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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수도원, 그 현장을 가다 06]
문화·신학·목회 (2021년 4월호)

 

  산 마르코 수도원, 간절한 기도가 예술로 승화되다
  

본문

 

| 꽃의 도시 피렌체

피렌체는 ‘꽃의 도시’라는 그 이름처럼 아름답고 화려하며 매력적이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어느 건물이든 우리가 들어서기만 하면 분명 우리를 매혹시킬 이야기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 오래전 로마 시대부터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이곳은 르네상스 시대인 14-16세기에 이르러서 유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곳보다 르네상스의 꽃이 화려하게 피어난 이 도시에서 대가들이 남긴 건축, 회화, 조각을 마음껏 누리는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도심 한가운데로 걸어가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또는 ‘두오모’라 불리는 피렌체 대성당, 조토의 종탑, 그리고 산 조반니 세례당이 방문객들을 압도한다.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우피치, 아카데미아, 바르젤로 미술관을 찾을 것이다. 문학도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베키오 다리를 걸을 것이다. 종교인에게는 메디치 가문의 산 로렌초 성당, 갈릴레오·기베르티·마키아벨리·미켈란젤로가 잠들어 있는 산타 크로체, 도미니크 수도사들의 영성이 스며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사 안젤리코와 사보나롤라를 만날 수 있는 산 마르코 수도원 등 흥분을 자아내는 장소가 즐비한 도시가 바로 이곳 피렌체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방문할 곳은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갈망을 아름다운 예술로 꽃피워낸 산 마르코 수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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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마르코 수도원

산 마르코 수도원은 본래 발롬브로사 수도회(O.S.B. Vall.)의 소유지였다. 발롬브로사 수도회는 피렌체 출신의 베네딕투스 수사 조반니 구알베르토(c.985-1073)가 피렌체에서 30km 정도 떨어진 발롬브로사(Vallombrosa)에 설립한 독자적인 수도회로 중세 시대 이탈리아 중부 토 스카나 지역에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그렇게 해서 12세기에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 자리에 자신들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1299년 이 수도원 건물은 이탈리아 오시모 출신의 실베스터 고촐리니(1177-1267) 가 1231년 설립한 베네딕투스회 공동체, 실베스트린 수도회(O.S.B. Silv.)로 넘어갔다. 그리고 적어도 이때부터 산 마르코는 수도원인 동시에 교구 교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15세기 초부터 실베스트린 수도사들이 수도 규칙을 잘 준수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이어지게 되었고, 1436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는 결국 이 건물을 도미니크 수도회에 넘겨주었다. 이렇게 해서 산 마르코 수도원은 발롬브로사 수도회에서 실 베스트린 수도회를 거쳐 도미니크 수도회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15세기 당시 산 마르코 수도원은 사실상 폐허와 같은 상태였다. 이에 피렌체의 정치 지도자 코시모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 미켈로초(Michelozzo)를 파견하여 산 마르코 수도원을 르네상스 스타일로 재건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443년 주님 공현 대축일인 1월 6일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가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은 정점에 달했고, 당대의 미술사가 조르주 바시리의 기록에 따르면 코시모가 수도원을 위해 내놓은 금액만 4만 플로린(피렌체의 금화 단위, 금의 함량에 따라 가치가 다르나 1플로린은 현재 가치로 대략 80만 원이니 320억 원에 해당함)에 달했다고 한다. 현재 산 마르코 수도원은 국립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 수도원 안으로

수도원은 복층 구조이다. 1층에는 2열의 기둥으로 구분된, 3개의 통로를 갖춘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여러 개의 큰 창문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와 공부하거나 필경하기에 적합하다. 미켈로초가 건축한 르네상스풍의 이 도서관은 다수의 귀중한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도서관에 있는 채색 필사본 대다수는 유명한 인문주의자 니콜로 니콜리(Niccolò Niccoli)가 소장했던 것들이다.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통치기에 피렌체에는 르네상스의 꽃이 활짝 피었고, 산 마르코 도서관은 안젤로 폴리치아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같은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임 장소였다. 폴리치아노와 미란돌라는 지금도 산 마르코에 잠들어 있다. 비단 수도사들을 위한 책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위한 인문학 서적도 풍부하게 보유한 산 마르코 도서관은 피렌체 인문주의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였다. 도서관 외에도 1층에는 15세기 수도원 재건 당시 수도원 책임자였던 안토니노(Antonino Pierozzi)의 이름을 붙인 회랑, 수도사들이 모이는 방(Chapter Room), 식당, 손님을 위한 숙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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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는 수도사들이 머무는 44개의 작은 방이 있고, 별도로 코시모 데 메디치의 개인 휴양을 위한 방 2개(38번, 39번)도 있다. 수도원 내부는 전 체적으로 회반죽으로 칠해져 있으며, 벽 곳곳에는 도미니크 수도사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작품이 그려져 있다. 2층 가장 안쪽 구석에는 산 마르코 수도원을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인물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와 관계있는 방(12-14번)이 있다.

