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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도(道)의 신학이란 12 (마지막회)]
문화·신학·목회 (2022년 4월호)

 

  종교와 과학, 테크놀로지, 그리고 도의 신학
  

본문

 

종교 간 대화와 종교와 과학의 대화

지금까지는 주로 한국 기독교가 소홀히 했던 우리의 과거와 관련하여 도의 신학을 논하며 우리 민족 영성의 열매인 전통 종교문화에 대한 맥락적 문해력(Contextual Literacy)을 높이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 신학을 새롭게 구축하는 작업을 중심으로 설명해왔다. 이는 서구신학의 배타적 영향으로 무시된 우리의 과거를 되살리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창조의 손길로 숨겨 놓은 신학적 유산을 되찾아서 복구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물론 이 작업에는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 같은 종교 간 대화가 필수적이다. 종교 간 대화는 20세기 후반부터 세계 신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아 왔다. 오히려 서구신학자들이 앞장서서 “종교들 간의 대화는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신학적 필연”이며, “대화 아니면 죽음”이라는 결정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1
더욱이 21세기에 들어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과제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과의 대화가 되었다. 세계는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혁명을 거치면서 인공지능의 발전과 더불어 급속도로 초-테크놀로지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과학자, 특히 공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인류 문명을 이끌어가는 중심 역할을 감당하는 시대가 왔다. 그러므로 과학기술과의 대화는 앞으로 신학의 핵심적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도의 신학은 종교와 과학, 그리고 테크놀로지와의 대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도의 신학이란, 서구신학에 의해 단절된 우리의 과거를 복구할 뿐만 아니라, 과학 시대에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상황을 모두 다루는 온전한 한국신학, 곧 글로벌 K-신학인 것이다.
세계 학계는 과학시대를 인지하여 20세기 후반부터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주요 학술분야로 정초하고 열심히 담론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존템플턴재단의 후원으로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의 신학과학연구소(CTNS)는 ‘종교와 과학 과목 설치 프로그램’을 여러 대학에서 대규모로 실행했다. 나는 CTNS의 요청으로 이 프로그램의 교수 워크숍을 2002년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개최했고, 4개 대학(강남대, 서울여대, 장신대, 한신대)에 과목을 설치하도록 주선했다. 또한 2001년부터 2년에 걸쳐 「기독교사상」을 통해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전반적으로 소개했다.2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종교와 과학 학술 담론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세계 종교와 과학 담론을 이끄는 세계과학종교학술원(ISSR)의 창립 멤버로서, 지난 20년간 자연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모니터하는 것을 주된 신학 작업으로 주목해왔다. 20세기에 칼 바르트가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고 읽어야 한다고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듯이, 21세기에는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손에는 과학기술의 새로운 뉴스를 읽고 모니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야 우리 기독교인들은 초-과학기술 시대에 창조세계 보존의 사명을 감당하는 청지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경(敬)의 삼중적 대화(trialogue)3

1) 겸허의 방법론(a humble approach)
종교 간 대화를 통해 얻는 경험과 통찰은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훨씬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온전한 종교 간 대화를 위해서는 두 방법론적 단계를 구성해야 한다. 즉 “서술-비교적 단계”와 “규범-구성적 단계”이다.4 여기서 서술-비교적 단계는 종교 간의 대화에 해당하며, 규범-구성적 단계는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에 해당한다.
먼저 서술-비교적 단계에서는 대화 상대방의 견해와 기본적 전제를 존중해주는 인식론적 겸허의 태도, 곧 경(敬)의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의 도식 안에 다른 사상을 부당하게 끌어넣으려는 아전인수적 비교는 범주적 착오이다. 온전한 종교 간 대화를 위해서는 이러한 범주적 착오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대화의 당사자들은 상대방에게 처방을 내리는 지시적(prescriptive) 입장보다는 서술적(descriptive)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종교와 과학 대화의 선구자라는 바버(Ian Barbour)처럼 유신론의 당위성을 전제하거나, 폴킹혼(John Polkinghorne)처럼 교리적 타당성을 설득하려는 자세는 부적절하다. 특히 서구신학자들은 19세기에 그들의 조상이 서구 기독교가 최상이라는 전제하에 무례한 인식론과 윤리적 교만을 가지고 저질렀던 선교학적 오류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진심 어린 겸손의 태도로, 필요하다면 자신들의 신학적 의제까지도 제쳐둘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먼저 경청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규범-구성적 단계에서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이 속한 신앙 공동체를 위한 신학을 구성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 같은 것은 이 신학적 단계에서 적합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이란 필연적으로 신학자 개인의 특정한 사회학적인 위치에서 제한된 종교-문화적 경험들에 의거해서 구성될 수밖에 없으므로, 신학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구성한 신학자의 사회-문화적 편견과 한계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더군다나, 아시아의 다종교적 상황에서 종교와 과학 간의 대화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동양종교들과의 만남, 곧 종교 간의 대화를 수반한다. 즉, 기독교 신학, 아시아 종교, 그리고 자연과학 사이의 ‘삼중적 대화’(trialogue)가 필요하다. 이러한 삼중적 대화를 통해 아시아 신학은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진일보시키고 세계화할 수 있는 매우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유교와 도교를 비롯한 다양한 아시아 종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서구 기독교 신학의 유신론적 지배와 독점을 넘어서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겸허의 방법론에 의거한 간종교적(종교와 종교)이고 간학문적(종교와 과학)이며 통합적인 대화로 이루어지는 경(敬)의 삼중적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제안한다.

