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살펴본 입체주의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정석이자 바이블이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한 모든 현대 미술가들에게 입체주의가 낳은 ‘빈 그릇’의 미술 형식은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매력적인 미래의 미술로 수용되었고, 화가들은 저마다의 삶과 경험을 ‘빈 그릇’에 담아 후기 입체주의 미술 양식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내었다. 이번 호에서는 그 후기 입체주의 미술이 러시아에서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조명하며, 특히 ‘검은 추상’의 출현에 주목하여 이 독특한 미술이 어떻게 형성되어 또 다른 현대미술의 분기점이 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검은 추상의 출현
해석학자 폴 리쾨르는 모든 예술작품은 상징이며 새로운 자기 이해에 이르는 매개라고 말한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드 라인하르트의 〈검은 추상〉 같은 작품 앞에서는 솔직히 당황스럽다고 고백한다.1 우리는 미술작품에서 ‘봄’(seeing)을 통해 어떤 인식을 기대하지만, 〈검은 추상〉은 그러한 여지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 볼 것이 없으니 인식할 것도 없는 까닭이다.

이러한 무의 추상을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이를 화두 삼아 검은 추상이 최초로 출현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의 탄생 배경을 검은 추상의 기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마도 독자들 중에는 러시아에 그런 전위적인 미술이 있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구소련 체제하에서 잊혀졌을 뿐 러시아에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미술사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만한 혁신적인 미술들이 대거 출몰하였다. 광선주의(Rayonism), 입체 미래주의(Cubo-Futurism), 구성주의(Constructivism), 비대상주의(Non-Objectvism), 절대주의(Suprematism) 등 용어만 들어도 걸출한 아방가르드 미술 양식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것이다.
짧은 시기에 이러한 전위적인 미술들이 폭발적으로 분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러시아의 정치적 환경이 직접적 원인으로 자리한다.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는 정치적으로 무능했던 자로 개혁의 소리에는 귀를 닫았고 미신까지 신봉하며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또한 민심을 수습한다는 이유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국고를 바닥내자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급기야 1917년에 일어난 2월혁명을 통해 황제는 폐위되고 차르 체제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절대왕정이 무너지자 민중들은 이제 자신들이 지지하는 개혁 세력이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길 열망했고, 이 열망은 미술에도 반영되어 기존의 미술과는 차원이 다른 전위 미술들이 출몰했다. 광선주의를 창시한 미하일 라리오노프, 절대주의를 창시한 말레비치, 구성주의의 타틀린, 로트첸코, 엘 리시츠키 등의 전위적 화가들은 혼란의 시기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팽배해 있던 혁명의 지지자들이었다.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붉은 광선주의〉를 보면 형태는 입체파, 미래파, 오르피즘을 결합한 포스트 입체주의 양식이지만, 교차하는 붉은 광선들이 마치 혁명 전야에 변화를 희구하는 민중들의 함성으로 느껴진다. 엘 리시츠키의 〈붉은 쐐기로 백색을 쳐라〉는 당시 러시아의 화가들이 어떤 정치적 입장에서 작품에 임했는지를 말해준다. 백색 원은 구 보수세력을 상징하고 붉은 쐐기는 개혁 세력을 상징하는데, 후자가 전자를 치는 모습이 기하학적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절대주의의 창시자 말레비치도 혁명주의자였다. 그의 작품 〈호밀 추수〉와 〈장작 패는 사람〉은 페르낭 레제 풍2의 후기 입체주의 양식에 노동자와 농부 등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노동 장면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데 이러한 기존의 미술 양식으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대변할 수 없다고 본 것일까? 말레비치는 “오브제 없는 세상”이라는 에세이에서 부재야말로 존재의 강한 확신이라고 주장하며 1915년 “절대주의 선언”과 함께 〈검은 정방형〉이라는 파격적인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세잔에서부터 시작한 구체적 형상의 해체가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거쳐 이제 해체할 대상조차 없는 비대상(non-objection) 회화, 절대 무의 회화에 이른 것이다. 말레비치의 작품이 입체주의로부터 급작스럽게 절대주의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당시 러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던 혁명의 열기였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미술사에 전무후무한 전위 미술로 분출된 것이다.

