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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수도원, 그 현장을 가다 05]
문화·신학·목회 (2021년 3월호)

 

  프란체스코 수도원, 영혼의 울림을 경험하는 곳
  

본문

 

| 작은 도시가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탈리아를 방문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와 같은 대표적인 도시들을 떠올리며 동경할 것이다. 이런 도시들은 하나같이 한달살이를 하면서 돌아보기에도 부족할 만큼 역사와 문화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그렇지만 대도시보다 소도시를 돌아볼 때 더 큰 감흥을 느낄 때가 많다.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라벤나를 방문하면 분명 오래된 교회당의 모자이크에 반할 것이다. 5세기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이자 이후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중심지였던 라벤나에는 1,500년 전에 건축된 세계문화유산이 즐비하다. 단테가 『신곡』을 완성하고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아시시 역시 프란체스코의 향기로 가득한 소도시이다. 필자는 여러 차례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도 이런저런 사정상 아시시에 가보지 못하다가 2014년에야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방문한 이때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아서, 2015년과 2016년 연이어 찾아갔다. 여행이란 누구와 함께 가는지, 언제 가는지, 또 날씨와 여정에 따라 그 감동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아시시는 언제 어느 때나 찾는 이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곳이다.

| 프란체스코 교회당과 수도원

아시시에 가까이 도달하면 도심의 서쪽 끝에 우뚝 서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교회당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룩한 수도원’(Sacro Convento)이라 불리는 수도회 건물과 하부교회당과 상부교회당으로 이루어진 바실리카 건축물이다. 프란체스코는 1226년 10월 3일 이 세상에서의 순례를 마치고 숨을 거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인 7월 17일 교황은 프란체스코의 제자요 수도회 책임자인 엘리아스(Elias of Cortona)에게 프란체스코 대성당과 수도원 건물을 건축하도록 명하였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하부교회당은 1230년 완공되었고, 고딕 양식의 상부교회당과 수도원은 1230-39년 사이에 완공된 것으로 여겨진다. 프란체스코 교회당은 1253년 인노켄티우스 4세에 의해 축성되었다. 교회당 내부는 1250-1330년 사이 당대 최고의 화가인 치마부에(Cimabue), 조토(Giotto di Bondone),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피에트로 로렌체티(Pietro Lorenzetti), 피에트로 카발리니(Pietro Cavallini) 등의 프레스코 작품으로 채워져 있어 그 자체로 역사적인 미술관이다. 지하에는 프란체스코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어 순례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이 언덕은 프란체스코 당시에는 죄인들의 사형장으로 사용되어 ‘지옥의 언덕’이라 불렸는데, 프란체스코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외곽에서범죄자로 죽임을 당했기에 자신도 아시시 외곽에 있는 이 지옥의 언덕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곳을 ‘천국의 언덕’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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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9월 26일, 아시시에서 리히터 규모 5.6과 6.1의 지진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지진으로 인해 프란체스코 교회당의 천장이 붕괴되면서 수도사를 포함한 네 명이 목숨을 잃었고, 건물과 내부의 작품들도 심하게 훼손되었다. 복구를 위해 2년간 폐쇄된 교회당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다시 문을 열었다.
프란체스코 교회당의 웅장한 건축과 화려한 치장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낼지는 모르지만, 뭔지 모를 씁쓸함과 허전함을 남긴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프란체스코 교회당에 프란체스코의 정신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크리스토퍼 브룩(Christopher Brooke)의 표현처럼, “청빈의 사도에게 이토록 화려한 유물을 바친 것은 터무니없는 역설이 아니면 치욕”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프란체스코는 주님만이 모든 사람의 경배를 받으시기를 진심으로 원했겠지만, 후대 사람들에 의해 그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 하부교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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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부교회당 측면 출입구에는 나무로 만든 두 개의 문이 있는데, 왼편 문은 구비오 출신의 우골리누치오(Ugolinuccio da Gubbio)가, 오른편 문은 무명의 움브리아 출신 장인이 16세기에 제작한 것이다. 양편 문은 프란체스코, 키아라, 루이, 안토니우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문 위쪽에는 아름다운 장미창이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왼쪽에는 성 세바스티아누스 경당이, 오른쪽에는 지오반니(Giovanni de Cerchi)와 요한(John of Brienne)의 무덤 조형물이 있다. 교회당 안에는 모든 수도사의 아버지인 안토니우스와 프랑스 투르의 감독으로 서방 수도원 전통에 큰 영향을 끼친 마르티누스를 비롯하여 몇몇 인물을 기념하는 경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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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의 천장과 벽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코화 연작이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중앙 제단 위쪽 갈빗살 형태의 반월창 천장에는 조토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프란체스코의 영광”과 “가난, 정절, 순명의 알레고리”가 순례자를 압도한다. 회중석인 신랑(身廊)의 좌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묘사한 다섯 개의 그림과 프란체스코 생애의 다섯 순간을 그린 그림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프란체스코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또는 ‘두 번째 그리스도’임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아쉽게도 신랑의 프레스코화를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일반적으로 ‘성 프란체스코의 장인’(Maestro di San Francesco)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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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의 오른쪽 익랑(翼廊)에는 조토가 그리스도의 유년기를 그린 작품이, 왼쪽 익랑에는 피에트로 로렌체티가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한 작품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가난한 고난의 종이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프란체스코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자발적 가난과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지하 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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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부교회당의 제단 바로 아래 지하에는 프란체스코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다. 하부교회당에서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작은 제단 돌 위에 프란체스코가 잠들어 있다. 프란체스코는 1226년 10월 3일 아시시 외곽의 포르치운쿨라(Porziuncula, 현재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부에 있다.)에서 숨졌고, 그 유해는 잠시 현재 아시시의 산타 키아라 바실리카(과거에는 산 지오르지오 교회)에 모셔져 있다가, 1230년 5월 25일 성령강림절에 완공된 하부교회당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건축 책임자인 엘리아스는 프란체스코의 유해가 온 사방으로 흩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의 유해의 위치를 숨겼다. 그러다가 1818년 발굴 과정에서 프란체스코의 유해가 발견되었고, 교황 피우스 7세는 그의 유해를 보관하기 위한 지하 묘실을 짓고 석관묘 안에 잠들어 있던 프란체스코의 시신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밖으로 꺼내어 1824년에 일반에 공개하였다. 그 후 1925-32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묘실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1932년에는 프란체스코의 무덤 곁에 그의 동료인 레오(Leo), 마세오(Masseo), 루피노(Rufino), 안젤로(Angelo)도 함께 묻혔다. 오늘날 이곳은 프란체스코의 정신과 영성을 닮고자 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처요 순례지이다.

