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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북한이탈주민의 이해와 한국교회 06]
문화·신학·목회 (2021년 12월호)

 

  북한이탈주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 행복한 시민이자 그리스도인으로
  

본문

 

‘모범적인’(?) 북한이탈주민(이하 ‘탈북민’)의 조건은 무엇일까? 한국 사회와 교회가 기대하는 소위 바람직한 탈북민의 모습은 어떠할까? 한국 사회와 교회가 상정하는 모범적인 탈북민 상은 다음의 몇 가지가 있는 듯하다.
첫째, 탈북민은 한국 사회에 위협적이지 않아야 한다. 남북한의 적대적인 분단 상황에서 탈북민은 남한에 온 이상 남한 편에 확실히 서야 한다. 이에 따라 탈북민은 남한의 편에 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요구에 직면하곤 한다.
둘째, 탈북민은 통일을 앞당기는 일과 통일 후에 북한 사회를 안정화시키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입장에서 탈북민은 통일의 중요한 자원이다. 따라서 통일과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셋째, (통일의 사명을 위해서) 이들은 한국 문화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 남한 말씨를 얼른 배워 남한 사람들이 이들과 의사소통하고 일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 탈북민이 남한 사람과 구분이 잘 안 될 정도가 되면 훌륭하게 적응한 것이다.
넷째, 탈북민은 한국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빨리 자립’해야 한다. 이 말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던 모습과 달리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함을 의미한다. 남한 국민의 세금을 축내지 않아야 좋은 탈북민인 것이다.
다섯째, 교회의 입장에서 탈북민은 ‘빨리 예수 믿고’ 북한 선교사로 살아야 한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일과 북한 복음화를 위해 부르셨다고 믿고 있다. 탈북민이 교회를 성실히 출석하면서 여러 모임에서 자신의 신앙을 간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더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와 교회가 탈북민에게 기대하는 바는 분명하다. 확실한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통일을 위해서 기여해달라는 것이다.
위의 기대들이 꼭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의 기대들이 우리 한국 사회와 교회의 너무 ‘일방적인 바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탈북민의 입장에서 한국 생활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들은 어떤 꿈과 기대가 있으며, 북한과 통일을 향해서는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탈북민의 미래와 그들의 역할을 가늠함에 있어서 우리가 일방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앞서, 먼저 이들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1 이 글에서는 ‘탈북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통해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와 역할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통일이라는 짐 대신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한국 사회가 탈북민에게 부여하는 의미 중 가장 큰 가치를 차지하는 것은 ‘통일’이다. 탈북민은 ‘미리 온 통일’이자 ‘통일의 마중물’로서 한국 사회에서 나름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이들이 전 세계 각국에서 한국으로 온 여타 이주자와 다른 사회적 혜택을 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이 법적으로 원래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된다는 점도 고려된다. 헌법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북민은 한반도의 일부분을 불법적으로 점유한 북한 정권을 피해 남쪽으로 온 원래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탈북민은 현재의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받는다. 그런데 한국에서 살아가는 탈북민의 중요성을 단지 통일의 관점에서만 보고 평가하면, 정작 탈북민 자신이 소외되는 일이 발생한다. 통일이라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탈북민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의 문제가 간과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탈북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서 ‘통일’이라는 거창한 담론을 잠시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탈북민을 ‘새로운 이웃’이자 낯선 땅에 정착하는 ‘이주자의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한 사람의 탈북민을 마주할 때 중요한 것은 통일이 아니다.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
한국에 온 탈북민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새로운 삶의 터전에 잘 뿌리 내리고 정착하는 일이다.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새로운 곳에 이주한 여타 이주민과 다르지 않다. 물론 대부분의 탈북민은 마냥 행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북한에 남겨진 가족이나 친척이 있기에 한국 생활을 마음껏 누리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한 삶을 누릴 자격과 권리가 있는 존재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이들도 자신의 꿈을 따라 자아를 성취하며, 공동체에 소속되어 관계의 즐거움을 누리고, 삶의 소소한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민족적인 사명의 부담감이나 북한을 바라보는 편견 가득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 한 탈북민으로부터 한국의 언론 매체들은 탈북민의 ‘과거’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북한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 탈북하면서 겪었던 힘든 이야기, 탈북민의 가슴 아픈 개인사만 듣기를 원한다는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이따금씩 나오는 탈북민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도 주로 한국 사회에서 이들이 겪는 부적응과 실패만 부각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한국에서 건강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서 잘 살아가는 탈북민의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하였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매체에 등장하는 탈북민의 고되고 가슴 아픈 이야기는 잠깐의 동정심과 연민을 자아내는 정도로 소비돼버리곤 한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 남북하나재단2을 통하여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서 잘 살아가는 사례가 적극적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남북하나재단은 지난 몇 년간 탈북민이 한국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착한(着韓)과 자립(自立)을 이룬 사례 모음집 『북한이탈주민의 착한 공감』을 네 차례에 걸쳐 발간했는데, 그 책에는 160여 편의 다양한 탈북민 정착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3 그중에 몇몇 사례의 제목만 살펴보자.

