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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모더니즘 시대의 미술 산책 05]
문화·신학·목회 (2022년 11월호)

 

  바넷 뉴먼의 숭고미와 한국 단색화의 자연미
  

본문

 

지난 호에서는 절대주의 미술을 창시한 말레비치의 ‘검은 추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러시아 정치 혁명의 한가운데에서 탄생한 말레비치의 유토피아적 추상은 현대미술사에서 전면 추상화로 가는 길을 앞당겼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망명 온 유럽의 화가들에 의해 미국에서도 큰 울림으로 수용되었다.
뉴욕화파1에 속하는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70)은 전면 추상을 ‘숭고’의 개념으로 수용하였다. 칸트로 소급되는 이 ‘숭고’의 개념은 20세기 추상미술의 경향을 이해하는 미학적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번 연재글에서는 ‘숭고’의 개념과 바넷 뉴먼이 펼친 회화의 세계를 살펴보며 20세기 추상미술의 세계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고자 한다. 나아가 뉴먼의 회화와 비슷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한국의 단색화 화가 윤형근의 작품을 비교하며, 숭고 회화가 동서양에서 각각 어떻게 달리 현상하고 있으며 한국적 숭고미의 독특한 점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숭고’ 개념과 낭만주의 미술

숭고의 회화는 19세기 낭만주의 미술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언급했듯이 ‘숭고’라는 개념 자체는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로 소급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으로도 비유되는 칸트의 사상은 진리의 패러다임을 객관으로부터 주관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이로부터 진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체가 스스로 생각하고 추론해가는 영역으로 변화한다. 그리하여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믿음과 은혜의 영역은 이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인식의 영역 밖으로 밀려났고, 종교는 이성이 다시금 해결해야 하는 철학적 과제가 된다. 칸트는 이 과제의 실마리를 미학의 영역에서 찾았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이성과는 무관한 지극히 주관적인 미감(美感)의 영역인데, 이를 통해 이성이 설명할 수 없는 종교의 영역에 닿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보기에 적절하고 편안한(angemessen) 미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장미꽃을 보고 예쁘다고 느끼는 쾌(快)의 감정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불쾌하더라도 ‘숭고’의 감정을 통해서만 이성을 초월한 종교의 영역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숭고’를 뜻하는 독일어 ‘das Erhabene’은 ‘들어올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erheben’에서 파생된 형용사 ‘erhaben’의 명사형이다. 말 그대로 ‘들어 올려진 상태’를 뜻하며 합리적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압도적 크기의 대자연이나 초월적 현상에서 느껴지는 ‘고양된’ 감정을 일컫는다. 칸트는 이 숭고의 감정을 통해 이성을 초월하는 믿음과 은혜의 영역이 다시 주체의 인식에 연결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로부터 생겨난 것이 낭만주의 미학이다. 독일의 사상가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처음 사용한 ‘낭만주의’(Romantik)라는 용어는 포에지(Poesie), 즉 예술을 통해 종교를 회복하고자 한 문예운동을 총칭하는 말로 미술의 영역에서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같은 화가가 대표적으로 언급된다. 즉 프리드리히의 작품에는 숭고의 감정을 유발하는 힘이 내재하는데 다음의 세 작품을 차례로 살펴보자.
〈고산지대〉라는 작품은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산맥 사이로 설산의 장관이 펼쳐지는 대자연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바닷가의 수도승〉은 거센 폭풍이 막 지나간 듯 시커먼 풍랑이 이는 황량한 바닷가에 홀로 고독하게 서 있는 수도승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두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꽃이 예쁘다’라고 느끼는 편안한 미감과는 차원이 다른 숭고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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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이 자연의 숭고함을 그리고 있다면, 다음 작품 〈거대 산맥의 아침〉은 자연의 숭고함을 종교적 차원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태양이 떠오르는 일출의 장관을 배경으로 새벽안개를 머금은 산들이 지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전경을 보면 높이 솟은 봉우리 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초연히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자세히 보면 십자가를 향해 두 남녀가 힘들게 오르는 모습이 미세하게 그려져 있다. 〈바닷가의 수도승〉에서 수도승을 미세하게 그린 것처럼, 이 그림에서도 화가는 인간을 보일 듯 말 듯하게 그림으로써 대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미약하고 유한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로부터 생겨나는 무한에 대한 동경을 대자연의 숭고함과 연결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종교의 초월적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방식으로 칸트와 낭만주의 미학이 제시한 길, 즉 숭고의 감정을 통해 이성으로부터 분리된 종교의 초월적 영역에 이르는 길을 미술의 영역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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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넷 뉴먼의 숭고 회화