러시아의 모더니즘과 혁명
러시아 모더니즘 미술의 특징은 사회혁명과 예술혁명의 결합이다. 18세기부터 점차 서구화되기 시작한 러시아 미술은 19세기 말 본격적으로 모더니즘에 진입한다. 푸쉬킨,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대문호들이 휴머니즘에 입각해 지배층의 도덕적 퇴폐와 민중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자 이에 부응한 화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주역은 니콜라이 야로센코, 바실리 페로프, 일랴 레핀, 이반 크람스코이 등으로 대표되는데, 이들은 민중의 고달픈 삶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전시했다 하여 ‘이동파’(移動派)라고도 불렸다.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트로이카〉를 보자. 한겨울의 추위 속에 세 아이가 자신의 몸보다 큰 물동이를 힘겹게 나르고 있고 물동이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은 매서운 추위를 말해주고 있다.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험한 환경에서 노동하는 모습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 아이들은 왜 이런 노동에 내몰린 것일까?

1851년에 일어난 러시아의 농노해방은 농민들에게 허울뿐이었다. 신분은 해방되었지만 돌아온 것은 불공정한 토지 분배와 이에 대한 과도한 이자와 엄청난 세금이었다. 게다가 강제로 노동조합에 소속되면서 노동 허가를 받는 데에도 수수료를 내야 했고, 조합을 통해 다시 토지를 재분배받으며 농민들의 상황은 이전보다 더욱 나빠졌으며, 경제적으로 다시 제국에 예속되는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스스로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한 채 아이들조차 값싼 노동력으로 내보내야 하는 지경에 내몰렸다. 〈트로이카〉는 그러한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벼랑 끝에 내몰린 농민들의 분노는 이때부터 점차 커졌고 이는 사실주의 미술을 넘어 20세기 현대미술에까지 일관성 있게 반영되었다. 혁명 전야에 산출된 말레비치의 〈검은 정방형〉도 반세기 넘게 쌓여온 농민들의 울분을 토해낸 그림인 것이다. 이는 아무것도 없는 검은 화면에 민중들의 절망과 유토피아적 희망을 동시에 담은 역설적 도상이다. 사람이 억압받던 현실에서 화가들이 꿈꾼 세상은 사람이 중심인 세상, 사람이 존중받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은 현실에는 부재한다. 그래서 현실은 부정된다. 그러나 부정은 또 다른 긍정의 시작이다. ‘부재야말로 존재의 강한 확신’이라는 생각으로 말레비치는 무의 검은 추상에서 현실의 철저한 부정과 현실에 부재하는 유토피아의 확신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허무주의(nihilism)가 아니라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이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여는 역설의 궁극적 형상이다.
〈검은 정방형〉이 품고 있는 사람 중심의 세상은 정사각형의 ‘형태’에서도 나타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비트루비안 맨〉은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미술 이념을 상징하는 도상인데, 사람이 신체를 최대한 뻗었을 때 생겨나는 형태가 장방형이 아닌 정방형이고 타원형이 아닌 원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인간의 신체를 건축의 본(本)으로 삼아 『건축십서』를 쓴 고대의 건축가였는데, 인간 중심의 미술을 추구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귀감이 되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비트루비안 맨〉에서 그의 건축설계도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리스도 세례〉 역시 원과 정방형의 구도 안에 그리스도를 그려 넣은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인간 중심의 형태인 원과 정방형 안에 그리스도의 성화를 그려 넣은 르네상스 미술은, 말하자면 성육신의 신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미술이라고 볼 수 있다. 말레비치의 〈검은 정방형〉도 이 문맥에서 통한다. 유토피아 내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인간 중심의 정방형 형태에 담음으로써 인간이 중심에 있고 인간이 존중받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말레비치의 꿈은 러시아에서는 구현되지 못하고 그의 미술은 단명한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 체제가 들어서자 미술의 영역에서도 공산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1934년에는 급기야 체제를 선전하는 미술이 국가의 공식 미술로 지정되어 아방가르드 미술은 퇴폐 미술로 규정되고 만다. 미트로판 그레코프가 그린 〈트럼펫 주자와 기수〉를 보면 당시 체제 선전의 미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있다. 말레비치는 1930년 첩자로 의심받아 KGB에 체포되고 정치적 탄압에 시달리며 예술적 자유를 박탈당한 채 1935년 사망한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와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미술들은 정치적 이유로 화려하게 꽃피웠지만, 같은 이유로 급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뿌린 혁명 미술의 씨앗은 서유럽과 미국의 후대 예술가들에게 강한 도전의 정신으로 다가가 또 다른 현대미술의 분기점이 된다.3

