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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나의 박사 논문을 말한다]
문화·신학·목회 (2022년 4월호)

 

  만우 송창근 목사의 ‘민족목회’를 조명하며 친일 오명을 논하다
  

본문

 

“만우 송창근 목사의 민족목회에 관한 연구”
한신대학교 대학원, 2019


만우 송창근(晩雨 宋昌根, 1898-1950) 목사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를 온몸으로 겪고 살아냈던 독립운동가이자 신학자, 그리고 신학교육자이자 목회자였다. 이러한 다양한 삶의 궤적 이면에는 그의 ‘성빈(聖貧)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장공 김재준, 추양 한경직, 죽산 박형룡은 한국교회사에 조금만 관심 있는 목회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다. 그러나 송창근이라는 인물은 이들과 동시대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까닭은 송창근의 아호(雅號) ‘만우’(晩雨)가 말하듯, 그 삶이 너무나 짧게, 마치 ‘늦은 비’와 같이 휙 하고 지나갔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송창근은 많은 글을 남기지도 않았다. 또한 그의 삶 끝자락에서 바울교회(현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성남교회)를 개척하며 활발하게 목회에 전념하기도 하였는데, 그 시기 발생한 화재로 인해 많은 자료가 전소되었다. 그러했기에 1932년 한국교회 역사 최초로 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음에도 현재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더욱이 우리나라의 신학사상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송창근 목사는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of Assisi, 1181-1226)의 청빈신학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성빈신학’을 토대로 당대의 보수근본주의 신학에 맞선 동시에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에도 맞선 기독교 영성가이자 사상가였다. 필자를 비롯한 한국교회사 학자들에게는 송창근이 말한 영성의 의미를 더욱 온전히 밝히고 적용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더구나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송창근을 ‘친일파’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여전히 논란의 요소가 많다. 이렇듯 학술적 연구 가치가 충분한데도, 필자의 논문이 이 주제를 다룬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일 정도로 그의 삶과 사상이 깊이 있게 논구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필자는 더욱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송창근 목사를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송창근의 친일 행적이라고 평가받는 지점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논리적 근거를 담보하기 위해 송창근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그의 민족의식, 신학 사상, 행적 등을 면밀하게 살펴야만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우 송창근 목사는 친일파가 아니다. 그렇다고 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도 아니다. 시대의 한계 속에서 친일과 독립운동 그 어느 사이에 실존했으며 민족운동의 마지막 숨결이자 보루였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진 한 명의 목회자일 뿐이었다.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송창근의 생애에 드러난 신학 교육자, 민족주의자, 성빈 영성가라는 세 가지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송창근 목사를 ‘민족목회자’로 새롭게 규정했다.

연구 방법

필자는 송창근 목사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위해 다차원적인 연구방법론을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문헌비평방법, 영성연구방법, 그리고 포스트식민주의 방법론을 사용했다. 연구 방법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논문 제1장 “연구 방법”에서 다뤘다. 특별히 기독교 역사학에서 전통적이며 주된 연구 방법인 이미 드러난 결과물에 집중하는 실증사적 연구에만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언행 기저에 있는 내적 동인을 다층적으로 분석하는 영성연구방법은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사회와 문화적 상황 속에서 반응한 송창근의 영성을 연구하는 데 매우 적절한 연구 방법이었다. 필자는 영성연구방법을 사용하여, 기존의 ‘사실 기록’을 통해 드러난 송창근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기록을 추동시킨 ‘신앙 동인’을 분석하며 접근했다. 이는 사회문화적 정황 속에서 고백된 그의 내면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특히 종교적 경험이 충만한 종교인을 분석할 때, ‘발생한 일’, ‘드러난 사료’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다는 태도가 이제는 지양(止揚)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세 번째 연구방법론인 포스트식민주의 방법론은 친일파로 낙인이 찍혀 있는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에 도움을 주었다.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 호미 바바(Homi Bhabha)가 설명한 ‘제3의 공간’ 개념은 대립적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서로 타협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더 나아가 잡종(혼종, Hybrid)이 되며 그로 인해 이항 대립적 구조가 파괴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은 민족주의가 정체성 형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으나 탈식민화 과정에서는 그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시각과 통찰은 송창근의 이항 대립적 평가 잣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가능케 한 지점이기도 하다.

