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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21년 10월호)

 

  1970-80년대 ‘일한연대’와 국경을 넘는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
  

본문

 

“トランスナショナルな公共圏とメディアの可能性に関する考察-1970~80年代における「日韓連帯運動」を事例に”(트랜스내셔널 공론장과 미디어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1970-80년대의 ‘일한연대운동’을 사례로)
도쿄대학대학원 학제정보학부, 2015


1970-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외에서의 지원 및 연대는 한인이 많이 거주하던 미국(북미), 독일(유럽), 일본 등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조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을 염원하던 재외한인들은 각 지역의 지식인, 활동가, 기독자 등과 연대하며 한국 군사정권을 비판하고 민주화 세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거나 구속자 석방을 위한 시위 및 데모를 조직하기도 했다. 또한 해외 각 지역의 정부 및 국제 인권단체가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인권침해를 규탄하고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로비 및 청원 활동 등을 통해 압력을 가했다.
필자의 박사논문은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외의 지지 및 연대 활동을 특히 일본에서 일어난 ‘일한연대운동’1을 중심으로 파악해보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갖는 초국가성(transnationality)과 그 정치적 함의를 밝히고자 했다. 한국과 일본은 구 식민지와 구 종주국이라는 관계를 갖고 있고, 냉전체제하 ‘반공’으로 묶인 ‘국가’ 간의 유대 속에서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필자는 일본에서 ‘헤이트 스피치’ 데모가 한창이던 2010년대 초반, 일본 종합잡지 「세카이」에서 1970-80년대에 연재된 ‘T. K생’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과 한국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일본에 건네진 지하문서 및 일본 연대세력의 지지성명 등을 읽게 되었다. 그 당시에 국가를 넘어선 시민들 간의 교류와 연대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정치적 함의는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사회사 및 교류사 연구의 측면뿐만 아니라, 글로벌 사회에서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선 시민들의 연대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와 관심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글에서는 박사논문 1, 2장에서 다룬 트랜스내셔널 공론장 및 트랜스내셔널 연대와 관련된 이론적 논의와 5장에서의 종합잡지 「세카이」를 중심으로 한 ‘일한연대’ 담론분석은 생략하고, 3장에서 기술한 일한연대운동의 전개를 간략하게 소개한 뒤, 이러한 연대를 가능하게 한 국경을 넘는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 활동과 그 의미에 대해 분석한 4장의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연구를 위해 필자는 한국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서적, 활동가들의 회고록, 운동 미디어, 성명서, 전단지 등의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와 더불어 한국, 일본, 미국, 독일 등의 관련 활동가들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대상은 박형규, 오재식, 지명관, 쇼지 츠토무, 정경모, 와다 하루키, 폴 슈나이스, 패리스 하비, 도미야마 다에코 등이었으며, 인용하지 않은 예비조사 성격을 가진 인터뷰를 포함해 모두 36명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1970-80년대 일한연대운동의 전개

