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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22년 12월호)

 

  삼위일체 하나님: '아래로부터의 신학'으로 본 자아와 공동체의 살아 있는 원천
  

본문

 

“관계적 자아의 근원으로서 역사·본질적 삼위일체론 연구: ‘성찰하는 자아’에서 ‘해석 공동체’로”
감리교신학대학교대학원, 2022


나의 박사 논문은 삼위일체론에 관한 연구이다. 삼위일체론 앞에 수식어가 붙은 논문의 제목은 “관계적 자아의 근원으로서 역사·본질적 삼위일체론 연구”이다. 연구 범위를 좁히고 특수한 주제를 다루어야 하기에 ‘관계적 자아’, ‘역사·본질’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붙어서 그러잖아도 어려운 삼위일체론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논문의 핵심은 ‘성찰하는 자아’로서 인간만이 교회를 해석 공동체가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할 수 있는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인간과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고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신학의 역사에서 삼위일체론으로 자아와 공동체의 관계적 모형을 제시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다.1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영향을 받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개인주의와 공동체 상실에 직면한 현대사회에 관계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 입각한 관계적 모델은 두 가지 심각한 도전을 받아왔다. 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 간의 관계를 이성으로 추론할 수 있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그 추론한 모델을 그대로 사회 윤리와 공동체적 프로그램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신학자’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 Pannenberg)의 삼위일체론을 역사·본질적 삼위일체론으로 규정하여 자아와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삼위일체론으로 제시하였다. 시대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삼위일체론을 연구 주제로 선택한 이유는 무한성과 보편성이라는 하나님 이해 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의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20세기 판넨베르크에게서 더욱 확장되고 체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교의학을 실정학문(positive science), 즉 주어진 사회 환경 안에서 역사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역사신학으로 이해하는 슐라이어마허처럼, 판넨베르크도 변증법적 신학의 협소한 계시 이해에 반대하여 ‘역사로서의 계시’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은 역사와 삶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현실이다. 슐라이어마허와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존재의 역동성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론을 내재적 삼위일체 분석에서 시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 위격 간의 관계를 추론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하나님의 무한한 영이 활동하는 보편적인 현실에서 삼위의 자기 구분을 설명한다. 보편적인 역사로서 하나님의 계시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 관계의 근거를 말하는 동시에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전체성을 지시한다.
이 두 사람의 삼위일체론을 통해 나는 관계성이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신학적 토대와 원천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다면 역동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터하고 있는 관계적 자아의 존재론적 위상과 근거는 무엇일까? 이를 논하기 위해 근대 주체의 시작인 데카르트의 ‘성찰하는 자아’(thinking self)를 논문의 서두에서 탐색하였다.