이코노클라즘과 검은 추상
러시아 모더니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현실’이다. 현실의 악(惡)을 반영하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도 강렬했다. 말레비치는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질서가 있다고 확신했고, 이 확신을 검은 추상으로 표상했다. 그런데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은 다분히 종교적인 신념이다. 이는 1915년에 열린 그룹전 〈마지막 미래주의 전시: 0.10〉에서 공공연하게 나타나는데, 〈검은 정방형〉이 걸린 위치를 보면 다른 작품들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즉 천장과 두 벽이 맞닿은 모퉁이에 대각으로 그림이 걸려 있는데, 이 위치는 동방정교를 믿는 러시아의 가정집에서 이콘화를 모시던 자리이다. 〈검은 정방형〉을 그 자리에 걸며 말레비치는 이 그림이 지닌 종교적 위상을 암암리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검은 정방형〉은 ‘현대의 이콘화’(Ikone der Moderne)로도 불리게 된다. 그런데 유토피아 내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표상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말레비치의 〈검은 정방형〉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한층 더 깊은 종교적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성상 파괴주의’(Iconoclasm)4라는 이름으로 시각 예술과 불편한 관계를 지녀왔고, 그 기원은 출애굽기 20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출 20:3)라고 말씀하신 후 바로 이어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출 20:4-5)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 자신은 감각계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이며 따라서 자연을 모방한 그 어떤 형상도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없고 그것들은 모두 우상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구약성서에는 신상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수없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유대교의 회당(시나고그)은 지금도 일체의 이미지를 배제한 무의미한 패턴으로만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는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구약의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로서 형상화될 수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습으로 감각계 안에 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시 초기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두고 성상 옹호론과 성상 파괴론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갈등하였다. 전자가 성육하신 그리스도에게는 신성과 인성의 교류가 가능하며 따라서 예수의 인성이 곧 신성의 표현이며 오히려 인간의 형상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묵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면, 후자는 그리스도의 성상은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을 묘사할 수 없으며 진정한 성상은 표현한 존재와 동일한 본질을 지닌 성만찬뿐이라고 주장하였다.
8-9세기에 결쳐 약 120년간 지속된 이러한 갈등은 결국 성상 옹호론의 승리로 끝나는데, 그 이유는 성상 파괴론 안에 담긴 자기모순 때문이었다. 성상 파괴주의를 묘사한 〈클루도프의 시편〉을 보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한 남자가 식초를 적신 해면을 예수에게 들이대고 있다.(막 15:36) 그리고 이 행위에 빗대어 한 성상 파괴주의자가 예수의 성상에 회칠을 하는 장면이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이제 출애굽기 20장 5절을 보자. 하나님께서는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 성상 파괴론이 지닌 모순의 단서가 있다. 즉 세 위격 하나님의 동일본질을 믿는 기독교에서 예수의 형상을 훼손하는 행위는 곧 성부 하나님을 ‘미워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상파괴주의는 설득력을 잃어 제7차 니케아 공회(787년)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843년에는 성상이 공식적으로 허용된다. 이로써 중세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을 성상으로 장식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러나 이코노클라즘은 또다시 반복된다. 중세 가톨릭이 성상을 면죄부 판매와 연결시켜 민생 착취와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하자 종교개혁과 함께 성상 파괴운동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 개신교는 지금까지도 가톨릭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시각 예술에 대해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개신교의 현실에서 말레비치의 ‘검은 추상’은 대안으로 부각될 수 있다. 