| 프라 안젤리코의 예술혼

산 마르코 수도원에 남아 있는 안젤리코의 그림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을 피렌체로 불러 모으는 구심점이다. 그의 본명은 ‘귀도 디 피에로’ (Guido di Piero)였으나, 도미니크 수도사가 되면서 ‘조반니’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후에는 그의 그림에 나타난 우아함과 경건함 때문에 ‘베아토 안젤리코’(Beato Angelico, 복된 천사와 같은) 혹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천사와 같은) 수도사라고 불렸다. 실제로 이후 안젤리코는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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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출입구로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안토니노 회랑의 벽에는 안젤리코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성 도미니크〉가 있다. 도미니크는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를 붙들고 깊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바로 왼편에 교회로 연결되는 문 위쪽 반월창에는 〈침묵을 요청하는 베로나의 성 베드로〉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수도원 내에서, 특별히 교회당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침묵을 지켜달라는 요청이다. ‘베로나의 베드로’ 혹은 ‘순교자 베드로’라고 불리는 이 인물은 13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도미니크 수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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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을 따라 돌면 각 방으로 연결되는 문 위쪽 반월창에 방의 용도에 맞게 그려진 안젤리코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수도사들이 모이는 방 입구에는 〈수도 규칙서를 들고 있는 도미니크와 동료들〉이, 순례자 숙소로 이어지는 문 위에는 〈순례자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두 명의 도미니크 수도사〉가, 옛 신학교로 연결되는 문 위에는 중세 스콜라 신학을 대표하는 도미니크 수도사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려져 있다.
1층 수도사들이 모이는 방에는 가로 9.5m, 세로 5.5m 크기의 아치형 벽에 〈십자가 앞의 성인들〉 프레스코화가 있다. 잠시 이 그림을 자세히 감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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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오른편에는 어머니 마리아가 사도 요한, 막달라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 19:25)의 부축을 받고 있고, 피렌체의 수호성인 세례자 요한, 책을 들고 있는 복음서 저자 마가, 메디치 가문의 수호성인인 라우렌시오, 다미아누스와 코스마스가 순서대로 보인다. 예수의 십자가 왼편으로는 무릎을 꿇고 있는 도미니크, 히에로니무스, 프란체스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시토회 중심인물), 조반니 구 알베르토(발롬브로사 수도회 설립자), 베로나의 베드로가 있고, 뒤편에는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베네딕투스, 로무알두스(카말돌리 수도회 설립자), 아퀴나스가 서 있다. 둥근 반원형 아치에는 성서 인물인 다니엘, 스가랴, 야곱,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욥, 신비 신학자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스, 이교도 여성 예언자 에리트라이의 시빌라까지 10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고, 아치의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을 상징하는 새 펠리컨이 피를 흘리고 있다. 받침대인 프레델라에는 도미니크회를 빛낸 17명의 인물이 작은 원 안에 그려져 있다.
‘순례자 숙소’라 불리는 방에는 안젤리코의 중요한 작품들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작품 〈십자가에서 내림〉에서 아치 윗부분과 양옆의 장식 부분은 로렌초 모나코(Lorenzo Monaco)가 작업했고, 중앙의 큰 그림은 안젤리코의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예수의 오른편에 검은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고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안젤리코 자신의 초상화로 여겨진다. 또 다른 작품 〈최후의 심판〉에서 그리스도 왼편은 정죄당하는 자, 오른편은 구원받는 자, 중앙의 빈 무덤은 죽은 자의 부활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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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코의 작품은 아니지만, 순례자를 위한 작은 식당 안에 있는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도 눈길을 끈다.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던 기를란다요의 이 작품은 같은 제목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것보다 앞선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아래쪽 대리석에 황금색으로 쓰인 “오! 경건한 어머니, 거룩한 삼위일체가 거하는 고귀한 처소여.”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는 마리아가 자신의 몸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장소로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구원을 이루는 통로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림의 제일 아래에는 그림 앞을 지나갈 때 동정녀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는 문구도 새겨져 있다.
2층에서 사보나롤라와 관련된 세 개의 방(12-14번)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에 다양한 주제의 프레스코화가 있어 관람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7번방에 있는 〈조롱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와 도미니크〉, 9번방의 〈성모의 대관식〉, 26번방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마리아와 아퀴나스〉, 코시모 데 메디치의 공간인 38-39번방에는 〈십자가와 마리아, 성 코스마스, 사도 요한, 베로나의 베드로〉,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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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당