바넷 뉴먼의 추상화도 이 문맥에서 이해되는 숭고의 회화이다. 1948년 뉴먼은 『숭고는 지금이다』(The sublime is now)라는 책을 출간하여 숭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는데, 뉴먼에게 숭고는 ‘마치 ~처럼’ 대상화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 ‘now’, 즉 ‘지금’ ‘여기’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것은 보이는 대상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에서 직접 경험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뉴먼에 오면 숭고는 외부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전환하는데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이 ‘회심’과 ‘속죄’이다. 그의 작품 〈하나임〉(Onement)은 ‘속죄’를 뜻하는 단어 ‘atonement’에서 파생된 제목으로, 속죄를 통해 내적으로 화해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화면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선은 내면으로의 회심(conversion), 속죄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통해 하나로 모아진 마음을 상징하는 기호라고 볼 수 있다. 뉴먼에게는 종교적 회심 자체가 지금 일어나는 숭고의 사건이다. 그리하여 수직선은 뉴먼의 모든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조형적 특징이며 속죄하는 삶으로의 회심을 상징하는 숭고의 기호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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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존재〉(Be)는 존재의 심연에서 가늘게 떨리는 속죄의 마음을 보일 듯 말 듯한 선(線)으로 표상하고 있고, 조각 작품 〈여기〉(Here)에 표현된 직립의 수직 형태는 마치 신이 부르실 때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나아가는 실존의 모습을 추상화한 것 같다. 신 앞에 선 인간의 마음은 두렵고 떨리지만 숭고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압도적 감정에 휩싸인다.
유대인이었던 바넷 뉴먼은 그러한 감정을 수직선이라는 상징적 기호를 통해 일깨우고 있다. 〈언약〉, 〈음성〉, 〈화해〉, 〈불의 소리〉, 〈신의 권좌〉, 〈아브라함〉, 〈아담〉, 〈이브〉, 〈십자가의 길〉, 〈존재〉, 〈여기〉, 〈순간〉 등 제목에서부터 종교적 색채를 띤 그의 작품들은 모두 신 앞에 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존재 사건을 시각화하고 있다. 이 중에서 작품 〈아브라함〉을 분석하며 뉴먼의 추상 세계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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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현대 미술관의 한 벽을 장식하고 있는 작품 〈아브라함〉은 2m 높이의 추상화이다. 멀리서 보면 그냥 검은색 추상화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약간 왼쪽으로 검보라색의 수직선이 상하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 수직선 역시 신 앞에 선 아브라함의 실존적 내면을 표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술사적으로 아브라함과 연관되어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는 ‘이삭의 번제’이다.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야말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그려진 〈이삭의 번제〉 도상은 제작연도 320년경으로 추정되는 카타콤 벽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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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묘사된 이야기는 창세기 22장,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려고 그를 부르시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브라함아!” 하고 하나님이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하나님은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창 22:2-3)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 번제에 쓰일 장작을 준비하여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장소로 길을 떠난다. 사흘 후 그곳에 도착하자 그는 함께 간 시종에게 나귀와 함께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이삭만 데리고 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장작을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뽑아 그를 내리치려 한다. 그 순간 하늘에서 주의 천사가 나타나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창 22:12)라고 말하며 아브라함을 저지한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숫양을 잡아 번제를 드리고 이삭과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카타콤 벽화에는 이 이야기가 두 장면으로 재현되어 있다. 아랫부분에는 아브라함이 명한 대로 시종이 나귀와 함께 주인을 기다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윗부분에는 아브라함이 결박된 이삭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제단 옆에는 이삭 대신 번제물로 바쳐진 숫양이 보인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곳에는 그림이 오래되어 지워졌지만 천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카타콤 도상은 중세 미술을 거쳐 20세기 샤갈에 이르기까지 ‘이삭의 번제’를 그린 모든 작품에 본(本)이 되는 핵심 도상이다. 따라서 이 그림으로 바넷 뉴먼의 〈아브라함〉에 담긴 도상학적 의미도 추론해 볼 수 있다. 물론 뉴먼의 그림은 추상화이지만 오히려 추상이기 때문에 구상이 표현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내면까지 다룰 수 있다. 그 내면이란 성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 겪었을 심리적 갈등과 엄청난 무게의 고뇌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고령에 얻은 귀한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성서를 보면 아브라함은 아내인 사라에게조차 침묵한 채 길을 떠났고, 함께 간 시종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아래서 기다리라고 명한다. 그것은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주변과 공유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는 보편적이며 가족 구성원, 친구, 이웃 모두와 공유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반인륜적인 아들 살해이며 제정신으로는 실행할 수 없는 비윤리적 행위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못한 채 오롯이 혼자 그 명령을 감당하며 믿음의 시련을 겪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너의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다”(창 15:5)라는 언약을 굳게 믿었다. 그 믿음의 힘으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그가 이삭을 내려치는 순간 들린 음성이 천사의 음성이었는지 혹은 아브라함 자신의 양심의 소리였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2 결과적으로 성서에 의하면 이삭은 소생했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다.
바넷 뉴먼의 〈아브라함〉은 구상화가 표현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내면, 즉 신과의 절대적 믿음의 관계 속에서 겪었을 아브라함의 인간적 고뇌를 존재사건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부르시자 “예,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그의 마음에서 일어났을 떨림과 공포가 어둠 속 희미하게 보이는 수직의 형상에 깊이 묻혀 있을 것을 상상하게 된다. 구상화가 하나의 순간만 포착해 재현할 수 있다면, 추상화는 담을 수 있는 내용의 폭과 깊이가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무한히 확대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작품 분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뉴먼의 그림에 등장하는 수직선은 이성을 초월한 믿음의 세계를 표상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러한 차원에서 숭고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직 형태와 초월성

