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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22년 4월호)

 

  김규식의 신앙과 학문, 그리고 항일민족운동(3)
  

본문

 

4. 민족해방운동과 신앙·학문 활동(1921-45)

앞서 보았듯 중국으로의 망명 이후 김규식이 펼친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 활동은 한마디로 외교독립운동이었다. 구미 열강을 상대로 한 이러한 외교적 활동은 1920년 이후 민족해방운동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그 운동의 노선과 무대도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전기는 바로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1에 참가한 것이었다.
본래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는 미국에서 워싱턴회의가 진행 중이던 1921년 11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김규식, 여운형 등 56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한국 대표단2은 힘든 여정 끝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표자 일행은 각자마다 ‘조사표’라는 이름의 12개 항목의 신상명세서를 작성했다. 이때 김규식은 그 신상명세서에 생년월일을 1881년 1월 29일로, 직업은 교육가로, 교육 정도는 고등(高等)이며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로 6개국어(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를 적고 있다.3 이 점 하나만으로도 당시 김규식이 국제회의에서 차지할 위상과 역할을 기대할 만했다.
그런데 이 신상명세서 내용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이르쿠츠크 공산당의 ‘후보당원’이라고 밝힌 점이다.4 그러나 김규식의 전후 경력과 활동을 고려해볼 때 비록 ‘후보당원’이라고는 했지만 그가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점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과연 그는 언제, 어떤 경로로 공산당 후보당원이 된 것일까?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또한 당시 극동민족대회 참가 이유가 “소련의 원조라도 받아 임정을 좀 더 키워보자는 생각으로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이 우리가 가게 된 것이다.”5라는 증언이 있고, 김규식이 ‘조선대표단 집행위원회 의장’ 자격으로 참석했기 때문에 당시 사정에 의해 형식적이라도 ‘후보당원’이라고 기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광복 이후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지도자 연속회의에 참석했을 때 한때 이르쿠츠크파에 가입했다가 제명당했다고 술회한 점으로 보아 이때 ‘후보당원’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아무튼 적어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기간에 보여준 언행 등을 볼 때 당시 김규식은 사회주의에 상당히 경도된 듯한 인상을 짙게 풍기고 있다. 그가 한국 참가자 대표 자격으로 행한 개회연설에서 “모스크바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운동의 중심지로서 극동 피압박민족의 대표자들을 환영하고 있는데 워싱턴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다.”라고 미국 측을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점, “우리 조선 대표들은 하나의 불씨, 세계제국주의, 자본주의 체제를 재로 만들어 버릴 불씨를 얻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다.”6라는 언급에서 그러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그가 왜 미국이 주도하는 워싱턴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소련의 코민테른이 주도하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했는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김규식만이 아닌 당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만연했던 시대적 사조의 하나였음을 또한 유념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즈음에 간행된 「공산평론」(The Communist Reveiw) 1922년 7월호의 글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The Asiatic Revolutionary Movement and Imperialism)에서 김규식은 “우리는 종종 극동의 혁명과업과 연관하여 ‘연합전선’과 ‘협동’의 필요성에 관해 언급해왔다. 최근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적 힘이 동아시아 전체를 연대 착취하기 위해 어떻게 결합했는가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당시 자본주의 진영, 즉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 압박 및 착취 등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7