기독교 민족주의자

박사학위 논문 1장에서 서술한 연구사는 송창근과 관련한 기존의 거의 모든 연구를 분석하며 소개했다. 이를 통해 이 논문의 독창성을 확인하며 2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그의 생애와 신학, 사상을 살피기 시작했다. 특히 2장에서는 송창근의 민족의식 형성과 배경을 추적하기 위해 그의 유년기 시절부터 그 영향을 끼친 교육기관과 교유관계에 대해 분석했다.
송창근 목사는 3·1운동과 수양동우회 사건 등 민족운동을 배경으로 세 번의 옥고를 치를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그의 첫 번째 투옥은 ‘강우규 의사 사건’으로 인한 것이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총독을 재등실(齋藤實, 사이토 마코토)로 교체하였다. 재등실의 총독 부임이 있었던 1919년 9월 1일, 강우규(姜宇奎, 1855-1920)1 의사는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항거로서 재등실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조선총독부는 일경을 총동원해 조선인 혐의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때 송창근도 함께 검거된 것이다. 강우규는 평안남도 덕천 출신이었는데 송창근 역시 북쪽 인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송창근은 남산 왜성대에서 신문을 받았다. 고문은 밤낮으로 지속되었고 특히 밤에는 발가벗겨 놓고 나무에 묶어놓아 모기들에게 온몸이 뜯기도록 고문했다. 그의 첫 번째 투옥 경험은 너무나 혹독했다. 강우규가 9월 17일 일경에 자수하며 송창근의 스물한 살 첫 감옥 경험은 끝이 났다.
감옥에서 돌아온 후 남대문교회의 조사로서 제대로 일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송창근은 또다시 당국에 붙잡혀갔다. 그의 두 번째 투옥이었다. 첫 번째 수감 후 약 4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1920년 1월이었다. 이번 당국의 체포 근거는 ‘독립운동 관련 창가(唱歌)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은 실제로 송창근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이었다. 체포 이후 두 달여를 구치소에서 보낸 뒤 1920년 3월 19일 판결이 내려졌다. 그에게 붙여진 죄목은 ‘정치범죄 처벌령 및 출판법 위반’이었다.

… 창가를 인쇄 반포, 조선독립운동을 원조할 것을 꾀하여 이를 피고 송창근에게 물으매 피고 송창근도 그 계획을 찬성하여 위의 운동을 선동할 목적으로 대정 9년 1월 말경 소관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 경성부 남대문통 세브란스병원 안에서 등사를 사용하여 전기 창가 600부를 인쇄한 후 피고 정후민 등에게 부탁하여 그중 수백 부를 경성부 내 경신학교·배재학교·이화학당·정신학교 등의 생도에게 반포케 하고 또 스스로 그 창가 백수십 부를 중앙학교 생도 및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등에게 반포하였으며….2