수도원과 붙어 있는 교회당은 하나의 신랑에 여러 개의 측면 경당을 가진 형태의 구조이며, 내부는 16-17세기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당 천장 중앙에는 조반니 푸치(Giovanni Antonio Pucci)의 〈성모 승천〉(1725) 그림이 있다. 오른쪽에는 세 개의 제단이 있는데, 첫 번째 제단에는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작품을 바치는 성 토마 스〉, 두 번째 제단에는 프라 바르톨로메오(Fra Bartolomeo)의 〈성 모자와 성인들〉 제단화가 있으며, 세 번째 제단에는 로마의 성 베드로 교회당에서 1596년 즈음 가져온 〈탄원하는 성모〉 모자이크가 있다. 중앙 제단에는 안젤리코의 〈십자가상〉 제단화가 있으며, 양쪽으로 15세기 수도원장이었던 성 안토니노 경당과 세라글리오 경당이 있다. 교회당은 1678년에 한 차례 개조를 거쳤고 1777-78년에는 바로크 스타일의 정면이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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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산 마르코 수도원을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인물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452-98)가 있다. 1492년 피렌체의 지도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고 아들 피에로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았 지만, 피에로의 역량과 자질은 아버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1494년 피에로는 프랑스의 샤를 8세로부터 나폴리 침공을 위해 길을 터달라는 요구를 받고 성문을 열고 그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샤를은 피렌체를 통과하면서 동맹군이 아니라 마치 점령군처럼 위세를 떨며 노략질을 하고는 나폴리로 향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피렌체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피에로와 메디치 가문은 도시 밖으로 추방당하였다.(몬테카시노의 베네딕투스 수도원 예배당 안에 피에로 데 메디치의 무덤이 있다.) 메디치 가문이 추방당하자 피렌체에는 사회 갈등을 중재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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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정치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산 마르코 수도원 소속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였다. 그는 피렌체의 모든 악이 도덕적 타락, 사치와 허영, 무자비한 부의 축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웅변적인 설교로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피렌체 시청 앞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갖가 지 장식품과 장신구, 사치스러운 물건, 세속적인 책과 예술품이 불태워졌다. 사보나롤라는 교황 알렉산더 6세 보르자의 부도덕에 대해서도 거칠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수도사의 신정정치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결국 사보나롤라는 자신이 온갖 허영을 불태우던 바로 그 광장에서 1498년 5월 23일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화형을 당했다. 오늘날 사보나롤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일부에서는 그를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독일 보름스의 종교개혁기념공원에 가면 루터에게 영향을 준 네 명의 종교개혁 선구자들의 조각상이 있는데, 발도, 위클리프, 후스, 그리고 사보나롤라가 그 주인공이다.

| 도미니크 수도회의 창시자 도미니크, 그는 누구인가

산 마르코 수도원이 소속된 도미니크 수도회의 창시자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스페인 출신인 도미니크(1170-1221)는 1194년경 사제 서품을 받아 오스마(Osma)의 주교좌성당 참사회원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규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성직자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다. 도미니크는 1205년경 남부 프랑스에서 카타리파라 불리는 무리를 찾아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논박하고 교정하는 일에 앞장섰다. 카타리파는 초대교회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적인 교리를 주장하면서 12-13세기 남부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분파였다. 프랑스 남부도시 알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알비파’라고도 불린다.
1215년 도미니크는 프랑스 툴루즈 교구 안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설교 운동에 매진할 새로운 수도공동체를 조직하였다. 기존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규칙을 근간으로 하여 설교자들의 수도회에 적합한 새로운 규칙을 작성하였고, 1216년 12월 22일에는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설교자들의 수도회’(Ordo Praedicatorum, OP)로 인준받았다. 교황청의 공인을 받은 설교자들의 수도회, 즉 도미니크회는 급속히 유럽 전역에 퍼졌으며, 프란체스코회와 더불어 중세 교회와 수도원을 지탱하는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도미니크회가 한창 활발하게 뻗어나가던 1221년 8월 6일 도미니크는 볼로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도미니크의 유해는 볼로냐의 산 도미니크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도미니크는 사후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축성되었으며, 천문학자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쓴 작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간접적인 2차 증언들밖에 없어 오늘날 우리가 그의 가르침과 인격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가 출발시킨 도미니크 수도회는 설교, 교훈, 교육, 그리고 신학 탐구에 열중하여 특별히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중세의 대표적인 스콜라 신학자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타울러(Johannes Tauler) 등이 모두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들이다.


박경수 | 종교개혁사를 전공하였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사』,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 『교회사클래스』, 『종교개혁 핵심톡톡』 외 다수가 있고, 역서로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스위스 종교개혁』 등이 있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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