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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도(道)의 신학이란 05]
문화·신학·목회 (2021년 9월호)

 

  예수 그리스도와 도의 신학(2)
  

본문

 

‘도-그리스도론’에 대한 한국적 전거들

그렇다면 ‘도’라는 근본 은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도의 해석학적 세계 안에 살고 있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미 시작부터 도의 관점을 통해 그리스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핵심 사상인 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한 것은 서구 기독교인들이 로고스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한 것처럼 지극히 타당하고, 그와 같은 기념비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신학 사상사에서 도를 근본 은유로 적용한 대표적 사례로 이벽, 유영모, 그리고 이정용의 그리스도론을 살펴보고자 한다.1

1) 이벽: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교차점으로서의 그리스도
노자는 궁극적인 ‘도’가 인간의 이성 너머에 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언어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자는 동시에 지혜로운 삶의 방법, 곧 덕(德)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도는 단지 형언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들이 인간-우주적 큰 흐름에 따른 변혁적 실천에 참여하는 방식들까지도 제시하는 자기발견적 은유인 것이다.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이러한 구별은 일반적으로 도교와 유교라는 상호보완적인 대립쌍(complementary opposites)에 의해 인식되었다. 도가 전통은 궁극적 실재의 탈언어적(apophatic) 차원, 곧 하늘의 길[天道]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유가 전통은 인간 삶의 언어적(kataphatic) 측면, 곧 인간의 길[人道]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탁월한 유학자이자 한국 최초의 신학자라 할 수 있고, 한국 가톨릭의 영적 교부라는 광암 이벽(李檗, 1754-86)이 천도와 인도의 일치와 합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도와 인도의 교차점이자, 신성과 인성이 합일한 최상의 현자로 보았다.

2) 유영모: “없이 계신 님”으로서의 그리스도
동아시아의 해석학적 지평 심장부에서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단초를 제시한 이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이다. 그는 그 나름대로 분명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유교와 불교에 통달했고, 선도의 수행자였다. 주돈이(周敦)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즉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절대무[空虛]와 우주생성적 근원이라는 상호보완적이면서도 역설적인 궁극적 대립쌍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도를 최상의 우주생성적 역설이라고 보는 신유교적 관점에서, 다석은 아주 흥미로운 동양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구상했다. “십자가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본다. 동양의 우주관이다. 동양의 우주관을 몸소 보여주신 이가 예수님이다. 그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이었다. 자기를 제물로 바쳐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열었다는 것이다.”
다석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무극과 태극이 하나가 된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예수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父子有親]이 넘치는 상호내재(相互內在)의 관계(perichoresis)로서 드러난다. 또한 다석은 십자가를 “꽃피”라고 했다. ‘꽃피’인 십자가를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아버지는 아들의 영광을 드러낸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라는 꽃이 피를 흘리며 활짝 피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우주의 영광스러운 만개를 그려볼 수 있었다. 유영모에게는 “우주 궤도의 돌진이 십자가요, 우주 궤도를 도는 것이 부활이요, 세상을 비추는 것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심판이다.”3
이러한 없음[無]과 있음[有], 비존재와 존재라는 최고의 역설적 시각에서 다석은 한국 특유의 영성으로서 기(氣)-탈언어적(pneumato-apophatic) 도(道) 그리스도론을 구상했다. 그는 예수를 원초적 호흡, 즉 ‘숨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예수는 ‘계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시는’ 분이다. 다석은 ‘없이 계신 님’, 곧 ‘비존재[無極]적 존재[太極]’라는 특이한 동양적 그리스도론을 고안한 것이다. 우리는 ‘있어도 (실제적 가치가) 없는 존재’, 즉 ‘존재적 비존재’라면, 예수는 ‘없어도 (절대적 가치가) 있는 존재’, 곧 ‘비존재적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면, 그리스도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다.