이 밖에도 위의 글에는 1920년대 우리나라를 비롯한 극동 정세, 특히 일본과 중국, 그리고 서방 열강들 사이의 역학관계 추이에 대한 김규식의 예리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 예컨대 한국의 독립은 국제적 역학관계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하면서 향후 한국의 독립운동 양태는 “혁명적·급진적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그 이유는 그들이 싸운다고 해서 더 이상 잃을 것도, 싸우지 않는다고 더 나을 것도 없기에 그들은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보듯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참가 무렵부터 김규식의 국제 인식과 독립운동론은 큰 변화를 보였고, 그 인식과 사상 이면에 사회주의적 성향이 적지 않게 풍겨나기도 한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에서 펼쳤던 외교적 활동과는 달리 민족해방운동에 방점을 두고 피압박 약소민족들과의 통일전선운동 연대를 강조하는 등 노선상의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운동 노선의 변화는 민족 내부의 문제, 곧 임시정부의 노선 문제에 대한 태도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회의 등에서 확인되듯 그가 그동안 믿고 신뢰했던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열강들이 기대와 달리 힘이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논리를 따르며 약소민족의 비애를 경청하려 하지 않는 점에 대한 반작용, 곧 일종의 배신감 같은 분노가 있었기에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로 선회했고, 따라서 한때 사회주의로 경도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후술하듯 이러한 김규식의 입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냉혹한 열강들의 지배 논리와 약소민족의 비애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국제 인식에 일대 변화를 보인 김규식은 상해임시정부의 노선과 위상 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가 대립하는 국면에서 창조파의 입장을 취했다.8 1923년 벽두부터 상해임시정부 내에서 3개월에 걸쳐 90여 차례가 넘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를 개최하는 진통 속에 김규식은 창조파로 입장을 굳히고 창조파 국무위원과 외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창조파 새 정부를 노령 지역으로 옮기고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원을 기대했다. 마침 이때까지는 코민테른과 소련이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기에 1923년 9월 김규식 등 국민대표회의 대표들이 다시 소련에 입국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규식 일행은 그해 말까지 연해주에 머물면서 코민테른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며 ‘민족혁명당’으로서의 한국독립당 조직 문제 등을 논의했다. 김규식은 코민테른 극동국 꼬브류로 의장에게 제출하기 위해 당시 군무 담당 국무위원 이청천(李靑天)과 공동명의로 작성한 비망록에서 “현재 실질적인 조선공산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인민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두 요소가 조선 민중의 해방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9라고 언급했다. 즉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협력한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정부를 만들고자 했던 김규식과 창조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창조파를 지원하겠다던 코민테른과 소련이 레닌의 서거(1924년 1월) 이후 일본과 밀약을 체결하여 시베리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강제 추방당하는 등 정세가 급변한 것이다.10 이러한 사정으로 김규식, 조완구(趙琬九), 원세훈(元世勳) 등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상해로 추방당했다.11 그 충격과 배신감은 이전보다 더욱 크고 깊었다. 피압박 약소민족에게 독립과 해방의 희망을 주겠다고 굳게 약속했음에도 자국의 이익 앞에서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냉엄한 국제 역학관계의 엄혹한 현실을 직접 접하면서 김규식은 약소민족의 비애를 거듭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김규식이 이후 한동안 독립운동 일선을 떠났던 이유가 이러한 저간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1924년 5월 러시아에서 상해로 돌아온 후 1926년 중반까지 약 2년여간 항일민족운동 선상에서 김규식의 활동은 찾기 어렵다. 1927년에 들어서면서 그는 다시 운동 일선에 등장하는데 그해 2월 유자명(柳子明), 이광제(李光濟), 안재환(安載煥), 그리고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왕조후(王), 인도인 간타싱, 비신싱 등과 함께 한국, 중국, 인도 3국 지도자들로 결성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의 회장에 선임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2 또한 같은 해 4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에 집행위원으로 추대된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이 시기 항일독립운동가로서의 김규식의 활동은 다소 침체했다.
