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의 자아정체성과 치리권 청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22
1933년의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2회 회록』에는 “함남노회장이 여자에게도 장로 자격을 주자는 헌의와 겸하여 최씨 영혜 외 103인이 연서하여 여자에게 치리권 허락 청원은 정치 제5장 3조를 개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허락할 수 없사오며”라는 짧은 기록이 담겨 있다. 헌의와 청원은 실패했지만, 조선장로교회는 이후 수년 동안 긴 논쟁을 해야 할 정도로 여성치리권 청원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이슈였다.
청원은 그저 하나의 사건이었는가? 104명의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이 대체 어떤 인물들이었기에 1930년대 조선장로교회를 들끓게 만들었는가? 왜 함경남도에서 이 일이 일어났는가? 필자는 이 질문들의 답을 찾기 위해 먼저 기초적인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03명’은 고사하고 이 기록에 유일하게 실명으로 등장하는 ‘최영혜’에 관한 기록조차 발견하기 어려웠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의 기록, 여성에 관한 기록을 찾는 것은 마치 강이나 바닷가에서 모래와 자갈을 잔뜩 채취하여 적은 양의 사금을 골라내는 것과 비슷하다. 교회의 기록도 마찬가지여서 총회록, 노회록, 당회록 등 교회의 공식 기록에서 여성의 역사를 발굴하는 일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므로 필자는 먼저 교회 안의 기록을 넘어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적 기록 안에 숨어 있는 104명의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을 찾아내어 교회사 속 인물들로 자리매김하고, 다음으로 치리권 청원을 그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성장한 이들의 ‘근대적인 자아정체성의 발현’으로 보고 이들을 ‘교회의 신여성’으로 부르고자 한다.
본 연구는 함경남도 지역에 관한 연구이다. 필자는 “지역의 역사 전통(정치, 경제 등 포함)과 문화(예술)의 특성을 파악하면서 교회 역사 연구에 착수”해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1 예전부터 함경남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지역의 역사 전통과 문화의 특성을 그대로 지닌 상태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수용했고, 그들이 수용한 기독교에는 그들의 역사, 전통, 문화 등 모든 것들이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함경남도의 교회 역사는 함경남도에서부터 시작하고, 교회 여성의 역사는 여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으로, 인용의 모든 출처는 원 논문에 표기되어 있다.)
여성의 독립성이 형성된 함경남도의 역사와 생활문화
본 연구의 첫걸음은 함경남도 지역의 역사에 여성의 자아정체성 자각을 형성할 만한 특성들이 있었는지와 관련하여 함경남도의 역사 전통과 문화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는 논문 제2장 “여성의 독립성이 형성된 함경남도의 역사와 생활문화”에서 서술하였다.
함경남도에는 고토(古土)와 강역(疆域) 사이를 오갔던 특별한 역사가 있었다. 함흥 이북 지역에는 여진족들이 자주 출몰하여 터를 잡고 살기도 했으므로, 조선 건국 이후로도 한동안 사람들은 이 지역을 과거의 영토인 ‘고토’로 인식하였다. 조선 왕실과 여진족은 이 지역을 자신들의 강역으로 삼기 위해 계속해서 공방을 주고받았고, 그동안 지역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다. 분쟁이나 전쟁이 계속되어 군사적 긴장감이 높고 불안함이 지속되는 지역은 어디든지 안정적인 체제나 제도가 확립되기 어렵고, 남성과 여성은 협력하여 가족과 자신의 생명을 지켜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마련이다. 장구한 세월을 분쟁 가운데서 보낸 함경남도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궁마지향’(弓馬之鄕)과 ‘상무지향’(尙武之鄕)의 특성을 갖춘 강인하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게다가 함경남도는 일부 평야 지역을 빼고는 대부분 험준하고 왕조의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그래서 정부의 통치권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변방 지역이었다. 고려시대까지 개방적이고 비교적 평등했던 부부관계, 균분상속, 남녀 구별 없는 족보 순서, 윤회봉사 등의 비종법적인 친족체제와 관습은 조선 중기 이후 가부장적 수직관계로 변화하는데, 함경도의 경우 오랜 세월을 거쳐 쌓여 있던 개방성과 남녀의 구분을 두지 않는 전통이 많은 변화를 겪지 않은 채 조선 후기를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이후 조선 후기에 함경도인들은 대량으로 잡히던 명태를 중심으로 상품화폐 경제의 기반을 다졌고, 명태가 전국적으로 소비되는 상품이 되면서 함경도의 경제는 상업경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전국적 규모의 상업활동의 중심에 함경도의 사상(私商) 집단인 북상(北商)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관원이나 양반층도 있었다. 이들은 조선왕조의 유학이 지향하는 목표에 그다지 얽매이지도 않았거니와 계속된 지역차별 때문에 관직을 얻기도 여의치 않았으므로 차라리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여 지역사회에서 지위를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다.
