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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충청·호남 지역의 기독교 수용 01]
문화·신학·목회 (2022년 4월호)

 

  고흥 향리와 기독교
  

본문

 

* 충청·호남 지역의 기독교는 19세기의 사회적 조건을 배경으로 지역 중간층이 그 수용을 주도하였다. 이 연재는 고흥, 순천, 강경 등지의 사례를 통해 중간층(아전, 향족, 객주)이 어떤 과정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는지 살펴보기로 한다.-편집자

고흥과 동학

1890년 전라도 고흥에 동학이 전파되었다. 포두면 중흥마을의 정영순이 태인의 접주(接主, 동학의 지역책임자)에게 포교받은 것이다. 이어서 송연호(점암면), 이준령(포두면) 등이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서 동학은 고흥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주로 문중 마을 단위로 친인척 등 혈연 중심의 연결망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동학 남접의 유력 지도자 김개남 휘하에 있던 태인 지역 동학 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보은 집회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고흥의 동학교도들은 농민군이 되어 3,000명에 달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초기부터 선봉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주성 점령 이후 고흥으로 돌아온 농민군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도소(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시행하였다. 이들은 6월 14일 고흥의 적폐를 청산한다면서 칼을 들고 와 향리를 구타하는 등 토호와 부패한 아전들을 징벌하기도 하였다. 향리들은 고흥 동학농민군의 주요한 응징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7월 16일 고흥의 농민군이 하동 전투를 위해 그곳을 떠나자 그 공백을 틈타 향리들은 8월 즈음에 수성군을 조직하여 읍성을 방어하였다. 그리고 12월 4일에 있었던 양측의 전투는 수성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체포된 동학농민군은 고흥읍 관풍정에서 참수되었다. 하지만 그 후 고흥의 동학은 빠르게 복구되었다. 도피에 성공한 송연호 등의 지도부는 다시 활동에 나섰고, 결국 1904년 갑진개화운동을 일으켜 조직을 완전히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1906년 천도교 고흥교구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흥양현으로 불리며 4개의 군사 진지와 국영 목장(흥양목장)이 설치되어 있던 고흥은 거문도, 나로도, 절이도 등 150여 개에 달하는 섬들이 분포하고 있어 조세 운반 항로의 중간 기착지이기도 하였다. 1899년 조사를 보면, 고흥은 전라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소작농의 비율이 높고 왕실 소유 농경지 등 면세전(세금을 매기지 않던 토지)이 많아 경제적 상황이 열악한 곳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고흥은 삼정문란으로 인한 임술년 농민 봉기(1862)가 발생한 지역이었다. 이로 인해 동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흥 향리의 기독교 수용

고흥의 동학군이 전주성 점령을 위해 낙안으로 향하면서 몹시 뒤숭숭한 분위기의 1894년 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Reynolds, 이눌서)와 드루(Drew, 유대모)가 이곳을 방문했다. 서양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고흥 땅을 밟은 것이다. 그들은 4월 28일 절이도(금산면)를 거쳐 녹도(도양읍), 축두, 대내(죽천)를 경유해 4월 29일 흥양(고흥) 읍성에 들어와 여장을 풀었다. 선교사들은 주막에 머물렀는데, 레이놀즈 일행에게 특별하게 관심을 표하며 접근했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질청(作廳, 지방관청 하급관리 사무실)의 향리들이었다. 이때 레이놀즈는 그들에게 성서를 배포했다고 전한다. 고흥과 기독교의 첫 만남이었다.
레이놀즈와 드루의 고흥 방문은 일반적인 전도 여행과는 달리 호남 선교 기획을 위해 6주간의 일정으로 전라도 전역을 순회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1894년 2월에 레이놀즈의 사랑방에서 열린 제2회 선교부 연례회의의 결정으로서, 1892년 11월 내한하여 1년 이상 적응 훈련과 언어 습득을 거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게 된 신호탄이었다. 이때 레이놀즈와 드루가 방문했던 도시들(군산, 전주, 목포, 순천)이 결국 나중에 그대로 남장로교의 스테이션(station, 선교거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탐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장로교 선교사의 두 번째 고흥 방문은 약 10년 후인 1905년에 이루어졌다. 광주 스테이션의 오웬(Owen, 오기원)이었다. 목사이자 의사였던 그는 그해 9월 서울에서 열린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자신의 사역지를 기존의 광주 부근에서 고흥을 포함한 바다 끝 남쪽 구역으로 확장시켰다. 1905년 가을 오웬이 고흥 읍내의 한약방에 머물며 전도하자 그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신우구, 목치숙, 박용섭, 박무웅, 설준승, 이춘흥 등 6인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고흥의 향리 집단, 즉 아전들이었다. 신우구(51세)는 고을의 형방과 이방을 지낸 후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박무웅(52세) 역시 이방과 형방을 역임한 토착 향리였다. 설준승(45세)과 박용섭(42세)도 아전 출신이었고, 그중 가장 젊은 목치숙(20세)은 부친(목인범)이 아전이었으므로 향리 2세였다. 이들은 고흥 은퇴 향리들의 모임인 향로재계의 주요 구성원들이기도 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이들이 혼인으로 연결되어, 실제로 한 집안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위의 여섯 사람은 당대 고흥의 유력한 향리였던 고령 신씨 신경무(1795-1866, 호장·전라좌수영리·오위장)의 자손들과 혼맥으로 얽혀 있었는데, 신우구는 신경무의 아들이었고, 설준승은 사위, 박용섭·박무응·목치숙은 손녀사위였다. 또 대체로 이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도 부유해 신우구는 고흥의 3대 부자로 정평이 나 있었고, 목치숙의 부친은 왕실 소유 토지였던 북어포장토의 이장(관리인)이었다.