3) 이정용: 역(易)의 완성으로서의 그리스도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정용(Jung Young Lee, 1935-95)은 주역(周易)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동아시아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는 ‘역’(易)이 기독교 신학을 위한 가장 적절한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미 실효성을 상실한 실체론적(substance) 패러다임(being)과 아직 불충분한 과정신학적(process) 패러다임(becoming)을 넘어서서 ‘역’(change)의 방식(being and becoming)으로 신학적 사고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현대 물리학의 발견이 보여준 것처럼, 궁극적 실재란 결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유클리드 기하학, 뉴턴 물리학 같은 희랍적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있음(substance)이 아니며, 그렇다고 화이트헤드의 과정적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되어감(process)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변화 안에 있는 있음(being)과 되어감(becoming), 혹은 음과 양의 상호보완적 대립쌍 안에 있는 태극에 근접한다. “그러므로 역은 있었고, 있고, 있을 모든 것들의 매트릭스이다. 그것은 모든 있음과 되어감의 근원이다. 따라서 역의 신학은 있음이면서 또한 되어감인 궁극적인 것의 특징을 설명한다.”
서구적 사고방식에는 양자택일(either-or)의 논리가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러므로 서구신학은, 과정신학까지도, 그 한계를 넘어서기가 어렵다. 모든 궁극적 문제들에서 진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상극적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아우르는 상생적인 양자긍정(both-and)에 있다. 이정용은 양자택일의 방식은 그릇된 것이고, ‘역’이 말하는 양자긍정의 논리야말로 신학의 올바른 형이상학이라고 주장했다.(God as Change) “역경(易經) 속에 나타난 역은 분명히 범주화할 수 없다. 역은 인격적이면서 동시에 비인격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동시에 남성적이며, 내재적이면서도 또한 초월적이다.”
이러한 완전긍정(both-and)은 완전부정(neither-nor)과 상호보완적이다. 최상의 역설로서, 태극은 완전한 긍정을, 무극은 완전한 부정을 상징한다. 따라서 최고의 도(道)로서의 하나님은 인격적이면서 비인격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남성적이며, 내재적이면서도 또한 초월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인격적이지 않으면서도 비인격적이지 않고, 남성이 아니면서 여성도 아니며, 내재적이지 않으면서 또한 초월적이지 않다. 이러한 시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의 완벽한 실현으로서 파악된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완벽한 조화 속에 있다. 예수의 정체성은 그의 인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양(陽)이 음(陰)의 존재를 전제하듯이 그렇게 인성을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완전한 인성은 완전한 신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의 신성과 인성의, 혹은 변화와 변화함의 완전한 상호보완성 속에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다. 변화와 변화함 사이의 완전한 조화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와 변혁의 궁극적인 현실이다.”4
이정용의 제안은 사실 신학사적으로 중요하지만, 그에 합당한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의 반서양적 수사학이 서양 신학자들에게는 과도했고,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지나치게 실증적인 형이상학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새로운 대안적 신학을 위한 보편적인 형이상학으로 역을 주장하며 내세운 ‘복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retrieval)은 여러모로 탁월하나, 그것에는 신학의 구성을 위해 더불어 중요한 전통의 역사에 대한 진솔한 비판을 하는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이 빈약하다. 그래서 역의 신학은 토착 전통에 대해 순박하고 낭만적인 해석학을 사용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신학은 아시아의 로고스 신학(종교신학)을 위해서는 좋은 모형이지만, 아시아 신학의 또 다른 축인 프락시스 신학(해방신학)을 위해서는 그렇게 좋은 모형이 되지 못한다. 서구 형이상학의 모순에 반대하는 열정적인 논쟁 속에서 이정용은 그의 본래 의도와는 반대로 도가 객관적으로 이름 붙여질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함정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도덕경』이 정의한 대로, 도는 결코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없으며 오직 자기발견적으로 체득할 수 있을 뿐이다. 계속적인 변화로서 역의 도는 어떤 고정된 얼굴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콘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속적으로 변화하면서 수없이 많은 얼굴을 가진다. 따라서 역동적인 도의 해석학에서는 해석자의 맥락과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 도의 해석학이란 해석자 또는 해석 공동체가 주어진 맥락과 맞물리면서, 도의 궤적을 각성하고 창조적이고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는 해석자인 우리에게 어느 때에 어떻게 우주적인 운동 속에 적절히 참여할 수 있는지 식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신-인간-우주적 합일의 완성: 양자긍정과 양자부정의 그리스도