1960년대 일본의 시민사회는 안보투쟁,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 등으로 정치 및 사회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역사상 가장 높은 시기를 보냈다.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에서는 미국의 전쟁에 협력함으로써 일본 및 일본 시민들이 ‘가해’에 가담하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가해에 대한 의식화는 이후 민족 차별에 대한 재일조선인의 고발과 투쟁에 연대하는 일부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1970년대 초 일본에서는 한국의 저항 시인으로 알려진 김지하와 ‘재일교포학생학원침투간첩단사건’(1971)으로 수감되어 고문을 당한 서승·서준식 형제에 대한 ‘구원운동’이 시작되었다. 김지하의 작품집은 1971년 일본에서 번역·간행되었고, 1972년 김지하가 풍자시 〈비어〉로 체포·구속되자 두 개의 ‘김지하구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4월에 결성된 그룹은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 극단 ‘민예’의 요네쿠라 마사카네 등의 문화인과 국제앰네스티 일본지부를 중심으로 결성된 것이며, 5월에 결성된 그룹은 오다 마코토, 츠루미 슌스케 등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에 관여했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었다. 한편, 재일한국인 유학생으로 한국에서 유학하다가 간첩 혐의로 수감된 서승·서준식 형제에 대해서는 동창회, 기독자 그룹, 학생 그룹 등에서 구원 활동을 펼치게 되며, 이는 ‘서군형제를 구하는 모임’(1971-90)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렇듯 1970년대 초 일본에서는 한국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받는 한국 민중에 대한 ‘구원’의 측면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구원’으로 시작된 운동은 그러나 운동 내외의 다양한 문제제기 속에 단순히 타자를 ‘구원’한다는 접근방식이 아니라, 일본/일본인의 ‘자기개혁’이 필요하다는 ‘연대’ 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문제제기의 한 예로 1972년 5월에 결성된 김지하구원위원회가 김지하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을 한국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방한해 당시 연금 상태의 김지하를 만났던 에피소드를 들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는 츠루미 슌스케는 당시 김지하를 만난 자리에서 “여기에 당신을 사형하지 말라는 취지로 세계에서 모아 온 서명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김지하는 “Your movement cannot help me. But I will add my voice to help your movement.”(당신들의 운동은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운동을 돕기 위해 내 목소리를 더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츠루미 슌스케는 회고록에서 당시 김지하의 “완전히 대등한 인간관계”에 기반한 이와 같은 발언에 놀랐으며,2 이 에피소드는 이후 일한연대운동의 다양한 운동 미디어 및 전단지 등에서 연대의 의미를 성찰하는 계기로 회자된다. 즉, 김지하의 응답은 일본 연대세력에게 “안이한 지원운동에 대한 거절”이며, “일본인 자신을 구해내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해석되었다. 1974년에 결성된 ‘일한연대연락회의’의 사무국장 와다 하루키는 1975년 11월 「세카이」에 실은 “일한연대의 사상과 전망”이라는 글에서 “우리들은 [김지하의 응답을] 반복해서 듣고, 반복해서 말해왔다.”라며 타자(한국 민중)에 대한 억압에 가담하고 있는 일본/일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기개혁을 통해 이를 바로잡는 것이 연대의 의미라고 논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일본이 한국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자기개혁을 수반하는 연대운동으로서의 일한연대운동은 재일한국인정치범구원운동 및 김지하와 김대중 등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 인사에 대한 구명운동으로 일어났다. 한편 한국의 군사정권과 결탁해 정치경제적 신식민주의를 통해 한국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데 가담하고 있는 일본 정권과, 이러한 착취 및 가해 구조에 무관심한 일본 대중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는 다양한 시민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74년 1월에는 일본기독교협의회를 중심으로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가 결성되었다. 결성을 알리는 성명문에는 “한국 기독자들의 신앙에 기반한 투쟁”에 “충격과 함께 날카로운 문제제기와 촉구”를 받았다며, 이는 “그들이 지금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는 한국의 정치 정세는 일본의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오늘날의 경제침략이 큰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외에도 1974년 4월에는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에 참가했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한연대와 관련된 여러 시민 그룹의 연계조직으로 ‘일본의 대한정책을 바로잡고, 한국 민주화 투쟁에 연대하는 일본연락회의’(약칭 ‘일한연대연락회의’)가 결성되었다. 또한, 기생관광반대운동을 기점으로 형성된 여성연대운동(대표적으로 ‘아시아여성의 모임’이 1977년 3월 1일 결성), 공해수출반대운동,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일한민중연대수도권연락회의(1979년 결성), 민족차별철폐운동 및 전후보상운동 관련 개별활동가 등이 재일한국인 민주세력과 느슨하면서도 긴밀한 연계 속에 일한연대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구체적인 활동으로는 한국과 일본 정부에 태도 변화를 촉구하며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는 청원 활동, 서명운동, 집회 및 데모, 기도회, 세미나 및 학습 활동, 엽서 보내기 등의 캠페인 및 문화 활동 등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및 김대중구명운동과 관련된 연대 활동 이후, 일한연대운동은 규모나 열기의 측면에서 축소된다. 그러나 연대 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이자 일본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된 전쟁 및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과거사 문제가 중점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다. 1984년 ‘전두환방일반대운동’에서 와다 하루키(일한연대연락회의/연대위원회 사무국장), 요시마츠 시게루(재일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모임 전국회의), 도미야마 다에코(김지하구원위원회 및 예술운동을 통한 일한연대운동)가 결의표명자로 등단한 집회에서는 “전두환의 방일은, 한일 양국이 강조하는 ‘신시대’의 시작이 결코 아니다. 또한 천황의 ‘말씀’ 같은 것으로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책임이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며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의 진정한 해결은 나라의 최고기관인 국회의 결의를 시작으로, 국민의 의사로 전 조선 민중에 대해 사죄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결의문에서 “우리들은 전두환의 방일을 반대하고, 오늘의 집회를 계기로 일본과 조선(한반도)의 진정한 우호관계 확립을 위해, 민중의 연대를 기초로, 지문날인 제도의 폐지 등 재일조선인(한국인)의 생활과 권리의 획득에 힘쓰고, 조선의 평화통일을 향한 운동을 더욱더 강화할 것이다.”(1984년 전두환방일반대 9·4중앙집회 결의안)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후 ‘전후 50년 국회결의를 촉구하는 모임’의 결성 등으로 이어진다. 또한 도미야마 다에코가 마츠이 야요리 등과 함께 1977년 결성한 ‘아시아여성의 모임’은 1980년대 말부터 한국 여성학자 및 활동가들과 연대하며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문제를 국제사회에서 여론화했다. 이렇듯 초기에 ‘구원’으로 시작한 일한연대운동은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연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한국 민중의 고통에 가담하는 일본/일본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자기개혁을 촉구하는 움직임으로 나아갔다. 박사논문 3장에서는 이와 같은 일한연대운동의 전개를 사진, 전단지, 성명서 등 여러 1차 자료의 이미지와 함께 정리, 소개했다.