논문의 구성과 내용

논문 제1장에서는 관계적 자아의 위상과 근거로서 하나님의 현실성을 논의하였다. 인간 자아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현실에 터하고 있기에 홀로 있는 주체가 아니라 관계적 자아가 될 수 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성찰하는 자아’의 본래 의미를 분석해야 한다. 존재의 근거를 거부하는 탈형이상학과 주체의 죽음을 주장하는 탈근대적인 사유의 배경에는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에 대한 반론이 자리잡고 있다. 데카르트는 주체를 이해할 때 의견과 관습의 불확실함을 의심하며 끊임없이 실천의 장으로서 확실성(certainty)과 명증성(clarity)을 생각하였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cogito,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의 그 주체)는 자아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해석학적 과제를 남겨주었다. 이 같은 과제에 대해 나는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가 모든 확실성의 근거를 신의 현존 안에 두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사유하는 주체는 확실성을 자아에게 두고 있는 것 같지만, 이 확실성의 근거는 무한한 신에게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무한자에 대한 직관이 사유하는 주체를 포함하여 모든 인식의 조건이라는 논제를 놓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는 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란 무한한 신의 현실 안에서 성찰하는 자아를 말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현실 아래에서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맺도록 자신을 초월하는 자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계, 그리고 무수한 타자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관계의 원천이 필요하지 않는가? 나는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 관계적 자아의 근원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실성에 두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현실성’이란 플라톤의 이데아(idea)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전달(Selbstmitteilung)하는 ‘계시’를 의미한다.
제2장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실성 안에 있는 관계적 자아를 하나님 형상(imago dei)으로 다루었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의 비판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심리적 모형으로 축소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폭넓게 다루고 있음을 부각시켰다. 이것은 관계적 자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여 관계를 맺는 인간 형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주장하는 관계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서 세 위격의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에 정작 위격 간의 통일성과 구별성을 실추시킬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관계적 자아를 보면, 자아를 관계 자체에 중점을 두는 ‘관계로서의 자아’(self as a relationship)로 이해하게 만든다. ‘관계로서의 자아’ 또는 ‘관계 안의 자아’(self in a relationship)는 고립된 자아를 벗어나 관계론을 중심으로 자아를 이해하게 하지만, 자아의 자기 정체성보다는 관계 자체에 중점을 두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비판을 교정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관계적 자아가 갖는 특징을 서술하였다.
제3장에서는 하나님의 자기 현실성 안에서의 관계적 자아를 판넨베르크의 종교사 신학에 입각하여 분석하였다. 종교사 신학은 역사 현실의 무한한 지평, 즉 세계의 전체성에서 자아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활동 무대인 세계의 시간성을 논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해석학적 작업을 요청한다. 관계적 자아는 하나님의 현실성인 역사의 의미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영원성을 자각하는 과정 속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런 과정을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미래의 존재론을 통해 종말론의 지평에서 해석한다. 종말론적 지평은 관계적 자아가 자신이 존재하는 생활 세계의 전체성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관계적 자아를 역사의 과정 안에 있는 존재자일 뿐만 아니라 무한한 신적 현실성 속에 있는 존재자로 드러낸다. 다시 말해 역사를 하나님이 활동하는 전체로 이해해야만 자아는 관계적 자아로서 세계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역사를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의 전체성이 역사를 포함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단 하나의 현실성은 시간과 영원성이 만나는 지점이자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일치를 이루는 지점이다. 이것은 시간의 차원에서는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이고, 공간의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림이자 통치이다. 판넨베르크는 1970년대 이후 미래의 존재론을 통해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는데, 역사 종말론적인 계시의 특징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현실화로 일관되게 표현하였다.
제4장에서는 관계적 자아의 존재 지평으로서 판넨베르크의 역사적 삼위일체론을 연구하였다. 나는 역사적 삼위일체론의 출발이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에 있음을 주목하였다. 판넨베르크는 그리스도론에서 역사적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아들과 성령을 통한 아버지의 군주적인 통치로 설명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점은 이것이다. 판넨베르크가 아버지의 군주성을 강조한다고 하여 단순히 군주적인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판넨베르크는 역사 경륜 속에서 예수의 삶과 말씀의 중심에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구별과 순종이 있음을 관계적으로 설명한다. 아버지의 군주성은 아들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며 예수의 종말론적인 정체성의 근간이 된다. 바꿔 말하면, 예수는 무한한 영의 활동을 통해 아버지의 주권에 철저히 순종하며 아버지의 다스림을 역사 가운데 실현하였다.
판넨베르크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처럼 내재적 삼위일체론에서 각 위격의 상호 구분과 일치를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 경륜에서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풀어간다. 그가 말하는 삼위일체의 원리는 하나님의 전체 통일성 속에서 예수와 아버지의 구분과 일치를 다루며, 무한한 영의 통일성을 보여준다.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은 하나님의 행동, 즉 역동적인 힘으로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합한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판넨베르크에게 사랑은 다른 여타의 속성을 포함하는 총괄 개념이자 무한한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한 현실로서 하나님의 본질을 표출하고 역동적인 힘으로서 관계적 자아에게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인 것이다. 이런 특징은 슐라이어마허의 ‘본질적 삼위일체론’과도 상응하는데, 그 이유는 슐라이어마허 역시 사랑을 다른 속성과 달리 하나님의 자체 속성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제5장에서는 관계적 자아의 본원(whence)으로서 슐라이어마허의 본질적 삼위일체론을 서술하였다. 먼저 나는 『신앙론』의 중심 주제인 경건(piety)을 공동체적인 삶의 현상으로 주장하였다. 『신앙론』의 서론에서 볼 수 있듯이 슐라이어마허가 주장하는 경건은 공동체성을 염두하고 있으며, 이는 나사렛 예수의 구원 활동과 연결된다. 하나님 의식의 공동체성의 배후에는 절대 의존 감정의 본원인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관건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삼위일체적으로 활동하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논문에서는 『신앙론』의 신론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론의 구조를 분석하였다. 그 이유는 슐라이어마허가 무한한 신적 본질의 통일성을 『신앙론』 전반에 속성론으로 펼치고 있으며, 자아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은 슐라이어마허가 신론의 완성인 삼위일체론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신앙론』의 결론에 위치한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신앙론』을 거꾸로 보면, 슐라이어마허가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교회를 통해 성령론을 배치하는 삼위일체적인 전망이 드러난다. 특히 슐라이어마허는 판넨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보존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절대 의존의 감정 본원 자체인 하나님의 현실성을 말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실성을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논의보다는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다룬다. 그는 양태론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벨리안주의를 수용하여 새롭게 해석하는데, 사벨리우스가 신성 안의 구분보다는 구원의 경륜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벨리안주의와 근본적인 차이도 있다. 사벨리우스와 달리 슐라이어마허는 인간 본성의 연합을 이루는 신성이 결코 아들, 즉 그리스도로 흡수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신성과 그리스도의 구별을 말한다. 이것은 성령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요약하자면, 슐라이어마허는 사변적으로 위격들의 관계를 구분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원인성을 경륜을 따라 그리스도와 공동의 영인 성령과 분명하게 구분 짓는다.
마지막 제6장에서는 판넨베르크와 슐라이어마허의 삼위일체론을 역사·본질적 삼위일체론으로 종합하여 공동체 모델로서 해석 공동체의 신학적 토대를 찾아보았다. 여기에서는 해석 공동체의 존재론적 근거로서 역사·본질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 현존의 차원을 서술하였다. 영적 현존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삼위일체론에 입각한 공동체론을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만들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표현으로 이해하게 한다. ‘영의 현존’이라는 파울 틸리히의 개념을 차용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론의 토대이며 역동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영’이란 삼위 중 하나의 위격으로 축소된 개념이 아니라 힘과 의미의 통일성을 뜻한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실성이 모든 것의 구조와 의미를 결정하며,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에 사로잡힌 자아는 자신을 넘어 타인들과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는 관계적 자아가 된다. 한마디로 틸리히는 삼위일체론을 사회적 이상향(idea)을 유추하기 위한 모형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 자기표현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해석 공동체를 역사 변혁을 위한 해방의 공동체로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 공간을 마련해준다.
그래서 논문의 결론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 존재론에 입각한 해석 공동체의 특징을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의 결속으로 보는 슐라이어마허의 교회론으로 분석하였다. 해석 공동체인 교회는 그 구성원인 관계적 자아를 하나님의 통치인 메시아적 사귐의 자리로 초대한다. 메시아적 사귐 안에 있는 자아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미덕을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넘어서는 탈자적 구조를 이룬다. 다시 말해 관계적 자아는 영적 현존인 하나님의 사귐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을 초월하고 보전하는 인격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가며