여기서 잠시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과 신앙생활의 면모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한 김규식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정치가, 독립운동가보다는 교육자 혹은 종교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의 특사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이래 평생을 민족 문제에 진력했지만, 사실 그의 타고난 자질과 성품은 교육자·학자,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에 걸맞는다고 할 수 있다. 학자·교육자로서의 자질은 중국에 망명해 있던 시절 십수 년간의 교수 생활에서 잘 나타난다. 김규식은 1923년부터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과 동방대학(東方大學)에서의 영문학 강의를 시작으로 이후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와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1924년 모교인 로녹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후 1920년대 말부터 1945년 환국하기 전까지 영문학 교수와 저술가로서 우사는 명성이 높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천진(天津) 북양대학교(北洋大學校) 교수로 재직하였고, 1936년부터는 성도(成都)의 사천대학(四川大學)에서 영문학 강의를 하였으며 또한 남경(南京) 중앙정치학원(中央政治學院)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엘리자베드시대의 연극입문』(Introduction to Elizabethan Drama, 1940)을 비롯하여 『실용영문작법』(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 1944)과 『실용영문』(Practical English, 2 vols, 1945), 그리고 1945년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에 접하며 “자유·평화·정의를 위해 싸우다 이름없이 쓰러진 중국·한국 그 밖의 연합국 용사들에게 바친다”는 『양자유경(揚子幽景): 전승을 기념하여』(The Lure of the Yangtze: In Memoriam Victoriae, 1945) 등을 영문으로 저술하였다.13
이상에서 보듯 학자·교육자로서의 우사의 성품과 명성은 선명하다. 그러나 그가 망명 기간에 어디서 어떤 교회를 출석했으며 종교적인 활동과 신앙생활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입증할 자료는 찾기 어려우며 단지 단편적인 사실이 전해질 뿐이다. 그러나 우사가 망명 기간에 기독교 신앙을 버리거나 개종한 사실이 없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사와 동시대에 기독교를 신앙하고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인사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리거나 혹은 다른 종교로 개종하여 사회주의 쪽으로 경도된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개화기와 구국계몽기에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기독교를 수용하거나 신앙했던 인사들은 국권이 일제에 강점당하자 독립운동의 새로운 수단과 이념을 찾아 새 종교, 새 이념으로 돌아섰다.14 그러나 김규식의 경우는 달랐다. 중국 망명 시절 상해에서 몽골로, 모스크바로, 다시 남경, 천진, 다시 사천성, 중경으로 수없이 옮겨 다닌 관계로 특정한 교회를 정해놓고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었지만, 신앙을 버리거나 개종한 일이 없었다.
오히려 쫓기던 어려운 망명 시절에도 교회를 찾은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935년 중일전쟁이 돌발하기 직전 사천성 성도로 이사하여 사천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김규식은 주일이면 가족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본 형사들과 밀정들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신분이 노출되는 교회 출석을 부득이 그만두어야 했다. 중국 망명 시절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꾸었던 것도 신분 노출을 우려해서였다. 남경 시절에는 이름을 ‘김’(金)이라는 자신의 성자(姓字)를 파자(破字)하여 ‘여일민’(余一民)으로 변명(變名)했으며, 사천대학 시절에는 ‘김우사’(金尤史)라 불렸으며, 이 밖에도 김중문(金仲文), 왕개석(王介石)이라고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15 환국 후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들은 해외생활 30-40년에 예배당 출석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하였다. 그것은 일본 밀정이 우리의 뒤를 따름이라. 이럴 때 예배당을 지나면서도 내 ‘아부지’의 집에 들어가 마음 놓고 예배 한 번을 잘 보지 못하던 우리들의 심경이 어떠하였으랴.”라는 회고, 환국 후 한 연설에서 “혁명운동에 종사하는 신교 신자들은 예배도 못보고 성경책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집안일을 돌봄 틈도 없었습니다.”16라는 술회에서 알 수 있듯 해외 망명 시절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늘 기독교적 신앙과 신념을 견지하며 매사를 기독교적 양심과 기준에 따라 행동했다.
오랜 기간의 해외 망명 생활에도 불구하고 김규식의 신앙이 초지일관이었음은 자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환국 후 처음 맞이하는 부활절을 기념하며 한 기독교 잡지에 “조선교회여 부활하라”는 제하의 글을 썼다. “밀 한 알이 죽었다 다시 사러나매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예수는 부활하셨다. 조선의 교회들아 예수의 부활이 헛되지 않게 하라.”17는 요지의 장문 설교 글에서 김규식이 기독교의 핵심 신앙인 부활신앙을 믿는 독실한 기독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신앙은 개인 구원의 차원을 뛰어넘어 늘 민족의 구원과 부활을 강조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부터 우리 마음에는 다만 삼위 하나님만 계시게 하고 오직 그만 경배하자.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깨끗한 곳 새 마음을 갖고 나가 하나님께 구하자.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자. 