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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수도원, 그 현장을 가다 11(마지막회)]
문화·신학·목회 (2021년 9월호)

 

  파운틴스 수도원, 정원 속 수도원의 흥망성쇠
  

본문

 

파운틴스 수도원 가는 길

2008년 2월 7일, 학생들과 함께 파운틴스 수도원(Fountains Abbey) 유적지를 찾았다. 유적지라고 표현한 이유는 지금은 수도사들이 생활하지 않고 수도원의 흔적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중부 도시 요크(York)에서 북서쪽으로 50km 남짓한 거리에 있는 파운틴스 수도원은 중세 시대 시토회 소속 수도원으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수도원 중 하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유적지 규모만 보아도 그 당시 수도원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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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학생들과 이곳을 방문한 것은 학생 교류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잉글랜드 ‘요크 세인트 존 유니버시티’(York St. John University)가 자매결연을 맺은 후 2008년 처음으로 학생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당시 학부 신학과 책임을 맡고 있던 필자가 학생 10명을 인솔해 요크를 찾았다. 2주 동안 강의를 듣고 역사·문화 탐방도 진행했는데, 그 일환으로 파운틴스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벌써 10년도 더 지났지만 그때 함께했던 학생들과 지금도 허물없이 가까이 지낼 만큼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여정이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당시 대학생이었던 제자들이 이제는 30대 중반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목회자가 되어 자신의 몫을 톡톡히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운틴스 수도원 400년의 역사