위의 판결문을 통해 알 수 있듯 송창근은 ‘조선독립운동을 원조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창가 반포에 동조했다. 대정 9년, 즉 1920년 1월 말경 송창근은 세브란스병원 안에 있는 등사기를 사용하여 창가 600부를 인쇄하였고 정후민 등에게 부탁해 경신학교, 배재학교, 이화학당, 정신학교 등의 생도에게 배포한 것이다. 결국 송창근은 경성지방법원에서 1920년 3월 19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두 번째로 투옥되었다.3
이후 송창근은 1937년 10월 28일 세 번째로 투옥된다. 그는 당시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민족주의 단체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수양동우회의 본래 명칭은 흥사단(興士團)이다. 이것을 국내에서는 수양동우회라고 불렀다. 송창근은 1931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돌아오기 전 미국 LA에서 흥사단에 가입했고 연설까지 했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1937년 6월 7일, 일제는 한반도의 민족주의자들을 모두 소탕하기 위해 온 역량을 쏟아부었다. 도산을 포함한 흥사단의 단우 70여 명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약 5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후 8월 6일에는 유치장에 감금된 단우들에게 강제로 해산서에 서명하게 하며 흥사단 운동의 마침표를 찍게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송창근 역시 일제에 검거되어 옥에 갇힌 것이다. 송창근은 1937년 10월 28일 체포되어 1941년 11월 17일 풀려나기까지 약 3년여 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이나 감옥에 갈 정도로 뜨거웠던 그의 민족의식은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의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송창근의 민족의식이 형성된 배경의 중심에는 북간도의 기독교 민족주의 교육이 있었다. 그 한 예로 명동학교를 말할 수 있다. 1910년 만 12세의 송창근은 북간도 지역으로 넘어가 민족주의 교육의 산실인 명동학교에서 공부했다. 1909년 명동학교는 정재면(鄭載冕, 1884-1962)을 초빙했는데 그는 신민회의 회원이자 서울 상동학원 출신이었다. 그는 부임 조건으로 성서를 읽고 가르치며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내걸었다. 명동촌 지도자들은 심사숙고 끝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을 시행한 명동학교는 북간도 민족운동의 중심이었으며 그 기반에는 기독교 신앙이 있었다. 명동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과서 중 대부분은 조선총독부가 ‘불인가 교과용 도서 및 발매 배포 금지 도서’로 지정한 것들이었다. 또한 북간도 기독교인들은 한옥을 지을 때 기와의 막새 부분에 태극기와 십자가 문양을 새겨 넣었고 이 막새기와가 명동학교에 사용되었다. 사실 1900년대 초 국내의 한옥에 사용된 막새에는 태극기와 무궁화 문양이 없었다. 게다가 기독교 신앙의 상징인 십자가가 함께 있는 것은 더욱이 그 전례가 없던 것이었다.
소년 송창근은 정재면 선생을 중심으로 황의돈, 장지영, 박태환, 김철, 김하규, 문재린과 같은 명동학교의 기독교 민족주의 교육자들로부터 배우면서 기독교 민족주의 사상을 크게 고취할 수 있었다. 이후 이동휘와의 만남은 그가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동휘는 20세기 초 북간도, 평안도, 함경도, 그리고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르친 목회자였으며 민족 해방과 조국의 광복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쳐 독립운동에 힘쓴 독립운동가였다. 일제는 이동휘를 체포 대상 1호로 지목할 만큼 위협 대상으로 삼았다. 송창근은 이러한 이동휘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이동휘는 소년 송창근에게 민족 독립을 위한 길은 기독교 신앙에 있음을 역설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목사가 돼라.”라고 권면한다. 이후 송창근은 본격적으로 신학의 길로 들어서며 피어선성경학교(현 평택대학교)에 입학했다.
피어선성경학교에서 공부하던 송창근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이었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한 이상재 선생은 1902년 탐관오리들의 모함으로 인해 독립협회 회원들과 투옥되었을 당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감옥에 함께 있었던 김정식, 유성준 등과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며 초대 교육부장을 맡았다. 이상재는 교육을 통한 기독교 민족운동을 전개했는데, 그의 삶 후반기는 서울 종로 YMCA와 함께하는 삶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청년 송창근은 서울 피어선에 입학할 때부터 1926년 일본의 청산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만 10년이라는 시간을 YMCA에서 배우고 활동했다. 집을 떠나 홀로 외로이 생활하며 신학을 공부하던 그에게 YMCA는 두 번째 집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와 같은 이상재 선생을 만났으며, YMCA의 민족운동은 자연스럽게 청년 송창근에게 스며들었다. 아래는 송창근과 이상재와의 한 일화이다.

