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나의 박사 논문을 말한다]
문화·신학·목회 (2021년 12월호)

 

  불교와 기독교, 삶의 치유를 위해 서로의 길을 비추는 벗이자 맞수
  

본문

 

“Therapeutic Vision, Discipline, and Religious Virtue in Ordinary Life: A Compa-rative Ethical Analysis of Augustine and Zhiyi”(일상에서의 치유적 비전, 훈육, 그리고 종교적 미덕: 아우구스티누스와 천태 지의에 대한 비교 윤리적 고찰)
미국 시카고대학교, 2020

경쟁적이고 억압적이며 무정한 사회 한복판에서 어떻게 한 개인이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며 다른 이웃과 함께 정신적인 삶의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종교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한국의 종교 지형에서 두 중추를 이루는 기독교와 불교는 정신적·사회적 질병에 대해 나름의 진단과 치유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일상의 삶에 영향을 주는 기독교와 불교의 ‘치유의 비전’이 얼마나 같고 다른지를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두 종교는 서로 벗이면서 맞수이다. 두 종교 사이의 유사성을 짚으면 공동의 관심을 공유하는 벗의 모습이 드러난다. 차이를 짚으면 서로의 다름을 인식하고 때로 갈등하며 혹은 다름에서 서로 배우는 맞수의 모습이 드러난다. 두 종교가 서로의 길을 더 잘 이해한다면 자신의 길을 다른 길과 비교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공동의 문제에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도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필자의 학위 논문의 바탕을 이룬다.

비교 방법의 문제

필자의 논문에서는 대표적 기독교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와 대표적 불교 사상가인 천태 지의를 비교하였다. 왜 하필 이 두 사상가들의 사상을 비교했을까? 1990년대 후반부터 비교 종교사상의 영역(비교 종교철학, 비교 신학, 비교 종교윤리)에서는 각 종교의 특징을 본질화하는 거시적이고 일반론적 설명 대신, 개별 사상가들의 문헌을 바탕으로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비교에 집중해왔다. 필자는 기독교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동아시아 불교에서 그에 필적할 위상을 가지는 수나라의 천태 지의(智, 538-597)의 사상을 미시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종교에 대한 일반화와 그에 담긴 편견에 거리를 두려 했고, 동시에 기독교와 불교의 주된 패러다임을 제시한 사상가를 연구함으로써 양쪽의 대표적인 입장을 파악하고 비교하려 했다.
그렇다면 왜 ‘치유적 비전’과 ‘훈육’, ‘종교적 미덕’과 ‘일상성’이 문제가 되는가? 이러한 주제들은 헬레니즘 철학과 불교 철학, 사회 철학, 그리고 인류학과 종교학 연구 등에서 현재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있다. 특히 치유와 일상성은 여러 현대 사상가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천착해온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지평에서의 문제의식은 연구 대상이 되는 고대 텍스트의 세계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찾으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필자의 논문은 이 점에서 비교종교학자들이 강조해온 ‘대화적 반성성’을 지향한다. 비교하는 사람 스스로가 자신의 시점과 상황을 인식하고 자기 가치관을 돌아보고, 비교 주체인 자신의 지평과 비교 대상인 종교전통의 지평 사이를 오가면서, 양쪽이 서로 얽혀 있음을 깨닫는 대화의 과정을 겪는다. 비교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종교의 본질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다. 특정 상황이나 가치관 혹은 관심 위에 서 있는 연구자가 비교의 대상, 즉 대화 상대자들과의 연관성을 상상하며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이런 주제들이 중요한 다른 이유는 종교 윤리학에서 ‘현상학적-해석학적 접근’, ‘탈식민적 종교 이론 비판’, 최근에 대두된 ‘비교 내향성 연구’를 가로지르는 방법론적 전환들을 짚기 때문이다. ‘현상학적-해석학적 접근’은 인간이 정념을 극복하고 삶을 치유하기 위해 어떻게 일상 속에서 가치, 욕망, 감정, 정동 혹은 감각의 습관 등을 변혁해야 하는지를 살피고, 그 체험의 틀이 텍스트의 세계, 즉 ‘우주론적 세계관’ 안에서 자리잡는지를 보여준다. 필자의 논문은 탈식민적 종교 이론 비판을 받아들이면서, 기존의 서구적 모델에 따라서 종교를 내면적 체험의 사안으로만 국한하는 태도를 넘어 신체적 차원과 이에 작용하는 제도적 권력의 문제를 고려한다. 그렇다고 내면성 혹은 내향적 체험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최근의 내향성에 대한 간(間)문화적 비교 연구를 참조해서 우주론적 참여의 문제, 즉 어떻게 개인이 텍스트뿐 아니라 제도적 실천들 속에 얽힌 우주 해명의 틀과 범주, 그리고 가치 체계를 자신의 체험의 틀에 받아들임으로써 저마다의 내면 세계가 개인의 관심을 넘어 더 큰 우주 전체의 삶의 질서에 참여하는지를 살펴본다. 더 나아가서, 종교 이론에서 유사한 구조를 상상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차원에서 고찰하는 형태론적 분석을 따라, 질병과 치유의 문제를 신화, 우주론, 윤리, 사회제도, 그리고 제의적 실천 등 여러 차원에서 내면과 외면 모두를 아우르며 분석한다. 첫째, 삶의 치유가 어떻게 신화와 우주론에서 드러나는 내면적 ‘우주론적 참여’에 연관되는가? 둘째, 삶의 치유가 어떻게 윤리, 사회 제도, 제의적 실천 등의 외면적 ‘훈육’을 통해서 드러나는가? 셋째, 이러한 내면과 외면의 문제가 어떻게 일상의 삶 속에서 매 순간 혹은 매일의 영적 수련을 요구하는가?
필자의 논문은 치유의 내면적 우주론적 참여와 외면적 훈육, 그리고 일상에서의 영적 수련과 훈육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두 사상가의 견해를 각 장에서 상세히 다룬 후, 최종으로 두 장에 걸쳐 고대 사상에 대한 역사적 비교와 현대적 의미를 짚는 구성적 비교를 제시했다. 논문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이 글의 성격상 논문의 원래 구조와 순서를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거시적 비교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우선 내면과 외면, 그리고 일상성의 문제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상에 대한 비교와 두 사상가의 현대적 재구성 부분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내면의 우주론적 참여-신화적 차원