파운틴스 수도원의 역사는 요크의 세인트 메리 베네딕투스 수도원(St. Mary’s Abbey in York)에 있던 13명의 수도사들과 함께 1132년에 시작되었다. 세인트 메리 수도원의 부원장 리처드(Prior Richard)를 비롯한 일단의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규칙이 느슨해지고 수도사들이 나태한 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수도원장에게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6세기 베네딕투스가 세운 수도규칙과 기본 원칙으로 돌아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찾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며, 노동의 의무를 지키는 공동체로 회복할 것을 간청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13명의 수도사들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요크의 대주교였던 투르스탄(Thurstan of Bayeux)의 보호를 받은 이들은 1132년 12월 27일 스켈강(River Skell) 인근의 파운틴스 계곡으로 피신하여 자리를 잡았다. 이것이 파운틴스 수도원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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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틴스 계곡은 “사람이 거주하기보다는 야생동물에게 적합한” 장소였으며, 마치 고독한 은수자들이나 살 법한 잉글랜드 북쪽의 광야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강가였기 때문에 생활에 필수적인 물이 풍부했고, 건물을 짓기 위한 돌과 나무 또한 쉽게 구할 수 있었기에 은신처로서는 제격이었다. 파운틴스라는 지명도 그곳의 샘들(fountains) 때문에 유래했을 것이다. 수도사(monk)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나코스’(μοναχός)는 ‘홀로’를 뜻하는 ‘모노스’(μόνος)에서 유래했는데, 파운틴스 계곡은 고독이라는 수도사의 의미를 실천하기에 적절한 황무지였다.
파운틴스 계곡에 터를 잡은 수도사들은 이듬해에 당시 수도원 개혁운동의 중심이었던 시토수도회에 도움을 청했다. 시토회는 1098년 프랑스 시토에서 시작된 개혁 수도회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2세기에 접어들면서 시토회가 유럽 전체로 빠르게 확산하면서 시토회 소속 수도원들이 다양한 지역에 생겨났지만, 모체가 되는 수도원과 새롭게 설립된 수도원이 모녀(母女) 관계를 통해 건축과 생활방식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1135년 파운틴스 수도원은 클레르보 수도원의 딸 수도원으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파운틴스 수도원은 리보 수도원(Rievaulx Abbey, 파운틴스 수도원에서 북동쪽으로 45km 정도 떨어져 있다.)에 이어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로 시토회 소속 수도원이 되었다. 베르나르는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인 제프리(Geoffrey of Ainai)를 파운틴스로 파송하여 수도원의 정착을 도왔고, 파운틴스 수도사들은 그를 통해 시토회의 규칙과 예전, 의복과 음식의 사용, 건축양식을 배웠다.
1144년 3대 수도원장 헨리 무르닥(Henry Murdac, 1144-47) 때에 돌로 만든 작은 교회당과 목재로 된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다. 하지만 1146년 폭도들에 의해 수도원이 공격을 당해 건물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불타고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모리스(Maurice, 1147-48)와 토롤드(Thorold, 1148-50)를 거쳐 새롭게 6대 수도원장을 맡은 리처드(Richard III, 1150-70) 때에 수도원은 안정을 되찾고 번성하였다. 그는 교회와 건물을 수리하고 확장하여 더 많은 사람이 머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리처드가 계획한 건축은 그의 계승자인 로버트(Robert of Pipewell, 1170-80)에 의해 계속 추진되어 1170년 91m 길이에 11칸으로 된 수도원 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때부터 파운틴스 수도원은 가난한 사람과 난민을 돌보고 보살피는 피난처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것이 다시 기부자들의 기부를 끌어내는 요인이 되기도 하여 수도원은 점점 부유해졌다.
12세기에 건립된 파운틴스 수도원은 기본적으로 시토회 지도자 베르나르의 원칙을 따라 소박하고 단순하게 지어졌다. 베르나르가 혐오한 사치스러운 장식과 꾸밈은 모두 배제하였다. 교회의 제단에도 채색 나무십자가와 철제 촛대만이 허용되었다. 그렇지만 이후 13세기 중엽에 동쪽 끝에 세운 아홉 개의 제단이 있는 예배실과 16세기 초에 건립한 종탑은 예외적으로 화려한 면을 보여준다. 13세기 전반부 수도원을 이끌었던 3명의 존(John of York 1203-11, John of Hessle 1211-20, John of Kent 1220-47) 시대에 수도원은 전성기를 누렸다. 교회의 성가대석과 동쪽 끝 아홉 개의 제단 예배당도 이때 지어졌다. 그러나 1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수도원은 어려운 상황과 맞닥뜨렸다. 이 기간 수도원장이 11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당시 수도원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지경에 놓여 있었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스코틀랜드인의 침입, 세금의 증가, 더욱이 흑사병의 발발로 인해 수도사 수가 급감했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 상황도 극도로 나빠졌다. 14세기 후반 교황청의 분열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잉글랜드는 로마 교황청에 속하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수도원은 아비뇽 교황청에 속한 프랑스 시토회와의 관계 단절을 요구받았다. 이로 인해 수도원장들은 자체적인 수도규칙을 만들어야 했고 점차 복잡한 교회정치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는 수도원장직을 두고 서로 정치적 싸움을 벌이는 혼란까지 벌어졌다. 15세기 중반에 와서야 파운틴스 수도원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새롭게 임명된 수도원장들의 지도력으로 수도원 건물이 복구되고 조직도 재편될 수 있었다. 특히 마르마듀크 후비(Marmaduke Huby, 1495-1526)가 수도원장으로 재직했던 16세기 초반에 수도원은 새로운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에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파운틴스 수도원의 운명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았다.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는 첫 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 불린(Anne Boleyn)과의 결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황청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결국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통해 로마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이제부터는 교황이 아니라 국왕인 자신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를 채우고자 로마가톨릭 수도원 해산령을 공포하였고, 이에 따라 1539년 파운틴스 수도원도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파운틴스 수도원은 1132년부터 1539년까지 400여 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539년 수도원 건물을 포함하여 인근 200만㎡에 달하는 땅이 왕실로 넘어갔고, 다시 1540년 당시 의회 의원이자 전직 런던 시장이었던 리처드 그레샴(Richard Gresham)에게 팔렸다. 1597년 수도원과 인근 부지는 스티븐 프록토르(Stephen Proctor)에게 양도되었고, 1627년에는 메신저(Messenger) 가문에게, 그리고 1768년에는 윌리엄 아이슬라비(William Aislabie)에게 넘어갔다. 현재 수도원 유적지를 둘러싼 스터들리 수생식물원(Studley Royal Park)은 윌리엄 아이슬라비와 그의 아버지 존(John Aislabie)이 조성한 잉글랜드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정원은 자연미를 최대한 살렸으며, 자연과 어우러진 우아한 건축물과 조각상, 운하, 연못, 인공 폭포, 끝없이 펼쳐진 잔디밭으로 꾸며져 있다. 1966년에야 오랫동안 개인 소유로 있던 수도원과 수생식물원을 웨스트라이딩주(West Riding County) 의회가 구입하였고, 1974년에는 노스요크셔주(North Yorkshire County)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1983년부터는 문화유산 보존 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가 노스요크셔 의회로부터 모든 부동산을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다. 수도원과 수생식물원은 그 역사적 중요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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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교회 안으로