국경을 넘는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

이와 같은 일한연대운동의 배후에는 국경을 넘는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 1972년 츠루미 슌스케 등이 한국을 방문해 김지하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방한단은 지학순 주교를 통해 마산에 있던 김지하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조카사위인 재일한국인 송영순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가 있었다. 송영순은 특히 가톨릭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는 한국으로부터의 다양한 정보를 번역하여 일본 연대세력에게 전하는 등 한국과 일본 및 세계를 잇는 정보교환의 매개자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정보교환 네트워크에는 이름을 남길 수도 없던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그리고 수많은 해외 한인동포와 현지의 협력자들이 존재했다. 이와 같은 국경을 넘는 정보교환 네트워크의 형성과 활동에 대해 박사논문 4장에서 분석했다.
특히 사회참여를 주창한 개신교의 에큐메니컬 기독교 네트워크는 각 국가와 지역의 교회협의회 및 세계교회협의회로 구성된 국제적인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는 언론통제 상황에 있던 한국의 다양한 지하정보를 세계로 발신하고 또 세계로부터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연대세력의 정보를 다시 한국으로 보내는 중요한 정보교환의 축을 형성했다.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및 인권위원회, 한국기독학생총연맹, 목요기도회, 갈릴리교회 등과 한국 내 외국인 선교사들의 월요모임 등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1971년부터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산업선교회 간사로 일본 동경에 거주했던 오재식, 1972년 유학을 위해 일본에 왔던 지명관(1973-88년에 「세카이」에 ‘T.K생’이라는 필명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연재), 1973년 미국에서 일본으로 온 김용복 등 한국인 기독자들과 개인적 연락망을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오재식은 1973년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산하에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정치상황 및 다국적 기업의 활동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민중운동을 지원하는 정보센터로 DAGA(Documentation of Action Group forAsia)를 설립했다. DAGA의 스태프로 오재식의 초청을 받아 1975년 일본에 온 패리스 하비는 1979년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한국 인권문제를 위한 북미주연합’(The 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Rights of Korea)의 사무국장으로서 미국 의회를 대상으로 로비 활동 등을 전개했다. 또한 미국, 독일, 캐나다, 일본, 영국 등지의 한국인 기독자들은 캐나다에 있던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1975년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이후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를 조직하고 정보를 교류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한국인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는 각 지역의 현지 기독자 및 활동가와의 연계 속에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다양한 연대활동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에서는 1974년 1월 일본기독교협의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이하 ‘긴급회의’)가 한국인 기독자들과의 연계 속에 일본으로 전해오는 정보의 메신저 및 매개점 역할을 했다. 도쿄 니시와세다에 있는 기독교회관 5층에는 오재식의 사무실이 있었으며 그 맞은편에서는 재일대한기독교총회의 사무실이 있었다. 또한 2층에는 일본기독교협의회 사무실이 있었고, 그 사무실의 한쪽에 긴급회의가 있었다. 당시에는 한국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던 시절이라, 해외 선교사들은 한국을 가기 위해서 일본을 들러야 했으며 일본에서는 니시와세다의 기독교회관을 방문하는 것이 기본이었다고 한다. 이에 긴급회의 관련자 및 해외 선교사들은 오재식 등으로부터 한국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방문할지, 그리고 무슨 정보를 가져가고 가져올 것인지 등의 정보를 얻어 메신저의 역할을 했다. 1975년 독일에서 일본으로 온 선교사 폴 슈나이스는 이러한 정보 메신저의 역할과 더불어, 1977년 말 한국 입국금지 후 1984년까지 정보 메신저 조정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는 일본 내에서 한국 정보기관의 활동도 활발했기에 한국에서 정보를 받아 일본으로 들어오면 바로 직접적으로 한국인 기독자들에게 이를 전달하기보다는 기독교회관 2층의 긴급회의 사무실에 전달해 오재식 등 한국인들에게 전달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교환 네트워크는 언론통제하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의 문제의식 및 상황에 대한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직간접적으로 전달되는 통로를 형성했으며, 일본의 연대세력은 이를 바탕으로 연대와 관련된 담론을 만들고 활동을 형성함과 동시에 당시 리버럴한 언론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도 한국 민주화운동과 연대운동을 여론화하는 데 기여했다.3