첫째로 필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지의의 치유에 얽힌 ‘내면의 우주론적 참여’를 신화가 가지는 일관성과 비일관성을 중심으로 비교했다. 신화는 한 집단이 그들의 분류방식과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삶의 질서의 감각 혹은 일관성을 마련해주는 이야기이다. 동시에 신화에는 그 일관성의 배후와 기저에 비일관성과 혼돈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 ‘두 도성의 분리’, ‘종말’을 말하고 역사의 배후에 섭리와 조화가 있음을 주장하는 식으로 이야기의 일관성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선의 결여로서 악의 설명불가능성을 지적하면서 비일관성과 혼돈의 여지를 남기지만, 결국 악의 섭리적인 조화를 주장하여 이야기의 일관성을 강조한다. 반면 지의는 무한한 방식으로 중생들을 구원하는 다양한 부처들이 현현한다는 법화경의 이야기적 틀에 따라서 논의를 전개한다. 지의는 ‘무지’와 ‘무명’, ‘번뇌’라는 비일관성과 혼돈이 그 자체로 지혜와 열반, 해탈의 순간이며 부처들의 방편이라 주장함으로써 이야기의 일관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지의는 결국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불가사의한 우주적 본성을 주장하면서 이야기의 비일관성을 강조한다.

내면의 우주론적 참여와 간인격적인 태도-우주론적 차원

둘째로, 우주론적-교의적 차원에서 두 사상가를 분석했다. 두 사상가는 우주론 안의 범주를 통한 분류 방식과 그에 얽힌 가치의 틀 속에서 어떻게 가치, 욕망, 감정, 감각, 습성 등을 포괄하는 우주론적 참여의 내향적 경험과 사회적 태도가 형성되는지를 제시하면서 그것들이 가지는 병리적이거나 치유적인 역동성을 드러낸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자기 삶을 반성할 때 드러나는 기억, 지성, 의지는 우주 내 피조물의 여러 층의 존재 방식과 의식 활동, 욕망의 발전의 정점에 있다. 이는 또한 존재와 진리, 선의 근원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그것들을 추구하는 사랑의 상승인 선과 그것들을 벗어난 악에 열려 있다.
지의에게는 매 순간의 경험, 인식, 충동에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선과 악, 그리고 선악을 초월하는 깨달음 모두를 끌어안는 삼천 겹의 존재 방식이 얽혀 있다. 또한 매 순간의 경험에는 이미 파악 불가능한 공(空)의 본성이 드러나며 이를 깨닫는 불성(佛性)이 존재한다. 매 순간의 경험은 공의 본성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무한한 방식으로 구현하며 중도(中道)를 실현하고 우주적 실체로서 법신과 반야-지혜와 해탈에 참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질병은 존재와 선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돌이킴이며 곧 자기 힘의 확장을 추구하고 이를 확인하고 자만하는 자기 사랑의 문제이다. 이는 앎과 욕망을 전복시키고 감각적 반응을 거짓된 상상들로 왜곡한다. 이것은 곧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얻는 쾌락, 서로 탁월함을 과시해서 우월하고자 하는 경쟁, 그리고 영원을 망각하고 시간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호기심으로 향한다. 인간은 영원한 선과 진리를 봄으로써 치유를 얻으리라는 믿음, 소망, 사랑 속에서 은혜를 받음으로써 지상의 것을 향한 사랑으로 갈라진 의지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향해 통합한다. 은혜에 이끌리는 선의지는 기억 속에 이미 있는 영원한 진리를 가진 보편 개념에 감각의 내용들과 이미지들을 결합시키고 이로써 선악을 진리에 맞게 분별한다.