만일 우리가 이 나라 건설을 위하야 충성을 다 하다가 죽는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내용에서 우사의 돈독한 신앙심을 재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구상한 신생국가의 모습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깨끗한 나라, 즉 정의와 자유와 평화가 강같이 흐르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었음도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그는 한국교회의 당면한 문제점으로 “예배당 안에 별별 우상 노름을 하게 한 것은 우리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인데 이 마음속에는 재물의 우상, 명예의 우상들이 가득 채워졌음”을 지적하였다. 이 지적은 반세기가 넘은 오늘날에도 해당하는, 정곡을 찌른 문제 제기라 할 것이다. 환국 이틀만인 1945년 11월 25일 모교회인 새문안교회에서 행한 특별 설교에서 ‘한국교회의 통일과 일치’18를 강하게 역설하는 등 그는 현실과 민족의 장래와 함께하는 살아 움직이는 신앙인이었던 것이다.19
1920년대 말 한동안 민족운동 일선에서 멀어져 있던 김규식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초부터이다. 만주사변(1931)과 상해사변(1932)을 거치며 일제의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커우공원 사건에 고무되어 같은 해 11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운동자동맹 등 5개 혁명 단체들이 연합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조직되었다.20 이때 김규식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집행부 외교위원장에 선임되었다.
한편, 1933년 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한민중대동맹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도미하여 여러 후원단체를 결성하는 동시에 수천 달러의 활동 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원동 정세”(Far Eastern Situation)라는 등사물(謄寫物)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글은 10년 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참가 당시의 세계정세 인식과 비교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10년 전에는 소련과 일본 사이의 전쟁을 예측했으나, 10년 후에는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던 것이다. 만약 미일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이 승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은 조선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획득하고 만주에서 일본이 장악한 이권을 인수할 수 있겠지만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22 따라서 그는 중국을 비롯한 동방 피압박 민족들이 연대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할 것을, 말하자면 10년 전에 비해 한·중 간의 연대와 통일전선 구축을 더욱 강조했다.
1935년 6월에 남경(南京)에서 기존의 통일동맹 대신에 강력한 통일전선 정당을 표방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하고 김원봉(金元鳳), 김두봉(金枓奉), 이청천, 조소앙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던 것도 시대에 대한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혁명당의 실질적 지도자는 서기부 부장으로 당무를 총괄한 김원봉이었지만, 김규식은 통일전선운동 조직으로서의 민족혁명당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23 민족혁명당은 당강(黨綱)을 통해 ‘봉건 세력과 일체 반혁명 세력의 숙청,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의 소멸, 민중무장의 실시, 토지 국유제,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적 기업의 국영화, 국민 일체의 경제적 활동의 국가통제’ 등을 표방했다.24 물론 이러한 방침에는 실제로 민족혁명당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의열단(義烈團)의 견해가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민족혁명당의 당강이 김규식의 정치노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자필 이력서〉에서 “김원봉과 그의 의열단이 헤게모니를 휘두르는” 데 대한 불만을 표했지만 민족혁명당의 노선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25 이것을 보면 민족통일전선이라는 대의 아래 자신의 개인적 견해와 입장을 자제하며 의열단 측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중일전쟁(1937)에 이어 태평양전쟁(1941)이 발발하면서 민족해방운동전선의 통합운동은 활기를 띠며 한층 진전되었다. 우선 상해임시정부가 변했다. 과거와 달리 1941년에 제정된 〈건국강령〉을 통해 토지의 국유화를 표방하는 등 임정은 좌익의 요구를 폭넓게 수용하는 변화를 보였다. 이로써 민족통일전선이 더욱 확대 발전할 소지가 마련되자 민족혁명당도 종래의 입장을 바꾸어 임정에 참여하기로 했다.26 그동안 지속적으로 민족해방운동 세력 결집을 주장했던 터라 김규식은 다시 임정에 참여하였고 1942년 10월 임정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43년 1월 임정 선전부장이 되었고, 1944년 2월에는 임정 약헌 개정에 따라 새로 마련된 부주석에 올랐다.27 김규식은 임정의 부주석 자격으로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했고, 그해 11월 23일 임정요원 제1진으로 환국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지 32년 만의 귀국이었다.