2) 삼중적 대화의 자리: 사람다움(인간성)의 지혜(道)
개념이나 방법론 혹은 형이상학을 가지고 서로 다른 전통들을 비교하는 것은 다른 전통의 텍스트에서 자신들의 교리나 의제와 현상적으로 유사한 것들을 찾아내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지적 놀이를 넘어서지 못할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 비평과 탈식민주의 비평은 십자군식의 승리주의로 위장한 채 서구 기독교인들에 의해 자행된 매우 아픈 역사적 과오들을 들춰내왔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은 겉만 그럴듯한 형이상학적 관념으로 가득 찬 대화 대신 구체적 대안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나는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해석학적 지평융합’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종교와 과학 양자 모두가 지닌 목적은 무엇보다 참된 인간성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종교 사이의 진정한 접촉점은 추상적 형이상학, 비교 방법론, 또는 지식의 인식론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인격이나 삶의 방식에 대한 해석학, 다시 말해서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는 길, 인간다움의 도(道)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 중근동의 유일신 전통이나 인도의 신비 전통과는 달리 동아시아의 지혜 전통이 지닌 중요성이 있다. 이 지혜 전통의 중요성은 증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지식을 사변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참된 인간다움을 위한 실천적 지혜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길을 찾으려는 데 있다.
동아시아 종교문화의 공동적 모체는 신유교(neo-confucianism)라고 할 수 있다. 신유교는 11세기에 도교와 불교에 대한 유교적 응답으로 발생한 후 동아시아의 특징적이고 공통적인 종교-문화적 특성들을 형성해왔다. 신유교는 하늘과 땅과의 조화를 통해 완전한 인간성(사람다움)을 실현하는 인간-우주적(天人合一) 비전을 그 기조로 한다.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이론과 실천이 일치하는 지혜, 곧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도(道)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탐구의 주된 목적은 형이상학이나 사변적인 이론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사람다움의 도를 실천하는 데 있다. 즉, 인간관계의 ‘구체-보편적’ 연결망(修身齊家治國平天下)을 통해 자기수양(修身)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다움의 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성화(sanctification)는 이러한 수신 사상과 대비할 수 있는 기독교의 교의이다. 동아시아에서 종교 간 대화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의 자리는 바로 존재론적 사람다움의 실천에 있다. 형이상학, 심리학, 혹은 종교철학과 같은 관념론보다는 올바른 인간성의 실천, 곧 수신과 성화가 그러한 자리이다. 이와 유사하게 과학과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이상적인 자리도 사람다움의 도를 위한 공통적 탐구, 즉 상호적인 자기비판과 자기변혁을 통해 과학적·종교적 지식을 삶의 실천적인 지혜가 될 수 있도록 수양하고 성화시키는 일에 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현상학적 비교 혹은 기술적 지식을 넘어서는 구체적 실천의 문제이다. 어떻게 새롭게 습득한 과학적 지식과 테크놀로지를 사회-생태학적 관계들의 사회-우주적 그물망을 통해 새로운 삶의 지혜로 바꿀 것인가? 이것이 과학과 종교 간의 간종교적이고 간학문적인 대화, 즉 과학과 신학, 그리고 아시아 종교들 사이의 삼중적 대화에서 핵심적인 문제로 대두된다. 다시 말해 삼중적 대화의 화두는 자연과학과 테크놀로지로부터 새롭게 습득한 지식과 능력을 바르게 실현하는 유익한 지혜로 개발하는 자기수양과 성화의 길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적 지식과 테크놀로지가 단지 지식(logos)과 기술의 차원을 넘어 자기수양과 성화의 과정을 통해 정화된 지혜(道)가 될 때, 우리로 하여금 통제할 수 없는 상업주의의 탐욕과 끝없이 편리를 추구하는 이기적 욕망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하고, 사회우주적인 그물망 속으로 참 사람다움의 도를 충만하게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줄 것이다.