향족과 기독교

이는 비단 고흥뿐만이 아니라 한말 기독교 수용 사례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초기 충청-호남 지역의 기독교 수용을 주도한 이들은 신분적으로 볼 때 대체로 조선 후기 향촌 사회의 변화에 따라 형성된 중간층의 신분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했던 양반 사족들은 18세기 이후 그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었고, 19세기가 되면서 양반 사회 내부에 심각한 계층 분화가 일어나면서 이전과는 다른 별도의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새로운 사회세력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양반 지배 체제에서 소외되었던 서얼(양반의 첩의 자손), 향리·향임(품관), 향반(토반) 등의 하위 지배층으로서, 이들을 보통 ‘향족’(鄕族)이라고 부른다.
지역사회의 중간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향족은 18세기 이후 수령 권력 집중과 상품화폐경제 발달 등의 정치경제적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상당한 부와 행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급기야 19세기가 되면서 많은 고을의 지배권, 즉 향권(鄕權)이 향족으로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일부가 기독교 수용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양반에 비해 유교 성리학에 대한 충성도가 약했기 때문에 진취적인 성격이 강했고, 기독교 등 근대성의 새로운 사조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 기독교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고자 했다. 이제 막 손에 쥔 기득권을 놓지 않고 싶었던 것이다.
고흥의 향리들은 여기에 더하여 바로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동학 농민의 득세에 사회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일종의 공포감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파란 눈의 선교사 레이놀즈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또 오웬을 자신이 운영하는 한약방에 묵게 하며 결국 그 전도를 받아들여 집단적으로 개종한 그들의 태도에는 어떤 절박함이 묻어 있다. 이를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치부하면 안 될 것 같다. 공교롭게도 레이놀즈가 고흥에 왔던 1894년 봄은 고흥 농민군의 세력이 절정에 이르던 때였고, 1905년의 오웬 방문은 고흥 동학 조직의 복구가 거의 완료된 시점과 일치한다. 그들은 집강소 시기 농민군의 주요한 징치(懲治, 징계하여 다스림) 대상이었지 않은가. 그것은 양반들의 차별을 딛고 일어나 19세기 고흥 향촌 사회의 또 다른 주역으로 성장한 향리들에게 내려진 가혹한 시련이었다. 서양 사람 레이놀즈와 오웬, 그리고 그들이 전했던 기독교는 고흥의 일부 향리들에게 하나의 피난처이자 유력한 대안으로 다가왔을 법하다.