파운틴스 수도원은 28만㎡(약 8만 5,000평)의 규모로, 13세기에 세워진 3.4m 높이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교회와 수도원 건물은 스켈강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강을 따라 농업과 산업과 생활의 공간들이 자리하고 있다. 파운틴스 수도원 교회당의 주출입구는 서쪽에 위치해 있다. 출입구 정면은 1160년경 수도원 북쪽 바위산에서 얻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풍화작용을 겪은 돌 건축물은 미묘한 색깔을 띠며 주변과 조화를 이룬다.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푸른 잔디 위에 양쪽으로 육중한 노르만 양식의 기둥이 줄지어 길게 뻗어 있는 웅장한 교회당의 규모에 압도당한다.
당시 시토회에는 수도생활에 전념하는 수도사(monks)와 노동하는 역할을 맡은 평신도 형제(lay brothers)가 함께 있었다. 평신도 형제들은 대개 수도 선서를 한 무학자들이었고, 수도원에는 수도사들이 사용하는 것과 구별된 별도의 그들만의 숙소와 식당과 진료소가 있었다. 교회는 함께 사용했지만 중간에 칸막이를 두어 동쪽에는 수도사들이, 서쪽에는 평신도 형제들이 자리했다. 제단 역시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사실상 두 개의 교회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평신도 형제들은 성직자가 되기보다는 수도 정신에 따라 살기로 서원한 사람들로서 석공, 목동, 제혁업자, 제화공, 제철공, 제빵사, 양조업자 등으로 수도원에서 일했다. 이들이 수도원의 농업과 산업을 전담했기 때문에, 수도사들은 반복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수도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로 인해 파운틴스 수도원은 중세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수도원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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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내부는 중앙의 신랑(身廊)과 기둥 바깥으로 남쪽(오른쪽) 측랑(側廊)과 북쪽(왼쪽) 측랑이 있는 구조이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측랑 쪽의 지붕은 돌로 마무리되었고, 중앙 신랑의 지붕은 나무였다. 위쪽에는 고창층(高窓層)이 있어 외부의 빛을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앞쪽으로 걸어가면 남쪽 익랑(翼廊)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은 수도원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으로 시토회 건축의 단순함을 잘 보여준다. 수도사들은 새벽에 첫 예배를 드리기 위해 숙소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와 남쪽 익랑을 통하여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15세기에는 남쪽 익랑의 내부 경당을 성물안치소로 개조하여 수도원의 값진 보물들을 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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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의 동쪽 끝으로 가면 완전히 다른 건축 양식과 만나게 된다. 성직자석과 아홉 개의 제단을 갖추고 있는 이 부분은 13세기 초에 건축된 것으로, 인근 니더데일에서 나온 대리석 기둥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소박한 시토회 건축 양식과는 대비된다. 15세기 말 수도원장 존 단턴(John Darnton, 1479-95)은 교회당 동쪽 벽 중앙에 큰 수직 창을 만들어 넣어 건물을 고딕양식으로 바꾸어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창문 머리 부분의 균열을 보강하기 위해 장식용 조각을 만들었는데, 안쪽에는 천사 조각상으로, 바깥쪽에는 이교의 상징인 녹색 인물 조각상으로 꾸몄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교회에는 천사의 평화와 선함이 가득하지만, 바깥 이교의 세상에는 불안과 죽음만 있을 뿐임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중앙제단이 있던 곳임을 표시하는 타일 바닥은 18세기 윌리엄 아이슬라비가 당시 남아 있던 것들을 모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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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익랑의 끝에 있는 종탑은 수도원장 마르마듀크 후비가 헨리 8세의 통치기에 그 지역의 석회암으로 건축한 것으로 높이가 52m에 이른다. 탑의 벽감에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로 짐작되는 조각상이 수도원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탑의 벽면에는 수도원장의 머리글자인 M.H.와 함께 시토회 성무일도 책에서 발췌한 “오직 하나님께만 명예와 영광이 영원하소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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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안으로