3) 자연(自然)과 무위(無爲)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서 ‘자연’이라는 용어는 관용적으로 쓰인다. 그런데 희랍 사상에 영향을 받은 서구신학의 전통적 ‘자연’ 이해에는 문제가 있다. 바로 자연적인 것에 대한 경멸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초자연과 자연이라는 견고한 계층적 이원론에 의해 계승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자연에 대한 동양적 통찰이 중요하다. ‘자연’이라는 한자는 ‘스스로 그러함’(self-so), ‘자발성’(spontaneity), ‘자연스러움’(naturalness) 같은 함의를 포함하고 있다. 동양사상에서 ‘자연’이란 도의 ‘스스로 그러함’, 자연스러운 원초적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한자로 자연과학이란 ‘스스로 그러함의 과학’을 말한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연은 선한 것이다. “자연의 신학”이 좀 더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동양적 이해를 통해서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서구적 이원론의 한계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동양적 전망은 자연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요청한다. 즉, 자연에 대해 지배와 통제의 패러다임에서 적절한 참여(禮)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무위(無爲)적 태도이다. 무위적 패러다임은 모든 만물이 삶의 그물망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적 우주라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유기우주적인 세계 안에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조종하고, 통제하기 위한 자기 결정권을 위해 악착같이 투쟁하는 자율적인 자아(ego)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신(神)-인간-우주적 궤적과 조화를 이루며 서로 연결된 전체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책임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관심해야 할 문제는 최대한의 유익을 갖기 위해 어떻게 자연을 통제하고 감독할 것인지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역동적 전체의 흐름을 바르게 분별하고 창조세계의 스스로 그러함을 존경(敬)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敬)의 태도를 기반으로 한 자연과학, 기독교 신학, 아시아 종교들 간의 삼중적 대화는 변증법적 갈등과 이원론적 경쟁의 서양적 모형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적인 태극의 상징처럼 유기적이고 통전적인 삼중적 대화라는 조화로운 동양적 도의 모형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우주적 다양성을 품으면서 하늘-땅-사람의 삼재가 아우르는 유기적이고 통전적인 도-우주론은 인간과 지구가 대립하는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anthropocene)에 매우 적절한 생태학적 대안일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도-우주론이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 복잡계, 자기조직화, 정보체계 등과 같은 현대과학의 새로운 영역에서 발견된 것들과 보다 잘 어울린다는 주장들이 서구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나오고 있다.5 앞으로 이들은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도의 신학적 주제들이다.

인공지능과 초-테크놀로지 시대와 도의 신학(Techno-Dao)