“다르고 부족한 것을 디딤돌 삼아” / “장기근속 9년, 제과 제빵기사로 인정받아온 시간” / “탈북보다 더 힘든 것은 없다” / “공방에서 독하게 일을 배운 그 후” /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스트레스” / “평범함 누리는 게 행복이자 성공한 정착” / “일할 수 있는 행복을 아는 ‘서산 억척이 북한 아줌마’” / “맛도 모르던 커피에서 희망의 향기를 맡다” / “승객에게 행복을, 동료에게 열정을 주는 나는 희망버스 기사입니다”

제목들만 보아도 이 글의 주인공들이 한국에서 자신의 삶을 얼마나 부단히 가꿔가는지를 느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삶에서 주어진 일상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살아가는 탈북민이 수없이 많다. 이들의 일차적 목표는 한국에서 잘 살아가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한 가까운 탈북민 목회자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저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이곳 대한민국에서 건강하게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에서 이들이 물질이 풍요한 사회 속에서도 좋은 가치관을 가지고 즐겁고 보람되게 사는 모습을 남과 북에 있는 주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통일이 한 걸음 앞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가 보기에 한국 사회에서 탈북민이 가진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건강한 삶이란 육체적인 건강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건강도 포함하는데, 그는 탈북민이 한국 사회의 물질적 풍요에 압도되지 않고, ‘좋은 가치관’의 기반 위에서 ‘즐겁고 보람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통일에 대한 기여는 이와 같은 조건 위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통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탈북민은 단지 통일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먼저 한국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할 권리와 자격이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거창하고도 당장 해결하기 힘든 통일이라는 짐을 탈북민에게 섣불리 지우지 말자는 필자의 제안은 탈북민에게 통일이 의미 없거나 이들이 통일에 기여할 것이 없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한반도의 통일과 회복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탈북민의 역할이 크고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다만, 탈북민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과 통일에 대한 강조가 너무 일방적이며 성급하다는 점에 우려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탈북민을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전자가 탈북민을 어떤 당위적인 목표를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라면, 후자는 탈북민의 잠재력에 더 주목하는 입장이다. 당위성은 우리의 관점에서 그들에게 강요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쉽다. 그러나 잠재력은 이들의 가능성에 주목하되 이들이 주체적인 모습으로 스스로의 사명을 찾아갈 것을 기대하며 곁에서 동행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면에서 한국 사회가 원하는 통일을 일방적인 방식으로 탈북민에게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이들이 가진 잠재력과 창조적인 역량이 자연스럽게 한반도의 회복과 통일의 과정 가운데 연계되어 드러날 것을 전망하고 기대하며 응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탈북민의 잠재력은 무엇이며 이들은 향후 통일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첫째, 탈북민은 ‘사람의 통일을 이뤄가는 중재자’가 될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은 세 단계의 분단으로 구분된다. 먼저 1945년 해방과 함께 맞이한 영토의 분단이 있다. 이후 1948년 남북한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체제의 분단을 맞이한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전쟁은 남북한 모든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분단이자 사람의 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의 분단은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는 방식으로 지난 70년간 증폭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남북한의 문화와 삶의 방식, 가치관은 매우 이질적으로 형성되었다. 탈북민의 존재는 이러한 마음의 분단을 극복하며 사람의 통일을 매개하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다뤘듯이 이들은 남북한의 문화를 모두 경험했으면서도 어느 한편에 완전히 종속될 수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이들은 두 문화의 주변부이자 경계선에 서서 하나의 접점이 되어 서로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한편이 다른 한편을 흡수하고 장악하는 방식이 아닌 제3의 지대를 열어갈 수 있는 창조적 주체가 될 수 있다. 특별히 남북한의 분단 현실을 상대화하며 하나님께서 열어가시는 새로운 길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이에 참여할 수 있다면, 탈북민은 이 시대에 남남갈등으로 수십 년째 정체되어 있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둘째, 탈북민은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다. 탈북민은 남북한의 분단 현실의 희생자이자 큰 상처를 경험한 자들이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이들의 “상처와 아픔은 새로운 비전을 위한 출구나 기회”가 될 수 있다.4 이들은 남북한을 모두 경험한 사람으로서 남북한 주민이 각각 경험했던 분단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분단으로 인한 헤어짐의 아픔, 타인의 편견과 차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절실히 경험했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말 그대로 상처 입은 존재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 상처와 아픔 속에서 먼저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면,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깊이 경험할 수 있다면, 상처받은 이 한반도 전역에 하나님의 치유와 은혜를 흘려보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셋째, 탈북민은 ‘미래의 북한 사회를 건강한 시민사회로 세워가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언젠가 북한은 분명히 열리게 될 것이다. 현재의 모습으로는 지속가능한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탈북민은 북한에 돌아가서 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배운 경제적인 역량과 기술, 교육의 경험들을 나누게 될 것이다. 특별히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북한 사회에 장기적으로 꼭 건강한 시민사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북한 주민의 의사와 역량이 온전히 존중되며 북한 사회를 포함한 한반도 전체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의 건강한 일원이자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깊이 경험할 필요가 있다. 민주적이면서도 자발적이며 책임 있는 시민의식을 가진 탈북민을 통하여 북한 사회에도 언젠가 자유롭고 건강하며 민주적인 사회가 세워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도 이들이 건강한 시민성을 가진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동행하며 함께하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에 주는 함의