나가며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정치사회사이면서 동시에 초국적 사회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재일한국인 민주세력과 더불어, 이들과 연계하는 형태로 일본의 진보적(혁신적) 지식인, 기독자, 문화인, 활동가들이 일한연대운동이라는 구체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냈고, 운동 내외의 다양한 문제제기 속에서 자기개혁, 즉 일본의 민주주의 운동으로 나아갔다. 즉, 한국 민중과의 연대를 통해 스스로(연대세력)가 주체가 되는 재귀적 민주화4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1980년대 이후 전개된 과거사 및 역사인식 문제는 따라서 한일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민주주의 운동 속에서 도출된 근원적 과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87년 한국의 민주화 이후, 한일 시민사회의 교류가 더욱더 활발해짐에 따라 과거사 및 역사인식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형태의 한일 시민연대 및 협력이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전개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및 우경화는 가해의 망각과 더불어, 피해자로서의 일본/일본인 담론, 그리고 이에 기반한 ‘헤이트 스피치’의 양산으로 이어지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 주류사회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일본의 양심적, 진보적 시민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운동을 돕기 위해 내 목소리를 더하겠습니다.”라는 김지하의 말처럼, 한일 시민연대는 이제 역사수정주의 태도를 보이는 일본 주류사회에 대항하는 일본 민주주의 세력과 지속가능한 정보교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목소리를 더해가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한일 간의 공동과제와 더불어 다양한 세계적 과제에 대해 아시아 시민 및 글로벌 시민 수준에서의 연대를 형성하고 이를 타자의 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개혁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변혁을 추진해나갈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註)

1 이 글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일본의 지지 및 연대활동을 지칭할 때 ‘한일연대’가 아닌 ‘일한연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1970-80년대 일본 내 활동가들이 쓰던 시민운동 조직명이나 집회명, 전단지 등에 사용된 ‘일한연대’라는 용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2 회고록 『전쟁이 남긴 것』(2004)에서 츠루미는 만약 자신이 김지하였다면 고작 “쌩큐, 쌩큐” 정도밖에 말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김지하의 응답에 대해 인간으로서 감탄했다고 회상한다. 츠루미 외, 『전쟁이 남긴 것』(2004), 337.
3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박사논문 및 졸저 『‘일한연대운동’의 시대: 1970-80년대의 트랜스내셔널한 공론장과 미디어』(도쿄대학출판회, 2018) 4장과 5장에서 다뤘다.
4 타자와의 연대가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 결국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수정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움직임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미국에서의 사례에 대해서는 Misook Lee, “South Korea’s Democratization Movement of the 1970s and 80s and Communicative Interaction in Transnational Ecumenical Networks,”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19/2 (2004): 241-270 참조.


이미숙|일본 도쿄대학대학원 학제정보학부에서 사회정보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릿쿄대학 Global Liberal Arts Program 조교수로 재직하며 한일연대, 한일저널리즘, 미디어와 사회운동, 미디어와 젠더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저서로 『‘일한연대운동’의 시대: 1970-80년대의 트랜스내셔널한 공론장과 미디어』 등이 있다.

 
 
 

2021년 11월호(통권 7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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