특히 세계는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혁명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인공지능과 초-테크놀로지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사회를 그러한 세상으로 이끌어가는 집단은 소수의 천재급 디지털 엔지니어들이다. 이들이 이끄는 IT기업(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등)은 역사적 전통이 있는 거대한 제조기업(GE, GM, Ford 등)을 제치고 초경제적 공룡으로 성장했다. 그들이 소유한 슈퍼컴퓨터와 빅데이터에는 세계 구석구석의 지도는 물론이고 세계가 돌아가는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그곳에는 벌써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우리의 개인정보들이 수집되어 있다고 한다. 온라인 사회적 미디어(SNS)를 사용하고 정보검색을 하다 보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그들의 정보망 안에서 움직이는, 부처의 손 위의 손오공 같은 신세가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 메타버스(meta+universe)는 IT 강국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교회를 살리는 좋은 방안이라고 반가워하며 이 기술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교회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이 꽤 있는 듯하다. 그러나 메타버스 같은 테크놀로지야말로 특별한 소수의 엔지니어 기업가들에 의해 설계되어 만들어진 그들의 부처 손바닥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메타버스는 공상과학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시뮬레이션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운 세계로 접어드는 첩경이라 할 수 있다.6 그것은 기독교 창조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신학적으로 훨씬 깊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2016년 3월 스스로 학습(Deep-Learning)하는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가 이세돌과의 세기적 바둑 대결에서 승리한 후, 앞으로 강한 인공지능(Strong AI)이 가져올 수 있는 총체적 기계지능화와 그에 따른 사람다움과 도덕성의 상실을 고려하여, 테크놀로지(Techno-Logos → Technology)가 지능을 넘어 사람다움의 도가 있는 기술로, 이름하여 ‘테크노-다오’(Techno-Dao)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7 인공지능이 초지능(Super-)을 갖게 되면, 그것은 플라톤 이후 서구가 추구해온 순수 이성적 이데아 세계의 기계적 성취, 곧 로고스적 사유의 기계적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감정과 영성 같은 온전한 사람다움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인간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사람다움의 도(도덕성과 윤리성)를 이해하고 공유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벌써 인간이 기계인간(Cyborg)으로 진화하는 특이점(Singularity)이 멀지 않았다는 예측이 무성한 상황에서 그것을 대비할 골든타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듯하다. 인간은 초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을 만드는 데까지는 관여할 수 있지만, 일단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초지능을 갖게 되면, 인간의 지능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수 있는 종말론적 디스토피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들이 경고해왔다. 과학자 호킹(Stephen Hawking)은 보통 인류의 멸망을, 정치가 키신저(Henry Kissinger)는 인간 역사의 종말을 예고했다. 유럽연합과 스탠퍼드와 같은 대학에서도 인공지능의 비인간적 요소와 비윤리적 가능성을 염려하며, 인공지능을 인간적이게 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고 있다. 나는 이에 대해 도의 신학의 입장에서 여러모로 문제를 제기해왔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2022년 9월 독일 카를스루에(Kalrsruhe)에서 열릴 제11차 WCC 총회 에큐메니컬 대화의 한 주요 주제로 이를 채택하고, 나를 자문위원(Resource Person)으로 초청해서 현재 논의를 진행 중이다.
그래서 사람다움의 도를 이해하고 사람과 공존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개발이 주요한 신학적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신 중심주의에 의거해 인간을 간과해온 서구 로고스신학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정작 사람다움이 무엇인가 규정하는 인간론과 휴머니즘에 대한 신학적 자원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에 인간 이해에 대한 가장 오랜 전통인 유교, 특히 사람다움의 도와 덕을 닦는 것을 최상의 삶의 가치와 목적으로 보았던 한국유학, 곧 도학의 중요성이 있다. 또한 그것이 한국도학을 기반으로 하는 도의 신학이 미래 세계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이유다. 이미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 유교가 정의한 사람다움의 품성, 어짊과 의로움, 예의와 지혜(仁義禮智)를 중심으로 인공지능을 학습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알파고 등장 이후 인공지능의 엄청난 발전은 초지능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급진적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운동이 맹렬히 전개되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이제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고, 이러한 초-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스스로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의 시대는 지났고 고성능의 과학기술로 장착된 기계인간 같은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고 강론한다. 그들은 근대 계몽주의의 후계자들로 자처하며, 그것이 인간과 지구를 살리는 최상의 길이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트랜스휴머니즘은 진정한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욕망으로 둘러싸인 실존적 인간의 모호성과 죄악성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수양과 성화의 주체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한 나이브한 인간론에 근거하고 있다.8 현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도 2015년에 공포한 생태환경 회칙(Laudato si’)에서 계몽주의 이후 근대에 정착된 기술지배적 사고방식(Technocratic Mentality)의 비기독교적, 비인간적 측면을 강하게 비판하고 전 지구촌을 살리는 통합생태학(integral ecology)적 태도로 전환하라고 권장했다.9 통합생태학은 내가 제안하는 도-생태학(eco-Dao)과 많은 면에서 공명하고 있다.10
근대의 시스템적인 기술지배적 사고방식에 의해 온전한 사람다움과 조화로운 온생명성, 지구촌 환경과 생태계에 총체적인 훼손이 이루어졌다. 예수의 도는 한마디로 사랑과 생명의 도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은 유교가 말하는 사람다움의 4덕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포함한다. 이런 어질고 의롭고 예절이 있는 사람다운 지혜로 정화되지 않은 지식이나 지능은 오히려 해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진리와 생명의 도이신 예수의 복음과 한국도학의 가르침이다. 사랑의 도를 모르는 초지능과 초-테크놀로지는 오히려 전 지구적 생태계의 종말과 같은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초-테크놀로지 시대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인의예지와 같은 사람다움을 갖추고 예수의 복음이 말하는 사랑의 도를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의 도는 ‘널리 돕는 사람이 되라.’는 우리 민족의 근본 정신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공명하며, 사람다움의 도는 우리 선조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온 선비정신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초지능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으로 재해석된 우리의 홍익인간과 선비정신이다. 그것이 바로 다가오는 초-테크놀로지 시대에 사랑과 생명, 그리고 사람다움의 도를 실천하는 글로벌 K-신학으로서 도의 신학이 전 지구촌을 위해 필요한 이유이고, 또한 반드시 발전시켜야 할 이유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7, 13)