장삿길에는 여성들도 빠지지 않았는데, 함흥의 여성들은 소와 말을 무서워하지 않고 마음대로 몰고 시장을 누볐다. 「신여성」을 포함한 몇 종류의 잡지에는 함흥의 시장이 마치 여인국 같아서 물건을 사고파는 대부분이 여성들이고 남성들은 마치 새벽하늘의 별이나 마른 밭(旱田)에 올라온 콩 싹(豆苗)처럼 보일 정도로 적었으며, 여성들은 직접 경제활동에 종사하므로 가정에서 경제적 실권을 쥐기도 하며, 독립적으로 살아가고자 하여 남성에게 그 삶을 의뢰하지 않는다는 등의 평가가 실렸다. 이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의 자아정체성 확립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일반 역사를 통해 살펴본 함경남도는 이렇게 여성에 대한 개방성과 존중을 잃지 않았던 특별한 지역이었으며, 이로 인해 함경남도에서는 다른 도와는 차별된 여성의 독립성이 형성될 수 있었다.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의 자아정체성 발현의 동력
함경남도의 역사와 문화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특성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자아정체성 확립의 맹아였다면, 그 맹아가 발현되도록 촉진하고 성장시킨 동력은 캐나다에서 내한한 여성 선교사들이 보여준 자아정체성, 1920-30년대에 함경남도에서 번져나간 여성 교육 운동, 그리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총회의 결성이었다. 이는 논문 제3장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의 자아정체성 발현의 동력”에서 서술하였다.
먼저 함경남도를 선교 구역으로 삼았던 캐나다 출신 여성 선교사들의 자아정체성을 살펴보았다. 19세기 후반 캐나다에서는 여성 교육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이 등장하였고 여성참정권 운동도 함께 성장하였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에게 열리는 장은 그리 많지 않았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의 소설 『빨간 머리 앤』은 이 시기 여성들의 성장, 갈등, 고민을 잘 담아냈다. 루시 모드는 내한한 여성 선교사 베시 커밍(Mrs. Robb, Bessie A. Cumming, 업배시)과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다. 그들은 소설 속 주인공 ‘앤 셜리’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고민하면서 옛날 여성들이 갔던 길을 택하거나 타협하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맥레이 선교사와 결혼한 에디스 서덜랜드(Mrs. McRae, Edith F. Sutherland)의 경우 자신을 선교사 부인이 아닌 선교사로 인식하였고, 루이스 맥컬리(Louise H. McCully, 리루이시)는 예수처럼 열두 제자를 양성하는 선생으로, 의료선교사 플로렌스 머레이(Florence Jessie Murray, 모례리)는 남녀 구분을 떠나 사람을 진료하는 의사로 자신을 인식하였다. 이들은 넓은 함경도 지역을 오랫동안 선교하면서 교회 여성들과 함께했으며, 이로 인해 함경도 여성들의 신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계몽과 교육의 바람은 함경남도에도 불었다. (함경남도) ‘북청 물장수’라는 말이 알려주듯이 함경남도는 옛부터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히 강했다. 이 시기에 남성들이 보통학교 정규교육 쪽으로 옮겨가면서 간이학교나 서당의 자리를 여성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또한 계몽과 교육을 위한 각종 강연회와 야학, 그리고 사경회에 참여하여 많은 여성들이 문맹에서 벗어났다. 문해력을 가진 교회 여성들이 증가하면서 함경남도 교회에서는 다른 도에 비하여 여성 서리집사의 비율이 월등하게 높아졌다. 이 시기가 여성치리권 청원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함남지역 교회 여성들이 선구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함경남도 교회 여성들의 자아정체성 발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총회의 창립과 발전이었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은 전국에 흩어진 개교회 여전도회와 지방연합회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더욱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여전도회의 연합을 이끈 것은 여성 선교사 루이스 맥컬리의 공이 컸다. 그는 여전도회를 전담하여 함경남도 여전도회를 발전시키는 한편 함남, 평양, 대구 등 주요 지역 여전도회 대표들을 모으고 준비하여 마침내 1928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총회가 결성되도록 이끌었다. 전국적인 조직이 결성되면서 교회 여성이 자아정체성을 발현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의 자아정체성 발현으로서 여성치리권 청원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은 마침내 치리권을 목표로 결집하였다. 치리권 청원의 배경과 인물들, 그리고 청원의 전개 과정을 논문 제4장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의 자아정체성 발현으로서 여성치리권 청원”에서 서술하였다. 이들이 치리권 청원을 통해 자신들의 자아정체성을 발현하게 된 배경이 있었다. 먼저 오랜 시간 노력한 결과로 1930년에 미국 북장로교에서 여성장로 제도가 통과되었다. 둘째로 조선감리교회에서 여성목사 제도가 통과되었다. 한 곳은 미국이지만 조선에서 활발하고 주도적으로 선교하고 있는 북장로회였고, 한 곳은 다른 교파이지만 조선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는 감리교회라는 점이 이들에게 분명한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교단 총회는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총회’의 명칭을 ‘조선예수교 장로회 연합여전도회’로 개칭하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여전도총회와 갈등을 빚었다. 