송창근 형이 첨 서울 왔을 때 아니 이십이 되나마나였는데 YMCA에서 이상재 영감을 처음 뵙단다. 영감께서 바나나 한 가닭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시더란다. 송형은 처음보는 과일이 뭔지도, 어떻게 먹는지도 몰라 어리둥절했다. 영감은 자기 손에 바나나를 껍질채 한입 뜯어 자시는채 했다. 송형도 그렇게 했다. 영감은 깔깔 웃으시며 “저 촌놈 바나나 먹는 꼴 봐라!” 하고 놀리더라는 것이다.4

위의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상재 선생과 송창근은 깊은 교유를 맺고 있었다. 훗날 송창근의 목회 가운데 나타난 해학과 유머는 이상재 선생에게서 받은 유산이었다.
1919년 3월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한 송창근에게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인물로는 함태영5을 들 수 있는데, 남대문교회의 조사였던 함태영이 3·1운동으로 인해 일제에 검거되자 남대문교회의 조사가 공석이 되었다. 송창근은 함태영의 뒤를 이어 그 자리로 가게 되었다. 기독교 민족주의 의식이 투철했던 함태영은 송창근을 눈여겨봤고 자신의 후임으로서 남대문교회의 조사로 낙점한 것이다. 함태영의 뒤를 이어 남대문교회의 후임자로 발탁된 구체적인 이유는 사료에서 찾아보기 어려우나, 일반적으로는 전임자의 목회 철학과 목회 성격을 계승할 수 있는 후임자를 찾아 청빙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송창근은 함태영 조사의 목회 철학을 계승했던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함태영의 목회철학은 어떠했는가?
함태영은 “민족을 섬기는” 목회를 지향했다. 이러한 목회자의 지도 아래 남대문교회는 민족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이갑성, 이용설, 김구 등 수많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출석하는 교회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함태영 목사는 민족목회인 목민(牧民)을 지향하며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남대문교회의 교우들은 민족운동의 지도자였던 함태영 조사의 목회적 지향점을 잘 따랐고 후임자에게도 그 역할을 기대했다. 바로 이러한 기대와 함께 21살의 젊은 송창근을 조사로 청빙한 것이었다. 함태영이 민족을 섬기는 ‘목민 영성가’였다면, 이를 계승할 적임자로 ‘민족목회자’ 송창근을 발탁한 것이었다. 송창근은 함태영의 목민(牧民) 목양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민족목회를 펼쳐나갔다.
“민족을 살리는 목사가 돼라.”라는 이동휘의 권면, 피어선성경학교에서의 신학 수학, YMCA에서의 활동과 이상재와의 만남, 민족지도자 함태영의 이끎 등을 통해 송창근의 민족목회가 형성되어 갔다. 필자는 그의 민족목회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보다 면밀하게 추적했다.

성빈영성과 친일 논박

논문의 3장에서는 「기독신보」에 게재된 송창근의 글을 추리고 전문을 옮겨 소개하였다. 당시 「기독신보」 자료는 『송창근 전집』에도 빠져 있던 미발굴 자료였다. 미발굴 자료와 기존 전집에 실려 있는 송창근의 1차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로 그의 ‘성빈영성’에 대한 내용을 3장에 담았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송창근의 성빈영성은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영성을 창조적으로 계승·심화·발전시켰기에, 청빈영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말씀과 기도의 영성’이 성빈영성에서도 똑같이 드러났다. 송창근은 민족이 처한 고난의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성서를 “보물단지”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철저히 말씀에 집중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성서의 민족지도자 모세와 여호수아, 아브라함, 엘리야와 자신을 일치시킨 뒤 민족목회의 어려움과 부담감을 토로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내主여도으소셔”(내 주여 도우소서) 하며 간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4장에서는 송창근의 성빈영성과 그의 민족의식이 합류한 ‘민족목회’의 실천으로서 조선신학교 설립과 현장 목회자로서의 활동을 서술했다. 송창근은 ‘민족목회’를 펼쳐 나갈 방안으로 ‘조선인에 의해 운영되는 신학교’ 설립을 택했다. 민족목회적 차원에서 조선의 교회와 민족의 앞날을 지도할 교역자 양성을 시도한 것이다. 동시에 선교사 중심의 신학교육 대신 ‘조선인의 손에 의한 신학교육’을 천명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신학원(교) 설립 취지서”에는 이러한 송창근의 의지가 분명히 담겨 있다.