충청-호남 지방 양반과 기독교

그렇다면 충청-호남 양반들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을까? 19세기의 지방 양반들은 동족 마을(집성촌)을 통해 혈연적인 결집력을 강화시키면서 이전 시기에 누렸던 권세를 여전히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들은 마을과 군현 단위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인척 관계에다가, 학문적인 사승(師承, 스승과 제자) 관계, 그리고 서원을 통해 문벌 가문 상호 간의 횡적인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향족 등 중간층의 신분 상승 욕구로 양반을 칭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양반의 권위가 실추되자, 뼈대 있는 구 양반층은 기왕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서 저속한 신흥 양반층과의 교류를 제한하고 스스로 배타적이 되어 갔다. 양반 신분의 하단이 느슨하게 열리고 인구의 많은 수가 그 안으로 몰려들었지만, 저 높은 곳에 있었던 최상층 양반 가문의 권세와 지배력은 튼튼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충청-호남 지역의 상층 양반들은 서울의 개화파 관료들을 보면서 갈등한 측면도 물론 있었지만, 결국은 지방에서 유교 성리학의 사유 세계를 고수하며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정치·경제 권력이 서울로 집중되던 19세기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지방은 지난 수백 년간 그들 양반 사족의 든든한 기반이자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대를 이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그들의 자기방어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므로 대체로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종교적 태도는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되었다.
예를 들어 충남 서산의 경우, 1927년에 발간된 『서산군지』를 보면 당시 서산군 내에는 태안면 창평리 소주 가씨 집성촌 등 모두 20개 가문의 동족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1905년부터 1930년대까지 세워진 서산의 6개 교회-태안의 승언리교회(1905), 서산읍교회(1908), 해미교회(1917), 솔안교회(1927), 유계리교회(1932), 오남리교회(1934)-는 모두 이들 동족 마을과 지역적으로 무관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전통적인 양반 명망가들이 모여 살고 있었던 마을의 기독교 수용 빈도가 매우 낮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북의 자립적 중산층과 충청-호남의 향족들

충청-호남 지역 교회의 형성 과정은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관서) 지역의 그것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비교된다. 즉 충청-호남 기독교의 성립은 향촌사회 내부 중간층의 동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서북 지역의 기독교 수용을 주도한 ‘자립적 중산층’(independent middle class)과는 그 속성에서 어느 정도 구별된다. 북부의 중심이었던 평안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양반 사족의 수가 적었고, 그래서 신분이나 가문의 관계가 크지 않았으며, 중국(청나라) 무역과 상공업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전국에서 가장 번창한 지역이었다. 1919년 3·1운동의 코디네이터였던 남강 이승훈의 인생 역정-평안도 정주에서 놋그릇(유기) 생산과 판매를 통해 거부가 되어 가는-이 그때의 분위기를 웅변한다. 서북 지역의 이 같은 사회경제적 활기는 상품 생산자이자 경제력을 갖춘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중소상공인·중소지주 등 이른바 신흥 중간계급의 광범위한 형성을 촉진시켰다. 근대지향적 사회세력으로서 신흥 중간계급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당시의 사회 현실에 반발하여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능력에 걸맞는 정치·사회적 권리를 요구해 나갔다. 기독교 수용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서북 지방 신흥 중간계급의 기독교 수용은 자신들의 사회적 처지와 이해를 대변해줄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충청-호남 지역은 이른바 서북의 자립적 중산층에 해당하는 요호부민층이 당시 특권세력의 과도한 수탈로 말미암아 독자적인 사회세력으로 눈에 띄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바로 그러한 시대적 사명을 대신하여 기독교 수용을 주도한 이들이 바로 향족이었다. 그들은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구질서에서 배출된 중간층으로, 상층 양반과 구별되는 행위 양식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 수용을 주도했던 향족은 고흥의 향리들의 예에서 보듯, 구체제에 대해서는 별 미련이 없으면서, 문명 개화를 하나의 대안으로 모색하여 기독교와 서구의 문물 제도에 대해 친화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주목하거나 정치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할 능력이 있었기에 근대화의 추세에 전향적이었다. 서북의 신흥 중간계급이 자신들의 처지를 대변해줄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했던 것처럼, 충청-호남의 그들도 문명개화론의 중요한 지지자들이었다. ‘기독교야말로 문명개화의 근본’이라고 하는 이 사상은 기독교 수용의 중요한 전제가 되었다. 기독교를 통해 새로운 시대 환경에 적응하려 한 것이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양반 사족들의 하위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근대에 이르러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역설적으로 신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한말·일제강점기 고흥 기독교