서구 미술에서 수직의 형태는 도상학적으로 초월의 의미를 함축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야곱의 사다리’이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이삭이 에서에게 줄 장자의 축복을 동생 야곱이 가로채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어머니 리브가는 에서가 야곱을 해칠 것이 두려워 야곱을 멀리 외가로 피신 보낸다. 그런데 야곱은 도중에 꿈을 꾸고, 사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이어져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비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올 것이며 항상 그와 함께하시리라는 언약을 듣는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히고 사다리가 나타났던 장소를 하늘로 들어가는 문,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로 ‘베델’(창 28:19)이라 이름 짓는다.
1534년에 제작된 루터성서의 삽화를 보면 그 꿈 이야기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야곱은 길 위에서 잠을 자고 있고, 그 위로 사다리가 하늘까지 올라가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그리고 사다리가 끝나는 곳에 구름 사이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이 나타나 야곱에게 복을 내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루터성서의 삽화가 야곱의 꿈 이야기를 서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영국의 바스(Bath) 수도원 성당에 조각된 〈야곱의 사다리〉는 이야기적인 요소는 다 빼고 사다리와 천사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수직 형태가 주는 시각적 효과는 더 강렬하다. 성당 입구의 양 종탑 외벽에 〈야곱의 사다리〉가 각각 조각됨으로써 성당에 입장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다리 끝에 열려 있을 하늘이 더 강렬하게 상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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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사다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豫表)하는 구약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장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로 하늘이 열리고 그리스도 자신이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다리, 즉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으로 이해된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이삭이 소생한 이야기, 자신의 의지로 장자의 권리를 획득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낸 야곱의 이야기는 모두 하늘이 열리며 일어난 초월적 사건들이다. 초월적 힘으로 이삭은 살아났고 야곱은 축복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선조가 된 것이다. 초월적 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방식은 논리가 아니라 믿음으로 표현된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함이 시간 속으로 침투하고 ‘지금’ ‘여기’는 영원한 ‘현재’가 되어 인간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한 믿음의 초월성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미술에서는 수직의 형상으로 시각화되어 왔다. 바넷 뉴먼의 〈아브라함〉도 그 문맥에서 이해되는 수직의 도상이며, 믿음의 실존이 신과 교통하며 내적으로 ‘고양’되는 순간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숭고의 회화이자 준(準) 종교화라고 말할 수 있다.