초대에는 선교사가 주체였고 반도의 신자가 객체이었으나 … 이제부터는 반도의 신자인 우리들이 교회 사역의 주체가 되지 아니하면 안될 것이다. 그러면 교역자를 양성하는 기관인 신학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손으로 경영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는 몸과 마음을 받힐 힘도 생기고 땅과 돈을 드릴 이도 생겨야 할 것이다.

새롭게 설립한 학교의 이름은 ‘예수교 장로회 조선신학교’였다. 함께 뜻을 모아준 이들은 채필근, 김우현, 윤인구, 이학봉, 인인식, 조희염, 함태영, 김길창, 차재명, 한경직, 김관식, 김응순 등이었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는 김대현 장로의 공헌이 컸다. 송창근은 김대현 장로를 찾아가 ‘민족이 살기 위해서는 교회가 살아야 하고 교회가 살려면 조선인 교역자가 살아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김대현 장로는 뜨거운 감동을 받고 50만 원(미화 30만 달러 상당)의 거금을 희사(喜捨)하기로 약속했다. 그의 헌신은 민족 자본으로 조선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었다.
송창근은 조선신학교 설립을 민족목회로 여기며 최선을 다해 일했다. 조선교회의 자주적이며 자생적인 성장을 위해 수준 높은 조선인 교역자가 양성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자본과 힘으로 설립한 조선신학교가 배출하는 조선인 교역자는 세계적 수준의 교역자로서 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민족 독립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신학교 설립은 한국교회사에서 우리의 손으로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 설립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다. 더불어 선교사 중심, 보수주의 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한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것 역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송창근의 민족목회는 조선신학교 설립 이후 현장 목회자로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 교회란 민족 해방을 위한 최후의 보루이자 탈출구였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교회는 사회문화적 자율성이 ‘그나마 상대적’으로 보장됐기 때문이다. 송창근은 이러한 교회라는 공간에서 민족 독립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고 신학교육을 통한 민족지도자 양성이라는 민족목회를 펼쳤다. 그 구체적 예가 ‘김천 황금정교회’(현 황금동교회, 이하 황금동교회)와 송창근이 개척한 ‘성 바울교회’(현 서울성남교회, 이하 바울교회)에서의 목회이다. 송창근은 현장 목회자로서 두 교회를 담임하며 교회를 찾아오는 신도들과 신학생 모두를 대상으로 신앙훈련과 신학교육을 실시했다. 이는 송창근이 조선신학교 설립 목적에 두었던 신학교육을 통한 민족지도자 양성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송창근은 바울교회 개척 당시 몇 가지 원칙에 따라 교회설립위원을 선출했다. 첫째 원칙은 신앙 경력이었다. 다른 어떤 기준보다 신앙을 최우선으로 두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둘째, 출신 지역에 따라 고르게 편성했다. 교회가 특정 지역에 따라 파당을 짓고 정치화, 게토화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 것이다. 셋째, 성평등에 기반하여 선출하였다. 교회를 조직하는 일에 의무적으로 여성을 참여토록 하였고, 설립위원 7명 중 2명의 자리는 여성에게 할당했다. 현대의 여성할당제 정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이상으로 볼 때 송창근의 민족목회 기반인 목회철학은 당시 매우 혁신적이고 선구자적인 것이 틀림없다.
조선신학교 설립과 황금동교회와 바울교회의 목회 모두 송창근의 민족목회의 일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창근을 민족목회자로 규정하는 데 이견이 발생하는 까닭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낙인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송창근에 대한 친일 규정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재평가해야 할 것을 주장하며 논박을 펼쳤다. 이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상전향합의서’(이하 합의서)에 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작성된 합의서가 자발적이며 능동적이었는지 또는 감시자는 없었는지, 강압에 의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의미이다. 『친일인명사전』에서 밝히고 있듯 송창근은 1938년 11월 4일 “이광수의 처 허영숙의 집에 참석”해서 사상전향회의를 한 뒤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런데 이 합의서는 강압과 감시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 합의서 작성은 감찰경찰관 세 명의 입회하에 이뤄졌다. 이들의 감시 속에서 어떠한 자유로운 토의와 자발적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겠는가? 강압과 감시 속에서 이뤄진 합의서는 더 이상 효력을 유지할 수 없다. 또한 이 합의서는 참여자들의 자발성과 능동성이 담보된 것이 아니었다. 송창근을 포함하여 합의서에 서명한 모든 이들은 당시 보석자 혹은 재감자로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거나 진행 중인 자들이었다. 