한국교회를 처음 방문하는 탈북민은 교회 성도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곤 한다. 한국 생활이 아직은 낯설고 서투른 탈북민에게 이러한 관심과 지원은 큰 도움이 된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교회만큼 탈북민을 환대하는 곳도 없다. 문제는 많은 탈북민이 한국교회의 환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환대를 진정한 환대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탈북민들이 그 환대 가운데 놓인 숨은 의도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교회는 탈북민을 향해 여전히 일방적인 방식을 고수한다. 북한이라는 무신론적 사회에서 온 이들에게 복음을 빨리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지나친 방식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탈북민에게 복음을 빨리 전해서 예수 믿게 하고 장차 북한선교 혹은 통일선교의 일꾼으로 세우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다분히 목표 지향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도구적인 접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의도가 탈북민에 의해 어렵지 않게 간파당하고 오해를 산다는 점이다. 때로 이들은 그러한 교회의 관심 속에서 위선의 냄새를 맡기도 하며, 거꾸로 교회를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결국 교회 출석이 하나의 거래로 전락하기도 한다.5 존 스토트(John Stott)가 일찍이 비판했던 것처럼, 사랑과 섬김이 전도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않을 때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 힘들다. 의도를 가진 사랑의 행동은 ‘낚싯바늘에 달린 미끼’에 불과하다.6 그러므로 스토트는 기독교인의 사랑과 섬김이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7 특별히 한국교회의 탈북민 사역은 이 부분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얄팍한 친절과 도움에 이어지는 전도의 방식으로는 탈북민의 마음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평생 북한에서 각종 선전선동과 구호에 휘둘리다가 온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을 진정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은 ‘대가 없는 사랑’이다. 필자는 탈북민들로부터 자신들은 기독교인의 말이 아니라 진실되고 조건없는 사랑의 섬김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을 열게 되었다는 고백을 수없이 들었다.
한국교회는 통일과 선교라는 어떤 목적과 기대를 가지고 탈북민을 바라보기보다는 이들 모습 그대로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탈북민에게 해줄 말은 “여러분, 회개하여 빨리 예수 믿고 다시 북한에 선교하러 가십시오.”가 아니라 “여러분,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쉬십시오. 저희가 가겠습니다.”라는 말이 아닐까? 우리가 나타내는 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통하여 탈북민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통일을 중재하고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하며 미래의 북한 사회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주역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주(註)
1 그렇다고 남한 사람의 입장에서 필자가 이들에 대하여 기대하고 기도하며 소망하는 바를 다루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급적 탈북민의 관점에서 이들의 상황과 미래를 보도록 함께 노력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 글은 탈북민을 만나고 교제해온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하지만, 여전히 남한 사람이자 목회자로서 필자의 주관적인 관점에 기초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2 남북하나재단(www.koreahana.or.kr)은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으로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제30조’에 따라 탈북민의 한국 사회 정착을 돕기 위해 2010년에 설립되었다.
3 여기서 ‘착한’(着韓)은 대한민국을 뜻하는 ‘한’(韓)에 ‘정착할 착’(着)을 써서 ‘대한민국에 잘 정착한’이라는 의미이다.
4 헨리 나우웬, 최원준 옮김, 『상처 입은 치유자』(두란노서원, 2011), 125-126.
5 김의혁, “북한이주주민을 향한 환대의 선교”, 「선교신학」, 제47집(2017): 162.
6 존 스토트·크리스토퍼 라이트, 김명희 옮김, 『선교란 무엇인가』(IVP, 2018), 29.
7 존 스토트·크리스토퍼 라이트, 위의 책, 31.


김의혁|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Intercultural Studies)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강원도 화천에 있는 통일부 북한이탈주민 정착교육기관인 제2하나원의 하나교회 담당목사로 일했다. 현재 숭실대학교 일반대학원 기독교통일지도자학과 전임 교수이다.

 
 
 

2021년 12월호(통권 7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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