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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북한이탈주민의 이해와 한국교회 01]
문화·신학·목회 (2021년 7월호)

 

  탈북(脫北), ‘인민의 낙원’을 뒤로하고: 북한이탈주민은 왜 왔을까
  

본문

 

두 북한 여성의 사연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말,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길림성에 숨어 살던 두 북한 여성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이 두 여성은 어렵사리 중국까지 왔지만, 코로나19 관련 봉쇄 조치 때문에 중국에서 오도가도 못 하고 있었다. 한국에 오는 모든 길마저 막혀 있는 중에 안타까운 소식이 필자에게 날아들었다. 둘 중 언니 노릇을 하던 여성이 숨어 지내던 처소에서 더는 머물기 어려워지자 ‘차라리 나를 중국 사람에게 팔아달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라도 북에 남겨진 가족에게 적은 돈이라도 보내고자 했다. 그만큼 그녀는 간절했다.(물론 절대로 그렇게 되게 할 수는 없었다.) 다른 한 명은 이제 갓 고급중학교(우리나라의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불과 18살밖에 되지 않은 앳된 여성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매우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며칠간 링거를 맞고 복통을 참았는데, 그녀에게 주어진 진단 결과는 급성 맹장염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 처지로 치료받는 것은 상당한 돈이 들거니와 비공식적인 의료 처치를 받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일이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이 소식을 내게 전해 준 탈북민 목회자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이 두 북한 여성의 이야기는 중국을 거쳐서 한국에 들어온 수많은 북한 주민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사연의 단면을 보여준다. 목숨을 건 탈북,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살벌한 중국 생활, 체포와 북송 혹은 제3국으로의 탈출 성공,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까지 탈북의 여정은 긴장되고 위험한 순간의 연속이다. 중국 공안에 붙잡힌 탈북민들은 북송 과정에서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을 느낀다고 한다. 자신들이 평생 살아왔던 조국과 척지는 순간, 어려서부터 보아온 수많은 공개처형의 대상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숨 막힐 정도로 가슴을 조여온다고 한다. 이 같은 두려움과 압박감은 탈북하는 모든 이에게 피할 수 없이 새겨지는 깊은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한국 내 북한이탈주민 현황

현재 한국에 들어온 북한이탈주민(이하 ‘탈북민’)1은 약 3만 명이다. 통일부 통계로는 2020년 말 기준으로 총 3만 3,752명의 탈북민이 한국에 입국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6·25전쟁 이후 지난 수십 년간 탈북해서 한국에 들어온 사람들의 수를 누적한 것이기에, 입국한 뒤 사망하거나 국외로 ‘탈남’하거나 재입북해서 감소한 탈북민의 수까지 정확히 반영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현재 한국 내 탈북민 수를 대략 3만 명 정도로 추산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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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수는 2000년대 초부터 급증해서 2009년에 정점에 이르렀다. 2009년 한 해에만 2,914명의 탈북민이 새로 한국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한국 시민은 TV 뉴스 시간에 어쩌다 한 번씩 나오는 보도를 통해서 탈북한 이들의 입국 소식을 듣지만, 실제로는 매달 200여 명의 탈북민이 꾸역꾸역 한국에 오던 시절도 있던 셈이다. 휴전선이나 서해를 통해 한국에 건너오는 이들은 지극히 일부일 뿐, 탈북민 대다수는 중국 대륙과 동남아 국가들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다.
이 같은 탈북민의 입국 추세는 2010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서더니 2011년 김정일의 사망과 김정은의 3대 세습을 계기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북송 문제가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중국 정부의 단속이 심해진 데다가, 김정은 정권의 체제 단속이 훨씬 더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탈북민의 입국 숫자는 매년 1,000명대까지 감소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창궐했던 작년 한 해는 감소폭이 훨씬 커져서 한국에 새로 입국한 탈북민 수가 229명에 불과했다. 통계로만 보면 20여 년 전 수준으로 돌아간 셈이다. 북·중의 국경은 거의 굳게 닫혔고, 중국 내의 이동도 통제가 엄격해졌다.
그렇다면 과연 이 추세는 코로나19 상황이 종식되면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990년대 후반의 북한과 오늘날의 북한은 상황이 다르다는 점이다. 지난 20여 년간 장기간의 기근과 대북제재를 경험하면서 생존의 방법을 터득한 북한 주민들이 이전처럼 대량 탈북을 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탈북민은 왜(why) 왔을까2