일제는 실제로 많은 민족 인사들을 재판과 투옥을 빌미로 협박하거나 강요 또는 회유하며 합의서에 서명토록 했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1930년대 이후 일제의 민족분열 정책을 통해 민족말살이 이뤄졌으며 그 구체적인 전략으로 민족단체들의 합의서 강압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토대로 송창근이 서명한 합의서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수양동우회, 흥업구락부 등 강압에 의해 서명한 합의서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종합하면,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이후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민족운동단체들을 협박하며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전향서에 서명토록 한 뒤 발표를 강압했는데 송창근의 서명이 담긴 합의서 역시 이와 같은 종류의 합의서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둘째,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1938년에 전국의 모든 단체와 개인을 망라해 하나의 전시체제로 편성하며 전시통합체제를 발족시켰다. 1941년에는 이것을 더욱 강화하며 재개편하게 된다. 전 종교계의 모든 조직체들을 강제로 전시통합체제로 흡수하며 친일어용기구가 탄생하게 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송창근이 경북노회 상무위원장(1942),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경북교구회 부교구장(1944. 12. 24-1945. 8. 8),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총무국장(1945. 7. 19-8. 15) 등 ‘친일어용기구 임원’을 수용하며 친일에 앞장섰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하여 송창근이 임원 자리를 수용하게 된 동기와 상황, 맥락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송창근이 적극적으로 친일어용기구 임원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친일파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그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겪은 세 번의 감옥 경험은 친일어용기구 임원 수용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막았다. 투옥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경험이었다. 그러한 이력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창근은 적극적으로 임원 수용을 거부하고 감옥에 갔어야 했다’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드러난 실증적 자료 너머 송창근의 영성을 토대로 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였다. 즉 ‘거룩한 가난’(성빈)이라는 영성의 최종 목적지는 자신을 모두 비워내고 그리스도로 충만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득 찬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송창근은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졌을 뿐이다. 친일어용기구 임원의 자리를 왜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순응했는가에 대해 송창근의 영성을 근거로 한 새로운 해석이 이뤄져야 한다.
셋째, 포스트식민주의 관점에 따른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고려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친일이냐 반일이냐의 이분법적 해석은 지양되어야 하며 다층적인 동기와 원인으로 접근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사 학자들은 친일 행위에 대한 원인을 일제의 정책과 강압, 자신의 기득권 유지, 개인적인 위기의식과 나약성,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의 결핍 등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일탈과 같은 도덕적 문제로 보는 경향이 압도적일 뿐 다양한 동기와 원인을 분석한 연구는 미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송창근을 평가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현재 일제 식민치하에서 누구는 협력했고 누구는 저항했다는 것 이 두 가지의 ‘보기’ 안에서 답을 택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그 현장을 다시 목도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주어진 사료들을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송창근이 남긴 흔적들은 그가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그는 친일파로서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한 것도 아니며 그 어떤 이익도 챙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포스트식민주의 학자 호미 바바의 표현을 빌리자면 송창근은 “제3의 공간” 그 어딘가에서 실존적 번뇌를 느끼며 처절하게 자신의 십자가를 감당하며 살아냈다는 것만이 진실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 사실과 진실의 간극을 좁혀나가기 위한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이러한 송창근의 친일 평가에 대한 논박과 더불어 그의 민족목회를 다시 한번 정리하며 논문을 마무리했다.