| 상부교회당

상부교회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처”라고 불릴 만큼 벽과 천장 전체가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다. 교회당은 고딕 스타일의 쌍둥이 문과 장미창으로 이루어진 정면(正面, Façade), 회중석인 신랑(身廊, Nave), 양 날개에 해당하는 익랑(翼廊, Transept), 제대(祭臺, Altar)와 후진(後陣, Apse), 아치형 천장(天障, Vault)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치형 천장은 갈빗살 구조로 된 네 개의 아치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출입구에서 제단 방향으로 첫 번째와 세 번째 아치에는 푸른색 바탕에 금색 별이 장식되어 있다. 두 번째 아치에는 하트 모양의 원 안에 그리스도와 프란체스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반신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네 번째 아치에는 서방교회 최초의 네 명의 박사인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 1세와 히에로니무스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것은 아이작(Isaac)이라는 장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데, 일부 학자는 그가 피에트로 카발리니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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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익랑과 후진은 치마부에와 그의 공방 작품으로 꾸며져 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프란체스코를 묘사한 작품을 보면, 프란체스코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우기를 사모했는지 헤아려볼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염료에 사용된 납 산화물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어 색감을 식별하기가 어렵다.
신랑의 벽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으로 나뉘어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윗부분은 구약성서(창조부터 형제를 용서하는 요셉까지)와 신약성서(수태고지부터 예수 무덤가의 여인들까지)의 이야기를 32개의 작품으로 구성해 보여주고 있다. 아랫부분에는 프란체스코 생애의 중요한 순간과 사건을 포착하여 묘사한 28개의 프레스코화 연작이 담겨 있다. 이 28개의 연작이야말로 프란체스코 교회당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직 그림만으로 그의 삶과 꿈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한 권의 책이라 할 만하다. 일반적으로는 젊은 시절 조토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조토를 포함한 몇 사람의 작품이 섞여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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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벤투알 작은형제회 수도원