탈북은 6·25전쟁 이후부터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진 현상이다. 북한을 떠나 한국에 온 사람들과 관련된 최초의 법안은 1962년에 제정된 「국가유공자 및 월남 귀순자 특별원호법」이다. 이 법안을 보면 국가유공자와 월남 귀순자가 같은 선상에서 다뤄진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국가유공자와 월남 귀순자가 이해되었고, 북한 체제를 뒤로하고 한국으로 온 이들은 한국 체제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명백한 근거로 이용되었다.3 이후 탈북민은 ‘월남귀순용사’ 혹은 ‘귀순북한동포’로 불리면서 관련 법안이 몇 차례 변화를 겪다가 1997년에 비로소 현재의 「북한이탈주민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전의 냉전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서 탈북민을 ‘보호’와 ‘정착’이 필요한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인민의 낙원’으로 부르던 북한을 떠나 ‘미제의 식민지’로 부르던 한국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 탈북의 동기와 성격은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소위 ‘고난의 행군’을 기점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에는 ‘정치적 망명’ 성격을 지닌 소수의 간헐적 탈북이 대부분이었다면, 대기근을 경험한 이후에는 ‘생존을 위한 대량 탈북’이 주를 이루었다. 원래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이 1940년 무렵에 만주에서 일본군에 항전하며 위기를 탈출하던 힘든 시간을 의미하는데, 이 명칭이 1990년대 중반에 심각한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과 체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캠페인성 구호로 다시 소환된 것이다.4
김일성이 사망한 이듬해인 1995년부터 북한에는 두 해 연속 큰 홍수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광범위한 농경지가 침수되고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심각한 피해를 겪었다. 게다가 1997년에는 큰 가뭄까지 닥치면서 북한의 식량 생산 기반은 돌이킬 수 없는 큰 타격을 입고 대기근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가장 많은 탈북이 일어난 지역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압록강 상류 지역과 두만강 지역이었다. 오늘날의 북한 지명으로는 백두산과 두 강, 즉 압록강과 두만강을 품고 있는 양강도와 두만강을 끼고 있는 함경북도 지역이다.5 이곳은 강의 수심이 얕고 강폭이 좁은 곳도 많아서 탈북하기 비교적 쉬웠다. 중국 연변의 조선족 공동체가 근접해 있어 도움을 받을 여지가 비교적 크다는 점도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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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20만-3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들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탈북한 주민들의 최종 목적지가 한국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애초 이들의 탈북 목적은 중국에서 식량을 구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는 데 있었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감행한 일시적 탈북이었다. 이들이 목격한 중국은 북한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훨씬 잔인하고 엄중했다. 조선족과 조선족 교회의 도움을 받아 죽음과 고난의 문턱을 비껴간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취업을 빌미로 인신매매 집단에 넘겨지거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돈을 벌기 위해 브로커를 따라나선 수많은 북한의 젊은 여성들은 중국 땅에서 한족 노총각과 장애인 등의 신붓감으로 팔려나갔다. 중국 내의 성매매 산업에 강제로 끌려간 북한 여성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듯 고난의 행군 시기 때 생존을 위하여 북한을 떠난 사람들은 타국 땅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그야말로 험난한 세월을 홀로 감내하며 살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선교사를 만나거나 중국에서의 생활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국을 향한 길을 찾아서 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 결국 하나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중반 이후 한국에 입국하는 탈북민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의 모습이 있다면, 소위 ‘연계형 탈북’이 덩달아 증가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한국에 온 탈북민들이 브로커를 이용해서 북한 내의 부모나 자녀 등 가족들을 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한국으로 향하는 탈북 루트가 확보되면서부터 북한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남한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권하는 경우들이 생겨났다. 서울대학교 김병로 교수는 앞선 대량 탈북 첫 세대가 ‘생존형 탈북’이었다면, 먼저 한국에 들어온 이들을 뒤따라 들어오게 된 이들의 탈북을 ‘생활형 탈북’이라고 규정한다.6 ‘생활형 탈북’에 해당하는 이들 대부분은 자아성취에 대한 기대나 ‘보다 나은 삶’을 동경하면서 한국에 온 특징을 지니며, 앞선 세대에 비해 중국에서의 방황과 어려움도 덜 겪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면에서 2000년대 들어서 탈북민의 탈북 동기는 고난의 시기 이전 혹은 직후와 다르게 훨씬 더 다양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 주는 의의