출애굽기 4장의 말씀도 위배하지 않고 나아가 유토피아 즉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도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은 현대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신국립미술관〉은 현재 미술관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의 모델로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모형을 보면 검은 정방형의 지붕을 선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아래 로비는 텅 비어 있고, 실제로는 지하 공간이 미술관의 용도로 쓰이게 설계되어 있다. 말레비치의 ‘검은 추상’이 지닌 의미를 고려해볼 때 검은 지붕 아래의 공간이 유토피아의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의도되었을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를 확인하는 의미로 칸딘스키의 작품 〈검은 정방형의 안〉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에 귀환해 있는 동안(1914-21) 러시아의 전위 화가들과 교류한 흔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말레비치의 〈검은 정방형〉을 자신의 조형 언어로 해석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말레비치가 검은 정방형 안에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암시만 했다면, 칸딘스키는 자신만의 독창적 언어로 이를 구체화하고 있다. 이 기하학적 조형 언어들은 칸딘스키가 초기부터 즐겨 그리던 구름, 산, 태양, 교회, 노 젓는 배, 말 탄 기수 등 자연과 일상 사물을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기호들인데 모두가 새로운 미래의 건설을 암시하는 메타포이다. 이들이 음악적 선율 속에 서로 어우러지며 유토피아적 질서를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칸딘스키의 이 그림에 근거하여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 작품을 보면 검은 지붕 아래의 공간이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된다. 억압과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의 급류를 거슬러 힘차게 노 저으며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사람들, 파란 말5에 올라타 유토피아를 향해 힘차게 도약하는 사람 등 칸딘스키가 꿈꾸었던 이들의 모습을 그리며 검은 지붕 아래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말레비치의 〈검은 정방형〉,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물, 칸딘스키의 〈검은 정방형의 안〉과 함께 그러한 교회 공간을 그려본다.

혁명과 미술
역사적으로 개혁과 혁명은 항상 미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중세 탁발수도회의 교회 건축은 화려한 가톨릭 성당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고, 종교개혁 이후 나타난 텅 빈 교회는 새로운 세상을 향하려는 의지의 표상이었으며, 프랑스혁명 전후에 나타났던 혁명건축(Revolutionsarchitektur)은 화려한 바로크 궁정 문화를 비판하며 등장한, 당대에는 실현될 수 없을 만큼 미래 지향적이고 전위적인 건축이었다. 이들은 모두 절망의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지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검소하고 극도로 단순한 외관을 특징으로 한다.
말레비치의 〈검은 정방형〉도 이 문맥에서 이해되는 미술 현상이다. 모든 혁명 미술은 유토피아적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은 현실이 절망스러울수록 더욱 강해진다. 현실이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할 때 그들은 늘 텅 빈 모습으로 출현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했다.
주(註)
1 폴 리쾨르, 변광배·전종윤 옮김, 『비판과 확신』(그린비, 2014), 325.
2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풍’이라 함은 피카소의 분석적 입체주의 양식을 둥근 구체로 해석한 양식을 말하는데, 현대미술의 아버지인 세잔이 “자연을 구, 원추, 원주로 바라보라.”라고 한 말에 충실한 후기 입체주의 양식으로 볼 수 있다.
3 특히 러시아 미술의 산업적 공리주의는 미술의 영역에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낳았고, 이것이 미술과 기술의 접목이라는 독일 바우하우스 이념에 영향을 주어 전후 미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에까지 큰 울림으로 자리하게 된다.
4 ‘Iconoclasm’은 그리스어로 ‘이미지’를 뜻하는 ‘eikon’과 ‘파괴하다’를 뜻하는 ‘klao’가 결합된 말로 ‘이미지를 파괴하다’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5 ‘파란 말’은 칸딘스키가 창립한 미술가 집단 ‘청기사파’(Der Blaues Reiter)를 상징하는 모티브로, 물질주의에 대항한 순수한 영혼과 정신을 의미한다.
신사빈|독일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미술사의 신학』, 역서로 『예술의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