지의가 말하는 질병은 인간이 모든 상대적, 잠정적 삶의 조건에서 선악을 분별하고 이에 집착하거나 혹은 이를 넘어선다면서 절대적인 경지인 공이 존재하는 양 상정하고 분별하고 집착할 때 발생한다. 상대적 선악을 추구하든 반대로 상대적 선악 구분을 초월한 절대 지평을 추구하든, 매 순간의 경험에서 우주의 본성(空)이 드러나지만, 그러한 추구에 집중하느라 간과된다. 곧 매 순간은 그 자체로 공의 드러남이며, 그러하거나 혹은 아니거나, 그러하면서 아니거나, 혹은 그러한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이런 식의 파악 불가능한 공이 가지는 역설의 논리를 담고 있다. 이를 간과할 때 여하의 확정적인 진술과 가치 판단을 그 자체로 전부라고 보는 분별과 애착에서 질병은 발생한다. 매 순간 드러나지만 끝내 알 수 없는 공의 역설을 보지 못할 때, 인간은 생로병사에 걸친 감각 경험, 정신 작용, 의식 활동 속에서 고통에 시달리며 무지의 상태, 충동, 사랑, 집착, 존재 방식 등을 통해서 더욱 고통받는다. 모든 임시적, 상대적인 추구에 얽힌 어리석음, 탐욕, 성냄의 질병은 절대 지평인 공을 관조하고 평정을 찾으면서 치유받고, 또한 공이라는 절대 지평 혹은 초월에 대한 집착 역시 곧 공은 다름 아닌 이 임시적이고 상대적인 삶의 순간에 있고 드러날 뿐이라는 점을 관조하고 평정을 찾으면서 치유를 이룬다.
이 치유는 양 극단을 서로의 반대 극을 통해서 교정하기에 중도의 치유이다. 완전한 치유는 다음의 깨달음, 즉 모든 잠정적이고 한갓된 매 순간의 경험(假)이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지평의 드러남이며(空) 그 자체로 양자가 구분없이 동일한 것(中)이라는 깨달음에 근거한다. 삶의 구체적 고통의 조건들이 그 자체로 절대의 지평을 담고 있는 구원적인 방편이다. 모든 잠정적이고 상대적인 삶의 순간에서 어두운 삶의 조건인 무명, 그른 인식의 조건인 무지, 욕망과 충동인 번뇌가 이미 그 자체로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신, 지혜로서의 반야, 그리고 해방으로서의 해탈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질병은 영원이라는 가치의 참조점 없이 자기 사랑 속에서 자기 기준과 힘의 확장을 욕망하는 것이라면, 치유는 영원에 따라서 선악의 가치를 판단하고 욕망하면서 선을 추구하는 의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지의에게서 질병은 잠정적인 삶 속에서 선악을 분별하든 혹은 절대적인 것을 상정하고 분별하든 여하의 확정적 가치 판단과 태도에 빠지는 것이라면, 치유는 파악불가한 우주적 본성인 공을 포착함으로써 두 극단 모두를 서로를 통해서 교정하는 것이다.
우주론적 참여를 추구하는 내면 경험은 두 사상가 모두에게 개인이 사회를 향해 가지는 태도와 그에 얽힌 질병과 치유의 문제를 결정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우주론적 참여는 최고선에 대한 사랑이며, 이는 이웃사랑을 수반하는 사랑의 연대이다. 이웃사랑은 이웃의 삶에 지상의 삶에 필요한 여러 재화들을 통해서 유익을 주는 일에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이웃을 영원을 향한 사랑에 향하게 하는 것이다. 천상의 시민들은 지상의 시민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 혹은 지배를 위한 강압적 질서를 같이 겪지만, 지상의 삶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재화들을 사용하고 제도를 유지하면서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평화에 협력하되 그러면서도 그들을 영원을 향한 같은 사랑의 방향으로 이끌려고 한다.
지의에게서도 ‘공’의 파악불가한 역설을 깨닫고 체화하려는 우주론적 참여는 사회적 태도의 모범으로서 보살의 이상을 포함한다. 보살들은, 모든 경험의 순간들이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공을 구현한다는 통찰을 얻고 자기 삶에 체화함으로써 모든 중생들이 가지는 무한하게 다양한 고통에 공감하며 상황에 적합하게 감응하는 능력을 계발한다. 보살은 저마다 다른 순간에서 마주치는 모든 생명을 무한하게 구하고, 무수히 많은 고통을 그치고, 다양한 고통에 응답하는 공감과 다양한 치료법들을 숙지하고, 부처의 탁월성을 이뤄낸다. 보살은 타인을 향한 자비와 고통의 공감과 타인의 행복에 동감하는 희락, 관대한 베품 등 여러 성품을 닦는다.
이와 같은 구조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가는 근본적 차이를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궁극적 가치로서 영원을 사랑하는 것과 이에 대비되는 악의 문제를 강조하면서, 임시적 협력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사랑의 방향성에 따른 두 대립된 집단에 대한 이원론적인 사회적 태도를 제시한다. 반면 지의는, 궁극적 가치로서 중도와 다양한 고통에 상응하는 다양한 치료적 가치와 치료적 감수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의 공동의 목표나 집단적 정체성 없이 매 순간 이웃과의 만남과 그에 얽힌 상황적이고 임의적인 작용 자체만을 긍정하는 다원론적 사회적 태도를 제시한다.