수도원의 중심은 38㎡ 넓이의 회랑이다. 회랑은 수도원 어디에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각형의 중심 공간이다. 따라서 수도원의 중요한 건물과 시설은 모두 여기에 잇대어 있다. 수도원 건물의 이러한 배치는 수도사의 생활 반경을 최소한으로 만드는 실용적인 건축 구조로, 베르나르가 설립한 프랑스의 퐁트네 수도원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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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틴스 수도원의 회랑은 북쪽으로는 교회당과, 동쪽으로는 수도사들의 챕터하우스(chapter house)와 연결되어 있다. 챕터하우스라는 이름은 수도사들이 매일 이 방에 모여 베네딕투스의 수도규칙을 한 장(chapter)씩 읽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챕터하우스는 수도원의 제반 행정적 업무를 관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챕터하우스는 12세기 후반 리처드 3세가 수도원장이었을 때 완공된 곳으로, 챕터하우스 동쪽 끝에는 19명의 수도원장 무덤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리처드 3세이다. 2층에는 수도사들의 숙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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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들은 마치 주인의 명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밤에도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잤다. 수도사들이 숙소에서 한밤중에 성무일도를 위해 교회당으로 갈 때 사용하는 계단과 별도로 낮에 이용하는 계단은 회랑의 동쪽 면과 접한 남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회랑의 남쪽은 수도원의 일상생활과 관련 있는 공간이다. 12세기에 돌로 만들어진 온열실에는 11월부터 부활절까지 수도사들이 몸을 녹일 수 있는 목재용 난로가 있다. 또한 매일 음식을 만드는 부엌과 함께 식사하는 식당이 있다. 수도사들은 나무로 된 긴 의자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설교단에서 낭독되는 경건한 서적의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수도사들은 여름에는 하루 두 차례, 겨울에는 한 차례만 식사를 하였다. 육류는 제공되지 않았고, 노약자나 병자에게만 특별히 주어졌다. 14세기에 와서는 특별한 날에는 수도사들에게 육류가 제공되기도 하였다. 부엌은 수도사와 평신도 형제들이 함께 사용했지만, 식당은 부엌의 동쪽과 서쪽 양쪽으로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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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의 서쪽에는 식품 저장고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교회당 남쪽 벽에서부터 스켈강에 이르기까지 91m에 이르는 공간은 저장시설, 창고, 평신도 형제들의 식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당 벽에 접해 있는 외부 저장고는 바깥의 큰 뜰로 이어지는데, 이곳은 침묵을 강조하는 수도원에서 수도생활과 수도원의 업무와 관련된 대화가 허락된 유일한 장소였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잔디밭에는 2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평신도 형제들을 위한 숙소와 진료소의 유적이 남아 있다. 평신도 형제들의 진료소 너머에는 후원자나 상인들이 머물던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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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들의 진료소는 평신도 형제들의 진료소 정반대쪽에 멀리 떨어져 있다. 수도원 건물 중 가장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 소실되어 폐허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수도사들의 진료소에는 부엌, 방, 예배당, 대강당을 모두 갖추고 있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작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장의 숙소도 이 건물에 있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

파운틴스 수도원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된 시토회 유적지이다. 남아 있는 유적의 규모만으로도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수도사들이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앞에 서면 마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시대로 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절로 상상의 날개를 펴고 중세 수도사가 된다. 비록 지금은 옛 모습을 잃었지만 남아있는 수도원의 웅장한 유적은 중세 시대 수도원의 흥망성쇠와 수도사의 삶과 희망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창문과도 같다.

※ 파운틴스 수도원 유적지의 모습은 ‘구글 어스’에서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인터넷 주소창에 다음을 입력하면 접속할 수 있다.(https://bit.ly/파운틴스수도원보기)


[연재를 마치며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영혼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기에, 하나님과 교통하고자 하는 갈망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다. 수도원은 인간이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교회사에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수도운동의 흐름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필자가 방문했던 유럽의 수도원들을 11회에 걸쳐 소개하였다. 어쩌면 개신교 목사인 필자가 왜 정교회와 로마가톨릭의 수도원을 소개하느냐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16세기에 등장한 개신교는 그 이전 1,500년의 초대와 중세의 유산과 전통에서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초대와 중세의 수도 전통은 우리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이 누려야 할 공동의 유산이다. 다만 과거의 유산 중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분별할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예전처럼 해외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또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커지는 상황에서, 안방에서 누리는 수도원 여행이라도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연재를 하였다. 독자들의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박경수 교수님의 “수도원, 그 현장을 가다”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부

박경수|종교개혁사를 전공하였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사』,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 『교회사클래스』, 『종교개혁 핵심톡톡』 외 다수가 있고, 역서로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스위스 종교개혁』등이 있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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