나가며

필자는 논문의 마지막 장을 통해 연구를 요약한 뒤 송창근의 민족목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송창근 목사의 민족목회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민족의 아픔의 현장 속에서 그들과 함께 웃고 아파하며 구원과 희망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언론과 문학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했으며 성빈학사와 사회사업을 통해 가난한 자들과 고난받는 자들에게 먼저 다가가 복음을 전했다. 또한 조선신학교 설립을 통해 민족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이룰 교역자와 민족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을 감당했으며 황금동교회와 바울교회에서의 목회를 통해 교회다운 교회를 보여줬다. 더불어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민족 구원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당시 끝까지 복음의 능력을 믿고 민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곳, 민족 구원의 마지막 보루였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그는 스스로 자신을 비우고 친일이라는 오명(汚名)을 수용하는 것 역시 그의 민족목회였다.”
송창근의 성빈영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목회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욱 거세지는 세대 간의 양극화, 경제적 양극화, 진보와 보수의 양극화 속에서 나를 비우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우는 성빈영성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최근의 코로나19 방역 정책으로 인한 한국교회의 위기설은 잘못된 진단이다. 코로나19 이전부터 교회 세습의 문제, 목회자의 윤리적·도덕적 해이 등 한국교회를 향한 경고는 계속해서 존재했다. 코로나19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새롭게 갱신해야만 한다. 송창근이 꿈꾸고 지향하며 실천했던 ‘민족목회’, 그것은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고 그곳에서 바르게 배우고 정직하게 실천하는 신앙훈련을 통해 민족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기독교 신앙으로 훈련받은 민족 지도자들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하며 어떠한 악의 권세도 물리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언하길 바랐다.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야만 한다.
송창근은 우리에게 묻는다. 교회의 본질 회복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바르고 정직하게 배우고 실천하는 신앙적 삶의 훈련은 있는가? 필자는 우리 한국교회가 송창근이 바라고 꿈꿨던 민족을 살리는 교회, 민족을 이끄는 교회로서 다시 한번 자리매김할 수 있길 기도한다.

주(註)
1 서대숙·김인식·이동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강우규 편』(역사공간, 2011), 373. 강우규는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했다. 이후 글방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중년에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입교했다. 1910년에 북간도 도두구로 이사한 뒤 그곳에서 배일(排日)사상과 민족주의 투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재등실 총독이 부임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남대문 정거장에 내린 후 마차에 올라탔을 때 강우규 의사는 그를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당시 강우규의 나이는 65세였다.
2 국사편찬위원회, “삼일 독립시위 관련자 예심조서-박인석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7: 삼일운동 Ⅶ』,(국사편찬위원회, 1986).
3 국가기록원 판결문; 관리번호 CJA0000401, 문서번호 772245.
4 김재준, 『범용기 1권』(한신대학교출판부, 1992), 49.
5 1873년 함북 무산에서 출생한 함태영은 대한제국 시기에 법관 양성소를 나온 뒤 검사가 되었다. 검사로 재직 시 독립협회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피의자는 이상재, 이승만 등이었다. 함태영은 이들을 모두 무죄로 선고하며 석방시켰고, 이 사건으로 인해 함태영은 파면당했다. 그러나 이내 대심원, 복심법원의 판사로 임명되며 판사직을 역임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함태영은 연동교회 장로이기도 했다. 1918년에는 남대문교회의 조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일로 인해 일경에 의해 체포된 것이었다. 함태영은 기독교 신자로서 그리고 남대문교회의 조사로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남대문교회사편찬위원회, 『남대문교회사』(남대문교회, 1979), 95.


김교민|교회사학을 전공하였다. 『한국 민주화 운동과 종교』을 공동저술하였다. 한신대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로 후속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백석교회 청년부 담당 부목사로 시무하며 젊은이들과 즐겁게 신앙생활하고 있다.

 
 
 

2022년 4월호(통권 7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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