윤형근의 회화와 숭고

바넷 뉴먼의 추상이 숭고의 회화라면, 이와 상당히 유사해 보이는 한국의 단색화3가 있다. 윤형근(1928-2007)의 회화이다. 바넷 뉴먼의 〈십자가의 길〉 연작 중 13번째에 해당하는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막 15:34)와 윤형근의 작품 〈청다색〉(靑茶色)을 비교해보자. 마치 한 사람이 그린 것처럼 외양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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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윤형근의 회화에 나타난 수직선은 유대-기독교의 특징인 초월성과는 거리가 멀다. 뉴먼의 수직선이 초월적 신을 향한 인간의 마음 길을 표상하고 있다면, 윤형근의 수직선은 그냥 여백일 뿐이다. 1999년 작품은 윤형근의 후기 작품이라 좀 경직된 느낌이지만, 70-80년대 작품들을 보면 텅 빈 여백의 분위기가 한결 더 시적(詩的)으로 다가온다. 윤형근의 회화에는 서구 미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의미’가 부재한다. 그저 자연이다. 자연이 스스로 살려고 하는 의지 없이 저절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의 그림도 자연을 닮았다. 뉴먼이 ‘의미’를 담아 수직선을 인위적으로 그리고 있다면, 윤형근은 무심히 선을 그을 뿐이다. 그 선이 면이 되고 여백으로 남겨진다.
서구의 화가들이 의미를 ‘표현’하는 인위(人爲)에 익숙하다면, 윤형근은 무위(無爲)의 화법을 구사한다. 애써 무언가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재료가 알아서 그려지도록 내버려 둔다. 색도 자연을 닮았다. 어둡지만 검은색이 아니라, 자연을 상징하는 흙색과 청색을 혼합하여 어두워 보일 뿐이다. 작품을 담은 바탕천도 마포이다. 천 위에 하얀 젯소4를 바른 인위적인 바탕이 아니라, 성김이 살아 있는 자연의 천에 직접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물감의 액체가 마포의 질감(texture) 사이사이로 스며든다. 그리고 스며드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둔다. 내버려 두면 저절로 형태가 생겨나고 저절로 여백도 남겨진다. 이러한 그림에서는 존재 의지도 잠시 쉬어간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물감이 천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상상하며 기다림의 멋도 느껴본다. 그렇게 마음을 화폭 위에 잠시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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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윤형근의 회화에는 바넷 뉴먼의 의도된 숭고와는 다른 숭고미가 느껴진다. 무위자연의 숭고이다. 자연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듯이 그의 그림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을 닮은 듯 텅 빈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저절로 숭고해진다. 한국 미술에는 애당초 숭고의 개념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무위자연’과 ‘비움’의 자연주의 미학으로 한국 추상화는 한국만의 독특한 숭고미를 자아내고 있다.

숭고와 진리

숭고 개념은 서구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이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던 시대에 기독교의 초월성은 이성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과제였다. 이 과제를 해결하고자 철학은 미학을 끌어들였고, 숭고의 미학적 경험에서 종교로 가는 연결고리를 찾았다. 이로부터 미(美)의 담지자인 미술작품은 진리의 위상을 획득하였고 진리에 이르는 시각적 매개가 되었다.
비록 동서양의 숭고 미술이 서로 다른 사상적 문맥에서 산출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각자 발(發)하고 있는 숭고미는 문화적 차이를 넘어 현대인들의 공허한 마음에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하고 말하였듯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스며들 수 있도록 마음을 정갈히 비우는 미학적 계기들이 되어준다.

주(註)
1 뉴욕화파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미국에 망명한 유럽의 전위적인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형성된 미국 현대 화단의 1세대 기수들을 가리킨다.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한 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빌렘 데 쿠닝, 아쉴 고르키 등의 화가가 여기에 속한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는 키에르케고어의 『공포와 전율』에서 다루어진 소재이다. 여기서 키에르케고어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가리켜 절대적 믿음 아래 이루어진 “윤리의 목적론적 정지”라고 말하는데, 이 해석에 대해 레비나스는 아브라함이 들은 음성은 천사의 음성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음성이었으며 타자에 대한 윤리가 믿음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즉 고통스러워하는 이삭의 얼굴을 보고 아브라함 스스로가 마음을 바꾸었다고 레비나스는 본다.
3 단색화’는 하나의 색으로 그린 한국 현대미술의 추상화 경향을 일컫는 용어이다. ‘모노크롬’(monochrome)이라는 영어 대신에 우리말 의성어 ‘Dansaekhwa’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만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한국의 미술 장르이다.
4 젯소(Gesso)는 캔버스 천 위에 초벌로 바르는 하얀 도료이며, 화가들은 보통 젯소를 바른 하얀 바탕 위에 그림을 그린다.


신사빈|독일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미술사의 신학』, 역서로 『예술의 힘』이 있다.

 
 
 

2023년 1월호(통권 7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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