나는 박사 논문에서 관계적 자아의 원천을 내재적 삼위일체의 각 위격 간 관계에서 추론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과 달리 하나님의 현실성에서 찾았다. 이를 위해 아래로부터의 신학 방법론을 따르는 슐라이어마허와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 신학에 입각하여 보편적인 하나님의 현실성에 주목하였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논문은 근대신학이 신학을 인간학적으로 전회하여 삼위일체론을 주변화시켰다는 주장을 재고하게 만들며, 또한 신학적 인간학의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역사·본질적 삼위일체론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역사·본질적 삼위일체론은 세계의 관계 속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칼 라너의 유명한 삼위일체의 기본 공식(Grundaxiom)을 받아들인다. 특별히 우리는 라너의 기본 공식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말을 먼저 언급하는 이유를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경륜적인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본질적 삼위일체론은 역사의 경륜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내재적인 본성을 나타내는 내재적 삼위일체론도 전제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 의식의 근거를 신적인 원인성으로 표현하였고, 판넨베르크는 보편적인 미래의 존재론으로 설명하였을 뿐이다.
역사·본질적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체 본질에 대한 추상적인 논의보다는 역사 현실성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경륜에 집중한다. 이것은 삼위일체론을 난해한 이론이자 심지어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교리에 불과하다는 오해에서 벗어나게 한다.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은 하나님의 총체적인 비전을 따라 신앙인과 교회 공동체를 끊임없이 하나님 형상으로 교정하는 실천적 도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 현존은 관계적 자아와 해석 공동체에게 존재의 근거이자 세계 변혁을 위한 원천으로 작용한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신학적 시학’(theological poetics)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자기를 넘어 대상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시학의 원리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력은 세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공동체적인 자아(ecclesial self)로 계속 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나의 박사 논문이 한국 신학계와 교회에 삼위일체론에 관한 논의에 작은 공헌이 되길 기대한다.

주(註)
1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지향하는 위르겐 몰트만은 동방정교회와의 신학적 대화를 통해 하나님을 항상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이라고 이해하였다. 종래에는 ‘하나의 본질’ 또는 ‘신적 단일성’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론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세 위격의 상호 친교와 연합을 강조하는 관계론에 초점을 맞춘 논의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또한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 영향을 받아 해방 공동체와 영성에 적극적으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적용한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기존의 위계질서를 지양하고, 완전한 공동체성의 원형을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둔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사상적 배후에는 존 지지울라스의 ‘관계로서의 존재론’이 자리잡고 있다. Alistair I. McFadyen, The Call to Personhood: A Christian Theory of the Individual in Social Relationship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64.


송화섭|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교회 현장에서 신학과 목회의 균형을 꿈꾸며, 구성 신학적 입장에서 교의학, 신학방법론, 영성신학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꿈의교회 부목사로 일하고 있다.

 
 
 

2023년 2월호(통권 7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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