1905년 오웬의 전도를 받은 고흥의 초기 기독교 수용자들은 1906년 9월 신우구의 한약방에서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하였다. 고흥읍교회였다. 그리고 교인이 늘면서 한약방이 비좁게 되자, 채한금의 집, 헌병대 군기고 사무실, 박무웅의 집, 12칸 초가로 모임 장소를 옮겼고, 결국 1922년 김익두 목사 초청 부흥회 이후 신우구 1,000원(현재 약 1억 원), 박용섭 1,000원, 정태인·오중구·오석주가 각각 100원씩 헌금하여 옥하리에 12칸의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목치숙은 1910년 고흥읍교회의 첫 장로가 되었고, 1918년에는 박용섭이 두 번째 장로, 정태인은 조사(助事, 임시 목회자)의 직분을 맡았다.
고흥읍교회가 세워진 지 20년 뒤인 1925년의 교인 분포를 보면, 대체적으로 초기 수용자들의 인척들이 다시 새롭게 가담한 정황이 드러난다. 즉 박용섭은 동생과 아들 세 명을, 설준승은 동생과 두 아들을, 박무웅은 동생 둘과 아들 하나를, 신우구는 아들과 조카 둘을, 목치숙은 목인경을 각각 입교시켰다. 이밖에 이들과 혼연을 맺거나 또는 같은 계급 출신의 향리층 인사들이 차례로 교회에 가입하였다.
고흥군에서 두 번째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금산면 역시 그 과정에서 중간층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흥양현 절이도의 행정구역이었던 금산면은 중앙정부의 사복시(司僕寺, 조선시대 병조에 소속되어 전국의 말 사육과 목장을 담당했던 관청)에서 운영하던 목장토가 많이 있던 곳으로, 1906년 그 이익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당시 집강(執綱, 향청의 임원)인 한익수와 목리(牧吏, 목장을 관리하는 아전) 선영홍이 지역민들을 대표해 상경하여 정부에 그 어려움을 호소하였는데, 그들은 서울 체류 과정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성서를 구입해 돌아왔다고 한다. 한익수와 선영홍은 향임과 향리 출신으로, 지역사회의 전형적인 중간 계층이었다.
그런데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선영홍은 곧 입장을 바꾸어 이탈하였기 때문에 금산면의 교회 설립은 한익수가 주도하였다. 그는 1907년 신흥리교회를 세웠고, 이에 영향을 받은 중소지주 출신의 오석주는 처음에 신흥리교회를 다니다가 이듬해인 1908년 다시 인근 신평리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오석주는 고흥읍교회 건축 헌금으로 100원을 후원하였고, 신평리교회가 예배당을 지을 때에도 비용의 절반을 부담하였다. 또 오석주는 처남 황보익을 전도하였는데, 나중에 황두연 등 아들 4형제와 손자 황성수 등에 의해 지역의 유력한 기독교 가문으로 성장했다.
1920년대 중반 고흥군에는 모두 13개의 교회에 1,000여 명의 교인이 있었다. 이러한 신속한 교세 확장의 배경에는 고흥 기독교의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이 있었다. 1919년 3월 3일 고흥읍교회의 목치숙과 신평리교회의 오석주는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올라가던 중 서울에서 3·1운동의 광경을 목격하고 고흥에서의 만세시위를 위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목치숙과 오석주는 고흥읍과 동강면, 그리고 금산면 사람들을 동원하기로 하고 한익수 등 여러 사람을 포섭하였다. 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4월 14일 고흥 장터에서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당일 비가 많이 내려 시위는 불가능해졌고, 결국 그들은 체포되어 목치숙과 오석주는 징역 6개월, 한익수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들은 석방 이후인 1920년 여름, 고흥 최초의 청년회인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여 각각 초대 회장과 2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고흥읍교회 예배당은 지역 청년들의 공간이었다. 기독교청년회는 1921년 사립 광명학원을 설립하여 모두 60여 명의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또 야학도 만들어 운영하였다. 교사 박성순은 앞서 언급한 박무응의 딸로 광주 스테이션의 수피아여학교를 나온 재원이었는데, 광주 3·1운동에 참여하여 4개월 수감 생활 후 고흥으로 내려와 야학 운동에 투신하였다. 또 고흥기독교청년회는 1923년 지역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하였다. 한익수가 주도한 금산면기독교청년회는 영천학원을 세워 빈농의 자녀들에게 근대 교육을 실시하였다. 영천학원은 1938년 명천보통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유지되었고, 황두연이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1924년 목사 안수를 받은 오석주는 금산면 동정리교회, 도화면 내발리교회, 풍양면 천등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였다. 그는 복음 전도뿐 아니라 「동아일보」 지국장을 비롯해 해태어업조합 감사를 지내는 등 지역사회와 교류하였다. 1940년 고흥읍교회와 순천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오석주 목사는 그것이 우상숭배임을 분명하게 지적하며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1년 6개월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오석주 목사는 해방 이후인 1947년 26개의 교회를 기반으로 고흥기독교연맹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수립 이후 고흥 지역에서 기독교가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송현강|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전주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남대 인돈학술원 연구위원으로 있다. 지역 교회사와 남장로교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대전-충남 지역 교회사 연구』,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등이 있다.

 
 
 

2022년 4월호(통권 7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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