외면적인 문화적, 제도적 훈육들―사회적, 윤리적, 제의적 차원과 일상의 문제

다음으로 필자는 내면의 우주론적 참여를 구조화하는 외면의 문화적, 제도적인 훈육과 그 치유적 작용을 고찰하며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윤리적, 제의적 차원들을 살펴보았다. 인류학자들은 우주론이 어떻게 성스러운 궁극의 기준을 마련하고, 전통을 통해서 전달되고 소통되며, 법과 정치적 규범과 사회적 위계의 틀을 형성하면서 집합적인 치유 경험을 집단 안에서 이뤄내는지를 논의해왔다. 필자는 훈육의 체계로서 외면적인 제도적 실천들이 어떻게 사회적, 윤리적, 제의적 차원 모두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우주론적 범주와 가치 체계를 체화하게 함으로써 우주론적 참여의 경험과 치유를 구조적으로 형성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첫째, 사회적 차원에서의 치유적 훈육을 비교하면서, 필자는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에서 질병 혹은 치유가 어떻게 구성원들로 하여금 우주론적 범주와 가치를 제의적인 행위들, 귄위적 전승, 사회 관계들을 통해서 체화하게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지상의 도성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삶에서 발생하는 질병적 상황이 자기 사랑과 지배의 욕망으로 인해서 분열되거나 혹은 폭력적 질서 유지 혹은 정복으로 왜곡되어 있다면, 시민적 덕 혹은 탁월성으로서 사회-정치적 치유는 서로 평등한 시민들이 하나님을 향한 공동의 사랑을 공적 제의와 설교를 통해서 확립하고 공동체적 정신의 조율을 이루었을 때 일어난다.
지의에 따르면, 국가의 혼란이 귀신이 일으키는 자연재해 혹은 여러 범죄 혹은 불법의 망각을 통해서 외부와 내부 모두에서 생겨난다면, 사회-정치적 치유는 포용적인 대승의 문제, 즉 국왕을 포함한 다양한 보살들이 감응력과 감화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중생들을 폭넓게 감싸 안으며 이들을 저마다의 다양한 상황에 맞게 변화시키는 포용성을 달성할 때 일어난다.
둘째, 치유적 훈육이 가지는 윤리적 차원에 대해서 비교하면서, 필자는 어떻게 제도적인 훈육 체계가 우주론적 가치 체계를 유포하는 전통과 또한 국가 제도와 종교 공동체를 기반으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종교적-도덕적 발전으로 이끄는지를 살펴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적인 예속에서 출발하여 영적 자유로 나아가는 발전과정을 제시하면서, 도나티스트들을 둘러싼 사회 혼란과 같은 최저의 상황의 경우, 강압과 견책이라는 측면에서 행보를 같이하려는 두 권력, 즉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의 협력 관계를 상정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훈육은 종교적 권위에 의존한다. 이는 곧 설교에서의 교훈을 통한 대중들에 대한 지적, 영적 교화뿐 아니라, 웅변과 그 문체들이 주는 역동적, 정서적 감동, 그리고 성례전적 참여 등을 수반하면서, 대중들을 육적인 예속으로부터 영적인 인식과 자유로운 순종에 이르는 발전으로 이끈다.
지의는 종교전통과 권위, 우주적 법이 여러 보살 중 하나인 국왕에게 위탁됨을 주장하면서 정치적 권위가 곧 종교적 권위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다양한 승려의 소통의 장과 그 물질적 조건들을 보조하는 것 외에는 다수의 대중들을 향해 시행되는 종교적 훈육 체계를 의도하지 않지만, 보살계를 받은 재가자와 출가자 수행자들에게는 정교하게 전문화된 종교적 훈육의 제도들과 기술들을 제시한다.
셋째, 치유적 훈육이 가지는 제의적 차원에 집중하면서, 필자는 어떻게 제의적 실천이 일종의 매개자를 소환함으로써 우주론적 참여의 경험을 불러일으키며 이를 통해 사회적 관계들을 구성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제의(세례, 성만찬, 보속 등)는 물, 빵, 포도주 같은 물질적 기호에서부터 영적 진리를 인식해내고 그 진리를 자유롭게 구현하도록 하는 훈육이며, 그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하나의 중보자에 의해서 연합하고 그 공동체에 편입되는 의식 속에서 정신을 밝히고 욕망을 정화하고 감정을 조율한다.
지의가 말하는 제의는 명상 수행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각 수행자는 저마다 상황에 따라 다른 제의적 형식들과 다양한 물질적, 감각적 차원들을 동원하면서 중도의 진리를 파악하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수행과정에 얽힌 장애를 참회하고 상황에 따라 다른 부처들과 신적 존재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호소하며 자신의 행위, 언어, 의지를 다른 제의적 규정에 따라서 조율한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지의가 어떻게 범속한 문화적인 활동들과 한복판에서 매일 혹은 매순간 내적 관조와 공동체적 훈육을 통해서 이러한 우주론적 참여의 경험을 강화하는 방법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지구적 근대화’라는 지평에서 살아 있는 전통들의 경합

