성에 힘을 썼다. 그리고 기금 마련을 위해, 자신의 도서 인세를 아낌없이 기증하였다. 그 자신이 가장 중요한 기부자였다.
스토트는 말년에 단순한 삶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미 스스로 실천해온 바였다. 그의 검소한 삶은 목회자로서, 멘토로서, 영적 지도자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원천이었다. 그는 단벌신사였는데, 옷만이 아니라 거처 등 모든 것이 검소했다. 그의 마지막 책 『제자도』(The Radical Disciple, 직역하면 ‘급진적 제자’)에서 단순한 삶을 포함한 것은 당연했다.
스토트는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이어지는 목회자 공동체의 전통도 실천했다. 그는 독신이라서 사제관에 공간적인 여유가 있자, 부교역자는 물론이고 학생과도 공동생활을 했다. 사택 공동체는 물론이고 학사(學舍)까지 운영한 셈이다. 그는 공동생활을 통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멘토링까지 했다. 그러나 멘토로서는 엄격했던 것 같다. 사적인 관계에서는 다정다감했지만, 공적인 면에서는 자기관리에 철저했고 후배에게 엄격한 기준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이 점에서도 스토트와 배시는 닮았다.
결론
존 스토트는 하나님께서 현대 복음주의에 준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교회는 복음주의적 성격이 강한 교회이면서도, 복음주의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다. 그런 공백을 메워준 이가 바로 스토트이다. 그의 책이 대부분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복음주의는 기성 교회의 경직화에 맞서 복음의 활기, 영혼에 대한 사랑, 신앙의 감격 등을 추구하는 소박한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후반에 한편으로는 교회 성장이라는 외적 축복에 현혹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인 영적 빈곤에 당혹해했던 한국교회가 보다 성숙하고 이해 가능한 형태의 복음주의를 갈구했을 때, 스토트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스토트는 인간을 그토록 사랑한 예수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전하는 데 전력을 다했지만, 막상 그가 맘껏 기쁨을 누린 것은 새를 관찰할 때였다.17 너무도 집중된, 너무도 막중한 사역의 틈바귀에서 그가 숨통을 트고 하나님 앞에서 한 명의 자녀로서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도록 한 것은 바로 하나의 아름다운 피조물인 새였다. 유유하게 솟구치는 비상을 통해 하늘을, 신을 상징하는 은유적 존재, 바로 새였다. 어쩌면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가슴 깊이 담아두었던 메시지는 그런 자유, 그런 신뢰, 그런 소박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주(註)
1 1881년 리들리홀이 케임브리지 소재 성공회 신학교로 설립될 때 설립자가 복음주의 성격을 강조하자, 유명한 성서신학자인 라이트풋과 웨스트코트가 별도로 신학교를 설립하면서 웨스트코트하우스로 명명했다. 티모시 더들리 스미스, 정옥배·김성녀 옮김, 『존 스토트: 탁월한 복음주의 지도자』(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9), 235-236.
2 기독교 성직자의 명칭, 직책 등은 매우 복잡한 사안이다.
3 로저 스티어, 이지혜 옮김, 『존 스토트의 생애』(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0), 45-51; ‘Iwerne’이라는 장소명을 번역서에 따라 ‘어웬’ 혹은 ‘유언’으로 표기하는데, 후자가 맞다.
4 책 제목에서 존 스토트를 목사로 언급한 경우도 있었으나, 그 책에서도 그의 목회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Julia Cameron ed., John Stott Pastor, Leader and Friend (Peabody, MA: Hendrickson, 2012).
5 존 스토트, 양혜원 옮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4); 더들리 스미스, 『존 스토트: 탁월한 복음주의 지도자』; 로저 스티어, 『존 스토트의 생애』; 크리스토퍼 라이트 편, 김명희 외 옮김,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1). 더들리 스미스의 전기는 두 권으로서, 두 번째는 스토트의 생애 후기를 다뤘다. Timothy Dudley-Smith, John Stott A Global Ministry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2001).
6 로저 스티어, 『존 스토트의 생애』, 425-426.
7 위의 책, 426.
8 데이비드 베빙턴, 이은선 옮김, 『영국의 복음주의: 1730-1980』(한들, 1998), 15-37, 특히 16.
9 존 스토트·스티븐 모티어, 김동규 옮김, 『신약의 메시지: 저자별로 풀어낸 입체적 성경 연구』(아바서원, 2013); 존 스토트, 황을호 옮김, 『기독교의 기본 진리』(출간 50주년 기념판, 6판; 생명의말씀사, 2009); 존 스토트, 황영철·정옥배 옮김, 『그리스도의 십자가』(개정2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7); 존 스토트, 김명희 옮김, 『제자도』(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0). 『신약의 메시지』는 1954년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글 번역본은 2013년에야 나왔다. 그리고 『기독교의 기본 진리』 출간 50주년 기념판에는 부록으로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미친 영향”이라는 글이 수록되었다.
10 C. S. 루이스, 장경철·이종태 옮김, 『순전한 기독교』(홍성사, 2005); 존 스토트, 정지역 옮김, 『존 스토트의 균형 잡힌 기독교』(새물결플러스, 2011); 존 스토트, 정옥배 옮김, 『진정한 기독교』(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7).
11 브라이언 스탠리, 이재근 옮김, 『복음주의 세계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12 존 스토트, 신현기 옮김, 『살아 있는 교회』(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9), 186-189.
13 더들리 스미스, 『존 스토트』, 261.
14 존 에디슨 외 9인, 이광식·이종태 옮김, 『친밀한 권위자: 존 스토트의 영적 멘토, 에릭 내쉬의 삶과 비전』(성서유니온선교회, 2008), 115, 119.
15 존 스토트, 정옥배 옮김, 『리더십의 진실: 인격의 약함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2), 117-131.
16 존 스토트, 김명희 옮김, 『리더가 리더에게: 탁월한 지도력을 위한 4가지 핵심 원리』(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6); 존 스토트, 이지혜 옮김, 『모퉁잇돌 그리스도: 존 스토트 베스트 에세이』(복 있는 사람, 2020), 111-123.
17 존 스토트, 이기반 옮김, 『새, 우리들의 선생님』(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
안교성|교회사를 전공하였다. 『한국교회와 최근의 신학적 도전』, 『아시아 신학 산책』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