맺음말

우사 김규식은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민족운동가이면서, 평생 동안 ‘기독교적 정체성’을 견지했던 신앙인이었다. 유년시절 선교사 언더우드 밑에서 성장하면서 기독교인이 된 그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20대 청년 시절 10여 년 동안 새문안교회의 제직으로 교회를 섬기는 동시에 경신학교·흥화학교 등의 학감과 총교사로 교육활동에 진력했고, 또한 YMCA 교육간사 및 연사로 사회계몽운동을 선도하기도 하였다. 1910년 29세가 되던 해에 새문안교회 장로에 장립된 그는 1911년 경기충청노회 서기로, 이듬해 장로회 총회 결성에서 전국주일학교연합회 부회장 등으로 교회 일에 진력하였다. 그 후 우사는 33세가 되던 1913년에 독립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32년간의 해외 망명 상황에서의 신앙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신앙을 지켜 환국 후 혼란한 정치계와 기독교계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듯 우사 김규식은 자신의 개인적 신앙을 뛰어넘은 성숙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찾으려는 돈독한 신앙심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그는 민족 문제, 정치현실 문제 등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볼 만큼 독실한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평생 동안 개인적 이해관계보다 민족과 나라를 우선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신앙한 기독교의 영향이었다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사 김규식은 한국 현대사의 정치사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낳은 대표적인 기독교계의 신실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라 하겠다.
한편 김규식은 1913년 상해로 망명하여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 상해 임정 외무총장, 학무총장, 구미위원부 위원장,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 의장,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상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조선민족혁명당 주석, 그리고 중경 임정 부주석을 거쳐 환국 후 좌우합작운동과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운동 등 평생을 민족 문제에 진력한 민족운동 지도자였다. 병약한 몸으로 엄혹한 이국땅에서 32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을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생애는 이 점을 잘 시사해준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여러 형태로 전개된 우사 김규식의 독립운동의 활동 양태와 성격은 중도와 좌우파의 운동론을 포용한 ‘통일독립운동론’(統一獨立運動論)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 구미위원부 활동, 그리고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활동과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결성 및 통일전선운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론을 하나로 묶어내려 한 당대 대표적인 통일독립운동론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은 어느 특정한 노선과 이념이나 종교, 인맥과 지맥과 학맥 등에 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는 그때그때 상황과 조건에 따라 자신이 가장 합당하다고 판단하는 입장과 노선을 취했다. 이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당성을 극복한 흔치 않은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개인적 욕망이나 정치적 야심에 매이지 않았다는 점과 그가 매우 이성적이며 합리적 사고의 학자형 인물이었기에 가능했지만, 그 이면에 있는 남다른 기독교 신앙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상대적으로 다른 우익 정치인에 비해 진보적인 노선을 견지했다고 보여진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참가에서 보듯 그는 한국 독립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면 공산당의 ‘후보당원’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기독교인이었다.
이 밖에 일반 대중과의 접촉을 꺼려한, 대중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한 특징이자 한계라 하겠다. 이 점은 광복 이후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혀야 할 기자단의 요청을 여러 번 회피한 태도에서 잘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한계와 특징은 김규식이 평생을 민족 문제에 투신한 독립운동가였으나 태생적으로 ‘전업적인 독립운동가’도, ‘직업적인 정치인’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엄밀히 말해 김규식은 독립운동가와 정치인 이전에 교육자이자 신앙인이었다. 32년간의 중국 망명생활 중 교수, 저술가, 학자로서 활동한 기간을 합산해보면 무려 20여 년에 해당한다. 이렇게 볼 때 그는 본직을 교육활동에 두고 나머지 시간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50여 명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직업을 ‘교육사업’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도 자신의 정체성을 교육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요컨대 우사 김규식은 ‘전업적인 독립운동가’, ‘직업적인 정치가’가 아니었기에 특정한 정파에 경도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고 발언한 지성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에 흔치 않은 경우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남달리 견지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바로 그의 믿음, 곧 기독교 신앙이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다 하겠다. 그렇기에 그는 해방 후 극렬한 좌우 분열의 혼탁한 정국에서도 흔들림 없는 좌우 연합의 원칙을 견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김규식은 6·25전쟁 와중인 1950년 9월 27일 인민군에 납북당해 그해 12월 12일 평북 개천(价川)을 지나 조중 접경 지역인 만포진(滿浦津)에서 삶을 거둔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그의 묘소는 평양 애국열사능에 안치되어 있다.