필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지의가 서구와 동아시아에서 정초한 전통들이 지구화가 진행되는 현대적 지평 속에서 영향을 발휘하며 생동적으로 지속하는지를 고찰하였다. 테일러(Taylor)가 제시한 바, 근대적 도덕 질서는 세 가지 축, 즉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진정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추구할 자유, 서로의 인격을 인정하며 서로 유익을 주는 공동체적 이상, 그리고 서로의 권리와 자유를 상호 보장하는 민주적 사회 체계로 유지된다. 필자는 두 사상가들이 정초한 현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현대 천태주의의 흐름이 근대적 도덕 질서의 세 문제들과 씨름해오며 살아 있는 전통들로 발전했는지 살펴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를 해석해온 일련의 현대적 사상가들(Arendt, O’Donovan, Milbank, Gregory)과 천태적 불교를 해석해온 사상가들(Nishitani, Ishizu, Ziporyn)의 견해를 참조하면서, 고대의 사상들이 어떻게 현대적인 지평과 새로운 틀 속에서 표현되는지를 제시하였다.

나가며

웰빙과 힐링, 욜로와 소확행 등으로 이어지는 키워드들은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치유를 추구하다 좌절하고, 결국 고통의 완화에만 만족하는 과정을 겪어왔는지 보여준다. 개인들은 질병적인 삶의 한복판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궁극의 가치가 주는 힘을 바탕으로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과 이웃의 만남을 새롭게 보는 관점을 익히고, 새로운 욕망과 정서 그리고 감각적 체험의 습성을 자기 수련과 훈육을 통해서 길러낼 수 있다. 물론 완전하진 않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치유적인 삶의 방식과 그에 얽힌 버텨내는 면역력과 또한 나아지는 회복력을 발휘하면서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아우구스티누스와 지의에 대한 필자의 비교 연구가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벗이자 맞수로서 이런 공유된 문제를 향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자신의 길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작업을 이루는 데 기여하였기를 바란다.

황은영|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과 예일대 신학대학원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종교윤리학/종교철학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독일 마르틴 루터-할레 대학교에서 19-20세기 독일 개신교 비교신학 방법론의 문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21년 12월호(통권 756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