* 김흡영 교수님의 연재 “도(道)의 신학이란”을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부

주(註)
1 David Tracy, Dialogue with the Other: the Inter-Religious Dialogue (Louvain: Peeters Press, 1990), 95; Diana L. Eck, Encountering God: A Spiritual Journey from Bozeman to Banras (Boston: Beacon Press, 1993), x.
2 연재한 글들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김흡영,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대한기독교서회, 2006). 또한 김흡영, 『도의 신학 Ⅱ』(동연, 2012)의 “제3부 도의 신학과 자연과학”(257-366쪽)을 참조하라. 그 후 종교와 과학에 관련된 나의 논문 대부분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3 더 자세한 학술적 논의와 문헌정보는 김흡영, 『도의 신학 Ⅱ』(동연, 2012), 347-366을 참조하라.
4 김흡영, 『왕양명과 칼 바르트: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예문서원, 2020), 263-265를 참조하라.
5 Fritzof Capra, The Tao of Physics: An Exploration of the Parables Between Modern Physics and Eastern Mysticism, 2nd ed. (Boston: Shambhala, 1983), 208-223을 참조하라.
6 Rizwan Virk, “The Metaverse Is Coming: We May Already Be in It,” Scientific American, Feb. 22, 2022를 참조하라.
7 Heup Young Kim, “AlphaGo’s Victory Over Korea Go-Master Showcases Western vs. Neo-Confucian Values,” Sightings, University of Chicago Divinity School, June 23, 2016을 참조하라.
8 나의 트랜스휴머니즘 비판은 다음 두 글을 참조하라. Heup Young Kim, “Cyborg, Sage, and Saint: Transhumanism as Seen from an East Asian Theological Setting,” in Religion and Transhumanism: The Unknown Future of Human Enhancement (Praeger, 2014), 97-114; “Confucian Religious Spirituality and Transhumanist Anthropology,” in Religious Transhumanism and Its Critics, eds Arvin Gouw, Brian Patrick Green, and Ted Peters (Lexington Books, 2022).
9 생태환경 회칙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 『찬미 받으소서』(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5)를 참조하라.
10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Heup Young Kim, “Eco-Dao: An Ecological Theology of Dao,” in The Bloosmbury Handbook of Religion and Nature: The Elements, eds. Laura Hobgood and Whitney Bauman (London: Bloomsbury Academic, 2018), 99-108; 김흡영, “생명생태계의 위기와 도의 신학”, 「기독교사상」 754호(2021. 10) 및 755호(2021. 11).


김흡영|조직신학을 전공하였다. 강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아시아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조직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도의 신학, 종교 간 대화, 종교와 과학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한국과학생명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도의 신학』(Ⅰ,Ⅱ), 『왕양명과 칼 바르트』 등이 있다.

 
 
 

2022년 4월호(통권 7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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