프란체스코 교회당에 잇대어 있는 건물은 프란체스코를 따르는 수도회 중 하나인 콘벤투알 작은형제회에 속한 ‘거룩한 수도원’이다. 눈에 띄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루는 1239년에 건축된 것이다. 콘벤투알 작은형제회의 행정을 총괄하는 본부는 로마에 있지만, 수도사들은 이곳 아시시를 자신들의 영적인 고향이자 본부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자들은 이 수도원이 1228년 건축되기 시작해 1239년경 완공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 수도원은 식당, 숙소, 수도사들의 방(Chapter Hall), 필경사들의 방과 도서관, 예배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수도원의 도서관은 소르본과 아비뇽의 도서관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의 교황 식스투스 4세 때인 1474-76년에 대규모 건축이 이루어져 수도원은 크게 확장되었으며, 교황의 여름 거주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세기 들어와서 1971년에는 신학연구소가 세워져 프란체스코 수도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통의 학생들이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장으로 활용되며, 목회자와 평신도의 신학 훈련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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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들이 모이는 방인 ‘Chapter Hall’은 하부교회당의 제단 오른쪽 출입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중앙의 큰 기둥을 중심으로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 마치 종려나무 가지가 아치형을 이루며 뻗어 있는 모양새이다. 생명나무가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성서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활력을 얻어 삶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북쪽 벽에는 푸치오 카파나(Puccio Capanna)가 14세기 중반에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 작은 천사들의 모습이 중앙에 보이고, 아래에는 어머니 마리아, 사도 요한, 베드로, 바울, 파도바의 안토니우스, 툴루즈의 감독 루이가 서 있으며, 프란체스코와 클라라는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있다.
이 방에는 프란체스코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잿빛의 천 조각을 이어 붙인 고깔 달린 수도복, 교황 호노리우스 2세의 1223년 11월 29일 자 인장이 찍힌 수도회칙서 원본, 민수기 6장 24-26절 말씀으로 형제 레오를 축복하는 내용(앞면)과 오상의 흔적을 받은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뒷면)을 담고 있는 프란체스코가 직접 쓴 양피지 문서, 술탄 알말리크 알카밀(Al-Malik Al-Kamel)에게 받은 25cm 길이의 아이보리 호른, 프란체스코가 순례하며 설교할 때 신었던 샌들, 1818년 재발견될 당시 프란체스코의 무덤에서 나온 12세기 말 루카에서 만들어진 동전과 돌베개, 오상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스며들어 있는 프란체스코의 옷이 보관되어 있다. 이런 유품들은 프란체스코의 철저한 가난, 공동체를 이루려는 부단한 노력, 에큐메니컬 정신, 복음 설교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사모한 그의 간절한 마음을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준다.

| 프란체스코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프란체스코(Francesco, 1181/82-1226)의 본명은 지오반니(Giovanni)이다. 아버지가 프랑스와 상거래를 하고 어머니가 프랑스 프로방스 출신이라는 이유로 고향 아시시에서 작은 프랑스인, 즉 ‘프란체스코’라 불린 지오반니는 자연스럽게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로 알려지게 되었다. 성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9:10-11)라는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은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아버지를 떠나 구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는 1209년에
뜻을 같이하는 11명의 동료와 함께 『삶의 방식』(Forma Vitae)이라는 수도 회칙을 정하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구두 허락을 받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Order of Friars Minor)를 설립하였다. 그 후에 수도 회칙을 개정하여 1223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게 정식으로 수도회 인가를 받았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생활은 설교하고(preaching), 찬양하고(sing-ing), 구걸하는(begging) 것이었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적이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수도사들은 13세기 교회와 수도원 개혁운동에 동력을 제공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아시시 귀족의 딸인 클라라[Clara, 1194-1253, 이탈리아어로 키아라(Chiara)]를 제자로 받아들여 여성들을 위한 수도회 클라라회를 설립하도록 도왔으며, 1219년 5차 십자군 전쟁 기간에는 이집트로 가서 이슬람 지도자인 술탄을 만나 평화를 설득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로 시작되는 〈평화를 위한 기도〉를 썼고, 모든 자연을 형제자매라 부르며 자연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경건한 심정으로 담아낸 〈태양의 찬가〉를 작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프란체스코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다가 1224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입으신 오상(五傷, 양손과 양발과 옆구리의 상처)의 흔적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와 같은 프란체스코의 명성에 힘입어 수도회는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보나벤투라(Bonaventura),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윌리엄 오컴 (William Ockham) 등도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들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코가 죽은 후 상황은 달라졌다. 프란체스코를 흠모하여 수많은 사람이 유산을 남기면서 수도회가 부유해지자 분란이 일어났다. 프란체스코가 남긴 가난의 유언을 계속해서 지켜야 한다는 주장과 상황이 바뀌었으니 재산의 소유권은 아니더라도 사용권은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였다. 결국 수도회는 프란체스코의 영성 가운데 은수자적 측면을 강조하고 엄격한 가난을 중시하는 ‘엄수파’(Observant)와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도시 안에 공동체를 세우고 살아가는 ‘콘벤투알’(Conventual)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엄수파에서 소위 개혁된 ‘카푸친’(Capuchin)이 다시 분리되어 나왔고, 이후 엄수파는 ‘리포르마티’(Riformati), ‘알칸타리니’(Alcantarines), ‘레콜레티’(Recollects) 등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교황 레오 13세는 이 모두를 ‘작은형제회’라는 이름으로 통합시켰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프란체스코를 따르는 수도회는 ‘콘벤투알 작은형제회’, ‘카푸친 작은형제회’, ‘작은형제회’가 있다. 이들 세 수도회를 제1회 프란체스코 수도회라 일컫는다. 여성들의 수도단체인 클라라수도회는 제2회 프란체스코 수도회로, 평신도 수도회는 제3회 프란체스코 수도회로 불린다. 현재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콘벤투알 작은형제회 소속이다.