최종적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여자전도연합대회’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여전도총회 입장에서 불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런 몇 가지 배경은 자아정체성이 뚜렷해진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을 결집하도록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손사라, 이자경, 배명진, 박금려, 김경순, 박은덕, 이성눌, 신애균, 전창신, 장영숙, 장인세, 송몽은, 목정순, 최영혜, 김마리아 등 함남노회 여전도연합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한 여성들의 상당수는 경성의 정신여학교와 함흥의 영생여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찍부터 교회 안팎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주체적인 자아정체성을 키웠다. 특별히 최영혜는 공식적으로 ‘무학’이었지만 많은 단체에서 활동하며 지도자의 역량을 키운 바 있고 함남여전도회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치리권 청원을 주도하였다. 더불어 김마리아는 긴 해외 생활을 끝내고 원산에 정착하였는데 독립운동가이자 여권운동가인 그녀의 합류는 치리권 청원에 기폭제가 되었다.
1933년에 함남노회를 거쳐 104명의 연서와 함께 총회 헌의안으로 상정된 여성치리권 청원은 「동아일보」를 통해 “조선기독교장로회 최초의 여권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교단 총회에서 즉시 부결되었다.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은 다시 힘을 모아 다음 해인 1934년에 최영혜 외 639명이 2차 연서를 작성하여 함남노회에 제출하였으나 노회를 통과하지 못함으로써 청원 자체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여성치리권을 놓고 장세환 전도사, 김춘배 목사, 채정민 목사, 그리고 최영혜 등이 신문에 글을 게재하면서 1935년까지 논쟁이 계속되었다. 교단 정치부 연구위원 5명은 여성에 대한 교권 불허는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보고했다. 여성치리권 주장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호도되었고, 교단 내 여러 가지 문제와 얽힌 상태에서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의 근대적 자아정체성
논문 제5장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의 근대적 자아정체성”에서는 반 뒬멘과 송호근의 이론에 근거하여 이 교회 여성들을 근대적 개인으로, 더 나아가 교회의 신여성으로 정의하였다. 반 뒬멘(Richard van Dulmen)에 따르면,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를 교육하고, 스스로 결정한다.’2 이런 주체적인 개인은 근대의 필수조건이며 선행조건이다.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면서 개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책임질 만큼 성숙해야만 했고, 유일한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서를 자국어로 읽기 위하여 문맹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렇게 문해력을 갖춘 근대적 개인의 폭발적 증가와 더불어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어떤 곳에 기독교가 전파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는 개인이 생겨나고 ‘문자’로 기록된 성서가 동반된다는 점에서 근대적 속성이 함께 전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의 상황도 동일했는데, 이때 조선 기독교는 ‘한자’가 아니라 갑오개혁에서 갑작스럽게 국문(國文)이 된 ‘한글’을 문자로 채택하였다. 기독교는 전적으로 한글을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일제강점기 중에도 한글로 된 성서와 찬송가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민중이 근대적 지식에 입문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기독교 여성들에게 한글은 신앙의 성장과 더불어 근대적 자아정체성 자각을 향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도구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난제가 있었다. 여성은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에서 근대적 자아정체성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다시 근대적 자아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모순적이고 분열된 자아정체성을 갖는 현상이 일어났다. “여성 계몽은 교회 안에서 아쉽게도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발전되지 못하고 여기에 멈추어 서 버렸”기 때문이다.3 이러한 현상은 교회 밖 사회에서 활발하게 운동을 펼쳤던 기독교 여성 지도자들이나 교회 안에서 활동했던 대부분의 교회 여성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렇다면 1930년대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은 근대적 개인이 되었는가? 