신학적 근본 은유로서 도의 탁월성은 형이상학적 실증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도 초언어적인 도를 표현해내는 방식과 지혜에 있다. 우리는 앞에서 궁극적 실재를 양자긍정과 양자부정의 방식으로 해명해보았다. 이와 같이 도는 그리스도론의 이원론적 난제들을 해결하고 그리스도를 통전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사실 니케아-칼케돈 신조의 탁월성도 희랍적 이원론의 틀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궁극적이고 우주생성적인 본성을 표현해낸 것에 있다. 그것을 통해 4-5세기 교부들은 기독교 신앙이 희랍 철학의 양자택일적 사고를 초월할 수 있게 하였다. 우선 니케아 신조(325)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vere deus)인 동시에 ‘참 인간’(vere homo)으로 표현하기 위해 양자긍정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칼케돈 신조(451)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서로 혼동되지도, 변화하지도, 분리되지도, 구별되지도 않음을 표현하기 위해 양자부정의 방식을 사용했다. 이것을 도의 용어로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면, 4-5세기 기독교인들은 인성과 신성 모두에 대한 전적 긍정으로서의 태극(太極)과 양자 모두에 대한 전적 부정으로서의 무극(無極) 사이의 최고의 역설적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생성적인 신비를 통찰하고 표현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인 동시에 우주의 참 주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도의 신학은 신-인간-우주적 합일의 완성을 발견한다.
사실 이러한 역설적인 사유 방식은 기독교 전통에서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영지주의 복음서들,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reopagite)와 같은 초기의 창의적인 신학자들,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와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와 줄리안(Julian of Norwich)과 같은 기독교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콜라스(Nicolas of Cusa)가 정식화한 ‘상극적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라는 원리 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더욱이 바울은 성서에서 이미 전적 부정의 방법을 사용하여 기독교를 설명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새번역)

새로운 태극: 우주생성적 그리스도

앞에 열거한 선진들의 통찰을 기반으로 도의 신학은 도-그리스도론을 다음과 같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예수는 곧 도이시다. 그는 태극과 무극이 일치를 이루는 지고한 역설의 완성이며, 원초적 숨님이며, 비존재적 존재(Being-in-Non-Being)이며, 완전한 형태를 이루는 완전한 비움(kenosis 혹은 sunyata)이다. 십자가는 우주변화의 길(道)로의 돌진을 언표하며, 부활은 신-인간-우주적 궤적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변혁을 의미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우주의 길을 변화시키는 우주생성적 못 박힘이다.
나아가 그것은 도의 옛 형이상학적 세계, 즉 태극과 이(理)에 존재하던 역사적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열어젖히는 사건을 의미한다. 이것이 태극의 개벽(開闢)을 언표한다. 옛 태극의 우주생성은 무극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새로운 태극으로서, 다시 말해 지고한 역설의 위대한 종말론적 운동으로서 부활했다. 그것은 그저 교리적인 혁명(logos)만도 아니요, 단순히 메시아적 영감을 받은 사회 변혁(praxis)도 아니다. 그것은 우주생성적 혁명이다. 도로서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태극은 그리스도의 우주생성적 혁명을 내포한다.
종합하면,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태극의 옛 인간-우주적인 고리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그것을 상서(祥瑞)로운(serendipitous) 신-인간-우주적 궤적으로 변화시키고, 태극의 새로운 시대(aeon)를 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건은 우주생명의 대변혁과 대개벽을 예고하고 성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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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반전과 복귀의 그리스도