| 프란체스코에 대한 또 다른 시선

자발적이고 철저한 가난을 선택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길을 걸은 사람은 프란체스코가 처음은 아니다. 프란체스코보다 40여 년 먼저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난 피에르 발도(Pierre Waldo, c.1140-1205) 역시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 인물이다. 발도 또한 프란체스코와 마찬가지로 교황을 알현하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발도파’는 교회로부터 출교 처분을 당했고, 결국 1215년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무엇이 발도와 프란체스코의 운명을 정반대로 갈라놓았을까? 발도는 성서가 모든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 반면, 프란체스코는 교황의 성서해석권과 교도권(敎導權)을 인정하였다. 발도가 성서의 가르침에 절대복종하기로 결단했다면, 프란체스코는 교황의 교도권에 순명할 것을 서약하였다. 오직 라틴어 불가타 성서만이 공인되던 중세 시대에 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성서의 수위성을 주장하는 발도파가 로마가톨릭교회의 눈에는 강고한 교권체계를 뒤흔드는 집단으로 비쳤기에 이단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교회 권력층 입장에서는 언뜻 발도와 비슷해 보이지만 교회의 제도와 질서를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프란체스코를 공인함으로써 발도파가 일으킨 풍파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프란체스코회는 공인되었고, 발도파는 축출되었다.
프란체스코가 죽은 지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성인으로 시성되고, 시성식 다음 날 프란체스코 교회당이 건축되기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프란체스코의 전기에 식인늑대도 강아지처럼 다루고, 새들에게 설교하고, 기도로 오상의 흔적을 받는 등 유난히 전설 같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것은 그를 성인화함으로써 민중들을 더욱 로마가톨릭의 체제 안에 묶어두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제는 지나친 성인화 작업으로 ‘만들어진’ 성 프란체스코가 아니라 ‘역사적 프란체스코 연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가 어떤 꿈을 꾸었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를 보다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하여 밝히는 것이 프란체스코를 진정성 있게 오래 기억하는 방법일 것이다.

후기 / 2015년 6월 22일 교황 프란체스코가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토리노에 있는 발도파 교회를 방문하여 과거 로마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고 화해를 청하였다. 교황은 로마교회가 발도파 교회에 보인 “비기독교적이고, 심지어 비인간적이었던 태도와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1215년 발도파가 이단으로 정죄받고 숱한 고난의 길을 걸어온 지 꼭 800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이상을 되풀이하여 말하곤 한다. 가난의 사도인 아시시의 성인 프란체스코의 이름을 자신의 교황명으로 삼기까지 했다. 교황의 아버지와 조부모의 고향이 바로 발도파의 거점이었던 이탈리아 피에몬테이다. 아마도 교황은 어릴 때부터 부모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던 발도파에 대해 들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박경수 | 종교개혁사를 전공하였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사』,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 『교회사클래스』, 『종교개혁 핵심톡톡』 외 다수가 있고, 역서로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스위스 종교개혁』 등이 있다.

 
 
 

2021년 3월호(통권 7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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