그들에게는 근대적 자아정체성이 있었는가? ‘근대적 개인’은 “나와 너의 차이를 인지하고 나의 됨됨이를 개성과 인격이라는 범주로 개념화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그것을 행위로 표출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삶의 공간을 자신이 창출한 고유한 방식으로 양식화”할 수 있어야 한다.4 ‘됨됨이를 개성과 인격이라는 범주로 개념화’하는 것은 내면의 일이며 ‘행위로 표출하고 고유한 방식으로 양식화’하는 것은 외부로 드러나는 근대적 개인 됨의 판단 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 개념화가 행위로 드러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 사건과 역사적 경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1933년의 치리권 청원을 근대적 개인의 판단 요소가 되는 ‘행위로의 표출’로 본다면, 비록 근대성 발현과 표출의 결과는 실패였음에도 불구하고 함경남도 교회 여성들은 근대적 개인으로 변모되었다. 함남노회 회록에 근거하여 볼 때, 함경남도의 교회 여성들은 치리권 청원까지 적어도 7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근대적 자아정체성을 차곡차곡 다졌다. 이숙진의 표현대로, ‘근대/개신교/자율적/순종적’이라는 네 가지 차원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서 조선의 교회 여성들로 하여금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자아정체성을 갖게 했다. 그러나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은 여성치리권 청원을 통하여 근대적 개인으로서 오랜 시간 다져진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주체적인 자아정체성을 발현시킨 것이다.
이들이 특별히 가치 있는 것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위 ‘신여성’이라 불린 많은 기독교 여성들은 교회 내 한계를 경험하고 교회를 떠났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는 침묵했고 교회 밖 사회에서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드러내는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은 치리권 청원이 실패하고 조선장로교회에 자신들의 자리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자아정체성을 지켰다. 필자는 이들을 ‘교회의 신여성’이라 부르고자 한다.
나가며
필자는 본 연구에서 ‘여성’, ‘지역사’, ‘문학작품’에 집중하였다. 첫째, ‘여성’의 역사이다. 여성의 역사는 전 지구적으로 소외와 배제의 역사이다. 초기 한국교회 여성들의 역사는 더 그러하다. 필자는 치리권 청원을 주도한 최영혜를 추적하였고, 일제강점기 헌병대 문서에서 최영혜의 나이와 대강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내었다. 또한 함남노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임원 중 15명을 발굴하여, 비록 이들의 역사가 이름과 강연회 제목 정도만 기록되었지만 대부분 정신여학교와 영생여학교에서 졸업한 여성들로서 근대적 개인으로 평가받을 만한 인물들이었음을 확인하였다.
두 번째로 필자는 지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사에서 여성에 관한 서술은 대부분 거시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 안에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등 다수의 교파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성사’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뒤섞인 채로 ‘여성’이라는 하나의 지붕 아래에서 서술되었다. 그러나 교파만 분류해놓고 보아도 교회 여성의 역사는 매우 역동적이고, 각자 걸어갔던 다른 길들을 살피다 보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치리권 청원을 ‘장로교회’ 내에서 일어난 일로, 그리고 ‘함경남도’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로 파악하였다.
세 번째로 필자는 문학작품을 역사 서술의 한 부분으로 첨가하였다. 문학작품은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 언어 등 많은 것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함경남도는 현재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출입이 힘든 지역이므로 현장에 가서 자료를 찾는 일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본적인 자료의 부족함을 채워준 것이 문학작품들이었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통하여 필자는 숨어 있는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을 찾아냈고, 치리권 청원을 단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성장한 이들의 ‘근대적 자아정체성의 발현’으로 보고 이들을 ‘교회의 신여성’으로 정의하였다.
주(註)
1 임희국, 『공감, 교회역사 공부』(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4), 18-21, 25-26.
2 리하르트 반 뒬멘, 최윤영 옮김, 『개인의 발견』(현실문화연구, 2005), 252-260.
3 임희국, 앞의 책, 321.
4 송호근, 『시민의 탄생: 조선의 근대와 공론장의 지각 변동』(민음사, 2013), 391-392.
서선영|장로회신학대학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장 통합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역사전시관과 장신대 역사박물관에서 일했다. 역서로 『사랑이 키티를 조선에 부르다』가 있다. 현재 이룸교회 부목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