이 뜻밖의 상서로운 신-인간-우주적이고 우주생성적인 궤적은 실재하는 것이지만 아직도 감추어져 있다. 그 궤적은 아직까지 완전히 표출되지 않고 있으며, 종말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기(氣, pneuma)의 개념은 중요한 해석학적 열쇠를 제공한다. 이러한 기의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론적 영이신 신-인간-우주적 비전이 새롭게 창안될 수 있다. 통전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기는 영적인 힘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힘의 물질적 현현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원초적 기운의 근원(source)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 힘의 매개체(medium)를 말하기도 한다. 기의 소통은 인간과 다른 생물들의 관계를 보다 통전적으로, 그리고 보다 심오하게 발전시킨다. 이와 같은 기의 영적인 소통을 통해 신-인간-우주적 생명의 그물망(life network)이 서로 공생(symbiosis)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민중의 사회-전기(socio-biography)와 순진한 인간-우주적 비전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창조적으로 넘어서서,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를 주제화하도록 해준다. ‘도’로서의 하나님은 기의 영적 소통을 통해 이루어진, 착취당하는 생명들의 사회-우주적 관계망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원초적 기운인 원기(元氣)로서 그리스도는 구원, 즉 해방과 화해를 동시에 가져온다. 더욱이 영이면서 동시에 물질로서의 기는 성육신(Incarnation)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영-인간-우주적 비전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하고,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를 가장 탁월하게 표출한다. 그러므로 신-인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원초적 기, 즉 원기의 영 안에 있는 뜻밖의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그리스도론은 기에 대한 영적인 해석학과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 모두를 그 구성 요소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곧 도를 그리스도로 언표하는 도-그리스도론은 영적이고 해방적이다. 결국, 도로서의 그리스도와 새로운 태극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아시아 영성의 구원론적 핵심 안에 구현되어 있는 해방적 그리스도론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인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와 기-사회-우주적 도로서의 그리스도를 구상하는 도-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을 곤경에 몰아넣는 근본적 문제인 근대적 역사중심주의와 희랍적 이원론을 극복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다가오는 시대에 그리스도론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인간-우주적 궤적에 따라 삶을 바른 길(正道, orthodao)로 변화시키며,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생명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들을 살리는 기-사회-우주적 운동에 동참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새로운 태극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주생성적 패러다임 전환을 완성했다. 신-인간-우주적 도로서 그리스도는 수난받는 온 생명들에게 이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힘, 곧 생명을 낳는 에너지-영이며, 더욱 우리식으로 말하면 원초적 기를 불어넣어 주신다. 이 대목에서 『장자』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매우 암시적이다.

너는 뜻을 한 가지로 가져라. 그래서 귀로 들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듣는 것은 귀에서 그치고 마음은 부합(符合)하는 데서 그친다. 허나 기는 허해서 온갖 걸 다 포용한다. 오직 도는 허(虛)한 데서 모이니 허한 게 곧 마음의 재계[心齋]이다.6

참된 도로서의 그리스도는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려 솟구치는 연어와 같이 생명들로 하여금 도로 복귀하게 만든다. 그 복귀를 위해서는 도를 완성하는 능력인 그리스도의 원초적 기, 곧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공허 곧 자기비움(kenosis)과 심재 곧 깊은 반성과 회개를 수반한 마음 닦음(metanoia)이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반전(산상수훈)의 능력에 합류하여 마치 고향에 돌아가려는 물고기처럼 도약하며 복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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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예수께서 물고기(ΙΧΘΥΣ)로 상징되는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태극기에 나오는 태극문양 또한 물고기 두 마리가 맞물려 춤을 추는 모습으로도 상징되니,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나라의 관계도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다. 예수께서 시몬과 안드레에게 하신 다음 말씀이 더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막 1:17, 새번역)

주(註)
1 이 글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표한 글을 보완·축약한 것이다. 학술적인 논의와 자료를 위해서는 김흡영, 『도의 신학 Ⅱ』(동연, 2012), 175-195; Heup Young Kim, A Theology of Dao (Orbis, 2017), 34-56을 참조하라.
2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이벽의 한국적 신학원리』(분도출판사, 1979). 이벽이 『성교요지』의 실제 저자인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 중임을 알려둔다.
3 김흥호, “동양적으로 이해한 유영모의 그리스도교관”, 박영호 편, 『다석 유영모』(무애, 1993), 299, 301.
4 Lee Jung Yong, The Theology of Change: A Christian Concept of God in an Eastern Perspective (Maryknoll: Orbis, 1979), 11-28, 20, 22, 99.
5 김흡영, 앞의 책, 191-192.
6 이석호 옮김, 『노자·장자』(삼성출판사, 1976), 214.


김흡영|조직신학을 전공하였다. 강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아시아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조직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도의 신학, 종교 간 대화, 종교와 과학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한국과학생명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도의 신학』(Ⅰ,Ⅱ), 『왕양명과 칼 바르트』 등이 있다.

 
 
 

2021년 9월호(통권 7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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