한국교회의 탈북민 사역은 지난 20여 년간 상당히 활발하게 이뤄져 왔다. 한국교회 내에서 탈북민은 남북한 간 사람의 통일을 준비하도록 돕는 통로로 이해되었고, 이에 따라 탈북민 사역은 한국교회가 통일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현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웬만한 중대형 교회마다 탈북민 부서나 통일선교부가 세워지고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면서 통일선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이 증가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외에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여러 탈북민 대안학교들이 세워져서 탈북민 자녀를 돌보는 일들도 지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문제는 탈북민 사역이 이제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전처럼 많은 수의 탈북민이 단기간에 한국에 들어오기가 어려워졌다. 물론 남북 관계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느냐에 따라 다층적인 차원에서 남북한 주민이 교류하는 장이 열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새로 들어오는 탈북민이 급감하는 현시점에서 한국교회의 탈북민 사역은 ‘이미’ 들어온 탈북민에 초점을 맞춰 재구조화될 필요가 있다.7 이때 한국교회는 탈북민 사역을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지난 20년간의 탈북민 사역이 탈북민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각 분야에서 정착하고 적응해서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리더십 성장과 성숙을 가속화(accelerating)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능력 있고 성실한 탈북민을 위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나,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멘토링을 제공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해가야 한다. 탈북민 목회 사역도 그동안 잘 준비된 탈북민 목회자들이 더 주도하여 집중력 있게 사역을 이끌 수 있도록, 이들을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탈북민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사역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되, 꼭 탈북민 관련 부서가 아닌 일반 부서에서도 사역 경험을 쌓고 훈련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아직 자립하지 못한 탈북민 교회들을 다각적으로 돕는 방법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한국교회가 그동안 ‘찾아오는’ 탈북민을 중심으로 사역했다면, 이제는 도움이 필요한 탈북민을 ‘찾아가는’ 사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는 새로 도착한 탈북민들이 정착 초기에 도움을 받기 위해 거쳐 가는 코스로 자리잡았기에 탈북민과의 접촉점을 만드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장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탈북민이 교회를 떠나가도 계속 오는 새로운 사람들 덕분에 당장에 눈에 띄는 타격이 크지 않았던 셈이다. 사실 탈북민들의 정착 초기에 이들을 시혜적으로 돕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익숙한 탈북민들에게 필요한 삶의 문제는 훨씬 심대한 것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신이 한국 땅에 와서까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고 그러한 ‘삶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탈북민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이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탈북민들, 예컨대 남성 탈북민이나 지방 거주 탈북민,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탈북민, 대학에 가지 않은 채 사회에서 살아가는 젊은 탈북민에 대하여 더 적극적인 관심을 두고 접촉점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서두에서 밝혔던 두 여성에 대한 최근의 근황을 나눠야 하겠다. 이들은 현재 중국 내에서 서로 다른 지역에 떨어져서 지내고 있다. 차라리 중국 사람에게 팔려가겠다던 여성은 중국 모처로 이동해서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급성 맹장염을 앓던 젊은 여성은 다행히 수술을 받아 건강하게 회복되었고, 여전히 숨어 지내고 있다. 감사하게도 이들의 소식을 들은 미국 내 한인 비영리 단체와 한인 교회가 각각 생활비와 수술비를 보내준 덕분이다.
그러나 이들의 한국행이 언제 가능할지는 여전히 요원하다. 기도하기는 이 두 여성의 한국행을 위한 길이 열리기까지 부디 중국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와 같은 탈북민의 절박한 상황은 지금도 중국이나 제3국, 그리고 한국 안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심정으로 탈북민을 바라보며 그들의 문제를 함께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의 손길을 뻗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註)
1 북한을 떠나 한국에 온 이들을 가리키는 법적인 용어는 ‘북한이탈주민’이다. 한때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새터민’이 제안되었지만,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요즘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은 ‘북한이탈주민’ 혹은 ‘탈북민’이다. 이와 관련된 더 자세한 논의는 이후 연재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2 앞으로 연재되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글의 흐름은 한반도평화연구원(KPI)과 미래나눔재단의 특별공동포럼 “경계를 넘는 윤리: 북한이탈주민의 탈경계와 윤리적 속성”(2019년 8월 22일)에서 논찬을 맡은 전우택 교수가 한국 내의 북한이탈주민 연구 경향을 진단하면서 분류한 방식을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그는 북한이탈주민 연구 경향을 6하 원칙에 따라 그들이 ‘어디서’, ‘왜’ 왔는지에 관한 주제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언제’ 적응하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고 보았고, 최근에는 그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많아지고 있다고 보았다.
3 김성경, “남한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 북한이탈주민: ‘환대’의 권리와 의무”, 「현대사광장」 6(2015): 98-99.
4 김병로, 『북한, 조선으로 다시 읽다』(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245.
5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의 출신 지역은 함경북도가 59.6%로 가장 많으며, 이어서 양강도가 18.9%, 함경남도가 9.1%이다. 다른 지역은 모두 4% 미만에 불과할 정도로 적다.(출처: 국가통계포털 kosis.kr)
6 김병로, 위의 책, 245.
7 김의혁, “코로나19 시대의 북한이탈주민 사역”, 「선교신학」 60(2020): 84-112.


김의혁 |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Intercultural Studies)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강원도 화천에 있는 통일부 북한이탈주민 정착교육기관인 제2하나원의 하나교회 담당목사로 일했다. 현재 숭실대학교 일반대학원 기독교통일지도자학과 전임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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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호(통권 7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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