주(註)
1 이 대회의 명칭은 ‘극동근로자대회’, ‘원동민족대회’, ‘원동약소민족대회’, ‘피압박민족대회’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어 왔으나, 이 글에서는 ‘극동민족대회’라고 칭한다. 임경석, “극동민족대회와 조선대표단”, 「역사와 현실」 32호(1999) 참조.
2 이 대회에 참석한 56명의 대표단 성격에 대해서는 임경석의 글을 참조.
3 강만길·심지연,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항일독립투쟁과 좌우합작』(한울, 2000), 77.
4 강만길·심지연, 위의 책, 77.
5 나용균 회고.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신구문화사, 1974), 77-78.
6 임경석, 앞의 글, 32.
7 강만길·심지영, 앞의 책, 80-81.
8 이정식, 앞의 책, 91-92.
9 강만길·심지연, 앞의 책, 91.
10 강만길·심지연, 앞의 책, 92-93.
11 원세훈은 이때 약혼녀와 떨어져 홀로 추방당하여 이후 공산당에 대한 감정이 극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정식, 앞의 책, 93.
12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는 「東方民族」이라는 기관지를 중국어, 영어, 한국어로 매월 간행하였다. 애국동지원호회 엮음,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362.
13 이상의 영문 저작물 중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판된 책은 다음과 같다. 우사연구회 엮음, 황건 옮김, 『양자유경: 우사 김규식 박사의 영문 장시』(한울, 2000).
14 윤경로, 『한국근대사의 기독교사적 이해』(역민사, 1992), 333-356.
15 장시화 편, 『건국훈화』, 30.(이정식, 앞의 책, 95에서 재인용)
16 새문안교회, 『새문안문헌사료집』(1987) 참조.
17 「활천」 重刊 2호(1946. 6).
18 위의 주.
19 윤경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우사 김규식”, 『한국근현대사의 성찰과 고백』(한성대학교 출판부, 2008), 227-229 참조.
20 강만길·심지영, 앞의 책, 99.
21 이 등사물은 53쪽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대학교 도서관과 한국연구원에 원본이 남아 있다.(이정식, 앞의 책, 99-100 참조)
22 이정식, 위의 책, 100-101.
23 이정식, 위의 책, 104쪽.
24 17개조에 달하는 구체적인 당강(黨綱) 내용과 성격은 강만길·심지연, 앞의 책, 110 참조.
25 강만길·심지연, 위의 책, 113.
26 강만길·심지연, 위의 책, 117-119.
27 임정 선전부장에서 부주석에 오르는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강만길·심지연, 위의 책, 120-136 참조.


윤경로|한국 근대사를 전공하였다. 한성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동 대학의 명예교수이다. 저서로 『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 『한국 근현대사의 성찰과 고백』 등이 있다.

 
 
 

2022년 4월호(통권 7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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